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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때가 전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마중 나왔다. 잿빛 승복 바지를 입었지만, 키 작고 마르고 노동에 찌들려 쭈글쭈글해진 모습이었다. 합장하고 첫인사가 “공양(식사)부터 합시다. 절집에서는 찬(饌)이 없는 게 찬이지” 였다. ‘지개야’(祉?也: 복을 비는 거지·56)라는 법명을 쓰는 그는 객(客)을 보면 밥 대접부터 먼저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寺)로 들어가기 초입에 걸려있는 ‘묵언마을’문패. 여러 가호가 모인 마을인 줄 알았는데 법당과 요사채만 있다. 절은 절이나 절 같지가 않다. 건축물은 반듯하게 각이 서야 할 텐데, 구불구불 곡목(曲木)과 황토만을 써서 기둥과 서까래를 엮고 세워놓았다. 생전 본 적이 없는 공법이었다. 우리말로 ‘법당’’구경칸’’똥칸’ 등의 표찰을 붙여놓았다. 그는 속세 시절의 재산 30억 원과 5년 세월을 이 유니크한 절에 털어 넣었다.
―왜 절을 ‘묵언마을’로 지었습니까? 스님께서도 묵언을 하고 있지 않고, 우리는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지요.
“ ‘묵언’(默言) 하면 절 냄새가 나고, ‘마을’하면 고향과 외가, 인간냄새가 풍기지요. 고향이나 외가에 다녀오듯 누구나 여기서 쉬어갈 수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죠. 여기 들어오는 분에게는 묵언을 시켜요. 물론 저도 묵언하는 시간이 있지요.
묵언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되지요. 처음 묵언하면 흩어진 마음이 밖으로 나돌지요. 모든 원망이 바깥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마음도 가는 길이 있는데, 가다가다 끝이 되면 더 이상 안 갑니다. 며칠간 묵언하면, 내면으로 들어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내가 왜 사는가?’ ‘우리는 태어나서 왜 죽어야 되는가?’라고. 인간이면 누구나 다 그런 고민을 하거든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과거에 살아온 길을 볼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죠. ”
―’왜 사느냐?’에 대한 스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후회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한번뿐인 삶 즐기다 갈 수도 있지만, 저는 세상에 태어나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있지요.
안동에서 축협에 근무할 때, 저는 송아지를 인공수정해주는 일을 했어요. 농부들이 일어나는 시간이 보통 새벽 5시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밤 9시 정도 됩니다. 농부들의 시간에 맞춰 저는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근무를 했어요. 왜냐하면 농부들에게는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필요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 집에 가서 송아지를 한 마리 낳아주면 그 집 아들의 공납금을 제가 내주는 거나 마찬가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 밤에 자는데도 불러도 반가웠지요.”
그는 경북 안동산촌 출신으로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가출했다. 그는“전깃불 밑에서 수돗물을 먹고 살아야 인간이 될 것 같아서”라고 했다. 초년 시절 이력에는 거지, 구두닦이, 신문배달, 중국집 종업원, 양복점 조수, 막노동 등이 들어 있다.
“오지 산골에는 매일같이 눈만 뜨면 이마에 딱 닿는 게 산이고 누우면 머리에 베는 게 산이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여름 반바지에다가 흰 러닝셔츠, 까만 고무신을 신고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안동시내까지 걸어와서 처음으로 전깃불을 봤지요. 중국집에서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먹었어요. 그걸 제일 먼저 개와 고양이가 먹습니다. 밤 12시 통금 사이렌 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다 자기 집을 찾아가고 없을 때야, 그걸 공동수돗물에 씻어서 먹었지요. 잠은 빈 포장마차에서 잤지요. 그때 저를 아는 사람들은 ‘네가 깡패가 안 되고 도둑놈이 안 된 것이 너무 신기하다’고 합니다.”
―정규 학력은 여전히 가출할 당시의 초등학교 졸업입니까?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남보다 더 잘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뒤 검정고시로 19살에 농업고에 입학했지요. 또 졸업해서 10년 만에 전문대에 들어갔고 다시 10년 만에 4년제 대학에 편입했고, 그 뒤로 대학원을 두 군데나 수료했어요.”
―그런 초년 고생은 한편으로 사람의 품성을 모질게 만들지 않나요?
“가축 인공수정사라는 시험이 있었지요. 시험을 치러 가려는데 차비가 없었습니다. 아는 가축 병원의 원장께 찾아가 ‘시험을 치러 가는데 차비 좀 빌려 주십시오’라고 했지요. 그분이 하는 말이 ‘내가 너 아비냐? 내가 왜 차비를 빌려 줘야 하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때 제가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저는 앞으로 원장 선생님보다 1원이라도 더 잘 살 겁니다’라고 했지요. 결국 버스를 공짜로 타고 가서 시험에 합격해 축협에 취직이 됐습니다. 제가 비뚤어지지 않는 것은 그때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모질었지요. 그러니 쓸데없는 데는 돈 한 푼 안 씁니다. 커피 한잔에 5000원이 아까워 다방에도 안 갔죠. 나중에 제가 돈을 많이 버니,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벌었으니 인생을 즐겨야지’라고 했지만, 저는 반대입니다. 인생은 즐겁게 살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보람되게 살아야죠. 자식들에게도 ‘물려줄 재산은 없다. 내가 번 돈이니까 내가 어떻게 쓰든 간에 내 마음대로 쓴다’고 했습니다.”
―맨손으로 어떻게 돈을 벌었던 겁니까?
“안동 축협에 근무할 때, 소 한 마리 값이 12만원까지 폭락한 적이 있었어요. 당시 정부에서 축산 장려책을 펴면서 소를 지나치게 수입을 한 겁니다. 농부들이 120만원 주고 산 소를 2년간 먹여 어미 소가 낳은 송아지 한 마리까지 끼워 팔아도 50만원도 못 받는 거예요. 그래서 자살을 하고 데모를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내리면 오르는 법이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오를 것이다. 자살을 하고 데모를 하느니 소를 더 기르자’며 농가를 찾아다니며 설득했지요. 그러니 나보고 다 돈 놈이라고 해요. 제가 먼저 실천해 보이기 위해 1000만원 빚을 내 소 100마리를 사서 직접 길렀어요. 지금은 송아지 한 마리에 270만원이에요. 팔고 사고 하면서 나중에는 500마리 정도 됐지요. 소 값이 비쌀 때 그것을 팔아 도시에 집을 사고, 그 집을 사놨다가 소 값이 내리면 그 집을 담보로 해가지고 또 소를 샀지요. 이 절을 지으면서 다 그만뒀지만, 안동에 있던 목장의 땅 값도 엄청 뛰었지요.”
―30억원을 들여 이 절을 지었으니, 돈을 많이 벌기는 벌었군요.
통상 이런 말에는 속인도 겸사(謙辭)하는 법인데, 명색이 스님께서 “이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수도 없어요. 없을 때보다는 당연히 많이 벌었지만 그게 많이 번 것은 아니지. 진짜로 돈 벌려고 했으면 100억원 이상쯤 벌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재산이면 평생을 안 벌어도 먹고살 것이고, 내가 더 돈 벌면 다른 사람들이 돈 벌 기회를 그만큼 잃게 되겠지요.”라고 큰소리쳤다. 듣는 내게는 가장 어려운 과업임에도.
“돈 버는 것은 쉬워요. 그런데 저는 남들에게 돈 버는 것을 알려주는 것을 좋아하지 제가 직접 버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뭐, 이 정도로 벌어도 저는 정말 출세를 많이 한 거죠. 산골 촌놈이 도의원도 했지, 이보다 더 출세할 수는 없어요. 너무 과분하게 출세를 했지.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좋은 일에는 마가 끼니, 내가 많이 출세하고 많이 벌었으니까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돈을 모으기만 하고 쓸 줄은 모르면 그건 돈의 주인이 아닙니다. 자기가 모았으면 자기가 쓸 줄 알아야 주인이지요. 주인이 자기를 어디에 쓰느냐를, 돈은 지켜봅니다. 귀신보다 더 밝다는 게 돈의 눈이란 말이지요.”
비록 절에서 돈 얘기를 했지만 돈은 늘 우리 삶의 관심사가 아니겠는가. 정말 맛있는 밥 한 그릇 잘 얻어먹고 왔다.
출처 묵언마을 | 지개야스님
보도자료
책 제목 : 『무법천지 판검사』
오는 9월 27일 시인이자 수필가인 지개야 스님이 책 논픽션 『무법천지 판검사』를 발행한다. 스님 마음의 영원한 스승이자 도반인 ‘순돌아’와의 대화형식이다.
책에서는 “무법천지 판검사, 법으로 먹고사는 판검사들이 대한민국 헌법을 짓밟았다. 참과 거짓을 판별해 벌을 주려면 양쪽 말을 세세히 들어야 한다. 본 사건에 판검사 10명은 피해자인 ‘지개야’ 말은 무시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헌법 제 11조 제 1항을 짓밟으면서까지 피고들의 조작알리바이를 합리화해 주었다.
경찰수사기록 200여 쪽에는 ‘지개야’가 제출한 여권사본을 포함한 결정적인 증거 42-72호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대신 피고의 조작알리바이는 14번이나 강조로 그들의 편을 들었다. 경찰조사자의견은 생게망게한 소설로 피고 '혐의 없음'으로 검찰에 넘겼다. 판검사들은 조사의견서에 토씨하나 구두점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였다. 경찰 어록이나 필사하는 자가 판검사란 말인가?
충북 음성소재 피고들의 사무실에서 ‘지개야’가 직접 도장을 찍어 계약을 체결했다는 2013년 8월 31일에는 중국에 체류 중이었다. 중국에 체류 중인 ‘지개야’가 같은 날 한국에서 체결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세 사람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고 피고와 피고의 직원 3명과 조사경찰까지 조력한 삼인성호三人成虎 조작알리바이다.
반증으로 ‘지개야’가 2013년 8월 31일 중국에 체류 중이었다는 여권사본을 근거로 한 이유서를 법원과 검찰에 11번 제출했다. 피고가 ‘지개야’와 계약을 체결했다는 날 ‘지개야’가 중국과 한국, 어디 있었는지는 이유서만 읽어보면 초등학생도 판별할 수 있다. 본 사건은 대전고검항고, 대전고법재정신청기각으로 더는 다툴 법이 없단다.
법위에 법인 헌법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확정하는 법이자 나라의 근본이다. 헌법을 위배한 법은 존재할 수 없어도 헌법을 짓밟으며 위배한 판검사는 존재한다. 지개야 한 사람의 헌법을 짓밟은 것이 아니다. 온 국민의 헌법을 짓밟는 ‘무법천지 판검사’ 이북도 아프리카도 아닌 나의 조국 대한민국 판검사들이다.
정말 이들 판검사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까? 청와대를 비롯한 행정부처, 헌법 재판소를 비롯한 사본기관, 변협, 민변, 오대 로펌, 인권위원회 등에 마테복음 7장 7절의 애절한 기도는 함흥차사였다. 일제감정기와 1960년대 절대빈곤일 때, 유신헌법 시절에도 이러지는 않았다. 지금도 진행 중인 판검사를 비롯한 고위층의 각종비리에 국민의 분노는 길을 잃었다.
본 사건에만 판검사 10여명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이들 뿐일까? 나보다 더 억울하게 당한 국민은 없을까? 지금도 얼마나 많은 국민이 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많은 국민이 당해야 한단 말인가?
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어쩌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을까?
우리는 이대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여기서 멈춰야 합니까?
이대로 멈춘다면 우리 모두의 앞날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대로 멈춰서는 안 됩니다.
김영란법과 고위공직자수사처로 다시 한 번 일어납시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서…….
우리 후손들에게 뇌물 없는 깨끗한 배려의 양심과 진실이란 정직을 물려줍시다. 지구상에서 영원히 살아남아야 할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서...너와 내가 아닌 우리 모두 함께 헌법 제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헌법을 지키는 공화의 정신으로....
이 땅에 헌법을 짓밟으며 양심을 속이는 가짓말쟁이 판검사는 없어야한다. 해당기관과 판검사들 실명으로“ 『무법천지 판검사』논픽션으로 지개야 스님은 책으로 국민께 일러바친다.
책 185p ?지개야! “본인은 법관으로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고 법관 윤리강령을 준수하며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이거 판사님 선서가 맞단 말인가?
순돌아! 환자가 1~2차 병원진료를 거쳐서도 치료가 안 되면 3차병원을 간다. 3차 병원에 담당의사는 환자가 어디가 어떻게 아프단 말을 상세히 듣고, 여러 분야의 의사가 환자의 말을 중심으로 아픈 이유를 찾아내어 필요에 따른 진료를 한다.
지개야! 고등법원 재정신청은 병원에 비교하면 3차 병원이다. 억울 환자가 재정신청병원 판사의사를 찾았으나 담당판사의사는 환자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판사의사들은 억울 환자에 대해 아무런 검사도 하지 않고는 “억울 환자님 억울함이 하나도 없으니 퇴원하세요.” 하는 판사의사는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순돌아! 대전고등재정신청병원에서는 억울 환자가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라고 억울 아픔을 판사의사한테 호소하고 또 호소했으나 판사의사는 환자의 말을 듣지도 않고, 아무런 검사도 없이 3개월 입원 방치하다가 퇴원시켰단다. 이런 돌팔이 판사의사가 어디 있나?
이유가 무엇인지 돌팔이 판사의사들의 말이나 우리 함께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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