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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태안 75코스 제2부
용주사-삭선리생태공원-산후방조제-
새발간석지들-초가지마을-감절마을-
어은2리마을회관-어은리·내도리 제방
20240124
1.물고기가 뛰놀고 철새 떼 날아가는 가로림만 바다
두루누비에서 서해랑길 75코스의 개요를 '가로림만 해안에 인접한 금굴산', '완만한 숲길을 지나 농촌 주변 경작지와 저수지를 지나는 코스'라 소개하고, 관광포인트는 '예전 이곳에서 금을 채굴하였다는 금굴산', '강물이 바닷가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방조제로 쌓아 막아 만든 '시우치 저수지'를 꼽고 있다. 출발지는 태안군 원북면 청산리 청산리나루터, 도착지는 서산시 팔봉면 호리 구도항이며, 거리 20.8km, 소요시간 7시간, 난도 보통이라고 안내한다. 서해랑길 태안 75코스의 개요와 관광포인트가 너무 허술하다. 20km가 넘는 가로림만 해안 둘레를 돌아가는 탐방길을 이렇게 무성의하게 소개해도 될까? 자신의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 국토를 사랑하는 마음의 부족에서 이런 안이한 태도가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75코스 탐방 체험을 3부로 나누어 추억한다.
제2부 : 서해랑길 75코스는 가로림만 최남단을 한 바퀴 돌아가는 탐방길이다. 태안군 원북면 청산리 청산나루터 언덕에서 출발하여, 태안읍 삭선리, 산후리, 어은리, 내도리 지역의 해안을 거쳐 서산시 팔봉면으로 넘어가 덕송리 해안을 돌아서 팔봉면 호리 구도항에서 마치게 된다. 가로림만을 호리병 또는 조롱박에 비유한다면 호리병과 조롱박의 맨 아래쪽 동그란 옆 부분을 타고 내려가 바닥을 돌아서 맞은편 동그란 옆 부분으로 올라가는 과정이 서해랑길 75코스 전체 탐방길이라고 할 수 있다. 길손은 현재 태안읍 삭선리 금골산 용주사 입구로 들어섰다.
금골산(金骨山) 용주사(龍珠寺)는 대한불교 총화종(大韓佛敎總和宗) 소속이다. 총화종이 무엇일까? 대한불교 총화종(大韓佛敎總和宗)은 1960년대 불교 분쟁 때 최득연(崔得淵) 스님이 1969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창종하였으며 원효 사상계에 속한 한국 불교의 한 종파라고 한다. 금골산 용주사 입구에 일주문은 없고 석조 사자상 한 쌍과 석조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용주사라는 이름은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를 떠올린다. 화성의 용주사는 조선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왕실원찰이다. 정조는왕이 되지 못하고 죽어 구천을 떠돌던 아버지가 비로소 한을 풀었다고 생각하고 절 이름을 임금의 상징인 용(龍)에 구슬 주(珠)를 써서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뜻을 지닌 용주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금골산(金骨山) 용주사(龍珠寺)는 창건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말엽에 금굴사로 창건되었다고 추정하며 1950년 6.25 전쟁 때 전소되었다고 한다. 그 뒤 '복성암(福成庵)'으로 불사(佛事)를 시작하여 이후 가로림만 바닷물 속에 달빛이 비추는 모습을 보고 암자명을 '수월암(水月庵)'으로 바꾸었다가, 현재의 주지스님이 1971년 용주사(龍珠寺)라고 개명하고 대대적으로 확장하였다고 한다.
용주사 경내 마당에 두 개의 탑이 세워져 있고, 마당가에 한겨울에도 푸르른 넓은 나뭇잎들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파란 겨울 하늘에 솟아 있다. 무슨 나무일까? 참나무과에 속하는 상록활엽교목 '가시나무'였다. '가시나무'라고 하니 가시가 달린 나무인 줄 알지만 가시나무는 가시가 없고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과이다. 참나무 무리에는 온대지방에서 자라는 상수리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낙엽참나무와 난대에서부터 아열대에 걸쳐 자라는 상록참나무가 있는데, 여러 종(種)의 상록참나무를 대표하는 나무가 바로 가시나무라고 한다. 가시나무의 이름은 '가서목(哥舒木)'에서 유래했을 것이라 보는데, 제주도 방언 '가시'는 도토리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 지역에서 자생하는 가시나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도 한다.(박상진의 <우리나무의 세계> 참조)
용주사 마당가의 그윽한 가시나무와 그와 다른 상록활엽수들을 살피며 석축 위의 대웅전과 요사채 아래를 통과한다. 종교가 없고, 신앙심도 없는 길손은 그러그러한 절이려니 생각하며 대웅전에 올라가지 않고 용주사 경내를 벗어나 금골산 자락의 숲길로 들어섰다. 지금 생각하니 대웅전 앞으로 올라가 가로림만을 조망하지 못한 게 아쉽다. 덤벙덤벙 지나치는 길손의 신중하지 못한 판단력을 또 후회하게 된다. 금골산 자락길의 골짜기를 건너 앞선 일행을 좇아 숲길을 뛰듯이 따라갔다. 허겁지겁 습지 뎈길을 통과하여 순식간에 금골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삭선리생태공원에 도착하여 한숨을 돌렸다. 생태공원에는 독수리 모형물을 설치한 놀이시설과 야외무대 등이 조성되어 있다. 생태공원 옆으로는 가로림만으로 유입되는 삭선천이 흐른다. 그런데 삭석천은 가로림만 해안을 막은 제방에 의해 갇혀 있다.
가로림만은 태안읍 삭선리와 산후리 사이로 깊이 파고 들어 넓은 간석지를 형성하였는데 현재는 삭선리와 산후리를 잇는 제방이 축조되어 있어서 제방 안쪽에 갈대습지와 넓은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다. 산후제방에서 가로림만을 조망하면 아침에 걸어온 가로림만 북쪽의 원북면 청산리 해안과 나루터길, 이적산 능선이 옛 친구을 재회하는 것처럼 반갑다. 처음 탐방한 길이지만 단순명료한 탐방길이어서 눈을 감고도 그 길을 그려볼 수 있다. 아랫말, 산지말, 이적말, 윗말, 시우치말, 청룡부리, 시우치저수지, 반계천, 이적산, 이교산, 이화산, 보타락가사, 갈두천(풍천), 선돌바위 등의 지명들이 유유한 강물처럼 흘러간다. 저 탐방로를 걷듯이 인생을 살아왔고, 미지의 탐방로를 따라걷다가 사라질 것이다.
삭선천 둑방길에서 백화산과 그 자락의 삭선리 진벌마을과 신동아아파트, 해창마을이 가늠된다. 허겁지겁 걸으며 백화산인 줄도 모르고 백화산을 촬영하지 못하였다. 탐방한 뒤에야, 아, 그곳이었구나, 백화산 자락의 진벌이 왜 중요한 곳이며 태안읍의 진벌로 도로명이 태안의 자존심을 드러내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안내판에 적힌 삭선천은 무우내, 무내, 머내라고 불리며 비가 내리지 않아 가물어도 내가 마르지 않고 항상 물이 흘러서 ‘무우내’라 하여 무우천(無雨川)이라 적는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산후방조제가 있는 산후리는 백화산 뒤에 있는 지역이어서 산뒤의 산후리(山後里)가 되는 것도 알았다. 태안의 진산 백화산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코 앞을 지나가며 백화산을 확인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백화산, 미안하구나. 너에게 꼭 다시 가련다.
산후제방 안쪽 갈대습지 앞 농로를 따라 간척농지를 돌아간다. 간척농지 농로에서 뒤돌아서서 산후제방과 금굴산(금골산)을 바라보면 금굴산의 자태가 배가 항해하는 모양처럼 보인다. 그래서 금굴산을 행주산(行舟山)이라고도 이른다고 한다. 높지 않은 금굴산에 올라서 조망하는 가로림만 풍경은 가로림만이 가슴에 쏙 안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산후리 간척농지를 돌아서 전원주택단지 언덕을 넘으면 또다시 드넓은 간척농지가 펼쳐진다. 이 간척농지는 산후리와 어은리 사이의 가로림만을 막은 제방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간척농지를 돌아가는 골짜기를 세발골이라 이르는 것으로 보아 산후리 지역의 간척농지를 세발골들, 새발간석지들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새발간석지들 옆을 흐르는 내를 중말천이라 이르며 중말천은 후산리와 어은리의 경계를 이루는 것 같다. 중말천 둑방길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서해랑길은 중말천 둑방길을 따라 후산리 금암동마을 방향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길손은 둑방길을 따라 가로림만 해안의 제방으로 향하고 말았다.
새발간석지들을 휩쓰는 바람, 강풍의 칼날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이 칼날바람은 아침에 가로림만 북쪽 청산리 해안과 마산리 시우치저수지에서 마주한 바람의 추억을 되살렸다. 누가 누가 더 날선 칼날바람일까? 가로림만 청산리 바람과 후산리 바람이 서로 경쟁하듯 한겨울 가로림만 날선 바람이 얼굴을 할퀸다. 새발간석지들의 농작물은 가로림만의 거친 해풍을 견디며 자라난다. 가로림만 해안 농지의 겨울 마늘밭에 마늘잎들이 파릇파릇하다. 마늘의 푸른 잎들이 애처로워 보인다. "애처롭다고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각자의 감각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요. 애처로워 보이기도, 희망차 보이기도, 무덤덤해 보이기도, 환희로워 보이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정작 각자가 감각하는 대상의 실체는 그런 감각과 별개로 상황 자체를 수용하여 견디며 즐기는것이겠지요. 나는 지금 매운 겨울바람을 수용하여 내 알뿌리를 알차게 키우고 있답니다." 겨울바람 속 마늘밭 푸르른 잎들이 바람의 언어로 들려준다.
중말천을 건너 어은리 초가지마을로 올라간다. 날선 칼날바람은 드러난 피부를 끊임없이 할퀸다. 이 바람이 어디서 자는가? 점심 먹을 때가 되었는데 바람이 자는 곳을 찾아야 한다. 초가지마을로 올라갔다. 초가지길을 따라 올라오다가 만난 마을의 첫집, 집 앞 양지바른 마당에 볕이 따스하다. 바람은 들지 않는다. 그 마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안주인이신 할머니께서 나오셔서 집으로 들어와 식사하라고 배려해 주신다. 경주 이씨 이순애님, 마음이 고와서 얼굴 피부도 고우시다. 길 위에서 아름다운 마음을 만나 감동하고 세상의 어둠을 씻어낸 듯 가슴이 환해진다. 초가지마을은 예전에 최씨 집성촌이어서 최가지(崔哥址)마을로 불리다가 현재는 초가지로 소리가 변화했다고 한다. 초가지마을 언덕의 묘지의 묘비를 살펴 보니 전주 최씨 선영이었다. 최가지(崔哥址)마을임을 증거한다.
초가지마을의 언덕을 넘어 어은2리 감절마을로 내려갔다. ‘감절’이라는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감절마을이라 불린다고 한다. 감절마을 양지바른 들을 품은 폐농가가 쓸쓸하게 햇볕을 받고 있다. 왜 폐가가 되었을까? 농촌 인구의 감소, 성공한 자식을 따라 도시로의 이주, 아니면 다른 곡절이 있을 것이다. 지상의 평화로운 농가가 사라지는 아픔이 잠시 길손을 흔들었다. 나 또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지선도로 진벌로 감절마을 버스정류소에서, 지선 진벌로가 간선도로 진벌로에서 갈라져 나온 곳을 뒤돌아본다. 아, 저곳이다. 산후1리의 금암동마을과 진벌로의 중말천교가 가늠된다. 방금 전 새발간석지들 칼날바람을 맞선 중말천 둑방길을 따라 올라오면 중말천교 입구로 올라오는 것이다. 이제 위치 감각이 좀더 확연해진다. 간선도로 진벌로로 나갔다. 진벌로 도로명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진벌로는 태안 동학농민군이 진을 쳤다는 진벌(진평陣坪)에서 유래한 도로명 같다. 진벌(진평陣坪)은 진뻘이라고도 불리며 왜구의 침입을 막아낸 가로림만 바닷가였다고 한다. 현재 그곳은 어디일까? 태안의 진산 백화산 자락 태안신동아아파트가 있는 어름으로 태안읍 삭선리(朔善里) 7리 진벌마을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진벌로는 원이로 무내교차로에서 태안신동아아파트 어름의 진벌골 진벌마을 앞을 거쳐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솔감천 어송교까지 이어지는 도로명이라고 한다. 진벌로를 따라 어은천 방향으로 이어간다. 진벌로 도로명에서 태안읍의 자존심을 읽는다. 역사의 영광과 상처가 진벌로 도로명에 나부낀다.
가로림만 산후제방에서 가로림만과 이별한 뒤 산후리-어은리 제방 가까이에서 가로림만과 만나는 듯 다시 헤어졌다. 가로림만과 재회하기 위해 내륙의 어은리 초가지마을, 감절마을, 어은2리 은동마을을 돌아나간다. 어은리는 고기잡을 漁, 숨을 隱 한자를 써서 어은리(漁隱里)라 적는다. 어은리 지명과 관련된 유래는 알 수 없다. 한자의 뜻만으로 지명을 풀어 보면 '고기잡으며 은거하는 삶을 누린다'는 뜻 같다. 자연에 은거하여 평화의 삶을 누리는 어은2리마을회관 옆에 쉼터정자가 있는데 정자의 현판은 '魚燕亭', 물고기 魚, 제비 燕, 한자를 쓴 어연정이다. 어은정(漁隱亭)일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물고기가 뛰놀고 제비가 날아다닌다는 '魚燕亭'이다. 시경(詩經)에 "솔개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네. 화락하고 편안한 군자가 어찌 사람을 사람답게 교화하지 않겠는가. 鳶飛戾天(연비려천) 魚躍於淵(어약어연) 豈弟君子(개제군자) 遐不作人(하부작인)" 구절이 있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놀고 제비는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어약연비(魚躍燕飛)'에서 '魚燕亭' 정자명을 적은 것일까?
어은2리마을회관과 '어연정(魚燕亭)' 앞을 거쳐 구릉지 언덕의 숲길을 통과한다. 가로림만 바다에 물고기가 뛰고 바다 위 하늘에 제비가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언덕길에서는 가로림만 남쪽 해안과 건너편 원북리 청산리 해안의 산줄기들이 언제든 가슴에 안겨들 듯한 자세다. 언덕의 솔숲을 거치면 드디어 동쪽에 서산시의 명품 팔봉산이 모습을 드러내고 태안읍 어은리-도내리 제방에 의해 형성된 드넓은 간척지들이 나타난다. 간척지들에는 태안 한우들의 밥 수많은 하얀 곤포사일리지들이 흩어져 있다.
어은리-도내리 가로림만 제방으로 올라갔다. 출발한 가로림만 청산리나루터와 도착할 가로림만 구도항이 마주보고 있다. 해안가 바닷물은 하얗게 얼어 있다. 바다에 쌍도가 떠있다. 두 개의 섬이 떨어져 한없는 그리움으로 언젠가 만날 때를 기다리는 자세이다. 쌍도 북쪽 태안군 원북면 청산나루터와 서산시 팔봉면 구도항 사이를 우럴목이라고 하는데, 이곳을 지날 때에는 바닷물이 소리가 우럴우럴 소리를 내서 이런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제방길에서 구도항 뒤쪽에 형제봉이 보이지만, 역시 명품은 팔봉산이다. 이때 철새 떼가 행렬을 이루어 가로림만 바다를 향해 흰구름 흐르는 파란 겨울하늘을 높이 날아간다. 팔봉산이 멀리서 이 철새 떼 행렬을 바라본다. 철새 떼는 가로림만 바다 위로 날아가더니 고도를 낮추어 바다 가까이로 날아간다. 바다에 물고기가 뛰노는가? 하늘에 제비 대신에 철새가 날고 있다. 이 풍경 속에서 길손은 화락하고 편안하다. 그런데 길손은 군자가 되지 못하여 사람을 교화할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의 즐거움 속에 빠져 가로림만의 겨울풍경에 도취할 뿐이다. 아름답다. 걸어갈 미지의 인생길도 이렇게 아름답기를 소원한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1.87km 중 17.1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25분 중 4시간 18분
대한불교총화종(大韓佛教總和宗) 금골산(金骨山) 용주사(龍珠寺)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라고 하나, 고려 말엽에 금굴사로 창건되었다고 추정하며 1950년 6.25 전쟁 때 전소되었다고 한다. 그 뒤 '복성암(福成庵)'으로 불사(佛事)를 시작하여 이후 가로림만 바닷물 속에 달빛이 비추는 모습을 보고 암자명을 '수월암(水月庵)'으로 바꾸었다가, 현재의 주지스님이 1971년 용주사(龍珠寺)라고 개명하고 대대적으로 확장하였다고 한다. 입구에 일주문은 없고 석조 사자상 한 쌍과 석조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에 2개의 탑, 왼쪽에 가시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정면의 건물이 대웅전과 요사채인 것 같다.
가시나무라고 하여 가시가 있는 나무라는 뜻이 아니다. 나뭇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가시나무란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정조 18년(1794)에 호남 위유사 서용보가 올린 글 중에 “······길고 곧은 나무는 반드시 쓸 만한 재목이고 가서목(哥舒木)은 더욱이 단단하고 질긴 좋은 재목으로서 군기(軍器)의 중요한 수요인데 유독 이 섬(완도)에서만 생산됩니다. 단단한 나무는 자라는 것이 매우 느려서 한 번 잘라버리고 나면 금세 쑥쑥 자라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더욱 애석하게 여기고 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죽나무나 상수리나무 같은 쓸모없는 재목들과 마찬가지로 땔나무가 되어버리니 앞으로는 각별히 금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목민심서》 권3 〈권농(勸農)〉에는 가사목(加斜木) 심기를 권장한 대목이 있고, 《물명고》에도 가서목을 ‘가셔목’으로 부른다고 했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도토리를 가시라 하며 나무는 가시목이라고 한다. 또 다른 옛 이름은 이년목(二年木)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보면 “가사목은 제주에서 나는데, 이년목이라 부른다”라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인들도 우리와 꼭 같은 발음으로 ‘가시(カシ)’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문화가 일본열도로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기를 쓰고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아무래도 가시나무만은 우리 이름이 그대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상록참나무는 가시나무를 비롯하여 붉가시나무, 종가시나무, 참가시나무, 개가시나무 및 일본에서 들여와 주로 정원수로 심는 졸가시나무 등 종류도 많고 생김새도 서로 비슷비슷하다. 이들은 잎의 모양으로 서로 구분할 수 있는데, 붉가시나무는 잎의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고, 종가시나무는 잎 길이의 2분의 1 이상에만 톱니가 있으며, 가시나무와 참가시나무 및 개가시나무는 잎 가장자리 모두에 톱니가 있다. 졸가시나무는 잎 끝이 둥그스름하다. - 우리나무의 세계, 박상진, 김영사
용주사 뜰을 거쳐 금골산 자락길을 따라오면 금골산 정상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 삭선리생태공원으로 내려간다.
삭선리생태공원으로 내려오면 독수리 모형물이 설치된 놀이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금골산 자락길을 따라 내려와 오른쪽 습지 뎈길로 나와 삭선리생태공원으로 들어왔다. 왼쪽 뒤에 야외무대가 있다.
왼쪽은 태안군환경관리센터 가는 길, 서해랑길은 오른쪽 산후방조제로 나간다.
태안읍 삭선리와 산후리 사이의 바다를 막은 후산방조제가, 왼쪽 뒤의 산후리와 어은리를 잇는 어은방조제로 이어진다.
환경체험학습장, 생태체험학습장, 생태공원, 해변산책로, 갈대습지, 암석관찰로 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삭선천이 가로림만 바다로 유입되는 곳에 방조제를 쌓고 배수갑문을 설치하였다. 중앙 뒤에 백화산이 보인다.
백화산白華山은 처음에는 산의 모양이 흰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 이 백화산은 서산시 팔봉면의 금광산金光山의 줄기가 태안의 도내리와 어은리로 뻗어내려 오소산烏巢山 : 一名 五率山을 이룩하고, 여기서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한 갈래는 동쪽의 상옥리와 인평리 사이로 뻗어내려 서우산犀牛山 : 一名 勿金山을 이루고 또 한 갈래는 남쪽의 상옥리로 뻗어내려 옥녀봉玉女峰이 되고, 여기서 곧게 서쪽으로 뻗어내려 흥주산興注山을 이룩하였는데, 이 흥주산이 태안읍사무소 뒤에서 백화산을 이루어 놓았음. 백화산은 태안의 진산인데, 산 전체가 바위로 되어 있으나, 한 때는 산림이 무성하여 특히 거목이 밀생하고 있었음. 그러나 광복 이후에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도벌盜伐과 남벌 등으로 인하여 오늘의 암석만이 남아 있는 글자 그대로의 백화산白華山이 되었음. 이 백화산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각 읍면으로 뻗어갔는데, 그 중 한 줄기는 한티재大峙를 이루고 평천리에서 멈춘 채 밖으로 읍邑을 감싸고 있으며, 또 한 갈래는 낙조봉落照峰을 이루고,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동쪽으로 뻗어가서 중봉재中峰峙를 이루고 여우내如意川에서 멈춘 채 안으로 읍을 감싸고 있음. 또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내려 마레기재馬力峙를 이룩하고, 여기서 또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남쪽에서 남문리 아맹이재衙望峙를 형성하면서 곧바로 남면을 거쳐 안면도로 뻗어내렸음. 그리고 다른 한 갈래는 반곡리로 뻗어내려 태안읍을 감싸고 있으며, 또 앞의 마레기재에서 갈라진 한 줄기는 삭선리에서 금골산金骨山이 되었는데, 여기서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하나는 서쪽의 근흥면으로, 다른 한 줄기는 북쪽의 이원면으로 뻗어갔음.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있어서 동쪽으로 서산군 북주산北主山, 남쪽으로는 도비산봉수都飛山烽燧에 응하였음. 산이 흰 돌로 되어 있고, 꼭대기에 돌로 쌓은 백화산성이 있는데 둘레는 2,042자, 높이는 10자가 됨.(태안군지)
건너편은 태안군 원북면 청산리 가로림만 해안, 중앙 뒤에 청산나루터가 가늠된다. 아침에 저 해안길을 걸었다.
이 제방길을 해변산책로라고 명명하고 앞에 보이는 구릉 아래에 생태학습장, 그 왼쪽에 암석관찰로가 있으며, 제방 안쪽에는 갈대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맨 왼쪽은 태안읍 산후리와 어은리 사이의 가로림만 바다를 막은 제방이다.
태안읍 삭선리 1120 지역, 75코스 시점 9.9km, 종점 10.9km 지점이다. 삭선천 건너편에 삭선리생태공원이 보인다.
삭선천에 설치한 산후방조제 배수갑문을 안내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삭선천 건너편에 삭선리생태공원이 보인다. 삭선천은 무우내(무내, 머내)와 무우천(無雨川)이라고도 이르는 것 같다.
머내는 무내, 무우내. 백화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서 해창을 거쳐 가로림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내. 비가 내리지 않아 가물어도 내가 마르지 않고 항상 물이 흘러서 무우無雨라 이름 붙이게 됨. ‘무우내’라 하여 무우천無雨川으로 적기도 함.(태안군지)
산후제방에서 금골산 곶부리 언덕에 자리한 태안군환경관리센터 건물을 바라본다. 오른쪽 건너편에 이적산이 보인다.
가로림만 최남단 태안군 태안읍 산후리 산후방조제에서 건너편 태안군 원북면 청산리 해안을 다시 바라본다. 청산나루터에서 나루터길을 따라 걸은 탐방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루터길 왼쪽 뒤에 이적산이 확인된다.
둑방길 오른쪽은 태안읍 삭선리, 그 왼쪽은 태안읍 산후리 지역이다. 왼쪽 맨 뒤의 아파트는 삭선리 신동아아파트이다.
산후리山後里는 산뒤, 산후. 본래 태안군 동일면의 관할지역으로서 백화산의 뒤편에 형성된 동네이므로 산뒤·산후라 하였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금암리錦岩里·오곡리烏谷里·오룡리五龍里·해창리海倉里·우정리羽坪里의 각 일부를 산후리에 합쳐서 그대로 산후리라 하여 서산군 태안면에 편입시켰다. 1973년 7월 1일부로 태안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산후리는 다시 태안읍에 편입되었는데, 1989년 1월 1일 태안군이 복군됨으로써 산후리는 다시 태안군에 편입되었다.(태안군지)
산후방조제 제방이 왼쪽 삭선리와 오른쪽 산후리로 이어지고 배수갑문이 설치되어 있다.
왼쪽 뒤에 삭선7리 태안신동아아파트 지역에 진벌골과 진벌마을이 있으며, 그곳에서 진벌로가 시작된다. 삭선천 오른편에 보이는 마을 삭선3리 해창마을이라 가늠한다. 서해랑길은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간척농지를 가로지른다.
삭선리朔善里는 본래 태안군 동일면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때에 해창리海倉里·우평리羽坪里의 일부를 삭선리에 합쳐서 그대로 삭선리라 하여 서산군 태안면에 편입시켰다. 그 뒤 1973년 7월 1일부로 태안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삭선리는 다시 태안읍의 관할 지역이 되어 내려오다 1989년 1월 1일 태안군이 복군됨으로써 삭선리는 다시 태안군의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었다.(태안군지)
○진벌마을은 삭선 동쪽 벌판에 있는 마을. 옛날 이곳에 동학군이 진을 쳤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 ○창터는 해창 동쪽에 있는 옛 해창의 터로서 창고의 터라 하여 유래된 이름. 조선시대에 이곳에 창고를 두고 이 지방에서 받는 조세를 저장했다가 배로 서울에 운반하였음. ○해창海倉마을은 금골산 남쪽 기슭의 마을로서 옛날에 세곡을 저장하던 해창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태안군지)
농로를 따라 간척농지를 가로지르며 산후제방과 그 안쪽의 갈대습지를 바라본다. 제방 너머 중앙에 가로림만 해안의 이적산과 이교산 능선, 그 왼쪽에 이화산 능선이 멋지게 들어온다.
오른쪽에 산후제방과 갈대습지, 정면에 금골산이 있다. 농로를 따라 간척농지를 가로질러오고 있다.
간척농지를 가로지른 뒤 농지 동쪽 끝의 농로를 따라오고 있다. 태안군환경관리센터 건물이 중앙에 보이고 그 왼쪽 뒤 흰 연기 나는 곳은 쓰레기소각장인것 같다. 전신주 뒤에 원북면 마산리 이화산 능선이 보인다.
간척농지 동쪽 끝에서 걸어온 길과 행주산이라고도 불리는 금골산을 조망한다. "금골산은 행주산行舟山이라고도 한다. 바다에 접해 있는데, 멀리 해상에서 바라보았을 때 마치 배가 항해하는 것같이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태안군지)
산후리 간척농지를 왼쪽으로 돌아 언덕길을 오르면 진벌로 211 지역 언덕에 전원주택단지가 있다.
전원주택단지 언덕을 넘어 내려오면 산후리와 어은리를 잇는 제방 안쪽에 새발간석지들이 펼쳐져 있다. 건너편 가로림만 원북면 청산리 해안에 이적산과 이교산 능선이 멋지게 보인다.
세발골 농로에서 새발간석지들과 제방, 가로림만 건너편 이적산과 이교산 능선, 왼쪽의 이화산 능선을 다시 바라본다.
서해랑길 탐방로를 잘못 들어서 새발간석지들 중말천 둑방길을 따라 가로림만 제방 방향으로 가고 있다. 왼쪽 뒤에 금골산, 중앙 아래에 태안군환경관리센터와 쓰레기소각장, 맨 오른쪽 뒤에 이적산과 이교산 능선, 그 왼쪽에 이화산 능선이 보인다.
앞 전신주가 있는 세발골 갈림길에서 중말천 둑방길 위쪽으로 가야 하는데 이 길을 따라 가로림만 방향으로 이어가다가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고 뒤돌아서 올라간다. 오른쪽 골짜기를 세발골이라 이르는 듯.
왼쪽 위의 전원주택단지 언덕을 넘어 왼쪽 세발골 농로를 따라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둑방길을 따라 가로림만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갈림길로 되돌아간다. 새발간석지들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 뒤에 금골산, 그 오른쪽 아래에 쓰레기소각장이 보인다.
중말천 둑방길을 따라가다가 앞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 왼쪽 어은리 초가지마을로 이어간다. 오른쪽은 금환골, 앞에 보이는 마을은 산후리 금암동마을일 것이라 가늠한다. 중말천 둑방길을 계속 따라가면 진벌로 중말천교 입구에 이른다.
금암동錦岩洞마을은 냇개의 동북쪽 어은리와 경계를 이루는 마을. 이 마을에 들어서면 오른쪽 산기슭 인가 앞에 큰 바위가 있음. 이 바위는 그 아래로 내려오면 한 길 넘어 다시 논을 거쳐 맞은편의 어은리까지 이어져 있으며, 그 모양이 매우 아름다운 비단 같다고 하여 비단바위(금암錦岩)로 부르게 되었음.(태안군지)
중말천 둑방길에서 건너편 태안읍 어은리 초가지마을을 올려본다. 서해랑길은 초가지마을 위 언덕을 오른쪽으로 넘어간다.
태안읍 어은리 863 지역, 75코스 시점 11.6km, 종점 9.2km 지점이다. 중말천 다리를 건너 초가지마을로 올라간다.
초가지마을의 초가지길 85 집 앞의 볕이 좋다. 여주인님이 집 안의 마루에서 점심을 먹도록 배려해 주셨다.
주홍색 지붕 초가지길 85 집의 마루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여 걸어온 길을 내려본다. 건너편은 산후리 금환골, 그 앞 중말천 다리를 건너 초가지길을 따라 어은리 초가지마을로 올라왔다.
초가지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 언덕에서 오른쪽으로 꺾어간다.
초가지길 언덕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언덕을 넘어 내려간다.
초가지길 언덕에서 가로림만 북쪽 이적산과 그 왼쪽 능선의 이교산, 그리고 왼쪽 맨 뒤의 이화산을 조망한다.
초가지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간다. 오른쪽의 묘지 언덕에서 초가지마을을 조망하고 묘지를 확인한다.
왼쪽 건너편 산후리 금환골 앞의 중말천 다리를 건너 초가지마을로 올라왔다. 초가지마을은 최가지마을이라고도 한다. "최가지崔哥址마을은 산후리 금암동의 건너편 삼산목장 밑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부터 최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 ‘초가지’라 부르기도 함."(태안군지)
최가지崔哥址마을임을 확인시켜 주는 전주 최씨 선산에 최익호씨와 배우자 김해 김씨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전주 최씨 선산 묘지에서 초가지마을을 내려본다. 점심을 먹었던 집은 언덕 아래 첫집, 왼쪽 맨 뒤에 전원주택단지가 보인다.
언덕을 넘어 초가지길을 따라 감절마을로 내려간다. 왼쪽은 태안읍 어은리 감절마을, 중앙 뒤의 마을은 태안읍 산후리 금암동마을, 그 뒤의 산줄기는 백화산 능선일 것이다. "감절마을은 어은동 남쪽, 산후리의 금암동과 인접해 있는 마을로서 ‘감절’이라는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이름."(태안군지)
왼쪽 감절마을 폐농가 앞을 거쳐간다. 중앙 뒤의 산줄기는 백화산 능선, 중앙 앞의 마을은 산후리 금암동마을일 것이다.
초가지길을 따라 태안읍 어은리 감절마을 폐농가 앞을 거쳐간다.
초가지길에서 지선 진벌로의 감절마을 버스정류소로 나가 왼쪽으로 꺾어 진벌로 지선을 따라간다.
지선 진벌로의 어은2리 감절 버스정류소 앞에서 앞쪽 간선 진벌로 방향으로 올라간다. 감절 버스정류장 안내판에 어은방앗간이라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곳에 어은방앗간이 있었던 것 같다.
왼쪽 뒤에 진벌로 중말천교에서 지선 진벌로가 갈라져 이곳으로 오고 있다. 진벌로는 왼쪽으로 이어지며 보이는 마을은 산후1리 금암동마을일 것이다. 중말천 둑방길에서 초가지마을로 올라가지 않고 둑방길을 계속 따라오면 중말천교 입구로 올라온다.
지선 진발로를 따라 간선 진발로 방향으로 올라간다. 건너편 솔숲 아래에 있는 마을은 태안읍 어은2리 솔마을이다.
지선 진벌로에서 간선 진벌로로 나가 왼쪽으로 꺾어 간선 진벌로를 따라 어은동 방향으로 이어간다.
태안읍 어은리 807-3 지역, 75코스 시점 13.1km, 종점 7.7km 지점이다. 왼쪽으로 꺾어 진벌로 간선도로를 따라간다.
간선 진벌로 건너편에 태안읍 어은2리 솔마을이 자리한다.
진벌로 간선도로를 따라 어은천 방향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진벌로 도로명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태안읍 삭선리(朔善里) 7리 진벌골은 옛날 이곳에 동학군이 진을 쳤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태안신동아아파트가 있는 어름이다. 원이로 무내교차로에서 태안신동아아파트 어름의 진벌골 진벌마을 앞을 거쳐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솔감천 어송교까지 이어지는 진벌로 도로명은 진벌골에서 유래한 것 같다. 진벌로는 태안읍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이다. 무내는 현재 삭선천이라 이르는 하천을 이르는 것 같다.
머내는 무내, 무우내. 백화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서 해창을 거쳐 가로림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내. 비가 내리지 않아 가물어도 내가 마르지 않고 항상 물이 흘러서 무우無雨라 이름 붙이게 됨. ‘무우내’라 하여 무우천無雨川으로 적기도 함.(태안군지)
진벌로를 따라 어은천 방향으로 이어간다. 진벌로는 태안 동학농민군이 진을 쳤다는 진벌(진평陣坪)에서 유래한 도로명으로 진벌은 진뻘이라고도 불리며 왜구의 침입을 막아낸 가로림만 바닷가였다고 한다. 진벌로 도로명에서 태안읍의 자존심을 읽는다.
진벌로는 어은천의 어은교를 건너 어은1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왼쪽 길로 들어가 어은길로 이어간다.
태안읍 어은리漁隱里는 본래 태안군 동일면의 관할 지역으로서, 응굴·은굴·은동·어은동 등으로 불리워오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탄동리炭洞里·고장리羔場里·북창리北昌里 등의 일부를 합병하여 그대로 어은리라 해서 서산군 태안면에 편입시켰다. 그 후 1973년 7월 1일부로 태안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어은리는 다시 서산군 태안읍에 편입되었는데, 1989년 1월 1일 태안군이 복군됨으로써 어은리는 다시 태안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태안군지)
지선 진벌로와 헤어져 왼쪽 어은길로 이어간다.
어은천 오른쪽 둑방길 어은길을 따라 맨 오른쪽 위 은동길을 따라 숲길을 통과한다. 왼쪽의 건물은 어은2리마을회관이다.
어은2리 들녘에 수많은 철새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위쪽의 마을은 어은2리 은동마을인 듯.
어은2리마을회관&경로당이 왼쪽에 있고 오른쪽에 어연정(魚燕亭) 쉼터정자가 있다.
태안읍 어은리 852 지역, 75코스 시점 13.7km, 종점7.1km 지점이다. 이정목 왼쪽 뒤에 이화산 능선, 전신주 왼쪽 뒤에 이교산 능선이 보인다.
어은길에서 위쪽 은동길로 들어가 왼쪽으로 꺾어 진행한다.
맨 왼쪽 끝에서 어은천을 건너 어은길을 따라 중앙의 어은2리마을회관&경로당과 어연정 앞을 거쳐 은동길로 올라왔다.
어은길에서 은동길로 진입하여 은동길을 따라 숲을 통과한다.
왼쪽 뒤 진벌로의 어은2리마을 입구에서 어은길로 들어와 어은천을 건너 오른쪽 둑방길을 따라 중앙의 어은2리마을회관&경로당과 어연정 앞을 통과하여 은동길로 올라왔다. 왼쪽 맨 뒤에 보이는 산은 백화산일 것이라 가늠한다.
앞에 보이는 가로림만 남쪽 지역은 염장(鹽場)마을인 듯. 염장마을 건너편 가로림만 북쪽에 이화산 능선이 보인다.
염장鹽場마을은 고장羔場, 양장羊場. 은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 염소를 먹이던 곳이어서 유래된 이름. 지형이 염소처럼 생겨서 처음에는 고장羔場이라 부르다가 소금을 많이 생산하게 되면서 염장鹽場이라 바꿔 부르게 된 것이 굳어짐.(태안군지)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본다. 진벌로의 어은2리마을 입구에서 어은천을 건너 어은길을 따라오다가 은동길로 올라왔다.
이 아랫마을이 염장(鹽場)마을인 듯. 중앙 맨 뒤에 태안읍 삭선리 금골산이 보인다.
은동길을 따라 다시 숲길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돌아서 중앙 구릉 뒤 들녘으로 내려간다. 오른쪽 가로림만 건너편 청산리 해안에 이적산에서 왼쪽 이교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태안읍 어은리와 도내리를 잇는 제방이 왼쪽에 길게 이어지고 그 안쪽에 어은리와 도내리 간척농지가펼쳐져 있다. 건너편 왼쪽에 이적산에서 왼쪽 이교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중앙 뒤에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 형제봉을 가늠한다.
은동길 오른쪽 언덕에 여러 채의 폐농가들이 보인다.
은동길 숲길을 지나 언덕의 꿈을이루는교회 태안수양관 입구를 통과한다.
은동길 언덕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서산시 팔봉면 양길리의 팔봉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로림만 해안에 어은리와 도내리를 잇는 제방에 의해 드넓은 간척농지가 조성되었다. 왼쪽 뒤에 팔봉산이 조망된다. 서해랑길은 은동길을 따라 앞의 소나무 아래서 왼쪽으로 꺾어 진행한다. 간척농지에 수많은 하얀 곤포사일리지들이 흩어져 있다.
가로림만 남쪽 해안에 왼쪽 태안읍 어은리에서 중앙의 도내리로 제방이 길게 이어지고 그 안쪽에 드넓은 간척농지가 조성되어 있다. 중앙 왼쪽 건너편에 75코스 종점인 서산시 호리 구도항, 그 오른쪽 뒤에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 형제봉이 가늠된다.
소나무 아래 서해랑길 이정목에서 왼쪽으로 꺾어 은동길을 계속 따라간다.
태안읍 어은리 492-45 지역, 75코스 시점 15km, 종점 5.8km 지점이다. 언덕에 은동길을 따라 내려왔다. 오른쪽 은동길을 따라 비닐하우스를 거쳐 뒤쪽 양옥집으로 이어간다.
태안읍 어은리 드넓은 간척농지에 하얀 곤포사일리지들이 흩어져 있다. 중앙 뒤에 서산시 팔봉면 양길리 팔봉산이 멋지다.
태안읍 어은리 은동길 154-18 우편함에 "새 때문에 우편함 문을 열고 우편물을 넣어 주세요"라고 적혀 있다. 왼쪽 뒤에는 태성수산식품 태성영농조합법인 건물이 있다.
은동길 154-25 태성수산식품&태성영농조합법인 건물 앞을 지나간다.
은동길에서 어은-도내 제방 서쪽 입구 안쪽에 농가들이 있다.
은동길을 따라 어은-도내 제방 서쪽 입구로 이어간다.
태안읍 어은리 492-234 지역, 75코스 시점 15.6km, 종점 5.2km 지점이다. 팔봉산 왼쪽 뒤에 보인다.
가로림만 남쪽 태안읍 어은-도내 제방에서 가로림만 북쪽 태안군 원북면 청산리 해안을 조망한다. 건너편 왼쪽 뒤 이적산과 이교산 능선, 청산리 나루터길이 가늠된다. 바다 맨 오른쪽과 중앙 왼쪽의 두 섬은 태안읍 어은리 소속의 쌍도이다.
태안읍 가로림만 어은-도내 제방에서 태안군 원북면 청산리 가로림만 해안을 조망한다. 바다에는 쌍도가 떠 있고, 왼쪽 뒤에 이화산, 중앙 오른쪽에 이적산, 그 왼쪽에 이교산이 확인된다.
가로림만 원북면 청산리 해안을 조망한다. 중앙 왼쪽에 쌍도, 중앙에 청산리나루터, 그 오른쪽 뒤에 풍경펜션, 그 오른쪽 뒤에 가마봉이 확인된다. 가마봉 오른쪽은 서산시 호리 해안이며, 가마봉과 호리 해안 사이로 가로림만 해협이 북쪽으로 이어진다.
우럴목은 쌍섬 북쪽에 있는 바다의 목. 팔봉면 구도항과 원북면 청산리 사이가 되는데, 조수가 이곳을 지날 때에는 소리가 나서 그 소리를 흉내 내어 붙인 이름,(태안군지)
중앙 건너편에 75코스 종점인 서산시 팔봉면 호리 구도항, 그 오른쪽 뒤에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 형제봉, 오른쪽 앞에서 두 번째 곶부리의 태안읍 도내리 도내나루터가 확인된다.
도내항島內港(도내나루터)는 안도내 북쪽에 있는 옛날 나루터의 이름. 가로림만 안쪽에 있는데, 서산시 팔봉면의 구도와 원북면 청산리 사이의 해상교통을 전담하던 나루터.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통하여 태안 부근의 조세를 서울로 들여갔음.(태안군지)
가로림만 남쪽 태안읍 어은리와 도내리를 막은 어은-도내 제방을따라간다. 오른쪽에 저류지(貯留池), 뒤에 팔봉산이 멋지다.
건너편은 가로림만 서산시 팔봉면 호리 해안이다. 중앙 오른쪽에 75코스 종점 구도항이 보인다. 맨 왼쪽은 가로림만 청산리나루터, 그 오른쪽 언덕에 풍경펜션, 그 오른쪽 뒤 구릉이 가마봉, 가마봉 오른쪽 좁은 해협으로 가로림만이 북쪽으로 이어진다.
어은-내도 제방 안쪽에 넓은 저류지(貯留池)가 조성되어 있다. 저류지는 태안읍 어은리와 도내리의 경계를 이룬다.
흰구름이 흘러가는 파란 겨울 하늘을 철새 떼들이 가로림만 바다로 날아간다. 여덟 개의 산봉들이 이어진 팔봉산이 보인다.
철새 떼들이 가로림만 바다 위에 낮게 떠서 날아간다. 건너편 왼쪽에 청산리나루터, 그 오른쪽 언덕에 풍경펜션, 그 오른쪽 뒤에 가마봉, 그 오른쪽 좁은 해협으로 가로림만이 북쪽으로 이어진다. 오른쪽 건너편 뒤에 구도항이 보인다.
태안읍 어은리 소속의 쌍도가 바다에 떠 있고, 왼쪽 뒤에 이화산 능선, 중앙 뒤에 이적산과 이교산 능선, 해안의 나루터길이 확인된다. "쌍섬은 쌍도雙島. 염장(鹽場) 북쪽 가로림만에 있는 섬으로서 섬 두 개가 쌍으로 있어서 유래된 이름."(태안군지)
왼쪽 뒤 언덕에서 은동길을 따라 간척농지로 내려와 제방으로 진입하여 어은-도내 제방길을 따라 태안읍 도내리로 넘어왔다. 왼쪽에 저류지(貯留池)와 배수로&수문, 오른쪽 뒤에 이화산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