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씻고, 열고
-개심사와 천수만
김애자
아침 9시에 경기문화재단 앞을 출발하였다. J시인과는 석 달만에 함께 가는 것이고 차례로 보면 그의 차로 가야할 순서였으나 2인용 승용차라 C시인이 대신 수고를 해주기로 하였다. 먼저 개심사에 들리고 그 다음에 서산마애불을 보러 갔다가 맨 나중에 천수만으로 가기로 일정을 정한 다음 비봉 IC에서 고속도로를 탔다.
네 사람 모두 아침식사를 잘 안하는 사람들이라 전에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동으로 아침을 해결한 적이 있기에 그러려니 했더니, J시인이 개심사 입구에 어죽을 잘 끓이는 집이 있다며 거기 가서 아침을 먹잔다. 그리 멀지않은 곳이니 그렇게 하기로 하고 안개 자옥한 고속도로를 계속 달렸다. 이번 기행의 목적이 주로 억새와 철새 사진을 찍는데 있었던 A시인이 걱정을 했다. 그러나 아침에 안개가 많이 낀 것은 날씨가 아주 좋을 징조이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심사 입구에 차를 대자 J시인은 우선 식당부터 찾아들어갔다. 주차장 바로 곁에 있는 ‘가야산장’이었다. 점심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다행히도 어죽이 된다고 하여 주문을 한 다음 주변에서 팔고 있는 먹거리 특산품들을 구경하였다. 표고버섯이 아주 싱싱하고 물건이 좋아 보여 값을 물어보니 1kg에 만원이란다. 그러면서 마수니까 200g을 더 줄테니 사라고 했다. 물건도 좋고 값도 싼데다가 마수라는데 물어만 보고 그냥 물러서기 안됐기에 1kg씩두 봉지를 사서 A시인과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덤으로 생강이나 한 쪽 달랬더니 내 손바닥보다도 더 큰 생강 한 개를 선뜻 집어준다. 피차 기분 좋은 마수걸이를 하고나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라는 주인의 권유를 사양하고 여행기분을 내고 싶은 우리는 입구의 아주 작은 쪽방만한 홀로 들어가 빨간 플라스틱 의자를 당겨 원탁에 둘러앉았다.
드디어 잘 끓어 걸쭉하고 붉으레한 어죽이 가스불에 얹혀 나왔다. 쌀이 아니라 국수를 넣고 끓인, 1인당 6천 원짜리 어죽이다. 마늘이며 고추장 된장 등을 듬뿍 넣고 쑨 듯 구수하면서도 입에 감기는 어죽의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든든하게 아침 겸 점심을 먹은 우리는 바쁠 것 없는 걸음으로 일주문을 들어섰다. 시간이 지나며 안개는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개심사 입구표지가 나타났다. 오른 쪽으로 차량이 출입하는 길이 있었으나 철문을 달아 통제하는 듯 했다. 산문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시작되는 곳에 글자를 새긴 입석이 대문인양 양쪽으로 세워져 있었다.
보통사람의 키보다도 작은 돌에는 洗心洞과 開心寺가 각각 새겨져 있었다. 마음을 씻는 동네이고 마음을 열게 하는 사찰이라는 뜻일까. 디디고 오르는 돌계단도 자연석이어서 정겹고, 돌 틈으로 졸졸대며 흘러내려가는 어린 물소리는 마음을 씻어주는 듯했다. 산비얄에 울울한 적송들도 굽어진 허리가 유연하고 그 자태가 우아하니, 참으로 마음을 청정하게 해주는 오름길이었다.
象王山 開心寺. 드디어 목표로 했던 첫 번째 장소에 도착하였다.
수행법을 배우는 도량인 듯 규모가 제법 크고 반듯한 목조건물의 조금 비껴 내려간 앞쪽으로 범종각이 보였다. 해탈문은 도량의 오른편 가장자리에 자그마하게 붙어있었는데, 키가 큰 사람은 고개를 숙여야겠다싶을 만큼 작고 낮아 겸손해 보였다.
해탈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그냥 여염집 안마당만한 정방형의 뜰에 5층 석탑을 앞에 세운 대웅보전이 가부좌한 듯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왼쪽의 심검당과 오른 쪽으로는 무량수전이 한 눈에 들어왔다. 특히나 심검당의 부드럽게 휘어진 배흘림기둥은 유연하면서도 단아하게 느껴졌다. 이 작은 절집이 마치 고향집에나 온 듯이 편안하고 다정한 느낌이 든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 안쪽에서 본 도량은 넓은 마루방이었는데 법고와 목어와 운판을 한 쪽으로 배치하여 쪽문으로 보이는 범종까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언젠가 J시인이 사진을 찍기 위해 빛을 기다렸다던 바로 그 자리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개심사를 찾았던 J시인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하냥 서있는 그를 보고 지나가던 스님이 뭘하고 있느냐고 묻더란다. 그래 빛을 기다리노라고 대답했다던 그 일화가 우리에게 개심사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그것이 결국은 우리가 문화기행을 시작하게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절집 바깥 계곡 쪽으로 자리한 해우소까지 돌아보고 나서 다시 해탈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왔다.
절 아래 조금 내려간 낮은 곳에는 직사각형으로 된 긴 연못이 만들어져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만든 외나무다리가 놓여있었다. J시인의 말에 따르면 절이 앉은 산의 이름이 象王山이니 그 연못은 코끼리의 물통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말 모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물속에는 꽤나 큰 잉어가 사는 듯 불그레한 자취가 움직이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녹조가 너무 심해 물이 물같이 보이지도 않는데 저 속에 사는 물고기들은 얼마나 가슴이 답답할까 안타까웠다.
다음 목적지는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서산 마애불.
강당골 물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작은 다리를 건넜다. 가물은 탓인가 수량이 많이 줄어있어 물고기들의 몸놀림이 손에 잡힐 듯하였다. 설치 된지 오래지 않은 목조계단을 조금 걸으면 금방 아주 가파른 돌계단을 만나게 되고 그 계단을 숨차게 오른 다음에 다시 자그마한 不二門을 통과해야만 마애불에 다가갈 수가 있다.
가야산 끝자락인 수정봉 북쪽 산중턱, 커다란 암벽을 안쪽으로 파내고 들어가 부조형식으로 조각된 이 삼존불상은 우리나라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고 한다. 가운데는 본존불인 석가여래입상, 왼쪽은 제화갈라보살입상(관음보살이라고도 함), 그리고 오른쪽은 미륵반가사유상이다. 놀라웠던 것은 세 번째 와서야 내가 비로소 백제의 미소를 실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듯 다사롭고 정겨운 미소를 확실하게 드러내어 보여준 것은 빛이었다. 우리가 막 도착한 바로 그 시각, 사선으로 내리 비추는 햇빛의 각도가 완벽했던 것이다. 특히나 왼편의 관음보살입상은 불자 아니어도 그 신비하고 온화함에 이끌리지 않을 재간이 없을 만큼 미소가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우리는 빛이 각도를 달리한 다음에야 그 앞을 떠났다.
다음은 철새도래지 천수만이다. 지금이 철새가 모여드는 한창 때라니 기대가 클 수밖에 없는 일. 전망대를 찾아가야 했으나 찾기가 그리 쉽지가 않았다. 나중에 보니 유원지인줄 알고 가지 않으려던 <서산 버드랜드>가 바로 철새 탐조차량을 운행하는 곳이었다. 새로 지어 개장한지 며칠 안되는 현대식 건물이었다. 1인당 5000원에 판매하는 탐조권을 구입했다. 한참을 기다려야 했으므로 동영상를 보았는데, 떼 지어 날아오르는 철새들의 영상은 환상적이었고 덩치 큰 새들이 얼음 위에서 미끌거리며 뒤뚱대는 모습 등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머금게 했다.
탐조 버스는 예정대로 오후4시 정각에 출발하였다. 승객은 우리 일행 4명과 운전기사, 여성인 생태 해설사 한 사람, 그리고 남자 1명이 더 탔을 뿐이었지만 해설사와 기사는 친절하였다. 설명은 열심히 해주는데 사람이 너무 없으니 우리가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철새를 만나러 가는 곳은 40만평 가까운 드넓은 간척지였는데 철새보호를 위해 일반 차량은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다. 한 시간 가량을 벼 베어낸 황량한 논밭 사이로 버스를 타고 돌며 철새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수많은 새떼가 일시에 날아오르는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그런 장관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고, 버스도 천천히 달리기는 해도 서 달라는 부탁은 들어주지 않았다.
가창오리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 부화하여 우리나라에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철새이다. 그곳에서는 사냥이 허용되므로 차량이 멈추면 가창오리들은 사냥꾼이 온줄 알고 놀라 날아오르는데 이때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철새들의 먹이가 부족한 현실이다. 게다가 철새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도래지를 바꿀 수도 있기에 세심한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엔 차만 보면 놀라 날아오르곤 하던 새들도 몇 년 지나면서부터는 차츰 통과차량에 대해서는 안심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정차하는 차량은 크게 경계하여 놀라기 때문에 정차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탐조버스가 멈추어선 곳은 짚을 엮어서 높고 길게 담을 치고 어른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구멍을 뚫어놓은 다음 망원경으로 새들을 관찰할 수 있게 관망 장치를 해놓은 곳이었다. 버스에는 물론 충분한 수량의 망원경이 준비되어 있었다.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난생 처음 그런대로 아쉽지 않게 많은 철새와 그 새떼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모습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철새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니 어느새 서녘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해는 서산을 넘고 있었다. 노을을 배경으로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의 모습은 또다른 정취를 느끼게 했다.
이제 저녁을 먹어야할 차례이다. 굴밥이 먹고싶다고 했더니, 간월도 바닥도 빤히 알고 맛에 대해도 빠지지 않는 일류 ‘인간네비게이션’ J시인이 괜찮은 밥집을 잘 알고 있다며 ‘맛東山’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맛있는 영양굴밥과 신선한 갱개미무침(간재미회무침)이 여행으로 피곤해진 우리에게 활기를 되찾아주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항구할매젓갈’ 집을 찾아가 저마다 조개젓이랑 어리굴젓들을 한 통씩 샀다. 막 문을 닫으려던 참이었다며 통마다 젓갈을 넘치게 꾹꾹 눌러 담아주던 할머니의 인정도 여행의 마무리로 손색없는 것이었다.
행복했던 하루! 다음 기행지는 어디가 될까?
첫댓글 남양만이 가까워서
요즘은 우리 마당 위로도 청둥오리가 날아다닙니다.
곧 떠나겠지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