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현상을 과학으로만 설명하려는 것만큼 시시한 일은 없다. 철퍼덕하는 소릴 듣고 잽싸게 달려가 주워 핥았으나 아무 맛 없어 입안 가득 덜큰함만 느끼고 내뱉은 감맛처럼.
초등 4학년 자연시간에 해풍과 육풍을, 낮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밤에는 육지에서 바다로 바람이 분다고 배울 때였다
아무래도 난 아닌 것 같아 선뜻 반기를 들었다
"아닌 것 같아. 바람은 제 멋대로 불던데?? 어떤 땐 한 점 불지도 않다가 또 어떨 땐 마구 불어대고 바다 육지 구분 없이 불던데?"
이런 나를 엄마는 '쎄가 나서 그런거니 놔둬라' 글귀 못알아먹는 아인 아니라고 성난 언니 오빠들에게 손막음을 치셨다
굳이 되묻진 않았으나 '쎄'가 난다는 말은 뿔 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행암 시절 뿔난 염소가 이리저리 치받고 날뛰는 통에 풀 먹이러 나섰던 오빠가 어찌나 성이 났던지 염소뿔을 씩씩대고 뽑아들고 왔더란 얘기를 집안에서 하도 들은 터라 내게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뿔이 돋아나서 그런 것이란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쎄가 나고 성이 나고 뿔이 나는 것을 동의어로 묶어두고 있었다
그 버릇은 여전해서 지금도 과학적 진리를 깡그리 무시하고 내 경험치로 자연 현상을 해석하곤 한다 꽃이 피고 단풍 지는것 조차 기온차에 의한 것으로 꽃은 남에서 북으로 북상하고 단풍은 북에서 남으로 남하한다는 사실이 넘 밍밍한 생각이 들어 달리 보기로 했다
꽃시샘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한송이가 무리 중 튀고 싶어 뽈속하고 고개 내밀어 빛을 내봤더니 덩달아 주변 것들도 시샘하듯 피어 꽃무리를 만드는것이 꽃 피는 시기 아닐까? 마치 '안피면 지는 거다'라는 유행어처럼 단풍도 그럴 것이라 굳이 강원도 가야 지금의 만산홍엽을 볼 기대는 하지 말자고 했다가 봉변을 당했다 군더더기 없고 명징한 과학도 앞에서 말이다.
쎄가 나서 그럴 거라고 넘기면 좋을 일을 혀까지 휘둘러가며 쯧쯧거리는 통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단풍 따윈 관심 없고 연포 분교가 있으니 가보자고 나섰다 궁색한 변명 같아 보였을거다.
그렇게 나선 가을 기행이었다.님도 보고 뽕도 딴다는데 단풍도 보고 '김봉두 선생' 영화 촬영지이자 30년간 유지되다 폐교된 연포 분교를 찾게 된 것이다.
또 한번 얼척 없다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도무지 과학도와 얼치기 문학가의 궁합이란.
연포 분교는 강원도 영월군과 정선군을 가르듯 동강을 끼고 흐르는 곳에 위치해 있다 두 지역은 강가에서 얼굴을 씻고 빤한 날빛으로 바라보면 서로 대화가 될 정도로 지척에 있다
인구 감소로 급속하게 쇠락해가는 시골에 빈 집들이 속출한 요즘이지만 분교가 들어섰을 당시만 해도 골짜기마다 아이들이 넘쳤을 것이다
영화 '선생 김봉두'에서도 그렇듯 도시에서 오지로 부임한 교사는 매사 짜증스런 태도로 나른한 일상을 보내지만 그런 급 낮은 교사일망정 당신의 아이들 교육을 맡은 분이라며 칙사 대접을 할 정도로 순박했던 어른들의 모습도 실제 그 곳 상황과 흡사했다고 한다
김봉두는 밀려났다는 패배감을 그 곳 천진한 아이들에게서 위로 받고 점점 사명감 지닌 교사로 거듭 난다는 것은 영화 속 시나리오만은 아니었던가 보았다.
은근하게 촌지 요구를 했으나 그 뜻조차 모르던 학모들은 그 날 수확한 배추를 내놓질 않나
기대한 식사 초대 자리에 된장국과 푸성귀만 오른 상에 적잖이 실망도 하는 김봉두지만 결국엔 폐교 반대에 한 몸 던지는 열혈 교사로 변신하게 된다
물론 극본이었으나 연포 분교 앞에 서보니 정말 김봉두가 느꼈을 막막함이 절로 와닿았다 고립된 곳에 홀로 섰을 듯한 적막함이 밀려 오는 듯 했다
동강을 마주한 두 마을에는 아이들 소리 끊긴 지 오래된 듯 세상 고요를 다 담고 있었다 폐교된 분교는 한동안 캠핑장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인부들 숙소로 개조해서 교실들은 들여다 볼 수 없었다 강 기슭에는 주민들이 이용하는 줄배가 한가로이 놓여 있었다 30년 전만 해도 줄을 잡고 학교와 집을 오갔을 것이다
내정 마을 주민 말씀으로는 당신 어린 시절엔 줄배도 아니었고 삿대를 이용한 배였다고 했다
자료에서 찾은 사진 속 쌍둥이 자매가 나섰던 길을 걸어보았다 그들이 뛰어놀았을 운동장 많은 부분은 배추밭으로 변해 있다. 속절없이 나도 늙었으려니와 이 곳에서 재재거리며 웃음 흘렸을 그들도 동강을 추억하며 어디선가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인근 늦깎기 고추 수확하느라 인부들이 밭에 매달려 있을 뿐 푸른 강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기암 괴석들은 단풍과 함께 절경을 이루건만 우리 외 관광객 발길 조차 찾을 수 없었다.
자료를 더 찾아보니 등교를 위해 배주인도 아닌 아이들이 스스로 삿대에 의지한 채 배를 몰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증언대로 줄배 이전엔 그렇게 다녔던 모양이다.
내 나이 네 살이었을까 다섯 살이었을까 행암 분교 가는 길이 다소 수월해진 일이 벌어졌다
도로 앞에 버티고 서 있던 돌출한 큰바위를 깨뜨리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 발파 소음이 아직 귀에 쟁쟁한데 언니 오빠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일이었을거라고 일축해버린다 서로의 기억이 이리저리 가리사니를 못 찾고 있다 오래 전 사라진 고향 탓인가 보다.
언제 고향가면 시사지를 열람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