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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6:1-14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쉬이 답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수학 문제처럼 정해진 공식이나 규칙에 따라 결론을 도출해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복잡함과 예측 불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때로는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처럼 보이다가도 고난이 찾아오고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릴 때가 있습니다. 이미 힘겨운 상황인데 더 큰 고통이 찾아와 좌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생은 불확실하며, 종잡을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 차 있어, 단 하나의 정의로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너는 인생이 무엇인지 모른다(1-4)
욥은 재산과 자녀, 건강 모두을 잃은 자로서 인생에 대해 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자신에게 어찌 이런 고난을 찾아왔는지, 하나님은 도대체 무얼 하고 계신 것인지,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어라 대답이라도 해주었으면 나으련만, 기도를 듣고는 계신 것인지 아무런 응답도 없으셨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고통으로 하루하루 보내던 욥은 결국 응어리진 마음을 터뜨렸습니다. 자기 생명을 지키는 울타리마저 사라지길 바랬고, 삶이 무의미하다 말했습니다. 욥은 의롭게 살았던 자신이 왜 이런 나락에 떨어졌는지 하나님께 따지고 물었습니다.
욥을 위로하려 그의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 소발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참한 처지를 본 친구들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자가 가진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주는 친구들로 욥은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거기서 그들의 만남이 끝났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과 세 친구 사이에 언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위로 하러 왔으나 거침없이 쏟아내는 욥의 원망에 친구들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의롭게 살아왔음에도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며 항변했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며, 하나님이 잘못하고 계신 것 아니냐며 따졌습니다. 친구들은 그런 욥에게 회개하라고, 굴복하라고 외쳤습니다. 이내 친구로서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을 내뱉기 시작했습니다.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심판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논리였습니다. 그들은 욥의 정죄했고, 그가 죄인임을 확신했습니다. 논쟁은 시간이 갈수록 격해졌고 감정은 치달아 갔으나 타협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말조차 꺼내지 않는 친구도 나타났습니다.
오가던 대화의 마지막으로 세 친구 중 빌닷이 끝내 굽히지 않는 욥을 꺾어 버리려, 격한 표현을 꺼내 들었습니다. "어디서, 위엄 있으시고 높으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따지고 드느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다. 어찌 자신을 의롭다. 깨끗하다 할 수 있느냐? 사람은 구더기와 벌레 같은 존재일 뿐이다." 빌닷은 하나님 앞에 사람은 초라하고 보잘 것 없기에, 그저 경외와 복종하는 것만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한마디로, "욥아, 입 닫아라. 하나님 앞에 원망, 불평하지 말아라!"는 말입니다. 욥에게는 원망할 자격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이에 욥은 조소 섞인 비웃음으로 답했습니다.
(1-4)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이를 원어로 보면 반어적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네가 힘 없는 자를 잘 도와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구원하여 주고 있구나? 지혜 없는 자를 참으로 잘 가르치고 있구나? 그런데 대체 누구한테 말하고 있는거니? 무슨 근거로 말하는거냐?" 여기서 힘 없는 자와 기력 없는 팔은 고난으로 무기력해진 욥을 가리키며, 지혜 없는 자란 표현은 욥이 지혜없다는 것이 아니라, 빌닷의 무지를 비웃는 반어법입니다. 또한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에서 정신은 '영감(נְשָׁמָה)'이란 뜻입니다. "누구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런 말을 하는 거냐?"란 질문입니다. 빌닷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아 말한다고 하지만 욥이 볼 때 그것은 주관적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은 빌닷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못합니다. 빌닷 본인은 큰 지혜라고 말하고, 힘 없고 고통과 좌절 속에 있는 자를 도와주고자 구원하고자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고 와닿지도 않으며, 무익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지금 내 상황을 봐라!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떠드는 거냐?" 욥은 빌닷이 인생에 대해서 하나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현실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욥은 그에게 하나님을 인생 속에서 두고 이야기 해보자는 겁니다.
나도 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5-13)
욥은 자신이 빌닷보다 훨씬 더 하나님에 대해 풍성히 안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해 더 세세히 서술합니다.
(5-6)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빌닷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하늘에 관한 것만 묘사했지만, 욥은 그 통치를 땅까지 확대시킵니다. 땅 밑에 있는 죽은 자들도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두려워 떤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땅 아래 바다가 있고, 그 바다 아래에 지하 세계, 스올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그곳에 내려간다고 믿었습니다(7:9 ; 삼상 2:6 ; 왕상 2:6 ; 시 55:15). '물에서 사는 것'이 떤다고 했는데, '물에 사는 것'은 물고기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혼돈의 세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이어서 욥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언급합니다.
(7)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하나님은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셨습니다. 북쪽(צָפוֹן)은 북쪽 하늘, 혹은 신이 거주하는 산으로 해석이 됩니다(참고, 시 48:2-3; 사 14:13-14). 저는 지리적인 의미보다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거처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앞 5-6절에서 가장 낮은 심연인 지하 세계에 관해 이야기했으니, 이번에는 가장 높은 하늘 세계를 이야기를 해야 대조가 부각되고,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지으시고, 디자인하셨습니다.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에서 '허공(בֹּ֫הוּ)'은 창세기 1:2의 '공허(בֹּ֫הוּ)'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여기서는 공허한 곳에 북쪽 곧 하나님의 나라를 펼쳤습니다.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단다란 표현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말합니다.
이번엔 욥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을 뿐 아니라 질서를 부여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8)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당시 사람들은 구름 속에 물을 담는 주머니가 있고, 그것이 열릴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믿었습니다. 가죽통에 물을 담고 다니면 물의 무게나 외부요인으로 인해 찢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름들은 결코 찢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자연의 질서를 섭리하시며, 실수 없이 온 세상을 권능으로 보전하고 계심을 말합니다.
이 고백이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시간을 겪고 있는 욥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가 어떤 심정으로 이 말을 했는지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주머니가 찢어진 것은 아닌가? 무엇인가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그 순간에도 욥은 하나님에 대해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이어서 세상의 창조와 질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9)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보름달은 원어로 보면 '왕좌. 보좌(כִּסֵּא)'입니다. 하나님의 설계도에 따르면 구름은 보름달의 밝은 빛을 감추기도 합니다. 이것을 원어의 뜻과 신학적으로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행사를 일부만 인식할 수 있게 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블랙모어(R. 블랙모어 경)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도 찬란하여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그의 보좌의 영광이 우리 시야를 압박하지 않도록, 그 현란한 힘을 제어하기 위해, 그는 흑암의 베일을 쳐놓으셨고, 그 사이에 구름을 펼치셨도다."
하나님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심은 수면과 빛과 어둠의 경계에도 나타납니다.
(10)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수면에 경계를 그으셨다는 것은 물의 한계를 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신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수평선을 빛과 어둠의 경계로 여겼고, 해가 뜨고 질 때 수평선에 있는 문을 통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낮과 밤의 규칙적 진행보다 창조에 관해 설명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만드셨고(창 1:2-3), 성경은 하나님을 빛과 어둠의 창조주(사 45:7)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창조자이시며, 질서를 세우시는 분으로 드러냅니다.
다음으로, 욥은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에 대해서 말합니다.
(11)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당시 사람들은 높은 산들이 하늘의 궁창을 기둥처럼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분노, 책망으로 꾸짖으시면 천둥이나 태풍, 바람이나 지진이 나타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게 됩니다. 사람이 보기에 경이롭고 장엄해 보이는 높은 산조차도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2)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하나님은 날뛰는 거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십니다. 바다와 라합은 혼돈의 세력으로 보입니다. 라합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하고 악한 자 또는 바다 괴물(사 51:9; 시 89:10; 욥 9:13), 애굽으로 해석됩니다(시 87:4; 사 30:7). 하나님은 공허와 혼돈 속에 질서를 만드시고, 지혜로 대적자를 물리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도 하셨습니다.
(13)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셨다는 표현에 대한 해석도 다양합니다. 어떤 이는 하늘을 장식하는 은하수나 특별한 성좌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입김'은 원어로 보면 '영, 바람, 숨결'(רוּחַ)이란 뜻이고 '맑게 하시고'는 '아름다움, 청명함(שִׁפְרָה)'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석하면 먼저, "하나님은 그의 숨결로 하늘을 아름답게 하시고 장식하셨다"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밝게 빛나는 별들을 만들어 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그의 바람으로 하늘의 구름들을 사라지게 하여 깨끗하게 하셨다”입니다. 저는 첫 번째 해석이 마음에 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단장하셨습니다. 밤에는 별들로 총총히 수놓고, 낮에는 햇빛으로 그것들을 색칠하시는 모습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아름다움을 깨뜨린 날렵한 뱀을 그의 손으로 물리치십니다. 날렵한 뱀은 앞에서 언급된 라합의 별명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바다 괴물인 리워야단(사 27:1; 욥 3:8; 41:1)이나 마귀(계 12:9)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 정체를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러한 대적자들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 창조와 다스림이란 큰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것은 그저 그가 행하시는 일의 일부분일 뿐이라 합니다.
모순과 헤아릴 수 없음 속에서(14)
(14)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사람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분뿐이라는 겁니다. 속삭이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작은 소리조차도 듣기 어려워 하는데, 우렛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유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돌아보게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감히 측량할 수 없으며 그의 본질과 능력은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하나님을 많이 이해했다고 자부하더라도 여전히 미완성이며 불완전하고,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어찌보면 욥의 논리도 빌닷의 주장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빌닷보다 좀 더 넓은 세계관을 그렸다는 정도로 비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이 도달한 결론은 다릅니다. 그는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하심과 무한하심 앞에서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그의 길들의 길을 보라!" 그는 자신의 고난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 하나님 앞에, 이해할 수 없음에도 끊임없이 자기 인생을 하나님으로 해석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장면을 욥기 38장을 통해 봅니다. 하나님은 폭풍 속에서 임하셨고, 욥은 그 속삭이심을 눈으로 목격했고, 하나님의 현현 앞에 전율하고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다 이해되지 않아도 다 알 수 없어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생각해보아도 그렇습니다. 은혜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할 때에야 비로소 그 깊이를 알게 됩니다. 아무리 입으로 떠들고, 외쳐도 하나님께 내어 맡기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분께 나아간 적이 있었습니까? 계산되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었기에 나아갔습니다. 믿었기에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머리로만 이해하려 하고, 그분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기를 주저합니다. 익숙함과 현실적인 안주, 확실히 손에 잡히는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단순히 지식의 파편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고 경험하는 하나님이 있는가?”
사람들은 종종 측량할 수 없는 은혜 앞에서 복잡한 마음을 품습니다.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답을 찾으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모순과 알 수 없음에 부딪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즉각 해결하시거나, 명확한 답을 주시지 않을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더욱 사로잡히곤 합니다. “하나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왜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시지 않을까? 내가 아는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 맞는가?” 이런 질문과 탄식은 고통 속 몸부림이지만 이는 성도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여정의 발판이 됩니다. 그의 인도하심은 때로 우리의 기대와 다르지만 그 길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어쩌면 이런 결론에 도달했을지 모릅니다. "인생에 명확한 답은 없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답을 찾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거는 몸부림에 있습니다. 모순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문제를 끌어안고 버티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걷는 길입니다. 알 수 없는 그때에, 헤아릴 수 없는 일하심을 보는 것, 그것이 우리의 탄식이요. 신앙 고백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창문을 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과 삶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가장 불행한 시간에도 변함없이 하나님께 인생을 걸 수 있기 원합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목표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주머니에 든 것이 별로 없어도 한결 같이 주를 바라보며, 인생의 여정을 마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욥은 의인이었으나 고난을 마주했고, 주님 앞에 탄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2. 욥은 모순과 이해할 수 없음 가운데 하나님께 토로했습니다. 우리는 인생 속에 하나님께 얼마나 의뢰하나요? 우리 심령 가운데 하나님이 어느 정도인지 차지하는지 적어봅시다.
3. 욥은 가장 불행한 시간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때는 언제입니까?
4. 욥은 논리 아닌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고 만났습니다. 이론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 아닌 우리 인생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적어봅시다.
(작성: 김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