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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9.05
이승만의 '정읍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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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6월 5일 자 조선일보 1면에 이승만의 '정읍 발언'에 대한 기사가 실렸어요.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을 방문해 "우리는 남방(南方)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조선일보 DB
내년부터 학생들이 쓰는 고등학교 한국사 검정 교과서 9종 중 8종이 1946년 6월 이승만(1875~1965)의 '정읍 발언'을 소개하면서, 충분한 전후 맥락에 대한 설명 없이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원인으로 보이게 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당시 무슨 발언을 했을까요?
이승만, 1946년 4~6월 삼남 순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해 우리나라는 일제 통치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38선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됐죠.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 회의(모스크바 3상 회의)에선 '최장 5년 동안 한반도를 신탁통치한다'는 결정을 해 한국인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모스크바 회의의 결정에 따라 1946년 3월 20일부터 5월까지 미국과 소련은 1차 미·소 공동위원회를 서울에서 열고 한반도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했으나 의견 대립으로 결렬된 뒤 휴회에 들어갔습니다. 소련이 '신탁통치 반대 세력은 협의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죠. 신탁통치에 찬성한 공산당과 좌파 세력만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얘기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귀국했어요. 당시 이승만은 좌우 양쪽 진영에서 지도자로 추대될 만큼 대중적 지지도가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김구와 함께 반탁(反託·신탁통치 반대)을 주장하던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삼남(충청·전라·경상도)을 순회했습니다. 그러던 중 6월 3일 전북 정읍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南方)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읍 발언'으로 알려진 이승만의 발언입니다. 이는 38선 이남·이북 중 어느 한쪽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것으로 평가받아 왔습니다. 이 발언에 대해 '38선으로 나누어진 남북이 합심해 통일 정부를 수립해야 할 시점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말해 결과적으로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한 발언'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많았죠. '한반도 분단을 초래한 사람은 이승만'이라는 폄훼까지 생겨났습니다.
4개월 전 북한에 사실상 '단독정부' 수립
그런데 과연 그런 비난은 타당할까요? 그렇지 않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습니다. 이미 1945년 가을 지중해와 태평양 방면으로 진출하려다 실패한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 사령관 슈킨에게 이런 지령을 내렸습니다. "한반도 북부에 소련의 이익을 영구히 구축할 정권을 수립하라." 아직 이승만이 귀국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1946년 2월 평양에 세워진 것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였습니다. 위원회는 김일성에게 권력을 집중하고 '조선 인민의 영웅'으로 부각하는 등 김일성 우상화를 본격화했습니다. 화폐를 발행하고 군대를 창설했으며, 주요 사업을 국유화하고 '인민 경제 계획'을 도입했습니다. 땅을 무상으로 몰수한 뒤 농민들에겐 소유권이 아니라 경작권만 준 토지개혁도 단행했습니다.
이것은 38선 이북에 사실상 정부(政府)가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분단을 획책한 '단독정부'는 소련의 지령으로 북한에 먼저 들어선 것입니다. 이승만이 정읍에서 그 발언을 한 것은 이 '북한 정부'가 세워진 지 4개월 뒤 일입니다.
"분단 아닌 '통일 민주 정부'의 큰 그림"
이런 이유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이미 수립된 북한의 공산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방어적 행동이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 정도 평가로 그칠 게 아니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수립의 기초가 됐고, 나아가 통일 민주 정부의 계획이 들어 있는 역사적 선언'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읍 발언'이 아닌 '정읍 선언'으로 부릅니다.
해방 직후부터 이승만은 미·소·영·중 정상에게 전보를 보내 '한반도에 하나가 된 통일 민주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귀국 후 자신과 김구·조만식·김일성으로 구성된 남북 지도자 모임을 열어 12월까지 중앙정부를 만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은 인구 비례로 남북 지도자들이 모여 38선을 철폐하고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북한에 인민 정부를 세운 소련은 남한까지 사회주의 국가로 적화(赤化)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정읍 선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왔습니다. 이미 미·소 공동위원회가 실패했다고 판단한 이승만에게 남은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남한에 임시정부를 먼저 수립하고,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은 뒤 소련을 압박해 통일 정부를 세우는 방안이었습니다. 결국 정읍 선언은 단독정부가 아니라 '통일 정부'를 궁극적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통일 국가를 한반도에 건설하기 위해 '선(先) 임시정부 수립, 후(後) 민족 통일 달성'이라는 단계적 통일 정부 수립론을 공표한 것이 이승만의 정읍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남한에서도 많은 사람이 정읍 선언에 반대했지만, 그들은 소련이 북한을 소비에트 위성국으로 만들어가고 있었으며 미·소 공동위원회가 파국을 앞두고 있던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승만의 정읍 선언이야말로 냉혹한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인식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이 지난 76년 동안 민주화와 산업화에 모두 성공한 것을 본 뒤, 이제야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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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3월 20일부터 5월까지 서울에서 열린 1차 미·소 공동위원회 당시 미국과 소련 대표가 담소를 나누는 모습. 여기에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했지만 의견 대립으로 결론을 내지 못하고 휴회에 들어갔어요.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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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 선언'을 한 전북 정읍시 정읍동초등학교에서 '6·3 정읍선언 77주년 기념식'과 기념사업회 출범식이 열렸어요. 참여자들이 현수막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어요.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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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오주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