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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나교 (인도 종교) [Jainism]
BC 6세기경에 바르다마나(Vardhamāna)가 당시의 정통 베다(초기 힌두교) 의례에 반대해 창설한 인도의 종교이자 철학.
제24대 티르탕카라(Tirthankara : 구원자)이며 지나(Jina : 승리자, 자이나교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했음)로 마하비라(Mahāvῑra : 위대한 영웅)로도 알려졌고 그의 선례를 따르는 것이 자이나교의 중심내용을 이룬다. 자이나교를 처음 주창한 사람들은 베다 시대의 동물 희생제에서 만연했던 살생 관행과 관념에 반기를 든 한 종파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창조신을 믿지 않는 자이나교는 아힝사(ahimsa)의 교리, 즉 어떠한 생명도 살상하지 않을 것을 윤리의 핵심으로 삼고 인간의 본성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주로 고행과 수도생활을 통해 성취해야 할 종교적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
티르탕카라 (자이나교) [Tirthankara]
지나(Jina:'승리자')라고도 함.
(산스크리트로 '나루를 만드는 자'라는 뜻)
인도 종교의 하나인 자이나교에서, 윤회라는 삶의 흐름을 건너는 데 성공하고 다른 사람들이 따를 길을 만든 구원자.
마하비라(BC 6세기)가 현세에서 마지막 티르탕카라였다. 그에 바로 앞선 티르탕카라였던 파르슈바나타는 그보다 250년 전에 생존했다. 자이나교 경전에서 언급되는 다른 티르탕카라들은 역사적 실존 인물로 간주되기 어렵다.
자이나교 신앙에 따르면 각각의 우주적 주기마다 24명의 티르탕카라들이 나타나는데, 청정성이 쇠잔해지는 주기의 티르탕카라들은 초기에는 거인으로 나타나지만 시대가 지남에 따라 체구가 작아지고 점점 더 짧은 시간 간격 뒤에 나타난다. 티르탕카라는 회화나 조각에서는 카요트사르가(kāyotsarga:'육신으로부터의 해탈')라고 알려진 부동의 자세로 서 있거나, 사자좌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형상은 종종 대리석 또는 그밖의 매우 반들반들한 돌이나 금속에 새겨지는데, 그 차가운 느낌을 주는 표면은 일상세계에 대한 냉엄한 초연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티르탕카라들은 완벽한 존재들이므로 상징적인 색깔이나 표상을 제외하고는 서로 거의 구별할 수 없다.
티르탕카라 24명의 이름은 그 어머니들의 태몽 또는 그들이 세상에 도래할 때의 상황에 따라 지어졌다. 그들의 이름에는 주(主)를 의미하는 나타(nātha)라는 경칭이 붙기도 한다.
현세의 지나들의 이름, 표상과 상징적 색깔을 그 출현 순서에 따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아디('최초의')라고도 불리는 리샤바나타('황소')는 표상은 황소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② 아지타('無敵의 존재')는 표상은 코끼리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③ 샴바바('상서로운')는 표상은 말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④ 아비난다나('숭배')는 표상은 원숭이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⑤ 수마티('지혜로운')는 표상은 왜가리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⑥ 파드마프라바('연꽃의 광명')는 표상은 연꽃이며 상징적 색깔은 빨간색이다. ⑦ 수파르슈바('아름다운 허리의')는 표상은 만(卍)자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⑧ 찬드라프라바('달빛')는 표상은 달이며 상징적 색깔은 흰색이다. ⑨ 수비디('적절한 방법')라고도 불리는 푸슈파단타('종교적 의무' 또는 '꽃으로 된 치아')는 표상은 돌고래 또는 바다의 용이며 상징적 색깔은 흰색이다. ⑩ 시탈라('서늘함')는 표상은 만자흉표(卍字胸標)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⑪ 슈레얌샤('더욱 훌륭한')는 표상은 무소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⑫ 바수푸지야('재물을 봉헌하여 섬겨야 하는')는 표상은 물소이며 상징적 색깔은 빨간색이다. ⑬ 비말라('청정한')는 표상은 멧돼지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⑭ 아난타('무궁한')는 표상은 매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인데, 공의파(空衣派)에서는 양 또는 곰을 표상으로 한다. ⑮ 다르마('의무')는 표상은 번개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⑯샨티('평화')는 표상은 영양 또는 사슴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⑰쿤투(확실한 의미가 알려져 있지 않음)는 표상은 염소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⑱아라(시대 구분의 하나)는 표상은 난디아바르타(복잡한 형상의 卍字)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인데, 공의파에서는 물고기를 표상으로 한다. ⑲말린('씨름꾼')은 표상은 물항아리이며 상징적 색깔은 파란색이다. ⑳무니수브라타라고도 불리는 수브라타('훌륭한 서원을 지닌')는 표상은 거북이며 상징적 색깔은 흑색이다. 니민('눈짓')이라고도 불리는 나민('절하는')은 표상은 푸른 연꽃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아리슈타네미('안전한 바퀴의 테')는 표상은 소라고둥이며 상징적 색깔은 흑색이다. 파르슈바('허리')는 표상은 뱀이며 상징적 색깔은 초록색이다. 나중에 마하비라('위대한 영웅')로 불리는 바르다마나('增長')는 표상은 사자이며 상징적 색깔은 금색이다. 티르탕카라의 형상은 축복을 주거나 인간사에 간여할 수 있는 인격적 신으로 숭배되지 않는다. 자이나교 신봉자들은 다만 위대한 존재들의 상징으로서 그 형상들에 경의를 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속세를 떠나 지고의 덕을 향하고자 하는 의지가 굳건해지고 궁극적으로는 해탈을 향한 길로 고무되기를 바랄 뿐이다.
마하비라 (BC 448?~BC 376?) = 마하비라 바르다마나
자이나 교의 교조이다. 니간타나타푸타라고도 한다.
한역불전(漢譯佛典)에서는 대웅(大雄) 또는 대용(大勇)으로 표기되었다.
출가 이전의 이름은 바르다마나이고, 크샤트리아 출생으로 주나타족(族)에 속한다. 아버지는 바이샤리시(市) 근교의 쿤다 촌(村)의 호족 싯다르타, 어머니는 바이샤리 왕의 누이동생인 트리샤리이다. 부모가 죽은 후 출가하여 12년의 고행 속에서 나체로 다니면서 단식을 통한 끝에 깨달음을 얻어 지나[勝利者]가 되었다. 국왕과도 연고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포교에 많은 편의가 제공되어 바이샤리 지방에 많은 신도를 갖고 있었다. 자기의 가르침이 과거 24성(聖), 특히 마지막 7성(聖)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이들 성인을 모두 지나라고 불렀다. 자이나교의 명칭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그는 30여 년 동안 깨달은 진리를 설법하며 곳곳을 편력하고 72세에 파트나시(市) 근교에서 생을 마쳤다.
자이나교 [ Jainism ]-인도에 현존하는 유서깊은 종교.
자나교라고도 한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비정통(非正統) 브라만교에서 발생한 출가주의(出家主義) 종교이다. 불전(佛典)에서 니간타(Nigantha:尼乾陀)라고 전하는 종교를, 석가와 같은 시대의 마하비라(Mahvra)가 재정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최고의 완성자를 지나(Jina:勝者)라 부르고, 그 가르침이라 하여 지나교 또는 자이나교라는 호칭이 생겼다. 불타에서 연유하여 ‘불교’라는 호칭이 생긴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교조(敎祖)의 출신과 인간형성, 지리적 ·문화사적 배경, 교단 성립의 경위도 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인도에서 하나의 종교로 성립된 이후 불교 ·힌두교와 더불어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으므로, 인도의 전통적 문화와 그 유형 무형의 유산에 관해서 자이나교를 무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불교와 교단간의 밀접한 교섭은 양종교의 원시 경전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1세기 말경 공의파(空衣派)와 백의파(白衣派)로 분열되고, 다시 여러 지파(支派)가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시 경전에서는 비교적 상세한 교의(敎義)가 정립되어 있으나, 그 이후로는 불교만큼 다채로운 발전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후세에 와서 인식론이나 논리학은 불교의 영향이 현저한데, 오랫동안 산일(散佚)되어 있던 불교의 작품들이 최근 자이나교의 승원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 교도 수는 인도 전역에 걸쳐 180만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상호부조적(相互扶助的)인 성격이 강하고 상인이나 금융업자가 태반을 차지하고 있어 경제적 영향력 또한 막강하다. 그 실천생활상의 특색으로서 승려를 통하여 불살생(不殺生:ahins)이 엄격하게지켜지고 있다. 교의로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二元論)을 주창한다. 즉 생명(jiva)과 비생명(ajiva)으로 이루어져 있고, 비생명은 다시 공(空:운동의 원리) ·비공(非空:정지의 원리) ·물질재료 ·허공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이 형이상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다음 7종 또는 9종(선 ·악을 포함하여)의 실천론적 계열이 모든 가능태(可能態)로 제시된다. 즉 생명 ·비생명 ·선 ·악 ·누(漏) ·박(縛) ·차(遮) ·멸(滅) ·해탈(解脫)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이 외적 대상의 영향을 받아, 물질재료가 생명 속에 누입(漏入)하고[漏], 그것이 물질적 업(業)을 형성하여 생명을 속박한다[縛]. 그리고 외적 ·내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업물질(業物質)의 누입을 정지시키고[遮], 또한 이 업물질을 멸(滅)한다. 이 멸한 상태가 해탈이다. 해탈에 이르게 하는 덕목(德目)으로는 정견(正見) ·정지(正知) ·정행(正行)으로 요약되거니와, 구체적으로는 불교의 오계(五戒)에 해당하는 오금서(五禁書:브라다),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에 해당하는 삼기율(三紀律:구프티), 오용심(五用心:사미티)이 특히 요구되고 있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www.penart.co.kr/literature-library/2_world-literature/india/039.htm
불교와 자이나교에 대해서 다시 간단히 정리해 보자. 불교나 자이나교의 공통점은 인간은 자신의 업에 따라 윤회한다는 것과 이를 퇴치하는 수단으로 스스로 자각하여 깨달음의 경지로 넘어서는 것이며, 출가하여 수행을 하는 방식과 불살생, 불망어, 불투도 등의 계율, 철저한 금욕주의 등을 들 수 있다.
두 종교가 서로 다른 점은, 불교는 수행방법에서 중도인 반면, 자이나교는 극단적 고행주의이다. 불교는 물질과 개가 다르지 않다는 즉, 만법이 귀일하다는 일원론인 반면, 자이나교는 물질과 정신이 분리된 철저한 이원론의 입장이다.
그럼 왜 불교가 자이나교보다 더 발전하게 되었을까? 초창기 불교의 교리는 바라문교와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 불교 교리의 중 윤회, 업사상은 석가모니 당시 인도에서도 있었고, 자이나교에도 이러한 사상이 있었다. 불교가 인도에서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어 국제적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평등사상에 근거한다.
이는 불교의 자비정신으로 발전되었으며, 고대 인도의 재편기에 사회적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거상들과 부호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새로운 사회적 이상으로 수용되었다. 이 자비와 평등의 사상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치면서 '대중구원 사회구원'의 대승불교로 심화되어, 소수 지식층의 종교가 아닌 대중종교로 확대 되었다
반면, 자이나교는 불교만큼 다채로운 발전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이나교에 있어서 구원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아니라 불교와 마찬가자로 오직 개인 각자의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적일 뿐 큰 종교로서 발전하려면 대중성과 종교의 구성요소인 교단이 그다지 성립되지 못한게 불교에 비해 크게 발전을 못한게 아닌가 생각된다
순수한 형태의 자이나교도는 현재 약 200만명 정도에 불과하고 주로 봄베이와 구자라트주에 거주하고 있다. 현재 자이나교도 수는 인도 전역에 걸쳐 180만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상호부조적인 성격이 강하고 상인이나 금융업자가 태반을 차지하고 있어경제적 영향력 또한 막강하다.
자이나교의 교리적 기원은 제1대 티르탄가라(Tirthankara)인 리샤바(Rishabha) 마하비라이지만, 교조는 제 24대 티르탄가라인 마하비라이다. 즉 힌두교의 브라만 사상보다도 더 상고로 올라가서 물활론적(animistic) 힌두교 안에 포함된 관념들이 자이나교의 정통 사상이다. 그러므로 자이나교는 힌두교 내의 다신교 신앙을-그것이 자연적 신앙이든 초자연적 신앙이든-모두 거부한다. 그들은 어떠한 신에게든 제사하거나 기원하는 것도 거부한다. 그러나 마하비라는 사후에 신격화되어 신자들로부터 다른 23승리자들, 혹은 성자들(Tirthankara)과 함께 예배와 기도를 받고 있다.
자이나교는 영원, 자존, 최고의 실유로서의 창조자 하나님을 부인한다. 그 대신 그들은 인간 존재의 영원성, 생명의 보편성, 신회되고 해탈된 인간 영혼이 하나님을 대신함을 믿는다. 그들은 시조를 신으로 격상시켜서 믿고 24티르트한카라 등 많은 구원자를 설정하였다. 자이나교가 힌두교의 차이점은 힌두교가 초자연적 능력을 믿는 유신 사상이라면 자이나교는 초자연적 능력이나 초월적 신적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은 카르마(karma) 법칙의 불변성 구원(Mok놈)의 방편으로서의 지성과 자기 의존을 믿는다. 자이나교도에게 무신론적이라고 하면 그들은 격노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현대 종교학적 의미에서 유신론적 요소는 극히 적고 무력하다.
자이나교의 우주관은 두 독립된 범주들의 영원 공존 우주관이다. 즉 지바(Jiva-living, 생)와 아지바(Ajiva-nonliving, 비생)의 범주이다. 전자는 영혼(Purusha)이 있는 실체이고 후자는 물질(Prakriti)뿐인 실체이다. 과거에 있었고 현재에 있고 미래에 있을 생물(animate)과 무생물(inanimate)로 이분된다. 이것은 정신(mind)과 물질(matter)의 이분법(dichotomy)적 세계관이다. 영혼(jiva)은 식물, 불, 물, 바람, 땅의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생물과 무생물을 통하여 창조주 없는 우주가 존재한다.
자이나교의 철학이 불교나 힌두교와 비교해 볼 때 우주를 생물(animate-jiva-soul)과 무생물(inanimate-ajiva-nonsoul)의 두 본체(substances)로 보는 이원론적 체계(system)가 불교나 힌두교의 체계들(systems)과는 중요한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모든 실체들(substances) 속에는 언제나 각각의 개체적 특성(individual characteristics)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실체들이 존재한다는 개념은 우리들의 인지(認知, perception)나 깨달음(自覺,awareness)을 통해서 파악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자이나교의 인식론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실재론자의 철학(philosophy of realist)이라고 한다.
우주에 살고 있는 영혼의 수는 무한(infinite)한데, 그들 중 대부분은 영원히 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birth, death, rebirth) 윤회(Samsara)의 과정 안에서 끊임없는 윤회를 강요당할 것이다. 이 세상은 자체가 흥왕과 쇠퇴를 반복하게 되어 있다(This world is itself subject to a process of growth and decline). 이 세계는 우주의 일부분이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무수한 우주적 기복(cosmic cycles)을 되풀이하면서, 문명의 발달과 쇠퇴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현재 우리는 문명이 하강하는 단계 가운데 다섯 번째 단계에 와 있다.
명백한 운명론이나 체계에 의한 결정론 등은 자이나교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배척되고 있는데, 그것은 자이나교의 다면적 이론(무다무-tavada: theory of many-sidedness)과의 차이 때문이다. 이 이론은 어떤 진리 체계이든지 간에 그것이 만들어진 시각에서 볼 때만이 진리라고 한다. 문명의 흥왕성쇠는 그 문명이 속한 세계관의 시각에서 볼 때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기 쉽지만, 개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인간이 그 자신의 구원의 범위를 넘어서면 어떤 부분적인 진리 체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해방된 영혼은 온전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알게 된다. 이에 대하여 잘 알려진 우화가 여섯 장님과 코끼리에 대한 것인데, 이 우화가 바로 자이나교의 우주관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진리 체계도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측면에서는 모두 옳게 보이고 진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직 니르바나(Nirvana) 안에서의 영혼만이 완전하고 완성된 지식을 갖는 것이다.
영혼의 본질적 특징은 자각(consciousness)과 지식(knowlidge)이다. 영혼의 원초적 상태에서는 영혼은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어 있었고 그 앞에서 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영혼은 존재의 지식(the knowledge of existence in all its various aspects, and at all times, past, present and future)을 지배한다.
영혼의 지식이 불완전하고 미비한 점이 있는 것은, 현재 이 세상에서는 영혼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체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초기 존재에서 취했던 형태에 따라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가장 낮은 단계에서의 영혼은 감각(touch)이라는 한 가지 인식(sense)만을 가진다. 이것은 땅, 물, 공기, 불, 식물의 세계를 포함한다. ② 두 번째 단계에서의 영혼은 감각과 맛 두 가지 인식을 갖는데, 벌레들과 조개류가 포함되다. ③ 세 번째 단계에서의 영혼은 감각과 맛과 냄새 세 가지 인식을 갖는데, 여기에는 개미들, 바퀴벌레들, 나방들(moths)이 속한다. ④ 네 번째 단계에서의 영혼은 감각과 맛과 냄새와 시각 네 가지 인식을 갖는데, 말벌류(wasps), 메뚜기들, 나비들이 여기 속한다. ⑤ 다섯 번째 단계에서의 영혼은 감각, 맛, 냄새, 시각, 청각 등 다섯 가지 인식을 갖는다. 여기에는 네 종류가 있는데 지옥 악마 존재, 고등동물, 인간, 천상의 존재가 있다.
영혼은 제1단계에서 시작해서 다른 단계로 끊임없이 여행을 한다.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면서 카르마(Karma, 業)라는 냉혹한 법칙(inexorable law)에 따라서 움직인다.
업(Karma)의 교리를 따른다는 점에서는 자이나교가 힌두교와 같다. 이 교리에 의하면 모든 행동, 사상, 언어, 행위는 반드시 다른 행동, 사상의, 언어, 행위를 생산하게 하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교리를 카르마적 연결(Karmic bondage) 혹은 단순히 카르마(Karma, 業)라고 한다. 자이나교는 윤회(transmigration)와 전생(rebirth) 교리에 동의하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 주어진 영혼의 상태는 업(Karma) 때문에 항상 영접의 긴 세월 동안 계속된다는 교리를 따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자이나교의 카르마 교리(the Jain doctrine of Karma)는 힌두교와 차이점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카르마를 순수한 자연 법칙으로(purely as a law of nature) 보고 있으나 자이나교에서는 카르마가 마치 옹기에 붙어 있는 진흙처럼 다섯 종류로 나누어져 영혼에 붙어 있는 물질의 작은 입자로 보는 것이다.
노력과 수련과 지식에 의해서 인간이 업(Karma)을 조종(control)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자이나교의 입장이다. 이기적이고 부주의하고 잔인한 행동들은 영혼을 아래쪽으로 가라앉게 만드는 무거운 카르마가 쌓인 결과이다. 그러나 좋은 행위로부터 증가하는 카르마는 금방 흩어지기 때문에 심각한 결과가 오지 않는다. 고행은 영혼을 가볍게 해주므로 이미 쌓여 있는 업을 흩기 위해서는 고통을 자초해서 당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Mok놈)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혼을 물질로부터 자유럽게 해주어야 한다. 영혼이 가볍게 되면 위로 떠올라서 우주의 높은 꼭대기에 이르게 되는데, 높이 올라간 영혼일수록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축복을 받는다. 마하비라와 같은 영웅들의 영혼은 실제로 이와 같은 생의 구원을 성취한 것이다. 그것은 카르마가 지상에서 그들과 결합된 상태에서 금식과 참회(penance)를 통해서 업을 없애고 열반(Nirvana)이라고 하는 영원한 안식처가 있는 신들의 최고 높은 하늘에 즉시 올라가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운명론적인 것이 아니고 무신론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최고 신 개념, 창조주, 우주의 섭리자, 초자연적 존재 개념이 없다. 다만 티르탄가라스만은 예외이다. 전생(轉生, rebirth)이나 카르마라는 불가사의하고(subtlety) 또 괴변스러워 보이던 교리가 자이나교에서 정교하게 잘 다듬어졌다. 자이나교의 세계관은 염세주의적(pessimistic)이다. 이 세상은 비참하고, 슬프고, 인생의 행복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또한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보상의 길도 없(no way compensated)다.
우주에 있는 영혼의 수가 무한하고(this infinite number of souls in the universe) 전생의 싸이클의 길이가 또한 무한(infinite Iength of the cycle of reberth)하기 때문에 영혼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희귀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기간 동안을 매우 좋은 기회로 여기고 세 가지 보화(three jewels)를 가짐으로써 구원(Moksha)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 세 가지 보물이란 정지(正知, right knowledge), 정신(正信, tight faith), 정행(正行, tight conduct)을 말한다.
바른 지식은 자이나교의 신조를 아는 것이고, 바른 신앙은 그 신조를 믿는 것이고, 바른 행위는 그 신조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앞의 둘은 세 번째 것 없이는 소용이 없다. 행함이 없는 지식과 믿음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이나교의 수도승과 수녀, 평신도 남녀들은 행위를 최상의 덕목으로 삼고 비폭력적 행위를 힘써 수련하는 것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영혼이 모든 속박을 벗어나는 최종 해방을 열반(Nirvana)이라고 하는데, 열반 이외에는 생명체 존재(animate)가 무생명체 존재에 계속 속박당하게 최종 해방을 방해하는 물질을 카르마(Karma)라고 한다. 카르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매우 미세하고 미묘한 물질이다. 이것은 행동, 말, 생각 등에 명백히 보이는 결과(visable effects)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결과(invisible effects)를 만들어 낸다.
출처 :ktsnh0330 원문보기 글쓴이 : 김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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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라쉬 사원에서 북쪽으로 500m쯤 가면 자이나교 석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이나교 사원에서는 자인교도들의 믿음, 신앙 그리고 철저한 금욕주의와 비폭력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자이나교 석굴은 힌두교 석굴과 같은 힘찬 느낌은
없지만 나름대로의 정교한 조각미가 돋보인다.
32번과 34번 동굴에는 파라스나트像을 그리고 다른 자인교 동굴군에서는 티르탄카라스像과
마하비라의 좌상(座像)을 볼 수 있다.
30번 동굴
다른 자인교 사원들과는 약간 동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Chota Kailasa(꼬마 카일라쉬)라고
불리는 이곳은 카일라쉬 사원의 모습을 어설프게 모방하고 있다.
32번 동굴
정교한 연꽃 무늬로 장식된 천장으로 유명한 32번 동굴에는 열매가 무성한 망고 나무
아래에 사자를 타고 앉아 있는 약시(젊은 처녀) 모습의 조각을 볼 수 있으며 이층의
천장은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자이나교 동굴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것은 32번 동굴이다. 베다신화의 주신(主神)인
인드라의 회의장으로 알려진 이곳에는 마하비라(Mahavira, 마하비라는 자인교의 24번째,
마지막 스승으로 자인교의 창시자이다)가 안치되어 있으며 자인교 티르탕카(Tirthankar,
자인교의 스승)인 파라스나트(Parasnath)와 고마테쉬바라(Gomateshvara)의 모습이
있다.
이곳의 마하비라 상(像)은 그 형상이 부처와 같았지만 반가부좌에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33번 동굴
Jagannath Sabha라고 불리는 33번 동굴은 32번 동굴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흥미로운 신상을 볼 수 있다.
34번 동굴
자인교 사원군의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는 5미터 높이의 Parasnath像이 엘로라를 내려다
보고 있다. 이곳에도 역시 아름다운 신상을 찾을 수 있다. -모신글

첫댓글 한국불교의 원천이 여기네 ~~~~~~~붓다교가 아니라 자이나교를 불교라고 믿고 있었으니........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