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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표 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10점
1960년 이집트가 아스완 하이댐을 만들기 시작합니다.이 댐이 완공되면 누비아 유적, 특히 아부심벨신전이 완전히 물에 잠기게 됩니다. 위의 사진입니다.이집트, 난 유적 그런거 몰라. 저런 거 우리나라 온 천지에 널렸어. 전기가 더 중요해!!! 유네스코 난리가 납니다.세계 각국에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뜻 있는 60개국이 응원해서 이 유적을 제대로 발굴하고,옮겨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세계적인 문화유산, 자연유산을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1972년 마침내 세계의 문화유산 및자연유산에 대한 보호조약이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1975년 처음으로 미국의 엘로우스톤 국립공원, 에콰도르의갈라파고스 제도 등 12개의 자연, 문화유산이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됩니다.자매품으로 세계기록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등이 있습니다.
찬란한 로마문명의 발상지 이탈리아가 제일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49점). 중국(45점), 스페인(44점)이그 뒤를 따릅니다. 40개 이상 보유국이 이 세나라구요, 30개 이상은 프랑스, 독일, 멕시코, 인도구요, 20개 이상은 영국,러시아, 미국이 있습니다. 이 열나라 중 8개 나라가 세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나라 10위 안에 듭니다.상관관계가 대단히 크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세계문화유산이나 자연유산으로 지정이 되어도 수난받는 유산들이 있습니다.아프카니스탄의 바이안 석불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보기 힘든 불교 유물이었으나 탈레반이 개박살을 냈으며,이라크 전쟁과 시리아 내전으로도 많은 유산들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문화유산 10점이 있고 세계자연유산 1점이 있습니다. 북한에는 평앙, 남포 고구려 고분군과개성역사 유적지구 등 2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자....... 그럼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유산인 세계문화유산엔 어떤 것이 있는지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1. 불국 정토를 갈망하는 예술혼의 극치 - 석굴암 · 불국사 (1995)
석굴암은 신라시대 전성기의 최고 걸작으로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유산이며, 불국사는 불교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 문화재청
어느 날 문득, 석굴암의 그 토함산에서 해 뜨는 걸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잠을 설치고 아내와 눈도 못뜨는 아이들을 강제로 차에다 싣고 설레임으로 어둠을 헤치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토함산에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날이 밝아오더니, 해가 떠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불국사로 바로 갑니다. 근데 너무 일찍이어서 문을 안 열었습니다. 문 앞에서 기다립니다. 시간이 되어 관리아저씨가 문을 열어줍니다. 가 보셨습니까? 아침에 깨끗이 비질이 되어 아무도 밟지 않은 불국사의 마당을? 그 마당에 우뚝 서 있는 두개의 탑의 놀랄만한 비례를? 아무도 없는 고요속에서 내뿜는 천년된 절의 정기를? 저는 그 때의 감동을 아직도 선연히기억합니다. 절이 정기를 뿜는다는 말을 정말 실감했습니다. 수학여행 온 애들과 복작복작 하면서 보는 것도 재미지만,아침 첫 참배객으로 불국사에 가면 천년고찰의 고요한 숨소리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교미술품이 불리는 석굴암. 통일신라가 가장 융성하던 시절,
김대성이 751년에 시작해서 20여년 동안의 고행끝에 완성되었다.
어릴 적에 왜 저기 불상 이마에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일본넘들이 떼어가서 지금은 없지만....여하간 해가 떠 오르면 제일 먼저 저 보석으로 들어가서, 그 빛이 반사되어 레이저 광선처럼 일본까지 간다....머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머 아직 초딩들은 그렇다고 믿는다능.....ㅋㅋ. 사진에 보면 천정의 제일 꼭대기 덮개도깨져 있는데, 김대성이 이걸 다 준비했는데 실수로 깨뜨려버리고 울고 있는데 부처님이 내려와서 다시 붙여줬다는....
석굴암이 처음 발견될 당시의 사진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 석굴암 모습
석굴암 천정에 구멍이 뚫려 비가 샜습니다. 일제는 보수공사를 시작합니다. 구멍만 막으면 되는데 지붕전체를다 들어냅니다. 대규모 해체공사를 합니다. 이 와중에 석굴암 내부에 지하수도 막아버립니다.그리곤 그 시절 최첨단 공법인 콘크리트로 처발라서 마무리합니다. 이때부터 내부벽과 본존불에 결로가 생기고이끼가 끼기 시작합니다. 박정희 시절 다시 한번 보수공사를 합니다. 콘크리트 더 처바릅니다. 이때부터 석굴암은아예 밀폐시킵니다. 못 들어갑니다. 제습기를 갖다놓습니다.
1913년 해체 수리하는 모습. 본존불에다 칼을 채워 놓은 같네. 저 아저씨들 머하는 아저씨들이지??
뭔가 가둬 놓은 것 같아 보기가 좀..... 근데 저 시절에 저렇게까지?? 잘 모르겠으면 그냥 놔 두는게 제일 좋다.
가장 최소한의 조치만 하고. 달나라에 여행가는 세상이지만 아직 천이백여년전의 그 기술을 완전히 파악 못한다.
완전하게 복원할 수 있다는 기술과 공감대가 형성되고 나서 시작해도 늦지 않다.
인왕상의 대표선수. 조탑동 전탑이나 분황사 모전석탑에 있는 인왕상도 다 저렇게 생겼다.
원래의 구조는 저 안으로 들어가서 본존불에 참배하고 본존불 주위에 있는 제자상과 관음상을 찬찬히 둘러 보는 것이
만든이의 의도였을텐데.... 지금은 볼 수없다. 죽기전에는 볼 수 있겠지.....
근엄하기도 하면서 뭔가 좀 섹시하다는 느낌도 준다.
통일신라의 예술문화가 가장 꽃피울 시기에 완공한 불교미술의 극치라 불리우는 석굴암입니다. 예술적 감각 뿐만 아니라 건축, 수학, 기하 같은 과학 기술적인 면으로도 탁월해서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예전엔 중국이나 인도의 그 거대 석굴의 부처님에 비해 왜소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그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교미술품이라 불리는 이유를 어렴풋하게 나마 알겠습니다.
천년 넘게 잘 견뎌온 석굴암이 지금에 와서 수난의 시대를 보내고 있다.
언젠가는 김대성이 만든 그 원형 그대로의 석굴암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불국 정토가 바로 여기다. 그런 신념으로 김대성이 지었을 거다.
이 청운교와 백운교를 올라가서 자하문을 통과하면 불국 정토로 들어간다.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557년) 그 다음해 불국사를 짓습니다. 통일신라가 정점에 달했을 때 김대성이 크게 중수하면서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석가탑, 다보탑을 만들고 석굴암도 만듭니다. 이거 다 국보입니다. 김대성은 천재적인
수학자이자, 건축가이며 조형예술가입니다. 황룡사가 규모로서 불교의 융성함을 과시하였다면, 불국사는 치밀한 구성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으로 부처님의 나라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홍준 선생은 불국사의 아름다움 중 으뜸은 바로 석축이라고 했다. 아랫단은 막쌓아 자연미가 넘치고 윗단은
다듬은 돌로 인공미가 나게 쌓았다. 저 돌들이야 말로 천년의 무게를 버티고 있다.
자연석을 평평하게 하여 장대석을 올린 게 아니라 오히려 장대석을 자연석에 맞추어 깎은 그렝이 공법.
이렇게 천년을 견디고 또 다른 천년을 견디어 낼거다.
한때는 거의 방치상태로 있었던 시절의 불국사이다. 일제가 한번 복원, 보수하고 1970년부터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박통이 공구리로 때려부어 보수하라고 하는 걸 한림대 김정기 교수라는 양반이 차라리 나를 공구리 치시오
소설가 현진건이 다보탑을 예쁘고 화려하게 치장한 미인 즉 성장미인(盛裝美人)으로, 석가탑을 기초화장에 수수한 옷을
입은 미인 즉 담장미인(淡粧美人)으로 비유했다. 균형과 세련..... 보면 볼 수록 폼나는 탑이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전설이 있는, 그래서 그림자가 없는 무영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는 갈 때마다 석가탑의 그림자를 꼭 확인한다.
ㅎㅎ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온 곳도 여기다. 도굴꾼 잡다가 발견했단다.
석탑의 화려함의 극치 다보탑이다. 본래 네개가 있어야한는 저 앙증맞은 사자상이 하나밖에 안남았다.
하나는 대영박물관에 있고 나머지 둘은 일본 어떤 넘들의 다락방에 있을 거다. 근데 대영박물관에 있는 거는 우리끼다고
돌라카먼 안주나? 안준다 카모 사가 오든가, 이도저도 안되면 그 머시냐 김윤석이하고 전지현이하고 이정재랑 김수현이랑
팀 꾸려서 영국으로 보내던가....
불국사의 배치도. 김대성이 왜 천재적인 수학자인지 알 수 있다.
강당인 무설전의 기와..... 먼가 아련해온다.
석굴암과 불국사. 너무나 노출되어 있어 어쩌면 가볍게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 새벽의 불국사가 아니었으면 그냥 남들 다가는, 수학여행이나 가는 곳으로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석굴암과 불국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속세에, 비록 한정된 공간이지만 부처님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와 그 예술혼이 집약된 곳입니다. 자세히 들여다 볼 수록 아름답고 신라인들의 부처님에 대한 간절함을 발견 할 수 있는 우리의 대표 문화유산입니다.
2. 위대한 유산을 보존하는 첨단 시설 건축물 - 해인사 장경판전 (1995)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 문화재청
고려시대, 거란족들이 마구 침입합니다. 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에 나오는 그 거란족입니다. 왕이 도망댕깁니다. 힘듦니다. 부처님한테 빕니다. 절마들 쫌 안쳐들오게 해주이소... 그래서 목판에 불교경전을 팝니다. 무려 76년동안. 근데 그 후 몽골이 와서 단번에 불태워 버립니다. 이런~~~ 다시 준비합니다. 이거 만들라고 대장도감이라는 기구도 만듭니다. 나무를 준비하고 일년간 눕혀두고 다시 합판으로 만들어 소금물에 삶고.... 이제 파기 시작합니다. 글자체를 똑같이 하기 위해 일년간 훈련을 시킵니다. 졸라 팝니다. 몽골이 쳐들어와도 계속 팝니다. 한자 파고 절하고, 또 한자 파고 절하고..... 그렇게 15년을 파서 1251년 대장경이 완성됩니다.
해인사 대장경판, 속칭 팔만대장경.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든 목판.
글자수는 644(경판 한장당 글자수) × 81,258(경판 수) ≒ 자그마치 52,330,152자.
뜨헉..... 이 엄청난 숫자는 조선 500년 역사를 정리한 조선왕조 실록의 49,646,667자를 웃도는 수치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가야산 해인사 정경
이 대장경은 원래 강화도에서 만들어져서 강화도에 보관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고 가까이 두고 보고 싶어서 서울로 옮기라고 명합니다. 팔만명이 대장경판 하나씩 머리에 이고 서울로 옵니다. 왜구가 자꾸 쳐들오 옵니다. 태조 불안합니다. 가야산속 해인사로 다시 옮깁니다. 보관상태가 썩 양호하지 못합니다. 세조 때 대장경을 보관할 건물을 짓습니다. 천년동안
대장경이 안 상하고 보관할 수 있게 만들라..... 그래서 장경판전이 만들어집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 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 문화재청
장경판전은 15칸짜리 길쭉한 건물 2개가 마주보고 있고 두칸짜리 작은 건물이 2채 더 있습니다. 남쪽에 있는 긴 건물을 수다라장이라 부르고 북측 건물은 법보전이라 불립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오로지 대장경판을 잘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만들어졌는데요, 아주 숨은 하이테크들이 많습니다. 지금의 기술로도 못 따라 갑니다. 대단한 선조들입니다. 이용재 선생의 말을 잠깐 들어보겠습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 두 건물의 각 벽면에는 위아래로 두 개의 창이 이중으로 나 있다. 아래창과 위창의 크기는 서로 다르고. 건물의 앞면 창은 위가 작고 아래가 크며, 뒷면 창은 아래가 작고 위가 크다. 큰 창을 통해 천천히 건물 안으로 흘러들어온 공기는 골고루 퍼진 후에 작은 창으로 빠르게 나간다. 과학. 소금, 숯, 횟가루, 모래를 차례로 놓은 판전 내부 흙바닥은 습기가 많을 때는 머금고, 습기가 없을 때는 내보내는 자동습도조절기. 동서 사간판전을 두어 안마당을 만든다. 양지바르고 바람 잘 통하는 명당. - 이용재 선생의 홈페이지 인문학적인 집짓기 중에서
위기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세종 때 일본넘들이 이거 달라고 졸라댔었댑니다. 안된다고 해도 하도 졸라대싸니까 세종이 귀찮아서 그럼 주까? 라고 했는데 대신들이 아주 반대를 해서 남았고, 한국전쟁 땐 해인사로 숨어 들어온 빨치산 소탕할라고 이승만이 야! 공중 폭격해서 절이고 빨갱넘이고 그냥 다 쓸어버려!!! 했는데 조종사인 김영환이란 분이 차마 팔만대장경때문에 폭격을 못했답니다. 뿔따구난 이승만이 명령 불복종으로 사형을 시킬라고 했는데 공군참모총장이 말려서 겨우 무마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 정말 다 쓸어버렸으면 진짜....이승만.... 지금도 욕 무지 처드시고 계시지만..... 아휴.... 아뭏튼, 이 공로를 뒤늦게 인정해서 2010년 김영환 장군에게 나라에서 훈장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분, 선비십니다. 존경합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이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팔만대장경은, 물론 국보이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직지심체요절, 동의보감, 조선왕조의궤, 승정원일기, 일성록
3. 동양의 파르테논 - 종묘 (1995)
종묘는 제왕을 기리는 유교사당의 표본으로서 16세기 이래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이다. 종묘에서는 의례와 음악과 무용이 잘 조화된 전통의식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 문화재청
요즘 드리마 정도전이 한창 인기리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머 저는 아직 못봤습니다만.... 제가 알고 있는 정도전은 지성과 의지력을 겸비한 혁명적 사상가, 그리고 말년에는 줄을 잘 못 선죄로 칼잡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는 머 그 정도의 인물인데요.... 좀 찾아보니 아주 좌파입니다. 그 시기에 토지개혁과 무상분배를 주장했을 정도이니까요. 여하간 정도전은 개혁가이었으며
무엇보다 한양의 도시계획을 주도한 건축가입니다. 경복궁도 이 양반 작품이구요, 여기 이 종묘도 정도전의 작품입니다.
종묘는 왕의 사당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왕에게 제사 모시는 곳입니다. '전하~~ 종묘사직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의 그 종묘이고, '신주 단지 모시듯'의 그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 유교라는 것이 중국에서 건너오고 그래서 왕에게 제사를 모시는 풍습도 당연하게 중국에서 유래되었지만, 지금의 중국은 마오에 의해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습니다. 물론 공자의 그 유교도 타파해야 될 구습으로 여겨졌구요. 그래서 중국에서 왕에게 제사를 지내던 풍습도 다 없어지고 그 공간인 자금성 앞의 태묘는 노동인민문화궁으로 바뀌어 완전히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공자의 나라인 우리나라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데요.... 장하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종묘의 배치도. 조선 왕들의 신위를 모시는 정전과 영녕전 뿐 아니라 고려 공민왕의 신당, 공신들의 사당인 공신당,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향대청, 제례음식을 준비는 종묘의 부엌 전사청, 종묘제례시에 음악을 연주하던 악공들이 연습하며 대기하던 악공청 등이 있다.
종묘는 원래 창경궁과 연결되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경성의 교통을 원활히 한다는 미명 아래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는 도로를 개설했다. 순종이 그것만큼은 안된다며 결사반대해 총독부도 어쩌지 못하다가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바로 공사에 들어가 완성시켜버렸다.
조선 25명의 왕의 위패가 정전과 영녕전에 나뉘어 모셔져 있다. 군으로 전락한 연산군과 광해군의 위패는 없다.
정도전이 처음 설계하고 만든 종묘의 정전은 왕이 죽고 모셔야 될 위패가 많아짐에 따라 계속 지어집니다.
정전으로 모자라 영녕전도 짓습니다. 정전은 왕이 죽을 때마다 한칸씩 늘어납니다. 계속 지어집니다. 무려 150여년간이나.... 그렇게 해서 완성됩니다. 임진왜란이 나자 선조는 위패만 챙겨 도망갑니다. 도망갔다가 다시 오니까 경복궁도 불타고 종묘도 불탔습니다. 그러면, 종묘는 왜구가 불태웠을까요? 아니면 왕만 도망가서 화난 우리 백성이 불태웠을까요????
1608년 종묘 중건. 가로 109미터 세로 69미터의 월대. 비어있으면서도 채워진 공간. 월대에는 거친 박석만이 아무렇게나
깔려 있습니다. 그 위에 배흘림 기둥에다 박공지붕만 얹었습니다. 아무런 장식도 치장도 없는, 그래서 오히려 더 경건한 공간으로 만듭니다. 101미터 19칸의 정전에는 왕의 신주 19위와 왕후의 신주 30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종묘건축의 부유하듯 장중하며 더해도 덜해도 완전한 채로 영원한, 관념과 실제가 공존하는 예혼(藝魂)의 공간을 어떻게 정확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위대한 작품일수록 정확하고 분석적인 진술을 거부한다. - 김개천. 건국민대 교수
동양의 파르테논, 정작 외국 건축가가 와서 가장 감명받는 우리 건축물. 이용재선생이 극찬한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만한 건축물.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으로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물입니다.
참고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판소리, 강릉단오제,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 영등굿, 처용무, 가곡, 대목장, 매사냥, 줄타기, 택껸, 한산모시짜기, 아리랑, 김장문화 아니 정녕 이런 것까지??? 등 총 16건이 무형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찌는 듯한 한 여름 땡낮에, 양복을 입고 혼자 종묘에 갔더랬습니다. 토요일은 자유관람이 되지만 평일에는 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1시간짜리 관람만 허락되었습니다. 사실 나는 건축물에 관심이 있는데, 해설하시는 분은 제사와 행사에 더 중점을 둬서 말씀하셔서 조금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박하면서 장중한 정전은 압권이었습니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월대에 아무렇지도 않게 깔려 있는 박석과, 그 박석위에 서서 보는 월대의 텅빈 공간은 아주 경건한 마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부다비의 그랜드 모스크에 버금가는, 그러나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작은 존재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건물이고 공간입니다.
4. 조선 마지막 중전, 그리고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서 황세손 이구까지 - 창덕궁 (1997)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 문화재청
창덕궁의 부용지와 주합루
창덕궁은 제1법궁인 경복궁의 보조궁궐로 지어졌으나 실제로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 궁궐로 쓰인 곳이며, 그래서 우리 건축물의 보물창고이기도 합니다. 정전인 인정전이 국보구요, 정문인 돈화문, 편전인 신정전과 희정당,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왕의 데이트 코스인 부용지의 정자인 부용정과 낙선재, 금천교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궁궐건축 뿐만 아니라 낙선재와 연경당과 같은 살림집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창덕궁입니다.
위의 그림은 창덕궁의 배치도입니다. 산을 옮기고 땅을 다져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속에 그냥 사뿐이 내려앉은 것 같은
그런 배치입니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궁궐배치인거죠.... 우리의 정서에 맞는 궁궐이고, 그래서 왕들도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했습니다. 아래 글은 문화재청이 설명한 창덕궁입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창덕궁 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 시설로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있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여기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이 여생을 보낸 낙선재를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부인이 숨을 거두고,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가 삶의 마지막을 보낸 곳, 그리고 영친왕과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장례식이 열린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조선왕조의 최후를 담담하게 맞이한,
궁궐로써 마지막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한 곳이 이 낙선재입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그리고 마지막 황세손 이구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 참담한 참담한 고종을 모시던 엄상궁은 1897년 44살의 늦은 나이에 은垠을 낳습니다.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인 영친왕입니다. 순종과 의친왕이 배다른 형입니다. 순종이 자식이 없자 황태자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1907년 순종의 즉위식이 거행됩니다. 그러나 정작 순종은 없습니다. 아버지 고종을 강제퇴위시킨 일본에 대해
순종이 무언의 시위를 한 겁니다. 일본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 뿔따구 납니다. 황태자인 영친왕을 강제로 일본으로
보냅니다. 볼모입니다. 생모인 엄상궁은 눈물바다가 됩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 때 나타납니다. 쨔쨘~~~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 자업자득으로 저세상으로 가고.... 1910년에 나라가 망합니다. 떠벌.....
일본으로 간 영친왕은 강제로 육군사관학교에 보내지고 그렇게 거의 가택연금 수준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1920년 마사코 여사와 강제 결혼. 종친회 난리가 납니다. 조선 황실의 황태자가 일본 여자와 결혼을???
다음해 아들 진 출생. 그러나 8개월만에 죽고.... 1930년에 일본 치요다구에 집을 짓습니다. 이듬해 아들 구玖가 태어납니다.
그렇게 살다가 일본 패망. 개명해서 마사코에서 이방자로 바뀐 여사의 아버지는 전범으로 구속, 재산을 몰수되고....
집을 팔고 호텔로 전전합니다. 이 시절 순종의 계비 윤씨부인은 순종이 죽자 홀로 낙선재에 들어가서 궁궐을 지킵니다.
영친왕의 외아들 이구는 1953년 미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방자 여사가 극구 말렸지만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아라' 라고 아버지는 적극 지원합니다. MIT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유명 건축회사에 입사합니다. 그는 이제 황세손이 아니라 건축가의 길을 걷습니다. 이 때가 인간 이구의 전성기였습니다. 1959년 미국 여성인 줄리아 머록여사와 결혼합니다. 머시라? 황세손이 미국여자와 결혼을??? 이씨 종친회 또 난리를 칩니다.
이승만은 나라를 몽땅 차지할 욕심으로 영친왕이 아예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합니다. 5대 궁궐도 모두 몰수합니다. 이런 ㅆ ㅂ ㅅ ㄲ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인심씁니다. 1963년 영친왕 전격 귀국. 한해 먼저 환국해서 병 치료 중이던 이복동생 덕혜옹주와 눈물의 상봉을 합니다. 아~~~ 이제 낙선재는 사람 사는 것 같습니다. 수복헌에는 마지막 중전 윤비, 낙선재는 이방자 여사, 수강재에는 덕혜옹주, 이듬해 황세손 이구도 귀국합니다. 가난했지만 단란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구는 서울대학교에 강의도 나갑니다. 왕족의 후예답게 귀티가 흐르고 행동 하나에도 품위가 있습니다. 건축가 김원이 은사였던 이구에 대해 쓴 짧은 글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심 조선의 마지막 왕족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 들어가 보시죠.....
http://blog.naver.com/leecorb?Redirect=Log&logNo=120115405346&from=postView
1966년 비워있던 궁궐을 홀로 지키셨던 조선 마지막 중전이 돌아가시고 1970년 영친왕도 낙선재에서 붕어하십니다. 조그만 사업을 하던 이구는 갖은 사기와 종친회의 괴롭힘 끝에 1977년 일본으로 도피합니다. 1982년 줄리아 여사와 이혼. 이젠 속이 시원하냐? 종친회 이 떠벌 넘들아!!! 1989년 덕혜옹주, 이방자여사, 시누이와 올케가 사이좋게 연이어 타계하시고.... 너무 힘드신 거죠. 낙선재는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황세손 이구는 2005년 일본 아카사카의 한 호텔에서, 누구 한 사람 지켜주는 이 없이 홀로, 참으로 고단했던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차가운 시신은 이제 낙선재로 돌아와 우리 왕족의 마지막 장례를 치릅니다.
1847년 건립된 ㅁ 자형태의 낙선재. 솟을대문의 현판은 장락문이다. 오래도록 즐겁게 사는 집의 문......
요동치는 우리 근현대사와 맞물려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인 일생을 보낸 조선 왕실들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어쩌면 그 역설적인 이름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듯 하다.
5. 조선의 부흥을 꿈꾸던 정조의 이상향 - 수원 화성 (1997)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 문화재청
얼마전에 역린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정순왕후와 정조의 아주 팽팽한 싸움이 주 이야기인데요.... 정조 졸라 멋있게 나옵니다. 팔굽혀펴기하는 정조.....ㅋㅋ 정순왕후로 나온 한지민도 그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쿠데타가 실패하고, 졸라 쪽팔림을 당한 정순왕후는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30년 동안 갈다가, 결국 정조가 죽고 난 뒤 멋지게 뒤집어 엎습니다. 독한년.... 그 때 정조가 입술 앙다물고 딱 처리를 했어야 했는데......
정조를 손 봐주려는 그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고 정조 당연히 눈 뒤집힙니다. 옛날에 아버지 사도세가를 뒤주에 가둬놓고 물도 안주고 그렇게 죽인 주범인 노론들 다 처 죽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깁니다. 융릉입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새로운 조선의 이상향의 도시를 꿈꿉니다. 제2의 한양을 만들고 다시 시작하겠다!! 라는 정조의 포부가 닮긴 곳, 수원 화성입니다.
화성 건설 추진위원회가 발족되고 마스터 플래너에 채제공, 수석 건축가 정약용을 임명합니다. 전국의 돌쌓는 기술자 총 집결. 연 70만 인원 동원. 성 둘레 5.7Km, 전체 42만평. 정조는 좀 특이한 주문을 합니다. "튼튼한 거는 기본이고, 아름답게 지으라..... 아름다움이 능히 적을 이길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튼튼하고도 아름다운 성, 수원 화성이 완공됩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 문화재청
화성의 행궁(임금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쉬어가던 처소)이다.
일제시대 때, 남낭헌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을 뜯어 가고 헐었다. 1994년부터 복원했다.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정조의 엄마인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는 이름으로 봉수당이라 지었다.
역린에서는 김성령이 정조 엄마로 나왔는데.... 한지민이한테 많이 밀렸다..... 정조는 역시 이산의 이서진이다.
늙어서 다시 오마..... 그래서 이름도 노래당이다. 그렇게 말년을 여기서 보내고 싶어 했던 정조는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49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뜬다. 정순왕후가 독을 탔다는 둥....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지금에 와서 정확한 사실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정조가 골초에 술도 말술이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한데.... 말 진짜 안듣는 신하들 데리고 일을 할려니 스트레스를 무지 받아서, 그리고 원래 말술에 골초라는 것이 더해지면서 일찍 세상을 뜬게 아닌가 하는게 일반적인 추측이다.
실제 정조는 왕들계의 엄친아였습니다. 일단 천재입니다. 읽으면 다 압니다. 책을 끼고 삽니다. 엄청나게 읽어 재낍니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공부벌레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무예도 출중했습니다. 활쏘기는 거의 김수녕급이라고 합니다. 역린에서 현빈이 엄청난 활 실력을 보여주는데, 실제도 그랬댑니다. 시서화도 뛰어나고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댑니다. 또한 조선 왕중에서 3대 이빨에 낄 정도로 말빨도 죽인다고 합니다. 세종의 그 언변과 학식에 태종의 불같은 성정이 합쳐진 거의 완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됩니다. 그 말빨부터, 말 안듣는 신하들, 출신성분에 대한 주위의 비하.... 그리고 결정적인 건 천도를 꿈꾸다 결국 실현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는 점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장안문의 모습.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가 내 눈을 의심했다.
그리곤 다시 자세히 보았다. 혹시나 뽀샵이 아닐까??? 이런!!!!!
수원성의 완전복원에는 1조 이상의 예산이 필요하고 시간도 무지 오래 걸린단다. 나라에서 돈을 엄한 데다 쓰니 돈이 없다.
정조의 릉인 건릉. 아버지 사도세자 옆에 누웠다. 사도세자의 릉인 융릉과 함께 융건릉이라 불린다.
수원화성박물관. 정림건축의 이후락씨가 설계했다. 공심돈을 공간화한 전망대에서 화성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화성 안에서 화성을 다시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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