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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크로소님과 라마드님의 토론에 한번 끼어들었다가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라마드님의 곧은 성격상 로빈~님에게 휘둘릴 것 같아서 지원사격을 하고자 했는데, 오히려 제가 총대를 맨 것 같습니다. 본래 논쟁까지 생각하지 않았는데, 주일이 지난 후에 글을 쓰겠다는 것이 논쟁하겠다는 말로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 하여튼 제가 보는 바로는 연속적 중생론은 개혁주의적이지 않다는 생각에서 최근에 나와있는 연속적 중생론에 대한 지지 글들을 보고 비평을 하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로빈~님이 자료들을 잘 올려주셔서 그 자료에 대한 비평을 하면 되겠다 생각을 가졌습니다. 여기까지는, 이전에 양무리 마을에서 있었던 연속적 중생론에 대한 토론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아예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죠. 그런데 어제 밤에 지난 논쟁들을 대략, 조금 보았습니다. 입이 쫙 벌어지더군요. 그리고 정말 이것은 아니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전에 있었던 논쟁에 대해서 일일이 첨언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라기는 운영자께서는 이전의 자료들을 잘 보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홀리죠이님의 글 “연속적 중생론과 순간적 중생론의 결정적인 구분”에 대한 완결된 글을 오늘 아침에 읽게 되었습니다. 좀 문제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이렇게 자기의 목적대로 글을 오도해 이끌어 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홀리죠이님의 글을 가지고 먼저 저의 논지를 이끌어 가고자 합니다. 그런 후에 시간이 있으면, 로빈~님께서 올리신 글들을 다루면 합니다. 홀리죠이님이 이전에 쓴 글들과, 댓글들을 대충 보면서 홀~님의 글의 성향에 대해서 조금 감을 잡게 되었는데, 자신의 글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지적에 한번도 동의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 눈에 띄었고, 남을 가르치고자 하는 입장에서 글을 쓰는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제 주관적인 생각입니다만, 여러 자료들을 자기 논리에 갖다 붙이는 것에도 능한 것 같습니다.
먼저,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시는 분들은 제발, 중생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홀리죠이님도 그의 글 “연속적 중생론과 순간적 중생론의 결정적인 구분”에서 넓은 의미의 중생을 전혀 엉뚱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의적으로 귀를 막고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 넓은 의미의 중생을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가진 중생의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오히려 그때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어느 하나의 정확한 개념으로 정착이 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자기들 주관대로 중생이라는 개념을 가졌는데, 다시 말하면, 중생에 대해서 폭넓게 자기들 나름으로 해석을 했다는 것입니다. 홀리죠이님은,
“종교개혁초기에는(선교적 상황에서!)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믿음->중생)을 사용해 왔다면, 이제 정착된 상황에서는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과 더불어서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중생->믿음)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중생과 칭의의 혼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중생을 상당히 광범한 의미로 언급했습니다. 칼빈도 역시 중생을 “새로운 생명을 생성시키는 하나님의 행동 이외에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는, 인간이 갱신되는 전 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17세기 저자들은 중생과 회심을 구분하지 못하고 두 용어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벌콥, 조직신학 p.716-717). 이처럼 중생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이 폭넓게 사용 되다가 오늘날에 와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좁은 의미의 중생, 넓은 의미의 중생이라는 개념이 정리가 된 것입니다. 홀리죠이님이, 칼빈의 중생 개념을 넓은 의미의 중생 개념으로 알고 거기에 맞추어서 연속적 중생론을 끌고가시는데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벌콥은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칼빈은 구원의 순서의 다양한 항목들을 체계적인 방법으로 분류한 최초의 인물이다. 하지만 카이퍼가 지적했듯이 그의 분류는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활동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다소 주관적이다. 후에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러한 결점을 바로잡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벌콥 조직신학 p.662). 여기서 “다소 주관적이다”라는 말은 아주 점잖은 말로 “틀렸다, 그릇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의 중생개념을 그대로 써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은 칼빈을 비롯해서 종교개혁시대,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표준문서에 나타나는 중생에 대한 가르침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에 대한 개념을 광범위하게 넓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넓게” 사용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개념을 섞어서 또는, 순서를 바꾸어서, 또는, 중생의 여러 요소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차차 시간이 지나서 오늘날에 이르러, 중생에 대한 개념이 정확해지고, 또한 중생과 다른 구원의 차서(서정, 순서)와의 관계가 분명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중생과 회심이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지고, 부르심과의 관계도 정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좁은 의미의 중생은 무엇이며, 넓은 의미의 중생은 무엇인가 하면, 좁은 의미의 중생은, 성령에 의해 새생명이 심기워지는 것을 말하며, 넓은 의미의 중생은, 성령에 의해 심겨진 새생명이 인간의 의식세계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회심이라는 것은 새생명이 의식의 수면 위에 떠오를 때 나타나는 인식 가능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때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은 회심을 통하여,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에 대한 개념은, 그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구분해서 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써 구분한 것을 다시 자기 편의에 맞게 짜맞추는 일은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홀리죠이님의 글의 문제점은,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 개념을 편의에 따라 짜맞추어 자기 식대로 만든 것입니다. 홀리~님은 “넓은 의미의 중생”을 “믿음과 회개 이후에 오게 되는 중생(믿음->중생)”으로 이상하게 만들어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비록 넓은 의미의 중생이라 할지라도, 중생 다음에 믿음이 오는 것이지, 칼빈이 그렇게 봤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음 글을 보면, 홀리~님의 잘못된 논리를 보게 됩니다.
“기독교가 세상에 등장했던 초기에 사람들은 믿음과 회개가 죄의 용서와 영생의 유익들에 이르는 길을 연다는 단순한 순서를 따랐다”(64쪽)고 합니다. 성인들인 경우에는 반드시 믿음과 회개가 언제나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칼빈도 심지어 여기에서 출발했고 구원의 길에 있어서 중생을 믿음 뒤에 두었다”(64~65쪽)고 바빙크는 강조합니다.
“곧 성인들의 경우나 아이들의 경우에 중생이 회개와 믿음에 앞선다고 하는 것이 바빙크가 말하고 있는 개혁파신학의 중생론의 욧점입니다. 바로 여기에 개혁주의 중생론의 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바빙크가 인정하는 것처럼, 칼빈과 같은 이가 믿음과 회개 뒤에 중생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파전통은 중생을 믿음과 회개의 앞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칼빈과 개혁파전통에 모순이 생기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그렇고, 바빙크에게 있어서도, 이런 중생론에 있어서 긴장을 모두 잘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파전통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입니다. 바빙크는 그 책 79쪽에서 이것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구분합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은, 중생이 믿음보다 앞서는 경우의 중생을 말하고(중생->믿음), 넓은 의미의 중생은, 중생이 믿음(회개)보다 앞서지 않는 경우, 곧 믿음과 회개 이후에 오게 되는 중생(믿음->중생)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초기에는(선교적 상황에서!)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믿음->중생)을 사용해 왔다면, 이제 정착된 상황에서는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과 더불어서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중생->믿음)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해서는 안되는 잘못된 논리입니다. 아마 이것은 두고 두고 회자되리라 생각이 드는군요. 다시 한번 더 말합니다. 칼빈은 오늘날의 “넓은 의미의 중생”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 시대에 자기가 깨달은 바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원의 서정을 논했지만, 그것은 오늘날의 신학적인 관점으로 볼 때 “다소 주관적”이었다, 즉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도가 헛되지 않았고, 오늘날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구원의 서정을 연구하는 좋은 출발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홀리죠이님의 생각처럼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 사이에 믿음을 넣을 수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결코 넣을 수 없습니다. 중생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생각하던 시대에서는 개념 자체가 그렇게 확고하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시도가 혹 있었고, 그 후로는 잘못된 신학으로 인해 그런 시도를 했는지는 몰라도, 중생의 개념이 확고해지고, 또한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 개념이 생겨진 후로는 그 어떠한 개혁주의 신학자도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전적인 하나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새생명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일과 그 새생명이 잠재의식 하에 있다가 새사람으로 의식세계에 나타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그 새생명이 심겨져서 성령께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시고, 영혼의 거룩한 성향을 일깨워주시더라도, 그것이 의식세계에 드러나기 전까지는 사람이 결코 깨달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 사이에 “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 회개와 믿음”이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사람의 역할이 들어가는 것이요, 그것은 신인합력으로 중생을 이끌어내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런 짓거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을 중생 뒤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콥은 중생에 대해서 말하기를(그는 비록 넓은 의미, 좁은 의미의 중생에 대해 설명했지만, 항상 중생을 말할 때는, 두 가지를 포함하여, 하나로 중생을 정의했다), “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이 말은 이전에 광범위하게, 또는 혼돈스러울 정도로 폭넓게 사용하던 것에 비해서라는 뜻입니다),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한다.”라고 했던 것입니다(벌콥, 조직신학, p.716). 여기서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이 하나님의 행위에 인간의 노력을 덧붙이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홀리죠이님께서 결론을 내린 말,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두 중생개념을 개혁파전통에서는 모두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믿음(회개)이 중생보다 앞서는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과 믿음(회개)이 중생보다 뒷서는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 이 두 개의 중생개념 모두가 다 성경적임을 개혁파 전통에서 인정해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성실하게 따라 오신 분들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의 글을 통해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가 있습니다. 믿음(회개)이 중생보다 앞서기도 하고, 혹은 중생이 믿음(회개)보다 앞서기도 하는 것이 모두 옳다고 한다면, 결국 “중생->믿음(회개)->중생”이라는 것이 개혁파중생개념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좀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주장을 소위 “좁은” 개념의 중생과 “넓은” 개념의 중생개념을 동시에 사용하는 개혁파 신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개혁파신자들 사이에서 해오고 있습니다. 진실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백해 온 개혁파전통은,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곧, 중생->믿음)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인정하고 고백해 왔고(요1:12참고),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곧,믿음->중생)으로 오직 믿음(회개)으로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다양한 성경말씀(예,요3:16)을 있는 그대로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고백해 왔던 것입니다. 진실로 개혁파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는 것입니다. 이 중생론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라는 말은 잘못된 해석에 토대를 둔 잘못된 평가에 불과한 것입니다. 후대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결코 두 개의 중생 사이에 믿음(회개)를 두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있다면, 찾아서 증거를 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바빙크의 경우는 중생을 둘로 나누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사이에 무엇을 끼워 넣지 않았습니다. 그가 중생을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로 나눈 것은, 중생의 모든 활동을 하나님의 행위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빙크는 회심을 또한 여럿 나누면서, 성향적 회심을 가리켜,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바빙크는 중생개념에 있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운 면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중생 사이에 회심을 끼워넣는다든지, 믿음을 끼워넣지 않습니다.
그리고, 홀리~님의 글,
“둘째, 바빙크가 “좁은 의미의 중생은 생명의 생성(genesis)과 발생(origin)만을 가르키는 용어이지, 그 생명의 성장(growth)과 발전(development)을 가르키는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라고 했을 때, 생명의 “생성”과 “발생”은 좁은 의미의 중생의 의미로 제한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생명의 “성장”과 “발전”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라고 질문을 던지고는,
“… 바빙크가 비록 “연속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좁은 의미의 중생에서 시간적 요소가 개입되어 그 씨앗이 싹이 되어 나오거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유효적 부르심에서 순간적으로 중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요소가 개입되어서 “연속적인”(elongated, 혹은 연장적이라고 번역되어도 좋음)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아마 중생이 연속적이라는 말을 하시고자 하는 것 같은데, 저는 이것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중생은 비록 근본적이요, 즉각적인 변화이지만, 그것은 새생명이 있는 고로 생명작용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그것은, 중생 이후로도 계속 성장하고 발전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단 이것은 새사람의 성장이요 발전인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 이후로도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재적 회심이지 않습니까? 바빙크는 “실재적 회심은 하나님에 의해 믿음과 사랑의 미덕들로 은사를 받은 거듭난 사람의 행위가 되었고,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일깨워지고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입은 사람은 그러한 미덕들을 또한 실제로 실천하기 시작한다” 고 말합니다(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p.172). 그런데 왜, 그러한 생명의 성장과 발전이 연속적 중생론을 지지하는 것으로만 해석을 시도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순간적 중생론(물론 연속적 중생론자들이 보는 순간적 중생론에 대한 개념정의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이라 할지라도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으로서 드러나는 활동을 주장하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후크마의 말을 빌면, “비록 중생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처음에서 일어나지만 그것이 주는 여파는 신자가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 되어진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p. 31) 홀리~님은 바빙크나 후크마가 연속적 중생론자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저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홀리~님의 글은 처음부터 “(좁은)중생->믿음(회개)->(넓은) 중생”이라는 틀을 만들어놓고 모든 해석을 여기에 맞추어가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만 골라서 쓰고 그렇지 않은 것은 죄다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코 그런 식으로 목적을 설정해놓고 해석하며 이끌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어느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홀리~님과 같은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못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죠.
이제, 마지막으로, 구원의 서정, 즉 구원의 차서를 통해, 연속적 중생론이 어떠한 신학의 기초,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래 구원의 서정(차서, 순서)는 구원론에 있어서, 개념의 정리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학을 밝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후크마의 분류를 따르고자 합니다.
먼저, 머레이입니다. 머레이는, 부르심 – 중생 – 믿음,회개 – 칭의 – 양자 – 성화 – 견인 – 영화, 후크마는, 중생 – 돌이킴(회개와 믿음) – 칭의 – 성화 – 성도의 견인 바빙크는, 소명과 중생 – 믿음과 회심 – 칭의 – 성화와 견인 벌콥은, 외적 부르심 – 중생과 효과적인 부르심 – 회심 – 신앙 – 칭의 – 성화 – 성도의 견인 마지막으로, 웨인 그루뎀은, 소명 – 조명 – 중생 – 회심 – 믿음 – 칭의 - 성화
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분류들은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한결같이 중생 다음에 회개와 믿음, 즉 회심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후크마는 자기의 구원과정을 열거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구원의 과정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또한 어떤 몇몇 구원론의 견해들은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척되어야 될 견해들은, 돌이킴 이후에도 어떤 분명하고도 인지 가능한 두 번째 단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자들, 또한 회심에 뒤이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단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자들을 포함한다. 그것들은 2단계 혹은 3단계 구원론이라 부를 수 있다.” 이 말을 한 후에, 배척되어야 할 세 부류의 구원의 단계를 말합니다.
첫째로, 성결교회, 돌이킴/회심(칭의) – 전적인 성화 둘째로, 대부분의 오순절 교회들, 돌이킴/회심(칭의) – 성령세례 셋째로, 몇몇 오순절 교회들, 돌이킴/회심(칭의) – 성화 – 성령세례
저는 연속적 중생론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피터 마스터스가 주장하는 구원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태 혹은 초기중생 – 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 – 회개와 믿음 – 칭의와 새출생(후기중생) – 구원의 확신
다시 말하면, 회개와 믿음 다음에 칭의와 새출발, 즉 후기 중생을 두는 것은, 곧 대부분의 오순절 교회들이 주장하는 회심 후에 성령세례가 오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변형된 오순절신학이랄까, 아니면, 개혁주의의 옷을 입은 오순절 구원론이랄까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제가 로빈슨크루소님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이들에게는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게 되는 것은, 중생 전입니까? 아니면 중생이 있고 난 후입니까? 아니면 함께 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로빈~님은 이렇게 답을 했죠. “---> 넓은 의미의 중생 때 즉 회심할 때 동시적으로 받습니다.”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글들을 쭉 찾아보니까 모두가 후기 중생 때 성령을 받는다, 또는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하였더군요. 만일 그렇다면, 오순절 구원론과 무엇이 다릅니까?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구원론을 말하기 전 성령의 사역을 거론합니다. 그리고 모든 구원의 과정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중생과 동시에, 또는 중생 전에 새생명이 새생명임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된 사람들 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연속적 중생론과 오순절주의 구원론과 무엇이 다른지? 만일 다르지 않다면, 연속적 중생론을 가리켜, 오순절주의 구원론이라고 불러도 될런지.... 이제 더이상 연속적 중생론을 가리켜 개혁파의 중생론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는 로빈슨 크로소님이 연속적 중생론의 지지자료로 올리신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 비교"에 대한 비평을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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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해서 내일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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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분께 감사드리며,토론의 본질을 흐리지 않기 위하여
질문이나 의견 피력은 이 토론이 마무리 된 후에
따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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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갈닉님의 글을 효과적인 부르심때 중생되는 그 시기에 성령세례가 주어짐으로 성령이 내주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위의 글이 다 이해가 명확히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을 때에 즉 회심-칭의-양자삼음의 때에 성령세례가 주어질 경우의관점에서 보자면 큰 문제거리로만 보일 뿐입니다. 성령세례가 언제 주어지냐에 따라 위험의 문을 열어두느냐..아니면, 성경해석이 더욱 명확해지냐 라는 기로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지요.
하여간 다음주가 기대되는군요. 저는 열심히 관전하고 있겠습니다.
지속적으로 읽고 공부하겠습니다
홀리죠이님, 토론 준비에 연일 수고가 많으시구요. 관전하고 있는 저도 좋은 토론이 이어지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중생의 결과로서 나타난 현상이 회심이냐?..>
아니면,
<회심이 드러나지 않으면 중생이라 할 수 없으니,.회심까지가 중생이다..>
분명히 중생케 하시는 생명의 씨앗이 심기워지는것..이것이 우리 인간의 의식으로는 감지할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중생이 회심으로서 우리안에 나타나는 것이라면,.연속적이라는 개념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갈릭님의 표현대로,.
칼빈의 중생관이 주관적이어서 오늘날은 <잘못됨>으로 평가 한다고 하지만,,
<회심>에 이르지 아니한 ,.신자들을 향하여,.
중생의 범위가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가에 대한 설득은 필요하리라 봅니다.
<중생의 결과로서 나타난 현상이 회심이..'), 'spam_popup', 'width=450, height=300, resizable=yes, scrollbars=no').focus();return false;" href="http://cafe329.daum.net/_c21_/bbs_nsread?grpid=kvSj&fldid=RkzJ&contentval=005cy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21636&searchlist_uri=%2F_c21_%2Fcafesearch&search_ctx=VnKaQtKZsJZB2Q6rEnyTQNJLYJ1BLByrXH6apwnmUgOL5YegifEsd2DiP9QJZaSuU2KbaQryMK4pwsH9zh1lh8om1_6_PuBuam5sHu1d6LinVk1oXVMdhyNgsiG4v5XkaNjl7N84fk_kElon9H_2eXNDtA_jrSvaKxxKhQjl1NQhBe1U8OkLMWTRqjV4nS2WiONP9U91utfauXR3dzl8o.dR_g5sAtqJeO91Q3_q51Tz2_CbikV.ouYkcOXuS1LL8owGZqOyhGLQD.tKc5xvT4oehAPd9jkDrzB7quLcEM4monk9Oo1KpTg2us8piEMoJLNJ.OLBYPSHDyvJEhpPWTKgdB17i8Es4a95jqGs4N57ckAuAqKIq7gcEmynFzp4gtCVy5TmLeM0#">신고
이것에 의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자의 신학이 드러난다는 갈릭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성령의 내주는 아니므로.내주까지 그과정이 짧거나 오래걸려 완성되기때문에 그중생의완성의 표지로 바로회심이오지요.
중생사이에 믿음, 회개라는것은 중생이 시작됬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돌이킴,회심은 아니죠. 여기서 연중론은. 주의해서 교회안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주신사명으로 양육하자는겁니다
물론 효과는 하나님이내시구요 오늘날 교회를 보세요 얼마나 중생이 남용되는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