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20일 아침 8시. 방콕발 서울행 대한항공기가 인천공항에 기수를 내렸다. 우리일행은 “마지막에 내리세요”라는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기창에 기대어 비행기에서 내리는 여행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무원 아가씨들도 우리가 이북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로 눈길을 두지 않았다.
인천공항에는 체제가 다른 북쪽에서 남쪽으로 귀순하는 탈북자들을 취재하기 위해 플래시를 터뜨리는 기자도 없었고, 귀순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더욱 없었다. 과연 비행장에 내리니, 땅 생김새도 기후도 이북과 비슷했다. 사람들도 약간 애교 섞인 서울말씨를 쓴다는 것 이외에 이북사람과 거의 구별이 가지 않는다.
남한정착과정에 나는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굳어졌던 남한에 대한 궁금증을 떨치기에는 그리 시간이 많이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북한과 해외를 떠돌아 다닐 때 남한방송을 즐겨 들은 탓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며 배움의 꿈을 펼쳐간다. 폐쇄된 북한의 세뇌교육만을 받다가 남한에 나와 개방형 교육, 글로벌 세상의 지식을 배워가는 남한의 대학생활이 얼마나 보람차고 재미있는지 모른다. 실로 이 모든 자유를 준 대한민국국민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또 자유로운 남한생활에 젖어 있을 때면 이 자유를 찾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자유를 깨우쳐준 중국 TV
내가 신의주 공업대학을 다니던 90년대 초 세계정치지형은 크게 달라졌다. 91년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고 92년에 한국과 중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특히 단둥(丹東)과 접한 신의주는 압록강 건너편에 우후죽순처럼 솟는 고층 빌딩과 밤에도 대낮처럼 밝은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중국의 개혁개방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장사에 눈뜨기 시작했고, 중국화교들을 통해 세계정세는 급속하게 사람들 속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은 중국의 개혁개방에 호감을 가졌고, 남한경제의 발전과 사회의 민주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신의주는 특별히 중국TV 전파가 잘 잡힌다. 대학생들은 공부가 끝나면 끼리끼리 개인 집에 나가 집집에 창문에 모포를 가리우고 중국TV를 보기 시작했다. 나와 친구 철민이도 대학 앞 동상동에 있는 아지트에 나가 중국TV를 보기 시작한지 꽤 오래됐다. 홍콩 무협영화와 디스코 춤이 재미 있었고, 뉴스시간에는 화교의 통역을 빌어 국제정세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9시 뉴스시간에 갑자기 인민반장을 앞세운 보안원(남한의 경찰해당)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며칠 전부터 아지트에서 흘러나오는 녹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안전원이 현행범으로 우리를 체포한 것이다.
김정일은 신의주가 자본주의 황색바람을 전파하는 관문이라고 하면서 당, 안전, 보위기관의 합동으로 된 비사회주의 그루빠를 조직했다. 여기에 시범케이스로 걸리면 수용소로 끌려간다. 다행히도 보안원에게 들켰으니 망정이지 퇴학은 물론 문제가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안원은 집주인과 나, 철민이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날 저녁 동상동 안전부(파출소)에 끌려가 취조 당했고, 다음날 아침 대학 보위원에게 인계되었다. 며칠 동안 담당보위원에게 불려가 자백서를 썼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자본주의 사상을 뿌리 뺀다며 1년 동안 대학 공공변소 청소와 건설장에서 혁명화 노동을 시켰다. 그리고 대학 전교 앞에서 중국TV를 보던 학생들이라고 폭로했다.
1년 동안 열심히 일한 덕분에 간신히 퇴학은 면했다. 이때 우리대학의 탁영남이네 형제가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신의주 보위부에 잡혀 들어왔다는 소문이 났다. 나는 자유를 구속하고 폐쇄적인 수령우상화 교육만 시키는 북한대학교육이 마음에 안 들었고, 언젠가는 자유로운 세상에서 배우고 싶은 마음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러던 1997년 3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첫 직장생활은 개천 편직물공장에서 했다. 며칠이 지나자 초급당비서는 “요즘 공장에 일감이 없으니, 충성의 외화벌이를 하라”며 금 1그램씩 바치라고 직원들을 몰아댔다.
‘충성의 외화벌이’는 1년에 주민 한 사람이 김정일에게 바쳐야 하는 금 1그램 계획이다. 1그램을 바치지 못하는 주민들은 충성심이 부족하다며 매일같이 욕을 먹었다. 이 광경을 보면서 일제시기에도 강제공출이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북한이 이보다 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사회는 체제유지에 광분하는 김정일과 그의 통치자금을 바치기 위해 주민들이 노예가 된 사회였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인권과 자유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다.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꿈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대학 때부터 중국TV를 보며 자본주의를 동경했던 터라 다른 세상이 무척 궁금했다. 여기서 허무하게 썩어갈 젊은 청춘이 아까웠다.
중국은 결코 나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다
나의 첫 번째의 탈출은 2000년 11월에 있었다. 혜산으로 가기 위해 나는 평양-혜산행 열차를 탔다. 통행증이 없던 나는 목적지가 국경이라는 의심을 받고 열차 검열관실에 끌려가게 되었다. 북한주민들이 열차를 타자면 주민증과 보안서에서 발급하는 통행증을 함께 소지해야 한다. 통행증도 없고, 내 소지품 속에서 중국지도까지 나오자 열차 안전원들은 확인할 게 있다며 나를 의심한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내게 짐 따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차라리 맨몸이 더 편했다. 나는 열차가 정전되어 멈춘 틈을 타서 차창을 열고 뛰어내렸다.
집을 떠난 지 근 한 주일 만에 혜산에 도착한 나는 먼저 압록강 폭이 좁은 지역을 선택하고, 국경수비대의 초소위치도 알아냈다. 압록강을 건너던 날 나는 고국을 등지고 떠나던 유랑민들이 부르던 ‘압록강의 노래’를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태어나고, 조상의 무덤과 부모형제가 있는 이 땅을 언제면 다시 밟을까 하는 인생의 허무감이 조수처럼 밀려왔다.
다행히 압록강은 깊지 않았다. 중국 장백현 쪽에 다 달은 나는 빨리 국경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동차를 잡아타기로 결심했다. 트럭을 잡아타고 한참 달리는데 트럭기사가 차를 세우고 나를 마구 때렸다. 아마 승인 없이 제차를 탔다고 그러는 것 같았다. 다행히 숲 속으로 뛰었으니 망정이지 공안에 붙잡혔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중국에서 받은 첫 대접이었다. 앞으로 중국에서 받을 대접이 더 무서워 났다. 더욱이 말도 모르는 내가 중국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허룽(和龍)시의 추위는 영하 30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사면은 눈으로 덮였고 도로를 걷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세끼를 굶은 나는 비틀거리며 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날씨는 어두워지는데 우선 잠자리부터 해결해야 했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불렀지만, 북한사람들을 잠 재우면 벌금 한다며 문전 박대했다. 다행히 혼자 사는 조선족 아저씨의 집에 들어가 오래간만에 토장국과 쌀밥을 먹었다. 얼었던 마음도 녹고 밀렸던 잠도 푸짐하게 잤다.
이렇게 겨우 찾은 곳이 바로 중국 허룽시 산골에 있는 채석장이었다. 돌을 다듬는 채석장 일은 중국인들도 꺼려하는 중노동이다. 힘든 일이지만 돈은 나중에 받기로 하고 일부터 시작했다. 채석장노동은 아주 힘들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고, 식사는 증기 빵 두 덩이를 먹었다. 잠에 쫓기고 먹는 것이 마땅치 않아 간염이 도지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인들은 내가 일을 잘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어느 날 갑자기 노반(老板: 중국에서 사장을 노반이라고 부른다)의 호령이 떨어졌다. 4~50kg짜리 돌을 10m밖의 공터에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 작업이었다. 돌을 지고 흔들거리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떨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옮기는 작업이란 여간 위험하지 않았다. 돌을 잘못 옮겨도 손가락이 짓눌려 문드러지고, 낙반에 맞을 위험이 항시적으로 뒤따랐다.
이렇게 겨울이 가고 여름이 왔다. 건설 장에서 많은 돌을 요구해 우리는 매일 5명이 8톤 차량을 6차씩 실어야 했다. 땡볕이 내려 쪼이는 여름 날, 나는 피곤하고 속이 메스꺼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요구했지만, 노반은 일이 바쁘다며 거절했다. 훗날 진단을 받아보니 간(肝)이 부었다고 한다. 이대로 두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진단결과를 듣고 서야 노반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노반은 내가 1년 동안 계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의 절반도 주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다. 병도 고쳐야 하고, 여비도 없으니 사정을 좀 봐달라고 했다.
나의 말을 동료인 조선족 최 아무개가 노반에게 통역해주었다. 그때 눈이 부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간이 부어 얼굴까지 부었던 것 같다.
인성을 등진 마귀들 속에서
노반은 중국돈 2천원(한국돈 26만원)을 나에게 쥐어주었다. 나는 노반의 차를 타고 천진(天津)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연길로 가던 중 중국변방대의 검문에 걸려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벙어리처럼 손시늉을 하며 온 몸에 긁힌 상처자국들을 보여주었다. 변방군인들은 신분증이 없는 나를 조사해야 한다며 노반에게 “타 쓰 쉐이야? (이 사람은 누구인가)”고 물었다. 뜻밖에도 노반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발뺌했다. 군인들은 전기곤봉을 내 다리 사이로 들이대며 팬티에 숨겼던 돈 2천원을 찾아냈다.
병 치료도 못하고 부모님에게 보내겠다며 꽁꽁 숨겼던 돈을 빼앗긴 나는 원통하기 그지 없었다. 더욱이 발뺌하며 달아나는 노반이 더 괘씸했다. 그때 노반이 2천원을 빼앗을 목적으로 변방대와 짜고 나를 체포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돈을 강제로 빼앗긴 나는 살겠다는 희망마저 잃고 담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울분을 토했다.
순간 울분보다는 북한에 호송되면 죽는다는 근심이 더 앞섰다. 나는 보초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잠자는 흉내를 내며 족쇄를 풀고 도망칠 궁리를 했다. 죽든 살든 달리는 차에서 내리뛰려고 했으나 네 명의 군인들이 달려들었다. 곤봉과 구둣발에 채운 내 몸은 걸레 짝이 되었다.
변방대에 도착하니 “도주시도자”로 찍혀 또 뭇매를 맞았다. 중국인들은 탈북자를 짐승 다르듯 했다. 동족에게 맞는 아픔은 참을 수 있어도 외국 사람에게 맞으니 분노가 치밀었다. 아마 김정일이 탈북자들을 잡아들일 때 너털웃음을 친다고 생각하니 더욱더 반발심이 치밀어 올랐다. 살 곳을 찾아 중국으로 나왔던 조선청년들은 그야말로 파리 같은 인생이었다.
호송되는 탈북자들은 족쇄 한 개로 두 사람의 팔을 채웠다. 2001년 7월 무산군 보위부에 도착하니 알몸으로 검사 당했다. 돈을 먹고 나온다며 소금 국을 많이 먹여 대변을 보게 했다. 선생(간수)들은 변기에 머리를 들이대고 똥을 막대기로 쑤셔 돈이 있는 가를 검사했다. 정말 유치하고 더러운 놈들이었다. 옆방에서 여자들은 자긍검사까지 한다고 들었다.
며칠 후 조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청진 집결소로 이송되었다. 2001년 8월 중순 청진집결소로 호송되던 도중 시속 80km 열차에서 뛰어내리려고 몸을 던졌으나, 보안원에게 붙잡혀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 열차에서 떨어져 탈출했다 해도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청진집결소에서 1개월 동안 나는 똥을 나루는 일을 했다. 넘어지면 똥물벼락을 뒤집어 쓰고, 옷을 빨아 입을 새도 없이 그대로 입고 다녔다. 하루는 길가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몰래 피운 적이 있었는데, 한 모금 들이 빠니 머리가 뗑 해졌다. 2달 동안 잡혀있었으니, 허약에 걸린 것이다.
그 후 채소농장에 나가 파밭과 오이 밭을 정리했다. 썩어 떨어진 오이와 날 옥수수를 입이 터져라 쓸어 넣을 때면 문득 남한에서 비전향 장기수로 37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는 이인모 생각이 났다. 그의 수기를 보고 설마 그러랴 했는데, 바로 내 앞의 현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작업이 끝나고 돌아올 때면 무조건 달리기를 시킨다. 우리가 도망가지 못하게 맥을 뽑기 위해서다. 내가 청진집결소에 잡혀있던 근 한달 동안 수십 명의 탈북자들이 굶어 죽었다. 이것은 북한인권 실상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야수의 소굴에서의 탈출, 재 탈북하기까지
한 달쯤 지나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주변 동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밖에 나가니, 내가 살던 거주지 담당 보안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주스런 청진집결소를 떠난다는 기쁨이 앞서긴 했으나, 앞으로 닥쳐올 위험변수들이 화면처럼 나타난다. 이제 고향에 가면 ‘반역자’로 재판을 받고 교화소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놈의 새끼, 살아 있었구나”라고 씨 벌이는 보안원의 말이 내 심장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날 저녁으로 우리 일행은 청진-평양행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출발한지 3일만에 열차는 평남도 고원고개에 도착했다. 고원고개는 원래 경사가 급해 열차를 감속 운전한다. 나는 손이 묶인 채로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순간 “반역자를 잡아라!” 라고 소리치는 보안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모든 열차승객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열차는 나 한 사람 때문에 멈춰 섰다. 기관사도 철도지령실에 도주자가 발생해 차를 세웠다고 보고하는 등 난리가 났고, 보안원들과 열차승무원들이 나를 포위하고 달려들었다. 허약 걸린 두 다리가 끌고 그들의 마수를 벗어난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면 거짓말이었다. 몇 백 미터 달아나지 못하고 덜미를 잡혔고, 수십 명이 달려들어 구둣발 공세를 안겼다. 보안원은 족쇄로 묶는 것도 부족하다며, 포승줄로 나를 결박했다. 그리고 밥과 물을 먹이면 달아난다며 아무것도 먹이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나면 교차역인 평남도 순천역에 도착하게 된다. 이제 조금 더 가면 나는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보안원의 긴장을 풀기 위해 코를 골며 자는 체 했다. 새벽 2시가 지나자 그들도 지쳐 자고 있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나는 뒤로 묶은 포승을 풀고 조용히 문을 열고,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 200미터쯤 달렸을까, 뒤쪽에서 보안원의 고함소리가 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탈출에 성공했다. 8월이니 밖에서 잠자기는 괜찮았는데, 무엇보다 손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야 했다. 북한에 신고제도가 있어 남의 눈에 띄우면 또 붙잡힐 수 있었다. 나는 길가에서 굵은 못을 얻어 들고 산으로 올랐다.
못을 바위 돌에 뾰족하게 갈아 간신히 족쇄를 제거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때 족쇄를 푸느라고 손목을 비틀어 아직도 그 흉터가 남아있다.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된 나는 또다시 북으로, 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잊지 못할 사장님과 헤어지기까지
열차에서 탈출한지 8일만에 나는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그 길로 내가 일했던 채석장에 찾아가 노반을 만났다. 노반은 눈이 둥그래지며 고생했다고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동북에서는 위험하니 천진에 가겠다. 그러니 여비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노반은 인민폐 돈 500원(한화 6만 5천원)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 돈을 여비 삼아 옌지(延吉)-텐진(天津)행 열차를 탔다. 천진까지 갔으나, 중국 땅 어딜 가나 내가 발 붙일만한 곳이 없었다. 근 1년간 텐진과 상하이, 쑤저우(숙주)를 전전긍긍하며 방황했다. 그러던 소주의 어느 한 한국 전자회사에서 직원채용을 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면접을 보았지만, 중국말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몸도 허약한 나를 받아줄 리 없었다. 면접에서 떨어진 나는 한국인 사장님을 만나 통사정을 하기로 결심했다.
정문에서 한국사장님의 앞을 막고 “저는 탈북자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라고 통사정을 했다. 나는 사장님의 보증으로 전자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부러진 발가락도 수술 받았다. 나는 동북에 있을 때 돌에 치어 발가락뼈가 부러졌었다. 당시 치료받을 수 없어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녔지만, 시간이 지나자 썩으면서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다리를 절룩거리는 나를 보고 무슨 일 인가고 물었다. 나는 발가락을 보이며 다치게 된 사연을 이야기 했다. 사장님의 지시에 의해 나는 곧 병원으로 옮겨졌고, 병원 측은 수술 받지 않으면 발가락을 절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수술비는 대줄 테니 발가락은 자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다리를 다 치료한 나는 2002년 11월까지 그 회사에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 중국공안이 달려들었다. 당시 중국에서 탈북자 숙청 ‘100일 전투’에 진입했을 때이다. 사장님은 내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중국인들은 나를 조선족으로만 알고 있었다. 중국공안당국은 한국회사가 탈북자들을 보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시로 탈북자 단속에 나오곤 했다. 내가 붙잡히면 회사는 영업정지를 당하게 된다. 국적 없는 수모는 날이 갈수록 더했고, 나의 진정한 보금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계속되는 검문으로 사장님은 이왕 한국으로 갈 결심을 했으면, 태국이나, 베트남으로 나가라며 인민폐 2천원(한화 26만원)을 주며 등떠밀어 주셨다. 참 고마운 분이시었다.
내가 깃들 품은 어디
2003년 2월 광주에 도착한 나는 한국으로 가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중국 쿤밍(昆明)으로 떠났다. 한국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지만, 자유를 찾을 희망은 그 길밖에 더는 없었다. 쿤밍- 라오스- 태국까지 30도의 무더위 속에서 정글과 산속을 헤치며 자유를 찾아가는 우리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오는 도중 라오스사람의 밀고로 우리일행 네 명이 모두 체포되었다.
한국대사관에 인계해줄 것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끝에 근 1개월 만에 태국접경지역인 메콩강까지 가게 되었다. 처음 라오스경찰은 우리를 중국으로 송환하려고 했으나, 한국과 여러 나라 인권운동가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석방되었다.
일행은 태국으로 밀입국하여 드디어 방콕행 열차에 올랐다. 그때서야 우리는 ‘자유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그때만큼은 북한에서의 탈출과 감옥생활, 그리고 중국에서 어려웠던 시절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 듯 했다. 2003년 5월 20일 방콕에 도착했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과 인터뷰도 하고 교회신앙생활도 했다. 이민국감옥은 자유를 갈망하고 희망하는 아프리카와 동남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매개 나라들의 인권과 환경의 처지를 들으면서 인권은 전 인류의 보편적 권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1948년 시민의 자유와 권리” 국제인권선언을 적은 책자를 공부했고, 유엔고등판문관 스텝들과 인터뷰를 통해 북한이탈주민들의 난민지위의 타당성을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감옥에서 느낀 ‘코리아’의 위상이었다. 감옥에서 우리는 “코리아 사람”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흔들며 한국이 이탈리아를 꺾고 월드컵 4강을 이루었다고 칭찬을 늘여놓았다. 나는 그때서야 한민족의 긍지를 찾게 되었고, 내가 자유와 희망을 누릴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맺는 말
세 번에 걸치는 체포와 두 번의 극적인 열차 칸 탈출, 이 모든 것이 내가 대한민국까지 오게 된 원동력이랄까, 아니면 북한 김정일 정권의 반인륜적 죄행을 폭로하기 위해 왔다고 할까 어쨌든 대한민국으로의 나의 결심은 천만번 지당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 입국해 나는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국적을 받아 안았다. 하나원에서 신분증을 받던 날 나는 울고 또 울었고, 생명과 용기를 준 대한민국에 감사의 인사를 했다. 지금은 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며 같은 민족, 한강토인 남과 북이 왜 이렇게 자유와 인권이 차이가 나는가를 더욱 절감하게 된다.
참다운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장되는 그런 사회가 바로 자유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남한 대학생들 중에는 북한인권운동이 어떤 정치목적의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북한의 인권을 똑바로 알리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친북을 외치며 북한의 참담한 인권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일주일간의 북한체험을 권유하고 싶다.
첫댓글 인지상정이라 눈물이 나네요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