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익희
그대는 아는가? 우리는 8천 년 전에 옥귀걸이를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 한민족 고유의 석관묘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이다.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홍산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 “석관묘 돌무덤”이다. 우하량의 16개 무덤 가운데 13개가 석관묘다. 석관묘의 묘장법을 이용해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은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백제 등지에서 이용되는 한민족 고유의 양식이다.
중국의 경우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였다.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하였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다. 고조선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 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한민족 고유의 산물이다.
* 세계 최초의 옥 장식품
홍산 문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옥 제품이다. 옥은 변하지 않는 보석으로 영생불멸을 상징한다. <주역>에서도 옥은 건(乾), 곧 하늘의 빛깔이자 하느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보물로 풀이한다.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장신구로, 신과 소통하는 신물(神物)로, 천제를 지낼 때 쓰는 제기(際器)로 옥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대부분 옥기들은 적석총의 중앙에 있는 석관묘에서 출토되었다. 옥기의 출현·제작은 큰 의미가 있다. 귀한 옥제품을 독점하는 과정에서 신분계급이 생기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전문화 분업화가 이루어졌다. 옥기는 신물(神物)과 제기로서 옥기를 갖고 하늘과 소통하는 독점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이른바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뜻한다. 국내 학계에서는 한반도 일대에서 발견되는 적석묘 형태의 분묘라든지 곰의 형상을 띤 가면과 옥 장식 유물 등이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다수 발견된 점을 주목해 단군조선의 뿌리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이 지역에서 옥결(옥 귀걸이)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기원전 6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세계 최초로 인간이 가공한 옥 공예품이다.
* 우리는 이미 8천 년 전에 옥 귀걸이 하고 다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유적에서도 나왔다. 이곳 역시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2007년에 전남 여수에서도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모양이 홍산 문화 옥결과 똑같았다. 이는 당시 이 지역들이 동일문화권이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흥륭와에서 발굴된 옥유물이 450KM 떨어진 압록강부근의 수암지역에서 나오는 '수암옥'을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옥기들이 발견된 적석묘와 석관묘의 형태가 요서지역에서 한반도와 일본으로 이어짐을 보이나, 중원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대인들은 시신을 잘 보존하면 영혼이 다시 돌아 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영혼을 불러오고 부패를 막아준다는 옥으로 수의를 만들어 시신에 입혔다. 옥은 돌보다 물러 옥을 물에 넣고 돌로 갈면 원하는 모양을 쉽게 만들 수 있다. 홍산 문화인들은 옥돌에다 사람 얼굴, 새, 귀걸이 등을 새기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적봉지역의 신석기인들은 하늘과 소통하기 위해 석관묘 안에 새를 새긴 옥기도 넣었으며 평소 고인이 아끼던 다양한 옥 장식품을 같이 넣었다. 우하량에서는 홍산문화의 대표적 옥기인 옥결, 옥벽(玉璧), 옥환(玉環), 옥패(玉珮) 옥 거북(玉龜) 등 각종 옥기들이 발굴되었다. 이와 같은 옥기와 관련된 신분의 차별은 사회 계급의 발생을 의미한다. 홍산 유적지에서 특히 옥이 많이 발굴되는 이유는 내몽고에 옥밭이 많았기 때문이다.
* 한민족의 옥 문화
이 전통이 좀 더 발전한 형태로 전해진 것이 고조선의 곱은옥과 둥근옥이다. 원래 고조선의 3대 특산물이 인삼, 잣, 옥(玉)이었다. 고조선의 옥은 칠색보옥이라 불리며 여기에 천부(天符)를 새겨 방장해인이라 불렀다. 당시 고조선에 큰 옥 생산지가 있었다. 지금 요령성 수암현으로 요동반도 남단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도 중국 최대의 옥 생산지이다. 또 후대 신라와 백제, 가야의 금관이나 금동관에 달려 있는 곡옥(曲玉)과 귀걸이 등 옥 장식품으로 연결된다. 곡옥은 착용하기도 하지만 일부러 땅에 매장하는 풍습이 삼국시대 한일 유적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산이나 땅속 도깨비를 제압하거나 부정한 기운을 막기 위한 일종의 부적이다. 홍산 옥기를 보면 옥은 신령을 부르는 도구이기도 했다.
조선 왕실은 온통 옥 천지나 다름없었다. 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으로 만들어 「옥새」라 했고, 왕이 앉는 의자를 높이 받들어 「옥좌」라고 했다.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홀도 옥으로 만들었으며, 왕의 옷인 곤룡포에는 옥대가 따랐음은 물론이다. 왕비가 착용하는 장신구도 옥 일색이었다. 옥반지, 옥비녀에 머리띠까지 백옥으로 장식했다. 옥에 대한 집착은 왕실에서 귀족층과 민간으로까지 전파됐다. 민간에서는 귀한 아들이 태어나면 옥동자라고 부르고, 딸의 이름에도 「옥」 자를 넣어 귀하다는 의미를 표시하고자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람들이 옥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일정한 벼슬 이하에 있는 사람들은 아예 옥(玉) 사용을 금지토록 영을 내린 대목도 나온다.
(홍산 유적지 석관묘의 옥 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