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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일파만파 퍼지는 상황을 보면서 스테판 에셀의 작은 책 《분노하라》를 다시 뒤적인다. 나이 90이 넘은 레지스탕스 노전사의 육성은 이 땅에서도 큰 울림을 만들어 낸다. 그의 육성은 지금 세계를 일깨우고 있다. 그것은 오래 전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를 위해 싸워왔던 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역사의 희망을 부르짖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선배 세대가 후배 세대에게 역사를 망각하지 말고, 맞서야 할 것에 맞서라는 촉구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 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를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이 땅에는 무수한 교회가 있지만, 스테판 에셀 한 사람의 목소리보다 세상을 격동시키고 있지 못하다. 왜 그런 것일까? 답은 분명하다. 역사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본과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교회의 목소리에 누가 귀 기울이겠는가? 버려진 자, 짓밟힌 자, 쓰러진 자와 함께하라고 나사렛 예수께서 말씀하셨건만, 오늘날 교회는 도리어 분노의 대상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분노의 뿌리는 사랑
스테판 에셀의 분노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특권의 시스템을 뒤엎어버린 예수님의 분노가 겹쳐진다. 성전을 특권의 성채로 만들고 그 안에서 돈에 대한 욕망을 거래하고 가난한 이들을 내쫓아버리는 현실에 대해 예수께서는 분노하셨다. 세상에서 작은 자들이 억압당하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신 것이다. 그 분노는 그래서 ‘거룩한 분노’라 불린다.
그 분노의 뿌리는 ‘사랑’이다. 그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한 손으로는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들을 공격하고 짓밟는 자들과 싸우시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능멸당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억울한 일을 겪고 있어도 아무런 분노가 없다면, 그것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분노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것과의 싸움을 만들어 간다.
그 싸움이 없으면 인간의 존엄성을 허무는 사태는 중단될 수 없다. 그래서 사랑과 분노는 하나이며, 그래서 그 분노는 사랑을 지켜내는 능력이다. 이는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짓밟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이웃을 짓밟는 자와 마주하는 일이다. 용기가 필요하고 지혜가 요구되며 연대가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신 것은, 그들로 말미암아 정작 성전 공동체에 들어와야 할 이들이 들어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집, 기도하는 집, 만민의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탄식하고 분노하셨다. 이 분노가 터져 나오지 못하면 기존 질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에서 성전은 절대적 권위의 현장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분노하신 나머지, 돌 하나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되리라고 하셨다. 특권을 누리던 자들이 보기에는 악담 중에 악담이자 거칠기 짝이 없는 말이다. 분노를 자제하지 못한 극단주의자의 저주로 들린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분노를 대변한다. 특권질서의 죄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들먹이는 자들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분노하지 않으시겠는가?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가 큰가를 몸소 보이셨다. 그 분노의 대상은 명확했다. 바로 성전을 자신의 소유물로 삼고 사회적 약자들을 유린하는 자들이었다. 그 목적과 메시지도 분명했다. 그 분노가 드러나지 않으면 특권 질서는 평화를 즐길 것이다. 예수님의 분노는 그래서 그들에게는 평화를 깨는 폭력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그로써 예수님을 모함해서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특권질서의 평화는 깨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특권의 부당한 질서로 수많은 이들이 짓밟히고 희생당한다. 예수께서 분노하신 까닭에 사람들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절대적 성역이 그 거짓 환상을 그대로 지켜내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가짜를 보고 가짜라고 해야 세상은 눈을 뜬다.
성전의 특권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한, 그 특권을 타고 앉아서 재력과 권력을 쥔 자들의 악은 저지되지 못한다. 예수께서 터뜨리신 분노는 그래서 그들의 허위와 권세를 부수는 힘이 되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분노가 그들을 원수 삼아 폭력으로 공격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새롭게 눈뜨게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그 악과 손을 잡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자식을 보고 부모가 분노하지 않으면 자식은 망한다. 부모의 노(怒)를 알아차린 자식은 함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하고 그 악으로부터 자신을 멀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분노는 선을 도모하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깃발이기도 하다. 그 분노의 깃발이 없는 곳에서 악은 창궐한다.
분노를 잃은 교회
그러기에 예수께서 발하신 분노는 우리에게 축복이다. 옳지 않은 길, 악의 길을 가지 않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이자 우리를 구하시려는 사랑의 손길이기 때문이다. 그 분노는 누구도 상케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분노로 인해 예수님 자신이 희생당하셨다. 그러나 비폭력의 분노는 마침내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남겨준 씨앗이 된 것이다.
오늘날 기득권화한 대부분의 교회는 사회적 부정의에 분노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 분노하면 정치적이라느니, 복음적이 아니라느니, 아니면 은혜가 없다느니 비난한다. 통탄할 일이다. 누군가는 맞아 죽고, 누군가는 실직당해 죽고,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 끊는 현실을 보면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말라는 것인가? 그렇게 해서 어떻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교회가 추해지자 세상이 교회에 대해 분노한다. 오죽하면 ‘개독교’ 소리를 듣게 되었을까? 교회에 대한 세상의 적의가 이 지경으로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아직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곳곳에 예수의 가르침을 몸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가 예수의 뒤를 따르려 하기만 하면 세상은 그 교회를 향해 갈채를 보내고, 함께하려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다.
스테판 에셀의 책이 이렇게 주목받는 것을 보면 이러한 생각이 허황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책에는 레지스탕스가 바라던 개혁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각종 에너지원, 전기와 가스, 탄전(炭田), 거대은행들이 국영화되었다. 이 역시 레지스탕스의 개혁안이 권장한 바였다. 또한 이 개혁안은 ‘공동노동의 결실인 대표적인 생산수단―에너지원, 지하자원, 보험회사, 거대 은행들―을 국가로 복귀시키는 것’ ‘경제계?금융계의 대재벌들이 경제 전체를 주도하지 못하게 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의 정립’ 같은 것들을 권고했다.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며, 노동계가 창출한 부를 정당하게 분배하는 일을 금권보다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레지스탕스의 개혁안과 독립 언론들이 오늘날 위협받고 있다. 자본이 현실을 지배하고 주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선전에 놀아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휩쓴 상황에서, 레지스탕스의 투쟁으로 일궈낸 역사적 성과들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프랑스 공화국이 이 레지스탕스의 유산을 계승하다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전 세계가, 그리고 우리 역시 지난 시기의 민주주의의 유산이 해체되고 자본이 모든 것을 거머쥐고 뒤흔드는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호소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 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교회와 세상을 구할 분노
무관심의 벽을 깨고 분노로 저항하지 않으면, 권력은 이를 자신이 정당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근거로 작용할 것이다. 분노하면 탄압하겠지만 탄압하는 권력은 마침내 무너지고 만다. 정당하지 못한 권력과 자본의 힘은 정당성을 요구하는 대중 앞에서 점차 무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주위를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정당한 파업과 진실을 은폐하는 일에 대해 사실 규명을 요구하면, 법질서를 내세워 이를 유린하는 이들을 묵과하지 않겠단다. 강자들의 무기가 되고 있는 법에 대해 법질서 운운 하는 것은, 강자의 요구에 굴종하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자기들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불법으로 모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되면 법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정작 이들이 된다. 그런 법을 왜 지키는가 하는 회의와 불신을 낳는 근본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여전히 ‘법 지켜라’ 하면 법이 우스운 꼴을 겪는다. 그렇지 않아도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현실의 경험법칙을 사람들은 너무나 뼈저리게 알고 있다. 재벌들은 대충 봐주는 게 우리 나라 법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조그만 죄를 저질러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러면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이 이어진다. 강자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위한 철옹성이 법이라면 그런 법은 조만간 저항에 직면하게 되어 있다. 이는 역사가 이미 무수히 증언하는 바다.
법이 정의에 기초해 있지 않으면 그것은 결단코 악한 법이다. 악한 법은 폐기되거나 고쳐져야지 지킬 이유가 없다.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짓밟는 법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존중해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악한 법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신분질서를 법으로 묶어 놓고 그걸로 인간차별을 하는 법을 우리가 지금 받아들이겠는가? 그런 법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현실에서는 아직도 이 법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분에 따라 법 적용이 달라지니 말이다.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지 적용이 언제나 그러리라 보장하는 건 아니다. 이러면서 사회는 갈등과 대립을 겪고, 있는 자와 없는 자들의 적대적 긴장이 발생한다. 대체로 문제의 원인제공자들은 있는 자, 강자들이다. 이들이 기득권을 누리면서 남들의 권리를 짓밟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참으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밀양 송전탑 공사 반대에 항의하며 자살하는 어르신들이 나오고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과 연대하는 희망버스 시민들 2,000여 명이 모였는데 기존 언론들은 이를 거의 보도하지 안 는다. 이에 대응하는 경찰들의 폭력이 당연히 문제가 되어야 하는데 정부는 아무런 사과도, 성찰도 없다. 경찰의 군화발로 시민을 밟으면 모든 것은 조용해지리라 믿는 모양이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에 대해 엄정한 법집행을 요구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은 경찰에게 공격당하고 종북몰이의 대상까지 되고 있는 판국이다. 이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야 할까? 이런 것을 보고 가만히 있는 국민들을 권력자들은 어찌 대하게 될까?
그렇지 않아도 화날 일이 많고 짜증날 일이 많은 데 무슨 또 분노인가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사로운 개인 일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만 사회적 정의가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잘 분노하지 않는 게 우리 사회다. 그러나 그 분노가 거세된 사회에서 자신이 똑같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아무도 분노하며 나서주지 않으면 자신이 희생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100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 나머지 99마리가 침묵하거나 귀찮아한다면, 다음 순서는 누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스테판 에셀은 말한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누구라도 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우리는 이 분노의 힘이 평화의 봉기로 발전하게 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주체세력이 되어갈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를 기르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한 평화를 원하는가? 분노하라! 정의를 바라는가? 분노하라! 더는 짓밟히지 않기를 바라는가? 분노하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들이 존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을 희망하는가? 분노하라!
이 분노만이 기득권의 수렁에 빠진 교회를 구할 것이며, 특권질서를 옹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온갖 범죄와 불법을 저지르는 현실을 뒤엎을 것이다. 그로써 진정 서로 사랑하며 정의와 평화를 누리며 사는 세상을 만들어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분노를 특권질서가 핍박한 결과이며, 부활은 이 핍박을 이기고 마침내 누가 역사의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지 확인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아니겠는가.
한종호
첫댓글 믿음의 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