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그리스도를 보라 (1493)
알브레히트 뒤러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탐구 정신이 풍부한 사상가였으며,
‘독일 미술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최고의 화가이다.
뒤러가 태어나고 활동한 뉘른베르크(Nürnberg)는 유럽 한가운데에 자리한,
당시 신성로마제국 최대 도시인 쾰른 다음가는 규모의 도시로,
인문주의를 비롯한 학문, 인쇄, 항해와 천문 도구 개발을 중심으로 한
과학 기술과 무역이 발달한 국제적인 도시였다.
뒤러가 살던 시기에 뉘른베르크는 5만 인구가 사는 성벽 도시였고,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이곳에선 매우 쉽게
문학가와 학자들과 예술가와 이를 후원하는 상인을 만날 수 있었다.
뒤러의 아버지는 헝가리에서 이주한 금 세공사로,
뒤러도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금 세공사 교육을 받았다.
15세가 되던 1486년에 그림으로 직업을 바꾸기로 결심한 뒤러는
화가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lgemut)의 도제로 4년을 보내며,
제단화를 비롯한 종교화와 책의 삽화, 목판화 등을 배웠다.
도제 수업을 마친 뒤러는 견문을 넓히려고, 19살이 되던 1490년부터 4년간
독일, 네덜란드, 북부 프랑스, 스위스를 여행했는데,
현재 독일 카를스루에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이 사람, 그리스도를 보라>는
아마도 1493년이나 1494년 초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예수님께서 군사들에게 채찍질과 조롱을 당하신 후,
십자가를 지기 직전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모습이다.
“자, 이 사람이오.”로 번역되는 라틴어 에체 호모(Ecce Homo)는
예수님의 수난 장면 중에서 전통적인 유형이고,
대개 예수님의 머리나 상체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있거나,
채찍 자국이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빌라도가 다시 나와 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요한 19,1-5)
예수님께서는 머리와 옆구리 상처에서 피를 흘리시며
그분을 때리는 데 사용된 도구인 세 매듭이 달린 채찍과
자작나무 다발을 들고 계신다.
그분은 가시관을 쓰고 슬픈 표정으로 얼굴에 오른손을 괴고 있다.
이 자세는 흔히 우울을 상징하는 멜랑콜린 자세라고 하는데,
그리스도 역시 신체보다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고뇌로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그의 왼손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데,
이는 뒤러가 초상화에 깊이감을 더하기 위해 자주 사용했던 자세이고,
얼굴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황금색 배경으로 그리스도는 그림 밖을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을 체념한듯하다.
금빛 바탕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엉겅퀴 가시덩굴이 가득한 사이에
두 마리 새에게 공격받는 부엉이의 모습이 보인다.
주행성 새들이 야행성 맹금류를 공격하는 것은
대개 선과 악 사이의 전투를 상징하는데,
여기서는 무고한 이가 당하는 고통과 시편 102장 7-8절에 나오는
낙담하여 주님 앞에 근심을 쏟아붓는 가련한 이의 기도처럼
“저는 광야의 까마귀와 같아지고 폐허의 부엉이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잠 못 이루어 지붕 위의 외로운 새처럼 되었습니다.”(시 102,7-8)는 말씀을
시각화하여 무덤 속 그리스도의 외로움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무덤처럼 생긴 곳에서 고뇌하며
넋을 놓고 관람자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결과 이 작품의 제목이 “이 사람, 그리스도를 보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