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소믈리에 한마디!
조선 시대 이래 서울은 조금씩 영역이 확장되어 왔다. 어떻게 보면 가장 서울다운 서울은 어쩌면 강남일지 모른다. 그러나 강남의 성공은 도시사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모두 마치 비법이라도 배운 것처럼 강남 개발 과정을 본따 신도심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붕어빵 도시들이 되어 갔다. 강남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이 책을 통해 강남에 끌려가는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소개
저자 한종수
저자 한종수는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롯데관광과 한국토지공사(현 LH)에서 일했으며, 현재 세종시 도시재생센터 사업지원 팀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중 역사책을 쓰는 작가로서 거창한 역사 담론보다는 그 사이에 파묻힌 사람들의 흔적과 일화를 발굴해 새로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업을 해왔다. 한국토지공사 재직 중에 도시사(都市史)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서울 토박이이자 세종시 건설의 참여자로서 서울과 세종의 주요 공간과 그에 관한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2차대전의 마이너리그』(2015년), 『제갈량과 한니발, 두 남자 이야기』(2013년), 『세상을 만든 여행자들』(2010년)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환관 이야기』(2015년), 『제국은 어떻게 망가지는가』(2012년)가 있다.
저자 강희용
저자 강희용은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한양대학교 도시공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강남과 인접한 동작구에서 제8대 서울시의원을 지냈고, 서울시 재개발 및 균형발전위원회 위원, 서울시도시계획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서울시 도시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관여해 왔다. 2013년 미국 국무부에 의해 세계 차세대 지도자로 선정되었다.
목차
들어가며
제1부 강남 개발이 시작되다
1. 개발 이전의 강남
2. 자동차 시대를 예비하다
3. 강남을 만든 수방 사업
4. 강남 건설
5. 명문 학교들의 개척 시대
6. 개발 초기의 풍경
제2부 더, 더 커지는 강남
7.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그리고 잠실
8. 더, 더 커지는 강남
9. 강남의 부촌들
10. 강남의 허파들
11. 지난날의 그늘
12. 현재의 강남
13. 서울시 도시기본계획과 강남
제3부 강남들
14. 작은 강남들
15. 강남의 영향
마치며
강남 개발사 연표
도판 저작권 및 출처
참고 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강남은 달린다!
‘강남’이란 말조차 없던 시절의 미개발 불모지에서
수도 서울의 ‘특별구’가 되기까지
강남 개발의 역사
원래 ‘강남’이란 말조차 없던 시절이 있었다. 이 책은 한강 이남의 미개발 불모지였던 강남이 우리나라와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역사를 소개한다. 아직 ‘영동’이라 불리던 시절, 장차 경제 성장을 견인할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장벽 같던 한강을 건널 수 있게 해준 제3한강교가 완공되면서 강남은 본격적인 개발 시대를 맞는다. 대대적인 수방 사업과 공유수면 매립, 택지 조성 사업을 통해 강남은 거대한 개발 부지로 재탄생하고 변변한 건물 하나 없던 허허벌판에는 격자형으로 도로가 깔렸다. 그리고 오늘날 강남을 있게 한 주인공들―유명 아파트와 거리들, 빌딩들, 그리고 수많은 사건들―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다.
출판사 리뷰
현대사를 증언하는 강남 개발의 역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형제 중 공부 잘하는 아들이 있으면 온 집안이 그를 위해 희생을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지역으로 치면 아마 강남이 그런 ‘잘난 아들’에 해당할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명문 학교와 국가기관이 옮겨 갔고 각종 특혜가 퍼부어졌기에 지금의 강남이 존재할 수 있었다. 강남에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했던 꿈틀대는 힘과 욕망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새로운 화해의 시대를 예감하며 여유로운 시선으로, 질시와 지탄의 강박을 벗고서 숨 가쁘게 달려 온 강남 개발의 역사를 돌아본다. 강남은 한국 현대사의 얼굴이다. 강남을 안다는 것은 한국 현대사를 안다는 것과 같다.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서울, 어디를 개발할 것인가?
1960년대에 서울은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포화 상태였다. 인구 급증은 주택난 등 각종 도시 문제를 낳았는데, 특히 수도 방위 차원에서 심각한 안보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휴전선에서 불과 4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강북에 지나치게 많은 인구와 중요 시설이 집중되는 형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서울의 도심 기능을 분산시켜 안보상의 부담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어디를 개발할 것인가? 만약 우리나라가 분단국가가 아니었다면 국토의 전통적인 중심축인 서울-개성-평양 축에 있는 은평, 고양, 파주 쪽이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먼저 개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한강을 건너지 못한 1백만 명가량의 시민이 공산 치하에 남겨져 고초를 당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때였고 1960년대 후반은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던 시기였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한강 남쪽, 강남으로 눈을 돌렸다.
아직 ‘강남’이란 말조차 없던 시절
1963년 이전까지 오늘날 우리가 ‘강남’이라 부르는 곳은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한, 논밭이 대부분이고 달구지나 지나다니는 소로(小路)들로 마을과 마을이 이어진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지금은 이곳을 ‘강남’이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영등포 동쪽’ 또는 ‘영등포와 성동(城東) 중간’이라는 뜻의 ‘영동(永東)’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실제로 1970년대에 시작된 개발 계획의 정식 명칭도 ‘강남 개발’이 아닌 ‘영동 개발’이었다. 다시 말해 ‘강북’이 곧 서울이었고, 한강 이남의 사람들은 강 건너를 ‘서울’이라고 불렀다.
커지는 강남 개발 규모
1963년 1월 1일 서울시 행정구역이 변경되면서 드디어 오늘날 강남에 해당하는 지역들이 대거 서울에 편입되었다. 1966년 9월 서울시는 반포에서 삼성동에 이르는 800만 평을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해 달라고 건설부에 요청해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강남 개발이 시작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강남 개발을 밀어붙일 힘과 속도가 제대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린 다음 날, 영동구획정리지구 시행 공고가 났다. 맨 처음 영동구획정리지구는 313만 평 규모였다. 하지만 정부가 지시한 고속도로용 부지 9만 평과 공공용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구획정리지구는 520만 평으로 늘어났고 1970년 후반에는 무려 937만 평에 이르게 되었다. 사대문 안 면적이 500만 평에 불과함을 떠올리면 강남의 면적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할 수 있다. 이렇게 되자 서울시는 적당한 면적 단위로 점진적으로 개발한다는 당초 계획을 바꿔 이 엄청난 공간을 시가지화할 필요가 생겼다. 정부와 서울시는 강남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많은 정책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그리고 불과 10여 년 만에 강남은 완벽하게 현대 도시로 탈바꿈한다.
강남과 강북을 이어준 제3한강교
강남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이었고 그것만으로도 개발 잠재력이 엄청났다. 하지만 한강이 큰 장벽이었다. 오늘날에야 한강 다리가 흔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한강에 다리를 놓는 일은 국가적 대역사였다. 1917년 건설된 최초의 한강 다리인 제1한강교(한강대교) 이후 두 번째 다리인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건설되기까지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 그렇지만 한강에 다리를 놓을 수만 있다면 강남은 기존 도심에서 지척이었다. 1969년 12월 25일 마침내 제3한강교가 준공되었다. 이 다리는 한강을 넘어 진정한 의미에서 ‘강북’과 ‘강남’을 이어준 첫 번째 다리였다. 훗날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땅값 폭등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그보다 먼저 착공한 경부고속도로와도 이어져 그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제3한강교는 ‘강북’으로부터 ‘강남’이라는 지역을 잉태하는 탯줄이 되었다.
거대한 개발 부지로 재탄생하다
강남의 또 다른 약점은 지대가 낮아서 자주 물에 잠긴다는 것이었다. “남편이나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로 강남은 대대적인 수방(水防) 대책 없이는 도시로서 기능할 수 없는 땅이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겪고 나서 일제가 쌓은 제방이 있었지만 그것은 원효로와 영등포, 노량진 일대만 겨우 지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마포, 뚝섬, 광진, 강남, 여의도, 잠실 일대는 홍수가 나면 모두 물에 잠겼다. 한강을 서울의 중심 생활권으로 만들기 위한 한강 개발이 1967년부터 시작되었다. 강변1로를 제방도로 형태로 건설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제방도 제방이지만 한강의 수량과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거대한 댐이 필요했는데 마침 소양강댐이 1973년에 완공되었다. 이러한 수방 사업을 거쳐 서울 시민들은 홍수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가장 큰 혜택을 본 지역은 물론 강남이었다. 이어서 ‘공유수면’ 매립을 통한 택지 조성이 뒤따랐고 강남은 진정한 의미에서 거대한 개발 부지로 거듭났다. 동시에 강남에는 폭 40~90미터의 광로(廣路)와 대로 등 무려 37개의 간선도로가 격자형으로 깔렸다. 이런 식의 도로망은 한국에서는 처음이었는데, 특히 제대로 된 건물과 시설들이 들어서기도 전, 허허벌판에 시원스레 뚫린 도로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도대체 이렇게 넓은 도로가 왜 필요한 걸까?”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가졌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강남의 도로들은 자동차들로 가득 찼고 휑하던 거대 블록마다에는 근사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며 고층 빌딩들이 들어섰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인물과 기업들이 이야기를 남겼고 랜드마크가 될 건물들이 속속 등장했다.
아파트 지구가 만들어지다
수방 사업과 공유수면 매립을 마쳤지만 한강변에서 좀 안쪽의 반포, 서초동 일대는 여전히 강변도로보다 지대가 낮았다. 원칙대로라면 제대로 매립을 해서 지대를 높여야 했지만 서울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심한 홍수가 나거나 벼락이 쳐서 배수펌프장에 전기 공급이 중단되면 저지대는 꼼짝없이 물이 찰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서울시장 양택식은 저지대 지역은 모두 3층 이상으로 집을 짓게 하는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최악의 경우 주민들이 3층 이상으로 대피하면 인명 피해는 없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리 하여 침수되는 지역까지 전부 아우르는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 지구’가 강남에서 공식 탄생하게 된다.
한편 순조로운 개발을 위해선 아주 많은 주민들이 필요했다. 초기에 강남 최초의 아파트 단지인 논현동 공무원아파트가 지어졌고 영동 주택단지가 조성되어 성공리에 분양을 마쳤지만 이것들은 규모가 너무 작았다. 그 정도로는 강남의 넓은 공간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8월 공식적으로 ‘아파트 지구’가 고시된다. 반포 지구 167만 평, 압구정 지구 36만 평, 청담 지구 11만 평, 도곡 지구 22만 평, 잠실 지구 74만 5천 평 등 강남에 설정된 아파트 지구는 다른 지역과 비교를 불허하는 단연 압도적인 규모였다. 이곳에 오늘날 강남을 대표하는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대문 안 구도심과 영등포를 따라잡다
원래 정부는 영동 개발을 시작하면서 서울시청을 비롯한 112개 국가기관을 모조리 옮기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많은 국가기관이 강남으로 이전했다. 대법원, 서울고등법원, 검찰청, 국정원, 한국은행 전산본부 등이 강남에 자리 잡았다. 한편, 1974년에 서울시장에 부임한 구자춘은 ‘3핵 도시론’에 미쳐 있었다. ‘3핵 도시론’이란 사대문 안 기존 도심을 첫 번째 핵으로, 여의도와 영등포 산업 지대를 두 번째 핵으로 삼고, 세 번째 핵으로 강남을 건설한다는 도시계획안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지하철 2호선의 노선을 강남을 관통하는 순환선으로 바꿔 버리는 한편, 적극적으로 명문고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그에 따라 경기고, 서울고, 숙명여고 등 이른바 강북의 명문고들이 옮겨간 강남구와 서초구는 유명한 ‘강남 8학군’과 ‘강남 교육특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 강남은 점점 대형 병원의 메카로 변해갔다. 건설회사들에 이어 백화점 기업들이 굴지의 대기업으로 커가는 곳이 되었으며, 고급 음식점과 카페가 생기고 외국 외식 문화가 도입되며 한국 소비문화를 선도하는 공간이 되어 갔다. 강남에 자리 잡은 대형 교회와 성당 또한 신자들이 급격히 늘어나며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또 강북에서 신설 및 이전이 금지된 유흥업소들이 몰려들어 신사, 압구정, 논현동 일대는 화려한 유흥가로 변해 갔다.
더 커지는 강남: 잠실, 수서, 분당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던 영동 개발은 놀랍게도 10여 년 만에 완료되었다. 하지만 개발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강남은 계속 확장되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잠실을 개발했다. 이때 지어진 아시안선수촌아파트와 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아파트 문화를 진일보시켰고 무엇보다 잠실이 강남권에 묶이는 데 있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외에도 잠실종합운동장을 비롯해 예술의전당과 코엑스 등 오래도록 강남의 간판이 될 랜드마크들이 전두환 정권 시기에 자리를 잡았다. 노태우 정권 시기에 들어서도 강남 개발은 수서와 일원, 분당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
개발의 그늘: 사라져버린 것들과 어두운 기억들
이 책은 강남 개발 시기를 거치며 사라져버린 옛 기억의 장소들을 차근차근 돌아본다. 수방 사업의 일환이었지만 한강변에 제방을 쌓고 강변도로를 만들면서 사라져버린 옛 한강변의 풍경에 대한 아쉬움이라든지, 1970년대 초 압구정동과 옥수동 사이에 있던 저자도(楮子島)가 아파트 대단지 건설을 위해 골재로 채취되어 사라져버린 이야기, 여의도 개발 당시 저자도와 비슷한 운명을 맞았던 밤섬 이야기, 잠실 물막이 공사의 결과로 잠실섬 아래를 흐르던 송파강이 사라지고 석촌호수로만 남게 된 이야기 등을 빠짐없이 소개한다. 그 외에도 강남 개발 장면마다 수많은 뒷이야기들이 독자들을 기다린다. 정부 유력 인사가 주도한 부동산 투기,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일으킨 수서 사건, 끊어진 성수대교와 무너진 삼풍백화점에 얽힌 사연 등 강남 곳곳에 남겨진, 이제는 역사가 된 에피소드들 또한 강남 개발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록에 남겼다.
가장 서울다운 서울은 강남이다
조선 시대 이래 서울은 조금씩 영역이 확장되어 왔다. 조선의 수도가 ‘사대문 안’ 한양이었다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명동을 중심으로 한 신시가 형성을 주도했다. 그리고 현대에 강남이 새로이 편입되어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보면 가장 서울다운 서울은 어쩌면 조선 시대의 한양도 아니고, 일본이 만든 경성도 아니며, 강남이다. 하지만 강남의 성공은 우리나라 도시사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한때 서울을 강타한 뉴타운 광풍은 강남에 역전당한 강북 사람들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였다. 언젠가부터 부산과 대구 등 광역시는 물론이고 소도시들조차 모두 마치 비법이라도 배운 것처럼 강남 개발 과정을 본 따 신도심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지방 도시들은 구도심이 죽어 버리고 특징이 없는 그저 그런 붕어빵 도시들이 되어 갔다. 최근에 와서는 어떤 개발론자도 63빌딩과 올림픽도로, 잠실 주경기장을 서울의 자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은 강남의 역사를 말하는 데서 조금 더 나아가 강남에 끌려가는 우리 사회를 성찰하며 우리 도시들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책 속으로
뽕밭이었던 잠원동은 무가 자라기 좋은 모래 토질이어서 단무지 농사가 잘되었고, 서초동은 미군과 서울 사람이 사가는 화초를 키우는 꽃동네였다. 압구정은 배나무 과수원골이었고, 도곡동은 도라지 특산지였다. 청담동은 이름처럼 물 맑은 청숫골이었다. 가장 기름진 땅인 개포동, 일원동 일대에서 난 과일과 채소들은 품질이 상급인 데다 산지가 가깝기까지 해서 서울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었다. / 한강 나루를 오가는 나룻배들은 과일과 채소, 그리고 한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가득 싣고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개포동, 일원동 일대의 주민들이 서울 시내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지금의 타워팰리스 부근 양재천변에서 ‘엔진배’를 타고 탄천을 따라 올라가 뚝섬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양재동까지 육로로 가면 거의 1박 2일이 걸렸다고 하니 그 정도로 강남은 오지였다.(25쪽)
공유수면 매립 공사는 봉이 김선달이 환생해도 놀랄 정도로 무조건 남는 장사였다. 건설 비수기인 12월부터 4월까지 노는 중장비와 노동력을 이용해 첫해에는 우선 제방만 쌓아 두고, 다음 해 비수기에 모래를 퍼부어 공유수면을 매립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지 위에 자신들이 직접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거나 아니면 땅을 그냥 국영기업체나 정부 투자기관에 일괄 매각할 수 있었다. 어느 쪽이건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장사였다. 이런 식으로 한강변은 강변도로에 이어 아파트 숲이 되어 갔다.(53~54쪽)
박종규의 질문은 간단명료했다. “헬기로 돌아본 지역, 즉 과천, 서초, 강남, 잠실 중에서 어느 곳이 가장 장래성이 있고 투자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윤진우는 탄천 서쪽이 가장 유망한 것 같다고 답했다. 바로 오늘날 강남구가 된 땅이었다. 박종규는 “그러면 그쪽을 사 모으라”고 지시했다. 약 2주 후 윤진우가 그 일을 거의 잊고 있을 때 시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갔더니 “제일은행 고태진 전무실에 가면 돈을 줄 테니 받아 와서 우선 그 돈으로 땅을 사 모으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높은 곳에서 나온 자금으로 땅을 사 모으고 땅값이 어느 정도 상승하면 되팔아서 갖다 바친다. 이 사실은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매우 높은 분 한둘과 김현옥 서울시장, 그리고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 사항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윤진우는 흥분했다. 당시 청와대는 누구든 생사여탈을 자유자재로 하는 절대 권력이었다. 윤진우는 ‘그 어른에게 잘 보이면 출세길이 훤하게 뚫린다’고 생각하니 흥분 때문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208쪽)
1966년 초 평당 2백~4백 원 수준이던 말죽거리 땅값은 1968년 말 불과 2년 만에 평당 6천 원으로 뛰었다. 부동산투기억제세가 부과되고 불경기 등으로 일시적으로 주춤하기도 했지만 강남의 땅값 상승률은 늘 타 지역을 압도했다. 예를 들어 1963년 당시 땅값 수준(지수)을 100이라 했을 때, 1970년 강남구 학동의 땅값은 2,000, 압구정동은 2,500, 신사동은 5,000이 되었다. 7년 만에 각각 20배, 25배, 50배가 오른 것이다. 같은 기간에 중구 신당동과 용산구 후암동은 각 각 10배와 7.5배 상승하는 데 그쳤다. 1979년이 되면 아예 단위가 달라졌다. 학동의 땅값 지수는 13만, 압구정동 8만 9,000, 신사동 10만이었다. 이에 따르면, 1963~1979년 16년간 학동의 땅값은 무려 1천 333배, 압구정동은 875배, 신사동의 경우 1천 배가 올랐다. 같은 기 간 신당동과 후암동의 땅값은 각각 25배 상승하는 데 그쳤다. 물론 강남의 땅값이 그 전에 워낙 낮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정말 놀라운 지가 상승이었다.(2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