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의 현손(玄孫)인 왕자지(王字之)는 자가 원장(元長)이며 처음 이름은 왕소중(王紹中)으로, 서리(胥吏)를 거쳐 벼슬에 올랐다.
누이의 남편인 왕국모(王國髦)가 이자의(李資義)를 죽일 때 왕자지가 궁궐 문을 지켰으므로, 그 공적으로 도교령(都校令)에 임명되었다. 숙종이 내시(內侍)로 불러들였으며, 다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임명하였다.
예종 때에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윤관(尹瓘)을 따라 여진(女眞)을 정벌하였는데, 여러 싸움에서 공로가 있었으니, 그 내용은 「윤관전(尹瓘傳)」에 실려 있다.
전중소감(殿中少監)으로 옮겼다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이부병부상서(吏兵部尙書)·추밀원사(樞密院使)를 역임하였다.
17년(1122)에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죽으니 나이가 쉰 일곱이었다. 시호를 장순(章順)이라 하였으며,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뒤에 간관이,
“옛날의 대신은 국가에 큰 공덕이 있은 다음에야 묘정에 배향될 수 있었습니다. 왕자지가 비록 전공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예종의 지우를 입은 것은 왕이 총애하는 근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위로는 임금을 바로잡은 적이 없었고, 아래로는 백성을 이롭게 한 적도 없으니, 제사의 의례(祀典)를 높이어 후대에 전례로 남길 일이 아니옵니다. 바라건대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마땅한 사람을 택하여 이를 바꾸도록 하소서.”
라고 건의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아들은 왕의(王毅)이다. 왕자지의 딸은 이자겸(李資謙)의 아들 이공의(李公儀)에게 시집갔는데, 이자겸이 패망하자 인척으로 연루되어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