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의 마지막 여행
이사람 시집(시인수첩시인선 73)
발행일: 2023년 08월 11일 / 판형: 장사륙판(124×198mm)
쪽수: 148쪽 / 정가: 12,000원 / ISBN: 979-11-92651-12-5 03810
2013년 《시산맥》 시, 2015년 《동양일보신춘문예》 동화, 2016년 《매일신문신춘문예》 동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동시집 『아빠는 쿠쿠 기관사』 『혼자가 아니야』 『학교 사용 설명서』, 동화책 『새들의 세탁소』 『너의 이름은 해리』가 있다. 22년 동시로 이르코창작기금 수혜. 현재 광영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다.
sangyun7368@naver.com
우리는 지구의 마지막 여행자이다
이사람 시인의 첫 시집 『지구에서의 마지막여행』이 출간되었다. 13년 《시산맥》 시, 15년 《동양일보신춘문예》 동화, 2016년 《매일신문신춘문예》 동시가 각각 당선되어 등단했다. 동시집 『아빠는 쿠쿠 기관사』 『혼자가 아니야』 『학교 사용 설명서』, 동화책 『새들의 세탁소』 『너의 이름은 해리』를 출간한 바 있다. 22년 동시로 이르코창작기금을 수혜받았다.
이사람 시인의 첫 시집에는 이별과 사랑, 죽음과 삶,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과 고독을 유추할 수 있는 시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고 시인은 고독속에 작품을 탄생시키는 존재이자, 한 사람이기도 하다. 저자가 고독에 몰입한 이유는 삶 자체가 고독했다기 보다는, 시인으로서의 철저한 자기 반성과 작품을 위해서 투신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결핍과 그로 인한 아픈 기억들과, 가난했지만 가난에 매몰되지 않았던 가족들의 추억도 작품속에 스며 있다. 저자는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의 아픔속에 조금 더 영악했더라면 받지 않았을 상처들에 대해 연민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고독’을 고독속에 감추려하기 보다는 그것을 웃음의 페이소스 속에 구축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첫 시집이 주목할 만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별은 어디에서나 편재했다. 나는 이별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시집 『지구에서의 마지막 여행』에서 보여주듯 가장 아픈 이별은 가족과의 이별이었다. 특히, 부모님과의 이별, 나의 가장 중심에 서 있던 존재와의 이별. 예감은 준비보다는 회피와 발을 맞추려는 습성이 강했다. 아쉬움과 후회는 나중에 부록처럼 따라왔다. 죽음 쪽으로 기울어가는 어머니는 점점 새를 닮아갔다.
슬픔, 후회 그리고 미련. 그리고 잔열처럼 남는 자신에 대한 분노와 상대에 대한 야속함. 이런 일련의 끈적한 감정들은 다가올 시간이 지워줄 거라는 걸 지나온 시간이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이론과 실체는 등을 맞대고 있지만, 결코 마주 볼 수 없는 동전의 표리관계 같은 것이었다. 이별 앞에서 나의 차분한 이성은 부재중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말을 쉽게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무심히 뱉은 말들이 마치 갚아야 할 부채처럼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깨우침에도 자꾸 같은 지점에서 걸려 넘어지는 것은 말처럼 쉽게 쓸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헛된 약속들을 내뱉으며 살았을까. 나의 경솔함으로 인해 누군가는 새벽까지 기다리다 되돌아가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시는 흘리고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가 주워 담는 작업이다. 흘린 것들은 대게 후회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그 꼬리표의 순서를 정리해 나열한 것이 이 한 권의 시집이다. 이 시집엔 쉽게 스며들 수 있는 서정들과 기시감 같은 직관들로 가득하다. 시를 읽는 독자의 자리에서 시를 쓴 시인의 자리로 자연스럽게 오버랩 될 수 있게 만드는 시집이다.
― 「저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존재는 홀로서기(hypostase)를 통해 존재자가 됨으로써 고독해진다는 존재론적 탐색을 보여준 레비나스도 있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시시각각 무시로 느껴지는 감각적 경험의 영역에 속한다. 알 수 없는 순간, 가늠할 수 없는 이유로 찾아와서 갑자기 가슴 한쪽을 무너지게 하고 쓰리게 하고 아프게 한다. 고독은 홀로 있을 때만 아니라 여럿이 있을 때에도 찾아오며, 호젓한 저녁이나 밤만 아니라 햇살 싱그러운 아침에도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생의 비의(秘義) 앞에서 절망하고는 한다.
사전이 말하는 대로 만일 쓸쓸함이 ‘외롭고 적적함’을 뜻한다면, 그것은 고독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외롭기 때문에 쓸쓸하고 적적하기 때문에 쓸쓸하다는 것은 ‘홀로 있음’으로 인하여 고독감을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두 단어의 발음상의 차이를 배제하고 의미의 측면에 주안점을 두고 보면 그것들은 더욱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고독과 쓸쓸함은 공히 인간 내면에 형성되는 정서적 경험이다.
이사람의 시편들은 이러한 고독의 의미를 묻고 천착하는 가운데 인간적 진실을 해명하려는 시적 노력을 보여준다. 대체로 20행을 상회하는 58편에 이르는 작품들은 일관되게 고독의 양상에 주목하고 있다. 이별과 사랑, 죽음과 삶, 아버지와 어머니 등의 시어에서 유추할 수 있는 많은 이미지들은 고독의 조형이라는 한 곳을 향해 나아간다. 그가 이토록 고독에 몰입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독이야말로 우리 모두 너나없이 겪어야 하는 삶의 본질임을 깨달은 때문이다.
삶이 고독하다면, 죽음은 고독의 붕괴를 의미한다. 존재자가 홀로서기를 그치고, 존재라는 함께 있음(Miteinnandersein)의 지평으로 상승할 때 그것은 어쩌면 영원한 자유의 경지일지 모른다. 「지구에서의 마지막 여행」은 바로 이런 차원을 웃음의 페이소스 속에 구축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사람 표 고독 조형의 세 번째 항목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시에 나오는 작품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 또한 그 경계선에 도달해 있다.
작품은 시종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정련된 언어 속에 짙은 슬픔을 내포하고 있다. 웃음의 근거는 ‘죽음’이 시사하는 고독의 붕괴로 추정할 수 있고, 슬픔의 뿌리는 ‘삶’이 본질적으로 고독하다는 데 있다. 실제로 그렇다. ‘어머니’는 ‘새’가 되고 싶어 했다. 심지어 ‘새’를 닮아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마침내 ‘액자 속에서’ 웃고 있는 아버지를 두고 날아갈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삶과 죽음을 구별하지 않는 이사람의 시적 인식이 번뜩인다.
이렇듯 이사람의 시집 『지구에서의 마지막 여행』은 이별과 그리움, 삶과 죽음, 아버지와 어머니를 디딤돌 삼아 한없이 쓸쓸하고 슬프고 안타깝고 그리운 생의 비의를 고독이라는 틀에 주조하고 있다. 그러나 생의 여러 국면을 모두 거쳐 온 고독은 결코 단편적이고 표면적인 우울의 표정에 그치지 않는다. 이사람의 시적 언어 속에는 현상학의 철학적 존재론에 육박하는 고독의 조형이 이루어져 있다. 그의 고독에는 웃음이 있고, 그의 죽음에는 삶이 있으며, 그의 이별에는 그리움이 있다.
이사람은 고독이야말로 우리 모두 너나없이 겪어야 하는 삶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시화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그의 세계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 「시집 해설」 중에서
◨ 시인의 말
당신을 놓치고
여러 해 앓던 적이 있었다
도무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한나절 겨울 강가에서
매운 생나무 가지나 태우고 돌아오던
어제의 나에게
오늘에서야
늦은 용서를 빈다
◨ 책속으로
이별을 읽다
나를 앉혀 두고 당신이 왼쪽으로 눕는 것을
이별이라 부른다
내가 오른쪽에 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따뜻할 수 있었을까
이별은 어제 죽은 자의 오늘
당신이 없는 거리에선 지는 꽃이 더 붉었다
바람이 지날 땐
꽃잎은 버리고 떨어진 향기만 보았다
이별은 이해되지 않는 장문의 편지
창의 왼쪽을 바라보는 난
새벽까지 한 문장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루는 생의 마지막처럼 저물고
나는 강가에 서서
오지 않을 즐거운 것들을 생각한다
당신이 등을 두고 간 자리에서
젖은 돌 하나를 주웠다
모가 닳았다
동글해져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
당신은 가장 깊은 수심에서 건져 올린 돌
다시 던져 강으로 돌려보낸다
수면에 그려지는 동그라미
자꾸만 당신 얼굴이다
-「이별을 읽다」 전문
기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휴게소 우동 한 그릇처럼
기다림의 시간은 다소 뜨겁고 시끌벅적했다
잠시 달아올랐다
식어버릴 일회용 종이컵 같은
자판기 앞에서의 우리
속주머니에 구겨진 차표가 있음을
더듬어 짐작할 뿐
언제인지 어디로인지 모르는,
그리하여 사소한 것들에 부지런히 재잘거리는
위생병원에 들러야 한다던 아버지는
눈인사도 없이
급히 새벽 기차를 탔다
가족이란 본딧말이
속수무책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기차가 떠난 자리엔
어린 조카의 힘찬 울음소리
플랫폼에 한 무리씩 모인 우리들
아내는 핸드폰으로
지난날을 다시 불러들이고
첫째는 어린 날을 도화지 속으로 날려 보내고
둘째는 재미 삼아 분유를 엎질렀다
플랫폼 앞으로 바싹 다가선 어머니가
차표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나는 담배 연기 속으로 숨었다
기차가 지나고 나면
떠난 가족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알지 못했으므로
아니, 안다고 바뀌는 게 없다는 걸
모른 척했으므로
그저 오고 가는 기적 소리는 무심했다
그렇게 가족이란 기차는
유모차처럼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상여처럼 조용히 빠져나갔다
-「플랫폼에서의 한때」 전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우리 집 해피 녀석, 해피해서 죽을 것 같다고
죽여 달라고 꼬리를 흔든다
아니, 휘두른다
길을 막아서는 녀석을 발로 물리고
방으로 들어가자
그 녀석 상주처럼 문짝을 긁어대며 박박 운다
그래, 당신을 생각하면
나도 개 꼬리처럼 나를 흔들던 때가 있었지
연탄집게가 부러진 아궁이 앞에서
바람이 벌려 놓은 지붕 밑에서
시간도, 거리도
당신에겐 참 어둡던 때
머리를 바닥에 붙이고 꼬리를 흔들다
결국 꼬리가 몸통을 흔들던
바짝 당신에게 납작했던 시간들
축대를 짚고 가는 바람의 기척에
나의 귀가를 그렸을 당신도
한때는 분간도 없이 흔들던 개 꼬리였을까
밤새 밖에 두어 영영 잃어버린,
이제는 더는 흔들 수 없는 그 개 꼬리
그래서 꼬리뼈라도 더듬어 보는 밤
참 미안하다
그때 좀 더 아프도록 흔들지 못한 것이
-「개꼬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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