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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이 스치고 지나간 몇 쪽의 바다들
김철
부산에는 강도 있고 바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어릴 때부터 바다를 더 좋아했다. 강은 물이 미끈거리고 뭔가 해감내 나는 것들이 강가에 묻어 있는 것 같아, 언제나 신선하게만 보이는 바다가 더 좋았던 것이다.
나는 해와 바다를 경영학적으로 비교해 본 적이 있다. 햇빛은 지상을 골고루 비춰 주지만 장벽이 있는 곳이나 구멍 속 또는 구석진 곳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나 바닷물은 바위 틈 구석구석까지, 속속들이 들어가 적셔 주고 핥아 준다. 즉 해 같은 경영자는 모든 종업원을 다 사랑할 수가 없으나 바다 같은 경영자는 모든 종업원을 한 명도 놓치지 않고 사랑하는 자상함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 나는 산업체에 강의를 나갈 때마다 관리자들에게 해가 되기보다는 바다가 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바다―지구 표면의 71%를 차지하고, 생물 수도 육지보다 7배나 더 많은 바다를 지금도 자주 찾는 나에게 어릴 때부터 각인되어 있는 그에 대한 일화들을 하나 둘 풀어 내 보기로 한다.
1. 부산 옛 수산대학교 옆의 바다 붐개
이곳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주 가서 놀던 바다로 ,지금은 아마도 매립이 되어 흔적이나마 찾아볼 수 있을지 의문인데, 수년 전 국제신문 논설위원이었던 정상수 선생과 통화 중 그 분의 칼럼에 언급돼 있던 붐개에 대해 감격해 하며 추억담을 주고받았을 만큼 그리운 곳이다.
붐개는 갯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시간만 나면 우리 사형제(형, 나, 그리고 동생 둘)가 도시락을 준비해 자리를 말아 들고 즐겨 찾았던 그 갯벌에는 게도 많았지만 모래를 조금만 파도 조개, 고둥, 가재가 지천으로 나왔다.
그 붐개도 개발 붐에 밀려 어딘가 조금씩 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던 1960년대 중반의 대학 시절 어느 날 역시 우리 사형제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곳을 찾았다. 준비해 가지고 간 군것질 거리를 먹고 난 우리는 얕은 바다에 들어가 발바닥으로 모래를 파헤쳤다.
그러자 이게 웬 일인가. 꼬막 같기도 하고 피조개 같기도 한 조개가 무더기로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런데 조개를 런닝 셔츠 자락에 가득 담아 나오는 우리를 보고 갑자기 부경대 쪽에서 한 남자가 나오더니 고함을 질러 대었다. 왜 그러나 하고 귀를 기울였더니. “그건 학교에서 양식 실험 중인 피조개이니 가져가지 말라!”는 외침이었다.
속된 말로 좋다가 만 이 해프닝을 끝으로 붐개는 영원히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2. 영도 제2 송도 자갈밭
내가 중학교 때 작은 아버지는 영도 남항동 전차 종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제2 송도 바닷가 부근에서 철공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기아자동차의 모태(母胎)가 된 삼천리자전거가 작은아버지 철공소 근방에서 삽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우리 식구가 작은아버지 철공소에 놀러 갔던 어느 일요일 무엇을 잡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바로 바닷가 자갈밭으로 가서 게를 잡겠다고 자갈을 들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뭔가 길쭉한 것이 휙 자갈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급히 따라가며 자갈을 걷었더니 그건 요즘 세발낙지나 쭈꾸미 비슷한 놈이었다.
낙지를 잡았다고 내가 소리를 지르자 김종대라는 철공소 직원이 와서는 보자 해서 주었더니 눈 깜짝할 새에 입으로 가져 가 바로 먹어버려 나로 하여금 울상을 짓게 만들었는데, 부산중학교 교복을 입은 내가 쭈그리고 앉아서 자갈을 뒤적이던 그 바닷가도 이제는 몰라보게 변했으리라는 생각이다.
3. 영도 제2 송도 갯바위
연도는 불확실한데, 아마도 내가 전포동의 GMKorea에 다니던 1970년대 중반이 아닌가 싶다.
겨울 어느 날 소설가 윤진상 선생과 부산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박정인 씨[전무로 재직하던 2001년경 작고]와 함께 박정인 씨 집에 들러 술을 마시는 등 대낮부터 대취하여 다니다가 결국 정착(?)한 곳이 윤진상 선생이 살고 있는 영도의 제 2송도 바닷가 한 술집이었다.
셋이서 의기투합한 속에 주흥이 도도해지자,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선생도 아니면서 어리광과도 같은 주정과 객기가 대단했던 나는 술이 얼마나 취했던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옷을 입은 채로 파도가 세게 치고 있는 차가운 바다 속으로 말릴 새도 없이 번개같이 뛰어 들어갔다.
윤진상 선생과 박정인 기자의 후일담에 의하면 ‘오늘 여기서 김철이 죽는구나!’ 생각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는데, 파도에 휩쓸려 곧 죽을 것만 같이 보이던 내가 하늘이 도왔던지 바위 하나를 거머쥐고는 이리저리 시달리다가 다행히도 올라오더라는 것이었다.
서울공대에 다닐 때 상계동 기숙사에서 외출을 나와 100미터가 넘는 기나긴 철교를 건너 강 건너 미군부대가 있는 의정부의 스탠드바로 서부의 사나이들처럼 폼을 재며 가서는 술을 마시고는 대취해서 돌아올 때 그 긴 철교의 침목 위를 뛰어 달리던 나를 보고 친구들이, ‘오늘 김철이가 죽었구나!’ 하고 가슴을 졸였다는 그 때 그 일을 기억나게 하는 일이었다.
술에 대취한 내가 그 거센 겨울 바다의 파도 속에서 살아나온 것은 사람이 걷지 못하게 불편한 스페이스(space)로 설치해 놓은 그 침목 위를 정신이 없는 속에서도 끝까지 실족하지 않고 완주했던 일에 못지않은 하나의 기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4. 송도 혈청소 가는 길 아래쪽 갯바위
송도는 오염되기 전까지는 부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던 해수욕장이었다. 그곳에는 바다 한가운데 꽤 깊은 곳에 도약대(跳躍臺)[도비다이(とびだい)]가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수영을 잘 못하는 우리들에게는 꿈만 같은 곳이었다.
송도 바다에는 빨간 뿌리와 연한 속잎장이 맛있는 해초인 ‘잘피’가 많아 직접 캐어서 먹기도 하고, 몇 줄기씩 묶어 ,파는 것을 사 먹기도 했었다.
송도해수욕장 옆을 지나 산허리를 돌아 넘어가면 혈청소가 있었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바다에서 고둥과 게를 잡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우리 사형제가 자주 찾던 곳의 하나가 바로 혈청소로 가는 길 삼분의 일 지점 아래쪽에 위치한 갯바위였다.
바위틈에는 살진 거북손도 많았고, 손만 넣으면 성게와 매운 고둥이 수두룩했으며 운만 좋으면 해삼과 군수도 건질 수 있었다. 낚싯대로는 술뱅이라는 고기와 함께 노래미, 복어도 잡았는데, 일부 잔인한 아이들은 물 밖으로 나오면 배를 뽈록 부풀리는 복어를 바위에 때기장을 치기도 했다. 그러면 복어는 “뽁!” 소리를 내며 배가 터져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물속에 들어가 놀다 보면 가끔 다리를 무언가 스치고 지나가고 나서 피부가 매우 쓰릴 때가 있었는데, 옆에 놀던 다른 사람이 그건 수구미라는 고기의 지느러미 독 때문이라고 귀띔을 해 주기도 했다.
또 검자주색의 큰 성게를 힘들여 잡아내고 나면 손톱 밑에 성게 가시가 박히기 일쑤라 며칠 간 아릿한 아픔이 계속되기도 했으나, 저녁에 삶아 먹는 그 싱싱한 해물에서 풍기는 바다 향기를 맡으면 아픔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 같았던 시절이었다.
5. 해운대해수욕장
해운대야 손인호가 불렀던 <해운대 엘레지>가 아니더라도 너무나도 유명한 곳이라 어떤 언급도 더 이상 필요치 않겠지만 이곳에서 내가 죽다가 살아난 이야기는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62년경인가 대학시절에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와 해운대에서 해수욕을 하게 되었다. 친구의 수영 실력은 100점 만점에 80점이라면 나는 40점 정도였는데, 어쩌다 친구를 따라 헤엄 쳐 들어가다가 너무 멀리 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 그 자리에 서 보니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머리가 물속으로 쑥 잠기는 것이 아닌가.
순간 죽었구나 하는 생각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나는 물속에서 잠수함같이 손을 앞으로 쭉 뻗고 물살을 가르며 발장구를 수없이 치다가 멀리 나왔다 싶어 발을 뻗어 보았으나 바닥에는 닿지가 않았다. 그 때부터는 비몽사몽 상태로 다시 손발을 한없이 허우적대다가 지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일어섰더니 겨우 발이 모래바닥에 닿는 것이었다.
해운대 바다는 모래 바닥이 갑자기 깊어져서 물결이 회오리를 치며 밀려나가기 때문에 깊은 곳에 들어가면 어지간한 수영 실력이 아니고는 좀처럼 되돌아 나오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던 것이었다.
그리고 해운대 백사장은 도다리나 보리멸[바다모래무지, 기스꼬(きすご)]을 잡겠다고 릴을 던져 놓고 기다리는 아빠 곁에서 노란 야구 모자를 쓰고 같이 서 있던, 이제는 서른이 넘은 아들의 귀엽기만 하던 네 살 때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6. 광안리해수욕장
불꽃놀이와 광안대교 등으로 해운대와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해수욕장에서 우리는 어릴 때 물속에서 트위스트를 추면서 모래를 파헤쳐 백합을 줍곤 했다. 오래 전부터 생활용수에 의한 오염으로 사라진 백합을 인공적으로 뿌려 놓았다는 소문이 있고 최근 잡아보았다는 사람도 있어 조만간 한 번 가 볼까 하는 이 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부산고등학교 때 해양훈련을 했던 기억이 난다.
GMKorea 전포동 버스공장 근무 시절 직원들이 단체로 해수욕을 가서 노래도 부르며 즐겁게 놀았던 장면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광안리 바닷가는 GMKorea가 새한자동차로 바뀌어 있을 때 사장으로 와 있던 투 스타 출신의 김종달 사장이 30여명이나 되는 간부들과 소주를 정종 잔에 가득 부어 1:30으로 주거니 받거니 30잔을 마시고도 끄떡없던 초인적인 모습도 생각나는 곳이다.
특히 이 날 내 앞에 와서 총무과장이 건네주는 술잔을 내게 내밀다가 내 눈을 보고는 주춤 멈추더니, “와아, 눈이 정말 보통 눈이 아니네!”라며 총무과장을 돌아다보며 놀라 하던 김종달 사장은, 새한자동차를 대우그룹이 인수하게 되어 있는데도 간부들에게, 자기가 끝까지 사장 자리를 지킬 테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라고 군인답게(?) 만용을 부리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었다.
7. 송정해수욕장
해운대, 광안리와 함께 부산시민의 사랑을 받는 송정해수욕장은 아내와 내가 처음으로 민박이라는 것을 해 본 곳이다. 할머니가 주인인 그 민박집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남녀 한 쌍도 들어 있었는데, 둘이 아직 데면데면한 사이라서인지, “쌀 씻었음!”, “밥 먹어야 되겠음!”, “숟가락 놓음!” 식으로 대화하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일편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송정해수욕장에서는 막 대학에 들어간 고교 동창들이 모여 이틀 정도 캠핑다운 캠핑을 하며 젊음을 구가하기도 했다.
혈기왕성하여 한창 폭음을 하던 때라 밤마다 술판이었고, 그러다 보니 동네 청년들과 시비가 붙어 도끼까지 등장하는 살벌한 대결 사태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던 송정해수욕장이었다. 우리는 밤에는 술만 마신 것이 아니고 마음 맞는 친구와 갯바위로 나가 낚싯대를 드리워놓고 별을 올려다보며 철학과 문학을 논하기도 했었다.
이 송정해수욕장은 일종의 낭만이 파도치는 곳이기도 했지만 송정만 생각하면 떠오르는 슬픈 사연이 둘이나 있는 곳이다.
하나는, 친구[고아인(高雅仁)]의 익사 사건이다. 캠핑 이틀째가 되는 날 아침 모래사장을 거닐고 있자니 모래사장 끝의 갯바위 쪽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하고 가서 보니 간밤부터 보이지 않던 그 친구가 수영복 차림으로 반듯이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안경도 낀 채―
나는 놀라서 친구들에게 알리고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나와서, 의사였던 고아인의 부친께 이 사실을 알렸다. 놀란 표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진료 가방을 챙겨 택시를 대절해 송정해수욕장의 현장에 도착한 부친은 찬구를 뒤집어 놓고 항문 상태를 확인 하더니 아들의 배에 걸터앉아 손으로 가슴을 힘차게 눌렀다 놨다를 되풀이하다가 굵은 주사기를 꺼내 바로 심장을 향해 수차례 꽂았다. 말로만 듣던 캄프르(camphre) 주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부친은 우리를 올려다보며 미소, 아니 쓴웃음을 지었는데, 그때 그 미소가 얼마나 비통해 보였던지 나에게는 폐부를 찌르는 듯한 아픔으로 다가왔었다.
중앙초등학교 5학년 말인 1953년 1월 9일 여수에서 부산으로 오던 여객선 창경호의 침몰 사고로 돌아가신 선생님의 영결식에도 화장터가 겁이 나서 가지 않았던 나는, 친구 고아인을 화장하는 날에도 화장 장면을 보는 것이 두려워 가지를 않았었다.
그 두 번째는, 의사이자 수필가로서 1974년도에 부산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우하(雨荷) 박문하(朴文夏)(1918~75) 선생에 관한 이야기다. 평소 나를 많이 아껴 주시고 칭찬해 주셨던 선생의 외아들이 서울대 의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해 여름, 방학을 맞아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선생님께 인사를 시킨 뒤 송정으로 의료봉사활동을 떠났다.
그런데 몇 시간 뒤 급한 전화가 와서 받아 보니 아들이 익사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 길로 삶의 의지를 잃은 선생은 거의 매일 술에 취해 해운대 바다에 나가 아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한다.
그러다 간이 나빠진 선생이 삶을 끝내고 아들 곁으로 돌아가자 집은 풍비박산이 나, 그 멋진 골동품들도 다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기만 한 지금 수안동에 위치한 <민중병원(民衆病院)>을 찾아갈 때마다 “여보세요!” 하고 선생과 똑같은 목소리로 우리를 반겨 주던 구관조(九官鳥)만이 나의 뇌리 속에서 파닥이고 있을 뿐이다.
해마다 8월 15일이 지나면 을씨년스러워지기 시작하는 그 바닷가 모래사장을 머리카락 날리며 사색에 잠겨 거닐던 20대의 내 젊은 모습이 눈에 선한 송정해수욕장이다.
8. 일광해수욕장
일광해수욕장은 물이 얕기로 유명한 곳이다. 아무리 들어가도 물이 무릎에 차지 않는 곳이다. 이곳은 가족들이 가서 놀아도 걱정할 위험도 없었지만, 계모임이나 직장 단위로 야유회를 가면 후리치기라는 것을 할 수 있어서 더더욱 마음에 들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후리치기는 아마도 훌치기에서 온 말 같은데, 배 한 척이 그물 한 쪽 끝은 모래사장에 고정시켜 놓고 그물을 끌고 바다 멀리 나가서는 가두리양식장을 하듯이 빙 둘러 친 뒤 다른 한 쪽을 모래사장으로 가지고 와서 처음 고정해 둔 끝과 좀 떨어진 곳에 고정시켜 두고는 한 두어 시간을 기다렸다가 그물을 끌어당기는 고기잡이놀이였다.
한 번 하는 데 요즘 시세로 약 10~20만 원을 지불했던 것 같은 후리치기는 그물이 뭍으로 끌려올수록 잡힌 고기들이 펄떡거리며 뛰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꽃게와 같은 게 종류도 섞여 있어,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는데, 요즘도 일광해수욕장에 가면 후리치기를 할 수 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9. 일광 갯바위
한국유리를 지나 일광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도로 왼쪽 편에 군부대가 주둔했던 야트막한 산이 하나 나타난다. 이 산은 내가 혼자서 또는 후배와 함께 자주 가서 난(蘭)을 산채(山採)하던 곳이다. 아침 햇빛에 찬란히 빛나는 금란(金蘭)도 자생하는 곳인 여기서 후배는 한국춘란 중투(中透)[잎에 노란 줄무늬가 있는 난 종류 이름]도 캔 바가 있다.
도로 오른 쪽에는 갯바위가 즐비한 바닷가로서 사시사철 사람들이 놀러와 낚시도 하고 화투판을 벌이기도 하는 곳인데, 우리 가족과 처갓집 가족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이곳의 갯바위 역시 고둥, 게, 성게, 거북손, 따개비, 군부, 그리고 담치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는 작은 것만 있는 게 아니어서 앞으로 언젠가는, KBS 2TV의 <스펀지 2.0>에 소개된 바대로 작은 어망 조각에다 돼지 삼겹살을 붙여서 진짜로 손바닥만큼 큰 게를 잡아 볼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고둥 잡을 때 유념해야 할 사항 하나를 일러둘까 한다. 물속의 거칠거칠한 바위 표면을 손으로 훑어보면 고둥이 손에 만져지는데 이 때 훑는 방향을 아무렇게나 하면 손이 닿자마자 고둥은 이를 순간적으로 감지하고 밑으로 떨어져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훑는 방향을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해야 고둥이 떨어져도 손 안에 들어오게 된다.
10. 다대포 반도목재 안쪽 갯바위
평일은 오후 다섯 시, 토요일은 정오에 점심까지 제공 받고 퇴근해 직장인들의 천국으로 선망(羨望)의 적(的)이 되어 있었던 GMKorea에 1972년 입사한 내가 지금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나의 아내가 되어 있는 귀여운 처녀 레지나[스탈레트(Starlet)]와 이듬해에 연애를 시작하여 1978년에 결혼하기까지 장장 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녀와 함께 자주 찾았던 곳의 하나가 다대포 버스 종점 못미처 있던 반도목재 원목 저장소 안쪽의 갯바위이다.
일요일만 되면 우리는 아침 10시쯤 지금은 없어진 충무동의 초원양과자점에서 만나 샐러드를 점심용으로 사서 챙겨서는 다대포행 버스를 타곤 했다. 마음에 드는 아가씨와 함께 낚시를 가는 청년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웠는지는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라도 짐작해 보면 알 수가 있으리라.
갯바위는 호젓할 때도 있고 껄렁패 같은 방해꾼들이 있어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루는 장대 낚싯대를 드리워 놓은 후 줄낚시를 바다 멀리 던져 놓고 한참을 놀다가 줄낚시를 당겨 보니 놀랍게도 감성돔도, 철갑도미도, 도다리도, 참게도, 털게도 낚시에 걸려 나왔다.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 어망을 끄집어내 잡은 것들을 담아 갯바위 사이의 물속에 담가 놓았는데, 저녁이 되어 어망을 들어 보니 고기가 한 마리도 없는 것이 아닌가. 어망이 오래돼 밑에 구멍이 나 있었던 것이었다. 둘이서 얼마나 애통해 했는지는 읽는 이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그러다가 한 번은 레지나가 집에 일이 있어서 나 혼자 반도목재 쪽 말고 다른 곳으로 낚시를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레지나가 일이 빨리 끝나, 다대포 쪽으로 나를 찾아 나선 것이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시절이 아니라 다만 추측으로 내가 갔을 법한 바다 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그만 그 유명한 한보철강(韓寶鐵鋼)을 지나가게 되었다.
앳된 아가씨가 그 쇠붙이 천지인 공장 옆을 지나가니 공장 일꾼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휘파람을 불고 난리가 났던 것이었다.
그 날 밤 한보철강 너머 인적이 드문 바다까지 고생고생 나를 찾아 헤맸다는 레지나의 이야기를 듣고 레지나가 애틋해 보이기도 하고, 잔 다르크(Jeanne d'Arc)처럼 강인해 보이기도 해서 속으로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11. 신선대(神仙臺) 바닷가
지금 나는 신선대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지만 중학교 때 우리 식구 전체가 놀러간 적이 있는 곳이다. 갈 때는 자가용이 없던 시절이라 무엇을 타고 갔는지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택시를 가시기리(かしきり=貸切)하지 않았나 싶다.
어느 여름 날 신선대로 놀러가기 전 아침 밥상머리에서 내가 형과 무엇 때문인지 다투다가 국솥이 넘어져 하필이면 내 다리에 뜨거운 국물이 쏟아져 다리를 데게 되었다.
고관 입구에 있던 주치의 이(李) 내과에 가서 응급 치료를 했는데, 의사는 물론 물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바닷가에서의 놀이 재미를 잘 알기 때문에 거기서 순순히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붕대를 감은 채로 물속에 들어가 고둥을 잡고 있는데 한참을 지나자 다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자세히 살펴보니 불에 덴 자리의 피부가 여기저기 하얀 막이 되어 불퉁불퉁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때문에 의사는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 것인데, 나는 오히려 이쑤시개로 그 풍선(?)을 톡톡 터트리며 재미있어 했으니!
12. 이기대 바닷가
정식 명칭이 <이기대(二妓臺) 도심 자연 공원>인 이기대는 용호동에 있는 바닷가이다. 지금은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져 아주 멋진 시민 휴식처로 탈바꿈을 했다니 지난날 열악했던 주차 시설 등이 잘 개선되어 있으리라 믿고 싶은 곳이다. 약 10여 년 전 외갓집 식구들과 갔을 때는 주차 문제로 신경을 꽤 써야 했던 것이다.
그 때 이기대는 막 태풍이 지나간 다음이라 배에서 흘러나온 듯한 콜탈 같은 기름이 바위마다 묻어 있었기에 뭘 마음껏 잡고 놀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 이기대는 파도가 꽤 센 곳이라 어린이들이 갯바위에 나가 놀 때는 극히 주의해야 하는 곳이다.
어쨌든 마음만 먹으면 가기가 쉬운 도심 공원이라 언젠가 한 번 놀러 가려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많이 알려진 곳은 사람들로 인해 시달리고 지칠 수가 있으므로 계절 선택을 잘 해야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이기대는 담치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내가 어릴 때 남선전기주식회사(南鮮電氣株式會社)[지금의 한전]에 다니시던 아버지로부터 전깃불 혜택을 받은 수정동 뒷산의 일부 주민들은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구수하기 짝이 없는 조선옥수수나 채소 등을 선물로 많이 가져 왔다.
그런데 한 번은 덩치가 보통이 아닌 남자 둘이 이기대에서 따 온 것이라면서 거짓말을 좀 보태 손바닥만한 크기의 담치를 힌 자루 가지고 와서 방바닥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술을 대접하는 사이, 요즘도 담치를 그 국물과 함께 무척 좋아하는 내가 얼마나 그 담치를 보고 흐뭇해 했는지는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13. 감만동 모래구찌
모래가 많은 입구, 어귀라는 뜻의 모래구찌[ぐち(口)]는 일본 강점기 때 적기(赤崎)[아카사키(あかさき)]라고 일컫던 우암동과 이웃한 감만동 솔개해수욕장 부근의 마을 이름이다. 솔개는 솔(소나무)이 많은 개[바다]라는 뜻으로 솔포(浦)라고도 했다.
부산에 살면서도 거기 그런 해수욕장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나에게는 단지 아버지, 어머니의 계모임을 따라 횟집에 가서 회를 먹으며 니나노를 부르던 어른들의 춤사위만 기억날 뿐이다.
옛날에는 다른 해수욕장과 마찬가지로 조개는 물론 담치도 많이 잡혀 쌀 포대 하나로 가득 잡는 사람도 있었다는 이곳도 매립이 되어 정유공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그 많던 횟집도 사라져 버렸는데, 그것도 모른 채 대학교 시절 친구와 한 번 찾아갔다가 아무런 옛 정취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고 허무한 마음을 달래며 돌아온 적이 있는 곳이다.
14. 인천 서해 바다
1960년 대학에 입학하여 그 누구보다 힘든 고학(苦學)이라는 고생문을 막 들어선 1학년 1학기 초의 어느 날 나는 혼자 인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푸른 바다를 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는 인천 바닷가라는 데를 가 보자마자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갯바위가 널려있는 부산의 바닷가만 생각하고 갔던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것도 아예 접근하기가 힘든 시커먼 갯벌뿐이 아닌가. 갯벌에도 바지락이 많으니 바지락 잡기라도 시도해봄직도 했지만 걸어 들어가기가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다시 찾아갈 수 없는 아득히 먼 50여년 전, 오랜만에 고둥이나 게를 잡으며 고학의 시름을 잊고 고향의 가슴에 안긴 듯한 뿌듯한 기분에 젖어 보려 했던 나의 순수한 마음이 갯벌뿐인 서해 바다에 그만 익사해버리고 만 하루였다.
15. 포항 도구(都邱)해수욕장
내가 대우자동차에 다니던 1980년 중반 초봄엔지 늦가을엔지 부서(部署)[생산관리부] 직원 단합대회를 포항의 도구해수욕장으로 간 적이 있었다. 해수욕 철이 아니라 한적했던 그 곳에서 우리는 족구도 하고 노래자랑도 하며 재밌게 놀았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이유가 나변에 있는지는 몰라도 다른 해수욕장의 모래밭에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백합이 발로 모래밭을 파헤치기만 하면 수도 없이 많이 나왔던 점이다.
다들 조개 잡고 놀기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은 내가 대우자동차 온천지점장을 하던 1990년대 초반에 여름휴가를 도구해수욕장 쪽으로 떠났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날이 흐리고 파도가 센 데다 10여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해수욕장의 모습도 거의 황폐해져 물에 발을 담가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몇 군데 파헤쳐 보았으나 조개는 씨가 말랐는지 눈에 띄지가 않았다.
실망만 가슴에 안고 구룡포로 가서 몇 군데 헤맸지만 이제 조개가 없다는 말만 듣고 바닷가 어느 깨끗한 집에 민박을 하면서 밤에 게를 잡으러 나가 게잡이 그물에 생선 대가리를 끼워 바다에 던져두었으나 다음날 아침까지 한 마리도 걸려들지는 않았었다.
이제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박하(薄荷)를 한 포기 얻었던 그 집 앞에 놓인 평상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릴 것만 같은 별떨기를 올려다보며 정겹게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속삭이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 눈에 아삼아삼한 지금이다.
16. 비진도(比珍島)
1970년대에는 엔간한 레저 정보는 주부생활, 여원 등의 여성지(女性誌)에 다 실려 있었다. 요즘의 여성지들은 활석(滑石)을 재료로 한 미려한 종이로 만들기 때문에 굉장히 무거워 누워서 읽기가 힘든 반면 옛날 여성지들은 보통 종이의 수수한 스타일이라 손에 들고 읽어도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경남 통영시 한산면의 .비진도도 여성지를 보고 알게 된 곳인데, 처음 비진도라는 이름을 접했을 때 그 이름이 얼마나 예뻤던지 가슴이 뛸 정도였다.
몇 년도 여름인지, 어디서 배를 탔는지 모두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쨌든 나와 레지나는 드디어 비진도행 여객선에 몸을 싣게 되었다.
갑판에 올라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선글라스를 끼고 멋지게 차려 입은 숙녀 한 분도 양산을 든 채 옆에 서서 바다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쯤 갔을까. 우리는 둘 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어지는 것처럼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배멀미가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급히 멀미에 대비해 가지고 간 got사과를 배낭에서 꺼내 레지나와 함께 먹었으나 별 효과가 없어 가까운 바다를 피해 멀리 수평선으로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웩웩 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다보니 조금 전까지 아주 멋진 자세로 서 있던 그 숙녀가 완전 망가진 모습으로 구토를 하며 콧물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언젠가 옛날 부산시청 앞 육교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양산을 들고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하이힐이 벗겨지고 스커트가 뒤집어지며 팬티가 드러나고 선글라스가 깨어지고 얼굴에 상처가 났던 한 젊은 여인의 비극(?)을 연상시키는 안쓰러운 장면이었다.
선실로 내려와 보니 거기도 반은 이리 저리 뒹굴며 고통스러워했고 반은 멀미에 이력이 난 사람들인지 그리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모습들이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드디어 비진도에 도착한 우리는 마땅한 방이 없어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한 빕에 들게 되었는데, 방문의 문종이가 다 찢어져 있어 걱정이었다. 청춘남녀가 자는 방이 들여다보인다는 그런 걱정이 아니라 그 독한 바다 모기에 밤새 뜯길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짐을 챙겨 놓고 바닷가로 나갔다. 바다는 꼭 일광해수욕처럼 수심이 매우 얕았다. 일부 관광객들이 모래사장에서 릴을 던져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잡히는 것은 하얀색의 보리멸[바다모래무지, 기스꼬(きすご)]이었다.
비진도 바로 옆에는 또 하나의 섬이 있었다. 그 때 만약 내가 난(蘭)을 하고 있었다면 반드시 건너가 보았을 그런 섬이었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섬의 모래사장 반대편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실망만 하고 들어왔다. 그 쪽은 온통 돼지와 소의 분뇨 천지였다. 이런 정화(淨化)되지 않은 상태로 어떻게 관광 명소라고 홍보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석유버너에 불을 붙이고 저녁 준비를 하고 있자니 집 마당 한 구석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려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눈이 약간 온전하지 못한, 술에 취한 주인아저씨가 대여섯 살 먹어 보이는 아들의 뽈록한 배를 깨진 유리병 조각으로 찌르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급히 달려가, 왜 이러느냐면서 말렸더니, 이놈 배에 난 종기의 고름을 짜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자세히 보니 아이의 배에 엄지손톱만한 종기가 나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하면 세균이 들어가 아들이 오히려 죽을지 모른다고 주인아저씨를 이리저리 겨우 달래놓고 비상약으로 준비해 간 머큐롬을 잔뜩 발라 주었다.
적어도 이틀은 묵으려고 했던 우리는 밤새 모기에게 뜯기기도 했고 여기저기서 싸우는 통에 잠도 못 이룬데다 주변 환경도 더러워 바로 철수하기로 하고 다음날 아침 배를 타러 나와 보니 비진도라는 이름만 듣고 반해 버렸는지 내리는 사람은 어제보다도 더 많아 보였다.
아아 비진도! 청춘남녀들을 유혹하기에 딱 어울리는 정말 아름다운 이름의 섬이었던 비진도―아직 개발되지 않은 30여년 전의 투박하기만 했던 그 섬의 에게해처럼 푸르고 투명했던 그 순수한 바다 속으로 다시 한 번 레지나와 함께 풍덩 빠지고 싶은 마음, 간절해진다. (끝)
서울공대 졸. 한국배우전문학원 신인배우모집시험 합격(1967), 김수영(金洙暎) 시인 사사(師事),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현대문학 천료(1969/1970). 한국문학번역상/부산펜문학상/고운최치원문학상 수상(1973/2009/2009). (현)한국현대시인협회 국제문화교류위원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