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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이 9회 연속 올림픽 진출에 성공했다. 여자 핸드볼 센터백의 계보를 잇는 임오경(왼쪽), 오성옥(오른쪽)이 후배 김온아를 격려하기 위해 만남을 가졌다.(사진=이영미)>
골키퍼를 포함해 7명의 선수가 출전하는 핸드볼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는 단연 ‘센터백’이다. 코트 중앙에서 공격을 조율하는 ‘필드의 사령관’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선수들을 조율하고 자신도 득점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센터백은 경험과 시야, 판단력, 해결사 기질까지 모두 갖춰야 하는 어려운 포지션이다.
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 ‘센터백’은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의 자랑이었다. 두 명의 ‘거물’ 임오경(44·서울시청 감독)과 오성옥(43)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표팀에는 김온아(27)가 여자 핸드볼 센터백의 계보를 잇고 있다. 김온아는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오성옥과 함께 센터백을 담당했던 그는 베이징 올림픽 8경기에서 19득점 1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한국의 동메달 획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현재 임오경은 서울시청 감독으로, 오성옥은 지도자 준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9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에 성공한 여자 핸드볼대표팀의 기둥, 김온아를 축하하기 위해 선배들이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한국 여자 핸드볼은 1984년 LA올림픽을 시작으로 9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에 성공,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앞두고 있다.
한국 여자 핸드볼의 올림픽 도전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오성옥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표팀에 뽑힌 이후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부턴 주축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오성옥은 큰 키와 단단한 체격에서 우러나오는 체력을 바탕으로 중거리포와 돌파에 능하고 밀착 수비도 일품이라 매번 대표팀 선발 1순위로 꼽혔다. 센터백으로서 필요한 곳에 빠르게 패스를 하고 경기를 조율하는 능력이 역대 최고라는 평가도 받는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 1995년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 획득의 주역으로 활약했고, 이듬해 결혼과 동시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첫 아이 출산 후인 1999년 대표팀 선배 임오경이 뛰던 일본 실업 히로시마 이즈미(현 메이플 레즈)에 입단하면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 대표팀 선수로도 복귀했다. 당시 3,4위 결정전 노르웨이전에서 패해 노메달의 수모를 겪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은메달), 2008베이징올림픽(동메달)에서도 활약한 바 있다. 아테네올림픽 이후 오스트리아 히포방크에 진출, 유럽에서의 활약을 이어가다 2008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은사 임영철 감독의 부름에 다시 대표팀에 복귀, ‘막내’ 김온아와 함께 마지막 올림픽 무대를 누볐다.
임오경 감독은 여자 핸드볼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1989년부터 2004년까지 15년간 대표 선수 생활을 한 임 감독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로 이어지는 ‘우생순 신화’의 주역으로 유명하다.
대표팀 에이스 김온아는 올림픽 무대에선 선배들과 달리 금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2008베이징올림픽 동메달,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동메달, 그리고 2012 런던올림픽 예선 첫 경기인 스페인전에서 무릎 인대 파열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올림픽 내내 목발을 짚고 다녔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런던올림픽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다.
한국 여자 핸드볼 센터백 계보들이 털어 놓는 핸드볼, 그리고 인생 이야기가 시작된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발목 부상으로 고생 중인 김온아는 레전드 급 선배들의 격려와 조언에 많은 공감을 얻었다고 말한다.(사진=이영미)>
“인사부터 하시죠!”
오성옥(오): 언니(임오경), 우리가 온아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지?
임오경(임): 당연하지. 온아 덕분에 처음으로 세 명이 한 자리에 모인 거야. 온아야, 고맙다!(웃음)
김온아(김): 어이쿠, 언니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언니들 덕분에 엉겁결에 끼어든 거죠.
임: 온아야, 몸은 괜찮니?
김: 아니요. 지금도 좋지 않아요. 발목 인대가 늘어나서 곧 수술해야 돼요.
오: 그랬구나. 많이 불편하겠다.
임: 온아가 핸드볼은 잘하는데 타고난 몸이 허약해요. 성옥이랑 나랑은 철녀(?) 였거든. 온아야, 지금은 핸드볼보단 몸 관리가 더 중요해. 몸 관리하는 것도 실력이니까.
오: 온아 넌 외국 나가면 안 되겠다. 외국 리그는 경기 자체가 더 과격하기 때문에 체력이 약하면 버티기 힘들거든.
김: 저도 잘 알아요. 외국 진출에 대한 마음은 이미 접었어요. 사실 2012 런던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외국에서 관심을 보였었어요. 그런데 예선전에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거기서 끝나고 말았죠.
임: 사실 히로시마 메이플 레즈팀의 회장님이 온아한테 관심이 많았었는데.
김: 아, 정말요? 그런데 왜 저한테는 그런 얘기가 없었지? 오늘 이렇게 두 언니들을 함께 만나는 게 신기해요. 감독님, 아니 오경 언니는 경기하면서 뵙지만 성옥 언니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데 이런 자리에 제가 있다는 게 매우 영광입니다.
오: 온아를 2008 베이징 올림픽 때 내가 대표팀에 복귀하면서 처음 만났거든요. 당시 난 최고참, 온아는 막내였죠. 첫 인상이 무척 귀엽고 착해 보였어요.
김: 실제는요?
오: 음, 그냥 귀엽기만?(일동 폭소).
<여자 핸드볼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서울시청 임오경 감독.(사진=이영미)>
센터백에 대해 논하다
임: 센터백은 일단 신체 조건이 좋아야 해요. 감독님의 지시를 받아서 경기 운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감독님, 선수들, 그리고 센터백의 호흡이 무척 중요해요. 신뢰가 무너지면 작전대로 경기 운영을 할 수가 없어요. 다른 선수들은 자기 플레이만 하면 되지만 센터백은 자기 플레이를 하면서 선수들의 경기를 조율하는 터라 무척 힘들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오: 우선 머리가 좋아야 해요(웃음). 물론 감독님의 지시도 있겠지만 센터백 스스로 경기 흐름을 읽으면서 상황에 맞는 지시를 내려야 하니까요. ‘아, 여기서 승부를 걸어야 하는구나’ 싶으면 과감하게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경기가 잘 풀릴 때는 센터백의 역할이 줄어들어요. 잘 안 풀릴 때 센터백이 할 일이 늘어나는 거죠.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면 센터백으로서의 자질 부족이에요. 지금의 대표팀에선 온아가 임영철 감독님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데, 많이 부담스러울 거예요.
임: 성옥이하고 난 서로 센터백을 보는 스타일이 비슷했어요. 코트에 들어서면 강한 집중력으로 감독보다 더 감독같았거든요. 선수들에게 자주 얘기를 해줘요. 하도 소리를 질러서 경기 끝나면 목이 쉴 정도로요. 반면에 온아는 우리랑 스타일이 틀려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더라고요. 온아의 기술은 우리도 인정할 정도이지만 센터백으로서의 역할은 조금 아쉬운 면이 있어요.
오: 그래도 요즘엔 온아가 많이 좋아졌어요. 처음엔 나도 오경 언니랑 비슷하게 생각했는데 요즘 경기에선 말수가 부쩍 늘었더라고요. 그런데 더 많이 해야 해요(웃음).
김: 언니들이 제게 어떤 걸 원하는 지 잘 알아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작전을 지시할 때도 소극적으로 얘기하고, 선수들에게 소리 지르는 게 창피하고 좀 그렇더라고요. 저도 이 부분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요. 성격을 쉽게 고치기가 어려워서요.
오: 온아야, 그래도 요즘 많이 좋아졌어. 한꺼번에 바꾸기가 어렵잖아. 노력하겠다는 마음으로 조금씩 변화를 보이면 돼.
김: 앞으로 더 많이 달라져야 해요. 감독님도 그걸 원하시고 있고요.
임: 나랑 성옥이가 함께 뛰었을 때가 재미있었어요. 내가 센터하면 성옥이가 백을 보면서 절묘한 호흡을 나타냈었죠. 임오경-오성옥 콤비는 역대급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웃음).
오: 그건 그래요. 언니랑은 다른 부분은 잘 맞지 않는데 핸드볼과 관련해선 호흡이 척척 맞았어요. 일본에서 언니랑 한 팀(메이플 레즈)에서 8년을 함께 뛰었어요. 8년 동안 일본 리그를 완전히 싹쓸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만큼 대단했어요. 언니랑 함께 뛰었을 때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여자 핸드볼 센터백에서 가장 화려한 플레이와 성적을 보였던 오성옥. 어느새 마흔 세 살 중년으로 접어 들었다.(사진=이영미)>
임오경과 오성옥의 인연
임: 성옥이 하곤 맨 처음 상비군에서 만났어요. 지금은 상비군 제도가 사라졌죠. 대신 청소년대표팀이 생겼고요. 상비군에서 처음 만났는데 나이가 1년 차이 밖에 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서로 ‘야자’했어요. 15살, 16살에 막내로 만났으니 얼마나 서로를 의지했겠어요.
오: 저로선 언니의 존재가 든든한 ‘벽’ 같았어요. 언니의 발자취를 무조건 따라하고 싶었죠. 그래서 대학도 언니를 따라 한국체육대학으로 간 것이고요. 결혼만 일찍 안했어도 언니랑 함께 곧장 일본 무대에 진출했을 거예요. 당시엔 스무 살 중반만 되도 다 은퇴하는 분위기라 스물 다섯에 결혼하면서 코트를 떠났습니다.
임: 그런데 성옥이는 그때 결혼 잘한 거야. 그때 하지 못했다면 아마 마흔 살까지 싱글이었을 걸?
오: 에이 언니, 그건 아니다.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데.
임: 너도 알다시피 운동을 계속하면 사람 만날 기회가 없어. 은퇴 연령이 늦춰지고 있기 때문에 결혼도 늦어질 수밖에 없는 거지.
오: 하긴 결혼도 일찍 했고, 결혼 후 6개월 만에 임신하는 바람에 여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됐지. 그런데 아이 낳고 나니까 산후 우울증이 생기더라고요. 자꾸 코트가 그리워지고. 그때 일본에 있는 오경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전화 걸어서 제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언니, 나 다시 뛸 수 있을까?” 언니는 딱 한 마디 하더라고요. “너라면 무조건 할 수 있어”라고요.
임: 그 시대는 결혼하면 24세, 25세 때 은퇴를 해야 했었어요. 대부분 그 나이 때에 은퇴를 했으니까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옥이는 너무 아깝더라고. 그 좋은 재능을 집에서 썩힌다는 게 속상했었죠. 그래서 성옥이가 전화로 복귀 의사를 물었을 때 무조건 하자고 했던 것이고요. 아이 낳고 일본으로 왔는데 와, 정말 엄청난 몸을 하고 나타났더라고요.
오: (웃으면서) 체중이 20kg이나 불었거든요. 이전의 몸이 아니었죠. 사실 아이 낳고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엄청난 고민에 휩싸였어요. 핸드볼을 하고 싶어 덜컥 복귀하겠다고 오경 언니와 약속은 했는데 막상 내가 움직이려다보니 걸리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 거예요. 가장 큰 문제가 아이를 누가 키우는지, 남편은 직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복귀해서 이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지, 머리가 점점 복잡해졌어요. 그때 친정 엄마가 아기를 키워주시겠다고 했고, 남편은 직장을 그만 둘 수 없으니 2년 여 정도 떨어져 지내자고 하는 거예요. 그 2년이 마흔 살 까지 선수 생활을 하게 된 거고요.
임: 성옥이가 산후조리를 잘하고 왔어요. 아직 체중이나 붓기가 빠지진 않았지만 새벽부터 밤 늦도록 웨이트트레이닝에 매달리며 체력 관리를 했었죠.
오: 언니도 아기 낳고 바로 윗몸일으키기 했잖아.
임: 그래 우리 둘 다 ‘독종’ 맞다(웃음).
<'독종'으로 불렸던 선수시절 임오경 감독의 모습.>
내 생애 가장 짜릿했던 순간
임: 난 코트에 있을 때가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어느 대회, 어느 장면이 아니라 코트에서 선수로 뛰었던 순간이 가장 행복했으니까요. 은퇴 후 사회 속으로 들어가 지도자 생활하면서 잘난 척하고 산다고 해도 그건 잠깐의 기쁨이에요.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 예상치 못한 힘든 일이 너무 많더라고요. 코트에선 내 역할만 하면 되잖아요. 그래서 후배들이 은퇴한다고 말할 때 강하게 만류해요. 코트에 설 수 있는 행복을 놓지 말라면서요.
오: 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어쩌면 아픈 추억이죠. 선수층이 얇았고, 나이 어린 후배들이 뛰다 보니 중요한 승부처에서 무너지곤 했어요. 난 당시 연금도 ‘만땅’으로 찼었고, 올림픽 출전 자체가 큰 의미가 없었거든요. 후배들이 메달의 혜택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에 감독님의 권유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는데 비록 메달은 따지 못했어도 어느 대회보다 가장 울림이 컸던 올림픽이었어요. 선수들이 똘똘 뭉쳤고, 팀워크가 정말 좋았거든요.
임: 시드니올림픽을 위해 태릉선수촌 입촌을 열흘 앞두고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어서 열심히 준비했는데 임신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되니까 잠시 다른 마음을 먹기도 했었죠. 결국 일본에 남아서 TV로 경기를 지켜봤어요. 선수들이 예선전부터 진짜 잘했거든요. 결승까지 무난히 올라가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큰 고비를 넘기지 못하더라고요.
오: 시드니올림픽에서 처음으로 노메달이란 쓰라린 결과를 안고 귀국을 했는데 와, 정말 철저히 관심 밖으로 밀려나더군요. 협회에서 선수들 밥도 안 사주고 공항에서 바로 해산시켰으니까요. 매번 축하와 박수만 받다가 그런 경험을 하니까 처음엔 적응이 안되더라고요. 핸드볼 같은 비인기 종목은 메달이 필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김: 전 가장 짜릿했던 순간보다는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이 있었어요. 아시다시피 2012 런던올림픽이었죠. 어느 때보다 몸을 잘 만들어서 올림픽을 준비했는데 덜컥 첫 경기에서부터 큰 부상을 당한 거예요. 런던까지 와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니까 심적 고통이 너무 컸어요. 그래도 깁스한 채 목발 짚고 다니면서 끝까지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 후 두 차례나 수술대에 오르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런던올림픽은 큰 아픔을 남아 있어요. 지금까지도.
부상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
임: 2004아테네올림픽을 앞두고 발바닥 부상으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는 입이 찢어졌고요. 그래도 오랫동안 선수 생활하면서 수술 받은 적은 없었어요.
오: 언니는 키가 작아서 잔부상이 많았어요. 상대 선수가 팔꿈치로 찍으면 금세 다치니까.
임: 한 번은 앞니 두 개가 빠진 적도 있었어요. 얼굴에 상처 나는 게 너무 싫은데 앞니 두 개가 부러졌으니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엄마가 TV로 경기보시다 앞니 두 개가 없는 절 보고 기절하실 정도였으니까.
김: 전 언니들 얘기 들으면 엄청 부러워요. 자주 다치는 편이라서. 런던올림픽 때의 부상이 가장 컸지만 그 전후로 관절경 수술을 받는 등 크고 작은 부상들이 많았어요. 요즘에 할머니가 저만 보면 우세요. 운동 그만하라고. 지금도 발목이 아주 안 좋거든요. 부상이 끊이질 않는 편이라 고민이 많아요.
<올림픽 출전 5회 기록을 갖고 있는 오성옥. 한국 핸드볼과 후배를 위하는 마음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표팀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았다.>
대표팀의 추억, 이젠 말할 수 있다!
임: 2003년 대표팀 시절이 정말 힘들었어요. 당시 핸드볼협회장이 공석이라 대표팀 예산이 부족해 간식 한 번 제대로 사주질 않았어요. 김치로 찌개만 끓여먹던 시절이었죠. 당시 일본에서 히로시마 팀을 맡고 있다가 대표팀 복귀 요청을 받고 태릉선수촌에 합류했는데 환경이 너무 열악해 속으로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어요. 이런 현실에 처한 선수들 입장이 속상했었고요. 국제대회 나가면 다른 나라 팀 선수들의 세탁물은 매니저가 알아서 처리하는데 우리는 일일이 손빨래를 해야 했어요. 그때 샤워실에서 빨래하며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나네.
김: 언니, 우린 지금도 빨래해요. 손빨래요.
임: 왜 지금도 선수들에게 빨래를 시키지?
오: 난 빨래하는 게 진짜 싫었어. 그래서 너무 힘들 때는 세탁물 담가놓고 피존 뿌려서 발로 밟아서 헹군 후 말렸지. 그땐 탈수기도 없었다.
임: 아, 그게 생각난다. 외국에 나갈 때 32인치 텔레비전을 들고 나간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 선수들 가방에는 항상 쌀이 들어 있었어요.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수화물이 오버되면 남은 물건들을 선수들 가방에 담게 했거든요. 그래서 기내 반입이 가능한 쌀을 가장 많이 담아 메고 다녔어요.
김: 언니, 제가 막내일 때는 훈련용 조끼를 제가 다 꿰맸어요. 다음날 시합 때 입어야 할 때는 새벽 내내 조끼를 꿰맸는데 당시 룸메이트 선배는 시합 전날 바느질하면 재수 없다고 제게 싫은 소리를 많이 했어요.
오: 지금도 그래?
김: 지금은 협회에 연락하면 퀵서비스로 바로 보내줘요. 이전과 지원면에선 비교가 안 될 정도예요. 성옥 언니랑 함께 뛸 때 우리들은 해외에 나가 있는 언니들이 합류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어요. 우리는 넉 달 전부터 선수촌에 들어가 외국에 있는 언니들이 합류하기 전까지 죽도록 체력훈련만 반복해요. 언니들이 합류해야 기술적인 훈련을 시작하는데, 훈련이 힘든 우리들로선 언니들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가 훈련 중간에 스트레스 해소 차원으로 축구를하는 데 대해 감독님은 부상 위험이 있다고 절대 안 된다고 하세요. 그런데 성옥 언니가 들어와서 ‘감독님, 공 한 번 찰게요’하면 바로 오케이였어요. 선배들의 파워를 실감했던 순간이었죠.
오: 그래서 그때 후배들이 일본에 있는 내게 전화를 많이 했었어. 언제 대표팀 들어오냐면서. 내가 막내로 대표팀 생활을 할 때는 기숙사에서 체육관까지 물주전자와 얼음주머니를 운반하는 게 정말 힘들었거든. 그때 ‘아, 나도 차 한 대 뽑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차로 운반하고 싶다면서.
임: 난 불암산 산악 훈련이 너무 고단해서 돈 벌면 불암산 전체를 다 매입하고 싶었다니까.
김: 전지훈련을 갔는데 뉴스에서 불암산에 불이 났다고 하는 거예요.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앞으로 불암산에서 훈련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철없이 애들끼리 좋아했던 생각이 나요.
임: 서울시청 감독으로 8년째 하고 있는데 난 외출 외박에 자유로운 편이에요. 헤어스타일도 선수들 자율에 맡기죠. 머리를 묶는다고, 짧게 자른다고 해서 핸드볼을 잘하고 못하는 시대는 지나 갔거든요.
오: 그건 맞아요. 선수들이 사춘기 학생들이 아니니까.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게끔 맡겨놔야죠.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훈련 외적인 부분에 대해 감독이 관여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임: 96년도였나? 감독님이 너무 외박을 주지 않아 성옥이 등 몇 명이 밤에 몰래 선수촌을 나가서 미아리 무도장을 찾았던 적이 있었어요. 새벽 내내 춤을 추고 노느라 귀가할 때는 다리가 퉁퉁 부었었죠. 그게 우리들의 유일한 일탈이었습니다. 당시 감독님한테 들키지 않고 소소한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때의 추억이 잊히지가 않아요.
김: 지금은 외박 받으면 선수들끼리 펜션으로 놀러가요. 휴가 땐 해외여행도 다니고요.
임: 운동할 때는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속으로 ‘하나님, 저 감독님 좀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감독이니 우리 선수들이 그런 기도를 하고 있을까 싶긴 해요(웃음).
<내년 리우올림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김온아. 부상 없이, 후회없는 경기를 펼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한다.(사진=이영미)>
김온아에 대한 선배들의 바람
오: 일본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올해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은데 오경 언니가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지도자 과정부터 밟으라고 하더라고요. 선수 파악 등이 제대로 안 돼 있으니까 많은 경기를 보면서 선수들과 지도자 스타일을 알아두라고 조언해주더라고요.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핸드볼에선 남자 감독, 여자 코치의 형태는 찾아볼 수가 없어요. 이유가 뭘까요? 전 가능하다면 남자 감독님 밑에서 코치 수업을 받고 싶어요. 남자 선생님들이 걱정하고 우려하는 현상과는 다르다는 걸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요.
김: 사실 이 자리에 나오면서 전 제 얘기를 하기보단 주로 언니들 얘기를 들으려 했어요. 제겐 ‘레전드’ 급인 두 분의 경험담이 어떤 공부보다 절실하게 와 닿거든요.
임: 온아야, 요즘 선수들은 휴식 시간에 잠을 자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걸로 소비해. 난 그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처럼 은퇴 후 나이 먹어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면 아무 것도 안 돼. 은퇴 전에 준비해야 하는 거거든.
김: 하긴 태릉선수촌에서 무료로 영어, 일본어 등 외국어 강습을 해주지만 선수들 대부분은 강의 듣는 것보다 잠을 자는데 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절 포함해서요. 마음은 외국어 공부를 많이 해서 미리미리 은퇴 이후를 준비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아요. 훈련이 고되니까 휴식 시간엔 그저 누워 있고만 싶고요.
오: 아까도 얘기했지만 전 온아가 좀 더 넓은 무대에서 뛰기를 바랐어요. 체력이 뒷받침되는 상황이라면요. 사실 저랑 온아 사이에 또 다른 대표팀 센터백들이 존재했거든요. 그런데 자리를 잡지 못하면서 잊힌 선수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나 온아는 제대로 자리매김했잖아요. 대표팀에서 온아만큼 센터백 역할을 제대로 하는 선수가 없어요. 이런 선수가 해외 나가서 경험을 쌓고 돌아온다면 한국 여자 핸드볼은 또 다른 변화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여자 핸드볼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있는 자리. 왼쪽부터 임오경, 김온아, 오성옥은 핸드볼 센터백의 계보를 이으며 여자 핸드볼을 위해 청춘을 바쳤고, 바치고 있다.(사진=이영미)>
임오경, 오성옥, 두 선배는 상대팀 감독, 핸드볼 선배라는 타이틀을 내려 놓고 후배 김온아의 미래를 위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며칠 후 대한핸드볼협회는 인천시청의 김온아와 동생 김선화가 FA 신분을 얻어 인천시청에서 SK 슈가글라이더즈로 이적한다고 발표했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에 공헌한 김온아, 김선화 자매의 SK 이적은 여자 핸드볼에 큰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센터백 3인방들이 전하는 영상 메시지이다.
< 이영미 기자 >
http://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969883&memberNo=21659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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