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4.
환산정
배가 부르면 부러울 게 없다. 이 좋은 가을날 배부른 돼지가 되어 운전이 벅차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안전을 위해 집중해야 한다. 이서면 화순적벽 입구에서 출발한 길은 알 수 없는 고개를 넘어 내리막을 주구장창 달리고 있다. 거의 다 왔다. 서성제 물빛이 얼핏 보이는 걸로 보아 저수지 끝자락의 어딘가에 목적지가 있을 듯하다.
열에 예닐곱은 그렇다. 정자(亭子)란 게 양반들이 경치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해 지은 집이다. 때로는 독서나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세상과 절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산을 등지고 경관을 감상할 수 있게끔 언덕 끝자락 절벽 위에 짖거나 강이나 호수 등 물을 앞에 두고 높다랗게 지었다. 정자 툇마루나 누마루에 앉으면 안다. 앞에 펼쳐진 경치에 마음이 평안해지고 여유로워지며 그 끝에는 졸음이 밀려온다.
정자에는 이야기가 있다.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서성저수지 내에 있는 환산정(環山亭) 역시 절속(絶俗)의 이야기가 있다. 1637년 창건된 환산정은 백천 류함 선생이 주인공이다. 이괄의 난(1624년)에 의병을 모집하여 임금에게 충성할 계획을 세웠고, 정묘호란(1627년)에도 의병을 일으켰으며, 병자호란(1636년)에는 의병을 이끌고 청주까지 올라갔다가 인조의 삼궤구고두례의 소식을 듣자 통곡했다고 한다. 공은 돌아와서 환산정을 짓고 세상의 일과 관계를 끊고 우국지한(憂國之恨)을 삭였다고 전한다. 정자 기둥에 달린 주련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庭有孤松階有菊 學來栗里晉先生
(마당엔 외로운 소나무 섬돌엔 국화 진나라 율리 사는 도연명에게 배웠네.)
乾坤磊落違初計 山水幽閒托晩情
(세상이 시끄러워 처음 계획 어긋나니 산수 그윽한 곳에 만년의 정 의탁했네.)
葉上春秋忘甲子 心中日月保皇命
(봄가을의 나뭇잎에도 나이를 잊었지만 마음속엔 일월로 황명을 보존했네.)
歲寒後操其誰識 時與山翁和不平
(날 추워야 늦게 시듦 그 누가 안다고 했나. 산 늙은이 세월 따라 불평도 사그라지는 것을)
옛 모습은 아니다. 1965년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저수지 제방을 쌓았고 산꼭대기 정자가 물 위에 떠 있는 섬이 되었다고 한다. 정자 가운데 높이 달린 편액의 글씨가 감탄을 불러온다. 휴대폰으로 검색하니 원교 이광사의 갈필 작품이라 한다.
가늘디가는 바람이 분다. 예쁜 정자 마당에 섰는데 나이 든 소나무 한 그루가 숨은 이야기를 전하려는 듯 길을 막는다.
첫댓글 절대있을수없는 일이지만 과거에 그사람들의 실물을 보고싶다 눈감고 앉아있으면 머리속에서 보일려나
사람까지 뭐하려고... 정자가 예쁜데. 정자만 있으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