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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0년
삼국지 연의가 가진 역사로서의 가장 큰 취약점 가운데 하나는
너무 사건과 인물에 치우쳐 세월의 흐름이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약점은
후반으로 갈수록 두르러져 심할 때는
몇십 년의 일들이 하루 사이에 일어난 것처럼
한 장회 속에서 처리되기도 한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한다면
삼국지 연의가 취급하는 시대는 황건난이 일어나는
서기 183년부터 오가 망하는 282년까지
약 백년간이며 공명이 죽는 232년은 꼭 그 한가운데에 해당된다.
그런데
연의의 6분의 5는 전반에 바쳐지고,
나머지 50년은 겨우 그 6분의 1로 매듭짓고 있다.
삼국으로 갈라선 천하가 나름대로 안정된 뒤에 태어난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시간 감각에 착오를 일으킬 염려도 없지 않다.
좀 어색한 대로 서력기원을 빌려 알기 쉽게
세월의 흐름을 더듬어 본다면,
공명이 죽고 난 뒤 강유가 다시 위를 치러 나선 것은
서기 253년,
공명이 죽은지 20년 만이었고,
사마사가 조방을 내쫓고 조모를 위주로 세운 것은
그 이듬해인 254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9년 뒤인 263년에는
마침내 삼국정립의 형세가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그 10년 가까운 세월도 평온히 지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앞 세대처럼 천하의 쟁패가 달린 떠들썩한 것은 못 되지만,
세 나라 모두가 크고 작은 내우와 외환에 시달리면서
천천히 시들어간 것이 그 10년 동안의 일이었다.
먼저 위나라부터 살펴보자.
사마사는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고
임금까지 갈아치웠으나 그렇다고 위에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마사가 새 임금을 세운 그 이듬해 위의 진동장군 관구검과
양주자사 문흠이 먼저 사마씨에게 반기를 들었다.
관구검과 문흠은 둘 다 조상과 가깝던 사람들이었다.
조상이 사마의에게 죽은 뒤 늘 불안히 여기다가
사마사가 명분을 주자 곧장 행동에 들어갔다.
수춘에 크게 제단을 쌓고 백마의 피를 찍어 맹세한 관구검과 문흠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관구검은 6만 대군으로 항성에 자리잡고,
문흠은 2만 대군으로 밖에서 오가며 변하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마사는 마침 눈에 난 혹을 짼 뒤라
성치 못한 몸인데도 몸소 대군을 이끌고 나갔다.
낙양은 동생 사마사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양양에 자리잡은 뒤 각처의 군마를 불러들였다.
제갈탄은 예주 군사를 일으켜 수춘을 치게 하고,
호준은 청주군사를 이끌고 관구검과 문흠이 돌아갈 길을 끊게 하며,
왕기는 전부병을 이끌고 먼저 진남을 치란 명을 받았다.
세 장수가 각기 명을 받들어 나간 뒤
사마사는 다시 스스로 싸울 일을 장수들과 의논했다.
광록대부 정포는 지구전을 권했으나
전부 대장 왕기는 관구검의 군사들이
마지못해 관구검을 따르고 있는 점을 들어 단기 결정을 주장했다.
왕기의 말을 따른 사마사는 전략요충인 남돈성을 먼저 차지하고
관구검이 오기를 기다렸다.
관구검도 남돈성이 요충이 된다는 걸 알고 군사를 보냈으나
이미 그곳은 사마사의 군사가 차지한 뒤였다.
거기다가 동오의 손준이 수춘성을 노린다는 말에 놀란 관구검은
얼른 항성으로 군사를 물렸다.
거기서 기선을 잡은 사마사는 공세로 들어갔다.
문흠의 아들 문앙이 홀몸으로 수십 명 위장을 죽이는 분전이 있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운 뒤였다.
문흠은 위나라의 신예 장수 등애의 출현으로 대패한 뒤
수춘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곳마저 이미 제갈탄에게 점령된 뒤라
하는 수 없이 동오로 달아났다.
항성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손발이 다 잘린 꼴이 된 관구검은 당황했다.
벌써 성을 에워싼 호준, 왕기, 등애의
세 갈래 군마와 성을 나가 싸웠으나 당해 내지 못했다.
겨우 10여 기만 데리고 신현서으로 달아났다가,
그곳
현령 송백의 속임수에 빠져 술에 취해 자는 중에 목을 잃었다.
회남은 평정되었으나 그 싸움에서 눈을 다친 사마사는
마침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제갈탄에게 정동대장군을 더해 양주의 군마를 다스리게 하고
자신은 허창으로 돌아갔다.
사마사는 허창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돼 죽었다.
죽기 전에 아우 사마소를 불러
대장군의 인수를 전함과 아울러 뒷일을 당부했다.
위주 조모는 사마사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사신을 허창으로 보내 조문 한 뒤
사마소더러는 계속 그곳에 머물러 동오의 침입에 대비하라 했다.
그러나
사마소는 심복 종회의 말을 들어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그 기회에 사마씨를 약화시켜 볼까 하던 조모는
사마소가 군사를 이끌고 낙수가에 진을 쳤다는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그에게 대장군에다 상서사를 맡겨 죽은 형의 뒤를 잇게 하니,
위의 정권은 여전히 사마씨의 수중에 남게 되었다.
어떤 경우든 한 나라의 정권 담당자가 바뀌는 것은
적국에게는 한 좋은 기회로 치부된다.
위를 보는 촉의 눈길도 그러해서,
강유는 사마사가 죽고 사마소가 뒤를 이었다는 말을 듣자
곧 위를 칠 기회라 여겼다.
정서대장군
장익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하후패와 함께 포한 쪽으로 나갔다.
옹주지사 왕경이 7만 군살르 일으켜 대항했으나
처음에는 강유에게 싸움이 유리했다.
도수가에 배수진을 친 강유는 크게 왕경의 군사를
쳐부수고 적도성을 에워쌌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위의 정서장군 진태와 연주자사 등애가 대군을
이끌고 달려옴으로써 전세는 뒤집혔다.
급하게 등애와 진태를 공격하던
강유는 도리어 등애의 계교에 빠져 검각으로 되쫓겨 갔다.
비록 쫓겨가기는 했으나 강유의 군사는 크게 상한 게 없는 데다
오래 싸움 준비를 해오 터였다.
거기다가 때는 마침 가을이라 곳곳에 먹을
곡식이 익었으니 군량 걱정도 없었다.
강유는 그걸 믿고 이번에는 다시 기산으로 나갔다.
그러나
강유가 다시 나올 줄 짐작한 등애는 먼저 기산에다
아홉 개의 진채를 세우고 엄히 방비하고 있었다.
이에 강유는 계책을 바꾸어 약간의
군사로 기산을 칠 것처럼 꾸미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빼돌려 남안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강유의 그 같은 계책은
등애에게 헤아려진 바 되어 어그러졌다.
무성산을 차지하여 진채를 세우려던 강유는
미리 가 있던 등애의 군사들에게 방해를 받아 일이 되지가 않았다.
겨우 마련했던 진채마저 등애의 화공을 받아 태워버린 강유는
이윽고 남안을 포기하고 상휴를 했다.
그러나
등애는 거기까지 헤아리고 단곡에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강유를 괴롭혔다.
때마침 달려온 하후패의 도움이 없었던들
단곡에서 벌써 큰 일을 당할 뻔했다.
이래저래 거듭 몰린 강유는 하는 수 없이
기산에 있는 진채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위장 진태에게 뺏긴 뒤라
한중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었다.
산길을 골라 한중으로 달아나는 강유의 군사를
등애의 군사가 급하게 뒤쫓았다.
거디다가 다시 진태의 군사가 앞길을 막으니
촉병은 완전히 위군에게 에워싸이고 말았다.
그때 촉의 탕구장군 장의가 수백 기를 이끌고
달려와 강유는 겨우 포위를 벗어났으나
장의는 아깝게도 그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한마디로 강유의 위나라 정벌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었다.
서촉에서 불어온 불길은 껐으나
위의 내정은 아직도 평온하지가 못했다.
안으로 또 한차례의 거센 불길이 그 불씨를 키우고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진동대장군 제갈탄이었다.
제갈탄은 낭야군 남양 사람으로 제갈량의 집안 조카였다.
일찍부터
위나라를 섬겼지만 제갈량의 조카라는 것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다가
제갈량이 죽은 뒤에야 겨우 중임을 맡게 되었다.
그 무렵 제갈탄은 고평후로
양회 지방의 병마를 도맡아 거느리고 있었다.
관구검과 문흠을 칠 때 세운 공 때문에
사마사가 그를 높여 대장군을 삼은 뒤
사납고 날래기로 이름난 그 지방의 군마를 맡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마씨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조위의 충신이라는 편이 옳았다.
사마소는 형을 이어 위의 대권을 잡자 은근히 딴마음이 일었다.
일을 벌이기 전에 지방에 흩어져 있는 장수들의 속부터 떠보기로 하고,
심복 가충을 지방으로 보냈다.
가충은 먼저 회남으로 가서 제갈탄을 찾아보고
사마씨가 위로부터 선위를 받으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제갈탄은 그런 가충을 꾸짖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나는 위이 국록을 먹은 사람으로,
만약 조정에 무슨 일이 난다면 이한 목숨을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뿐이다!"
가충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들은 사마소는
가만히 야주자사 악침에게 밀서를 보내
제갈탄을 해칠 계책을 꾸미는 한편
제갈탄에게는 사공 벼슬을 내려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그게 자신을 해치기 위함인 걸 금세 알아차린 제갈탄은
먼저 사마소의 사자를 문초해 악침이 거기 관련된 걸 알아낸 다음,
불시에 양주를 들이켜 악침을 죽이고 반기를 높이 들었다.
제갈탄은 양회와 군사 10여 만과
양주에서 항복한 4만을 조련시키는 한편
동오에도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그때 동오의 대권은 손준에게서 그의
종제되는 손침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손침은 제갈탄의 청을 받자 전역, 전단을 대장으로 삼고,
주이와 당자를 선봉으로 세운 뒤,
문흠을 길잡이로 딸려 7만 대군을 제갈탄에게 보냈다.
거기서 힘을 얻은 제갈탄은 곧 사마소를 칠채비를 갖춤과 아울러
위주 조모에게 표문을 올려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밝혔다.
사마소도 크게 군사를 일으키고,
천자와 태후를 졸라 친정의 형식으로 밀고 내려왔다.
낙양과 장안의 군사 26만에 정남장군 왕기는 정선봉으로,
안동장군 진건은 부선봉으로 세우고
감군 석포와 연주자사 주태를 좌우군으로 삼은 대군이었다.
사마소의 군사가 먼저 창칼을 맞대게 된 것은 동오의 군사들이었다.
동오의 선봉 주이는 위의 왕기와 맞붙었으나
세 합이 못 돼 몰리게 되는 바람에
오병은 대패해 50리나 ㅉ기게 되었다.
제갈탄이 문흠, 문양 두 부자와
수만의 날랜 군사를 이끌고 성을 달려 나와그런 오병과 세력을 합쳤다.
그러나 오병이 대의보다는 이득을 구하러 온 데 착안한 종회의 계책에 떨어져
제갈탄은 군사만 잃고 수춘성에 도로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도우러 온 오병도 손침의 조급함과 포악함 때문에
제갈탄에게는 끝내 이렇다 할 힘이 돼주지 못했다.
겨우 우전이 이끈 오병 1만이 수춘성으로 들어갔을 뿐,
주이는 몇 번 진 죄로 손침에게 목이 달아나고,
손침이 돌아가면서 남긴 전위는 손침이 두려워
오히려 위에 항복해 버린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위는 다시 수춘성 안에 있는 아버지 전단과
숙부 전역에게까지 글을 보내 달랬다.
거기 넘어간 전역과 전단이 수천 오병과
함께 위에 항복하고 마니 성안의 제갈찬은 더욱 외로워졌다.
형세가 외로워지자 수춘성 안의 인심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먼저 모사 장반과 초이가 제갈탄에게 속전속결을 권하였다가
제갈탄이 받아들여 주지 않자 성을 넘어 위의 진채로 달아났다.
그 다음은 문앙과 문호 형제였다.
그 아비 문흠 역시 제갈탄에게 급히 싸우기를 권하다
목이 달아나자 그들 형제는 성을 넘어가 사마소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문앙 형제가 위의 벼슬을 받고 그걸 자랑하며
성안을 보고 항복을 권하니 제갈탄의 군사들은 더욱 마음이 흔들렸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사마소가 일제히 성을 공격하자
북문을 지키던 장수가 문을 열어 위병을 맞아들였다.
제갈탄이 겨우 남은 수백 군사로 맞서보려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위장 호준을 만나 그 한칼에 목을 잃었다.
볼 만한 싸움을 벌이다 죽은 것은 오히려
구원하러 왔다가 성안에 갇혔던 오장 우전이었다.
우전은 항복을 권하는 왕기를 성난 소리로 꾸짖었다.
"명을 받들어 남의 어려움을 구하러 왔다가
어려움을 구해 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적에게 항복하란 말이냐?
내 어찌 차마 그런 의롭지 못한 짓을 하리!"
그리고 투구를 벗어던지며 다시 외쳤다.
"사람이 한 번 나서 싸움터에서 죽는 것도 얼마나 복된 일이냐!"
제갈탄을 따르던 졸개들도 죽음 앞에서 씩씩했다.
항복만 하면 살려준다는데도 수백 명이 모두
항복 대신 목을 늘여 칼을 받았다.
위가 천자까지 나서서 남쪽에서 싸우는데
촉이 그대로 있을 리 없었다.
강유는 제갈탄이 사마소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고
동오의 손침까지 거들어 위주가 몸소
싸움터로 나갔다는 말을 듣자 몹시 기뻐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공을 이룰 수 있겠구나!"
그렇게 소리치며
곧 후주에게 표문을 올려 칠 것을 허락해 달라고 아뢰었다.
중산대부 초주가 "수국론"이란 글 한 편을 지어
강유에게 보내며 출정을 말렸다.
그때 이미 촉은 내관 황호의 난정으로
안으로 깊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변방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강유가
큰 나라인 위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려 하니
충성되고 헤아림 깊은 대신으로서는 그냥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유는 오히려 초주의 말림에 성을 내며
기어이 군사를 일으켰다.
새로 얻은 장서와 부첨 두 장수를 앞세우고
이번에는 장성 쪽으로 군사를 냈다.
장성을 지키는 장수는 사마소의 친척 형뻘인 사마망이었다.
이붕과 왕진
두 장수와 성안의 군사들을 이끌고
성밖 20리 되는 곳에 진을 쳤다.
그러나 사마망은 강유의 적수가 아니었다.
한 싸움에 두 장수를 모두 잃고 성안으로 쫓겨들어갔다.
강유는 그런 사마망을 뒤쫓아 급하게 성을 들이쳤다.
그런데 막 성을 떨어뜰리려 할 즈음 뜻밖의 구원병이 달려왔다.
위장 등애 부자였다.
이에 강유는 장성을 뺏지 못하고 다시 등애와 맞서게 되었다.
등애는 자기 아들 등충을 성안으로 들여보내며
사마망에게 싸우지 말고 굳게 지키기만 하라 일렀다.
그러다 보면 남쪽의 싸움이 끝나 관중의
군사들이 몰려올 것이고,
강유는 오히려 양식이 떨어져 돌아갈 것인데,
그때 강유를 치자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강유는 등애에게 급하게 싸움을 걸었다.
등애는
금세 나와 싸울 듯하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싸움을 하루 이틀 미루었다.
그렇게 대여섯 번이나 싸움을 미룬 걸 보고서야,
등애의 속셈을 알아차린 부첨이 강유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등애가 무슨 속임수를 쓰는 듯하니
방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강유도 그제서야 등애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오히려 손침과 연결해 거꾸로 등애를 골탕먹일 궁리를 하고 있는데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사마소가 수춘을 들이쳐 제갈탄을 죽이고,
도우러 왔던 오병에게는 모두 항복을 받았습니다.
사마소는 군사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갔으나 멀지 않아
이곳 장성을 구하러 올 것이라 합니다."
그 소식에 놀란 강유는 곧 군사를 물려 돌아갔다.
그러나 등애가 반드시 뒤ㅉ을 것이라 여겨
좁은 길목이나 험한 산길마다 뒤쫓는 적을 막을 준비를 하게 했다.
염탐하는 군사가 촉병이 물러난 걸 등애에게 알렸다.
그러나
등애는
어찌된 셈인지 서둘러 뒤쫓는 대신 껄걸 웃으며 말했다.
"강유는 사마대장군이 오실 것을 알고 먼저 군사를 물린 것이니
굳이 뒤쫓을 것은 없다.
오히려 함부로 뒤쫓다가는 그 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군사를 풀어 가만히 촉병을 뒤따르며 살펴보게 했다.
과연 등애가 본 대로였다.
촉병은 물러가면서 낙곡 좁은 길목에
장작과 마른 짚검불을 쌓아 두고 있었다.
위병이 뒤쫓아오면 거기 불을 질러 화공으로 나올 작정인 듯했다.
여러 장수들이 그런 등애의 밝은 눈에
한결같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사마소도 대군을 움직일 필요 없이
촉병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자 몹시 기뻐했다.
그게 모두 등애의 공임을 알고 크게 상을 내렸다.
한편 동오의 손침은 자신이 제갈탄을 구하러 보냈던
당자와 전단 , 전역 등이 모두
위에 항복했다는 말을 듣자 몹시 성이 났다.
당자와 전단의 일족을 모조리 잡아들여 죽이게 했다.
이들이 위에 항복하게 된 데는
누구보다 그 자신의 허물이 컸건만
그쪽으로는 눈길 한 번 돌리는 법이 없었다.
그때 오주 손량은 나이 열일곱이었다.
사람이 총명하고 영리해 포악한 손침을 싫어했으나
그 일가가 나라의 병권을 모두 잡고 있어 어찌할 수가 없었다.
틈만 엿보다가 어느날 장인이며 황문시랑인 전기를 불러
손침을 죽이라는 밀조를 내렸다.
전기는 장군 유승과 함께 손침을 죽이려 일을 꾸몄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손침의 누이라 일이 이뤄지기 전에
먼저 손침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오의 국운이 그것밖에 안되는 모양이었다.
손침은 전기와 유승 및 그 일가노유를 모조리 죽이고,
손량을 임금자리에서 내쫓았다.
그때 상서 환희가 손침에게 맞서 보았으나
손침의 칼에 의로운 피를 묻히고 죽었을 뿐이었다.
손침이 손량 대신 오주로 세운 것은 낭야왕 손휴였다.
손휴는 손침을 승상에 형주목을 겸하게 하고
백관에게 차례로 벼슬과 상을 내린 뒤 조카
손호에게도 오정후를 내렸다.
손침은 자신이 승상으로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 후가 다섯에 금병의 대장들이 또한 모두 피붙이였다.
그 권세가 임금인 손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손침은 갈수록 방자해지다가
그해 겨울 대단찮은 일로 손휴에게 감정을
품고 좌장군 장포를 찾아 찬역의 뜻을 밝혔다.
장포가 그 말을 손휴에게 일러바치자 오주 손휴는 놀랐다.
거기다가 며칠 뒤 손침이 정말로 군사를
움직이려는 기미를 보이자
한층 급해진 손휴는 노장 정봉을 불러 매달렸다.
"폐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에게 나라의 해근을 뽑아 없앨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정봉은 그렇게 대답하고 납일(동지 뒤 셋째, 종묘에 제사를 지냄)인
다음날을 기해 일을 벌였다.
금군을 자기 형제가 장악하고 있다는 것만 믿고
아무 경계없이 궁궐로 들어온 손침을 불시에 잡아
목베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오주 손휴는 손침을 죽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일가붙이에 의해 저질러진 모든 잘못을 바로잡았다.
손침 및 손준의 손에 걸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모두 누명을 벗고,
쫓겨났던 이들을 다시 불러들이니 마치
나라가 새로워지는 듯했다.
촉의 후주 유선이 사신을 보내 그 일을 치하했다.
오에서도 설후를 사신으로 보내 답례했다.
설후가 돌아가자 손휴가 촉의 사정을 물었다.
설후가 본 대로 전했다.
"중상시 황호란 자가 권세를 잡고 있는데
공경이란 자들은 모두 아첨만 일삼고 있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곧은 말을 들을 수가 없고
백성들은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습니다.
마치 참새나 제비가 처마 끝에 살면서
큰 집이 불탈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바로 그 무렵 촉의 내정을 잘 보고 하는 소리였다.
"만약 제갈 무후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어찌 그런 꼴이 났겠는가!"
손휴는 그렇게 탄식하고 국서를 써서 성도에 보냈다.
사마소가 오래잖아 위나라를 찬탈하고
그 위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촉과 오를 침범할 것이니
서로간 정신차려 준비하고 있자는 내용이었다.
강유는 그런 오나라의 국서를 받자
지난번에 깎인 위신을 되찾을 때가 왔다 여겼다.
다시 후주에게 표문을 올려 위를 치러 가겠다고 나왔다.
후주가 마지못해 허락하자
대장군 강유는 이듬해 일찍 군사를 일으켰다.
선봉은 요화와 장익이요, 왕함과 장빈은 좌장군으로,
장서와 부첨은 우장군으로 세운 뒤
하후패와 함께 20만 군사를 몰아 한중으로 나아갔다.
하후패와 의논 끝에 강유가 잡은 길은 기산 쪽이었다.
기산 어귀에 이른 강유는 일찍부터 농우의 군사를 이끌고
그곳을 지키던 등애와 다시 맞부딪치게 되었다.
그때 등애는 언젠가 촉병이 다시 올 줄 알고
모든 채비를 갖춰놓고 기다렸다.
곧 촉병이 진채를 칠 만한 곳에 미리 땅굴을 파놓고
촉병이 거기 자리잡기만 하면
그걸 이용해 안팎에서 들이칠 작정이었다.
등애는 촉병이 정말로 자신이 점찍어 둔 곳에
진채를 내리자 됐다 싶었다.
밤을 틈타 땅굴로 사람을 보내,
안팎에서 촉병의 진채를 들이쳤으나
강유가 침착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첫 싸움에서는 크게 이기지 못했다.
이에 등애는 강유와 진법으로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도리어 강유의 장사권지진이란 진법에 말려
위병은 기산의 진채만 빼앗기고 말았다.
그 뒤로도 등애는 한편으로는 정면으로 싸우고,
한편으로는 기습을 노렸으나 싸움은 영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때 등애와 함께 싸우던 사마망이 내놓은 계책이
초의 어지러운 내정을 이용한 반간계였다.
그걸 받아들인 등애는 양양사람 당균에게 뇌물을 넉넉히 주고
촉의 중상시 황호를 매수하게 했다.
몰래 촉으로 숨어든 당균은 황호에게 금은
보석을 바리바리 져다 바치고,
강유가 후주를 원망해 오래잖아
위에 항복할 것이란 말을 아뢰게 했다.
그리고 아래로는 백성들 사이에도 유언비어를
퍼뜨려 똑같은 말이 떠돌게 하니,
예전에 공명이 사마의를 내쫓기게 할 때와 비슷했다.
황호가 곁에서 두 번 세 번 일러바치는 데다
성도 백성들까지 강유가 반역하려 한다는 말을 하자
후주는 깜짝 놀랐다.
곧 사람을 보내 강유에게 돌아오라고 이르게 했다.
강유가 영문도 모르면서 군사를 돌리려 하는데
요화가 나서서 말렸다.
"장수가밖에 있을 때는
비록 임금의 명이라도 듣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조서가 있다고 해서 가볍게 군사를 움직여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나 장익은 생각이 달랐다.
요화의 말에 고개를 가로젓고 나섰다.
"촉의 백성들은 대장군께서
해마다 군사를 움직이시는 데 원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번에 마침 이겼으니 그 틈을 타 군사를 돌리는 데 어떻겠습니까?
돌아가 인심을 가라앉힌 뒤에 따로 날을 잡아 일을 꾀해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강유도 장익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곧 군사를 서로 돌리고 요화와 장익은
후군이 되어 뒤쫓는 위병을 막게 했다.
그 돌아가는 진용이 얼마나
단단하고 빈틈없던지 등애조차 감히 뒤쫓지 못했다.
성도로 돌아간 강유는 후주를 찾아 뵙고 불러들인 까닭을 물었다.
후주에게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우물쭈물 핑계를 대다가 다만 한중으로
돌아가 위에 변고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강유는 탄힉하며 한중으로 돌아갔다.
강유가 돌아가자
이번에는 사마소에게 촉을 칠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새로 세운 위주 조모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
함부로 위를 비울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중호군 가충 등이 사마소에게 위주의 잠룡시를
고자질하니 사마소와 위주 조모의 사이는 절로 벌어졌다.
위 감로 5년 4월(서력기원 후 253년 4월)
사마소는 조조를 본받아
위주에게 구석을 청했다.
내심 싫으면서도 사마소의 위세에 눌려 하는
수없이 사마소에게 구석을 내린 조모는 분했다.
시중 왕침, 상서 왕경, 산기상시 왕업 세 사람과 의논 한 뒤
사마소를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이름뿐인 천자라 힘이 없어,
기껏 끌어모은 게 전중시위 처럼 가까이
부리는 군사들과 창두 관동같은 궁중의 일꾼 3백이었다.
왕경이 그런 조모를 붙들고 말렸으나
조모는 듣지 않고 사마소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궁궐문을 나서기도 전에 사마소의 심복인 가충 성제 등이
거느린 정병과 만나 싸움중에 성제에게 죽고 말았다.
뒤늦게 그 일을 들은 사마소는 은근히 놀랐다.
한편으로는 태후를 구슬려 죽은 조모의 죄상을 천하에 선포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을 죽인 죄를 오로지 성제에게 덮어씌워
그 삼족을 모두 없앴다.
이때 사마소의 심복들이 바로 위를 넘겨받기를 권했으나
사마소는 듣지 않았다.
조조를 본떠 그 일은 그 아들 사마염에게 맡기기로 하고,
자신은 여전히 조씨를 세워 천자로 삼았다.
사마소가 조모를 대신해 세운 게
조조의 손자요 연왕 조우의 아들인 조환으로,
그가 곧 위의 마지막 임금인 원제가 된다.
위의 그 같은 정변은 다시 촉에 한 기회로 여겨졌다.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함께 군사를 일으켜 위를 치자 하고
자신은 15만 대군을 일으켰다.
강유는 요화와 장익을 선봉으로 삼아
요화는 자오곡을 취하라 하고
장익은 낙곡을 취하라 했다.
그리고 스스로는 야곡으로 길을 잡아 한꺼번에
갈래 군마를 몰고 기산으로 나아갔다.
기산을 지키던 등애는 강유가 나오자 맞을 채비를 했다.
그때 거느리고 있던 장수 중에 왕관이란 이가 있었다.
등애에게 거짓 항복의 계교로 강유를 꺽자고 권했다.
곧 스스로를 지난번 위주 조모가 죽을 때 조모편에
섰다가 함께 죽은 왕경의 조카라하여 강유에게 항복을 믿게 한 뒤,
틈을 보아 안팎에서 호응해 강유를 사로잡자는 계교였다.
등애는 그 계교를 따랐으나
그걸 알아차린 강유가 오히려 거꾸로
이용하는 바람에 대패하고 말았다.
강유의 복병에 걸려 등애 자신이 보졸의
옷을 입고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나야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왕관이 싸움의 방향을 이상하게 이끌어 갔다.
거짓 항복으로 촉군 뒤에 있다가 등애가 대패했다는 소리를 듣자
위로 달아나는 대신 한증으로 들어갔다.
강유는 혹시라도 한중이 어찌될까 두려워 군사를 한중으로 돌렸다.
그 바람에 싸움에는 이겼어도 아무 것도 얻은 것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강유가 공명에 이어 여덟 번째로 대위전을 일으킨 것은
촉한의 경요 5년 10월이었다.
그 동안 군마를 기르고 군량을 쌓은 강유는 후주에게 표문을
올리고 30만 대군을 일으켜 도양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도 강유를 맞아 싸우게 된 위장은 등애였다.
강유가 조양으로 온다는 말에
다른 장수들은 그게 허장성세라 주장했다.
도양으로 나오는 체하면서 기산을 치려 함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등애는 도양을 근거로
둔전을 하며 장구한 계책을 세우려는 강유의 뜻을 헤아리고
빈틈없는 채비를 했다.
그 바람에 싸움은 처음부터 촉에 이롭지 못했다.
전부를 맡은 하후패는 도양성을 뺏으러 갔다가
등애의 복병에 걸려 죽고,
강유도 등애의 급습으로
20리나 쫓겨난 뒤에야 겨우 군사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때 장익이 강유에게 권했다.
"위병들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기산은 틀림없이 비어 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군사를 정돈해 도양과 후하를 들이치고 계십시오.
저는 가만히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기산에 있는 위군의 진채를 쳐부순 뒤
장안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강유도 그 계책이 옳다 싶어 그대로 따랐다.
곧 장익에게 군사 한 갈래를 떼어주고,
자신은 남은 군사로 등애의 대군을 도양에 붙들어 두었다.
멋모르고 그런 강유와 며칠을 싸운 등애는
퍼뜩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첫 싸움에 지고도 오히려 급하게 싸움을 거는 걸 보고
촉군의 숨겨진 계교를 짐작했다.
아들 등충에게 그곳을 맡기고
자신은 기산을 구하러 달려갔다.
등애가 없는 걸 감추기 위한 위군쪽의 활발한 움직임이
이번에는
강유에게 의심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그 갑작스런 움직임에 속임수가 있는
것 같아 살피다가 문득 등애가 없어진 걸 알았다.
강유는 등애가 틀림없이 장익의 계책을 눈치채고
기산으로 달려갔다고 보아 자신도 기산으로 달려갔다.
강유가 기산에 이르렀을 때
먼저 간 장익은 뜻밖에 나타난 등애의
공격으로 한창 위급함에 빠져 있었다.
강유가 그런 등애의 등뒤를 후려쳐 전세는 곧 뒤집혔다.
등애는 오히려 장익과 강유에게 에워싸여 위태로운
지경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도 촉의 운세였는지,
뜻밖에도 성도에게 강유를 불러들이는 조서가 연이어 내려옴으로써
등애는 겨우 위태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리석고 어두운 후주와 간신 황호가 손발이 맞아
해놓은 한심한 짓거리였다.
그때 촉의 우장군에 염우란 자가 있었다.
아무런 공도 없이 황호에게 뇌물을 써서 대장군까지 되었는데,
벼슬이 오르자 슬며시 딴 생각이 났다.
강유의 자리를 노려 황호에게 뇌물을 듬뿍 안기자
황호가 후주에게 달려가 아뢰었다.
"강유는 위와 여러 번 싸웠으나 이렇다 할 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염우로 하여금 강유를 대신해 대장군으로 세우는게 좋을 듯합니다."
이에 황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르 쑨다 해도 믿는 후주가
조서를 내려 강유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한중으로 돌아간 강유는 그곳에 군마를 쉬게 하고
자신은 조정에서 온 사자 와 함께 성도로 갔다.
그러나 열흘을 두고 후주를 찾아뵈려 해도
후주가 받아 주지를 않았다.
강유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루는 동화문에서 비서랑 극정을 만나자
슬몃 물어보았다.
"공은 폐하께서 나를 불러들이신 까닭을 아시오?"
극정이 가볍게 웃으면서 아는 대로 털어놓았다.
"장군께서 여태까지 그걸 모르셨습니까?
황호의 짓입니다.
염우로 하여금 장군의 자리를 대신케 해서
공을 세우도록 장군을 불러들이신 거지요.
그러나 위장 등애가 하도 군사를 잘 부린다 하니
감히 염우를 대장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크게 노했다.
주먹을 부르쥐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내 반드시 이 간사한 내시놈을 죽이고 말겠다!"
극정이 깜짝 놀라 그런 강유를 말렸다.
"대장군께서는 무후의 뒤를 이으시어 맡으신 바
일이 무겁기 그지없으신 터에
어찌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십니까?
만약 폐하께서 장군의 뜻을 받아들여 주시지 않는다면
도리어 좋지 못한 일만 생길 것입니다."
강유도 그 말을 듣자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노기를 억누르며 극정에게 감사했다.
"선생의 말씀이 옳은 듯하오.
새겨 듣겠소이다."
그 다음날이었다.
그날도 후주는 황호와 더불어 후원에서 술타령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강유가 몇 사람을 데리고
바로 후원으로 들어갔다.
강유가 뛰어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황호는 놀랐다.
얼른 호수 뒤에 있는 산 곁에 몸을 숨겼다.
뒤이어 들어온 강유가 후주에게 절을 올린 뒤에 울며 아뢰었다.
"신은 기산에서 한창 등애를 에워싸고 몰아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잇달아 세 사람이나 보내시어 신을 불러들이셨습니다.
그러신 폐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실로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후주에게 할 말이 있으리 없었다.
꿀먹은 벙어리처럼 한참이 지나도 입을 열지 못햇다.
강유가 다시 아뢰었다.
"황호가 간교하게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하고 있으니
이는 후한의 십상시 같으 무리올시다.
폐하, 가까이로는 장양을 살피시고
멀리로는 조고를 동이켜보옵소서.
이런 무리는 빨리 죽여야만 조정이 맑고 평온해질 것이며,
중원도 그 뒤라야 되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주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황호는 그저 내 뒤를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이나 하는 하잖은 내시외다.
설령 그에게 나라의 권세를 통째 맡기나 해도
그걸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는 위인이오.
지난날 동윤이 매양 황호에게 이를 가는 게 알 수 없더니,
이제는 또 경이 왜 이러시오?
어째서 꼭 황호를 죽여야 한다는 게요?"
"폐하께서 오늘 황호를 죽이시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큰 화가 미칠 것입니다."
강유는 그렇게 잘라 말하며 거듭 황호를 죽이자고 우겼다.
그러나 후주는 조금도 그런 강유의 말ㅇ르 들어주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말로 강유를 달랠 뿐이었다.
"어여삐 여기는 것은 살리려 애쓰고,
미워하는 것은 죽이려고 애쓴다더니 정말로 그렇구려.
어찌하여 한낱 내시도 너그럽게 용납하지 못하시오?"
그러더니 곁에 있는 신하를 시켜 호숫가
산그늘에 숨은 황호를 불러내게 하였다.
"대장군께서 크게 노여움을 품으신 듯하다.
네 스스로 대장군께 빌어라."
후주가 그렇게 말하자 황호는 강유 앞에 엎드려 울며 빌었다.
"저는 다만 폐하를 따르며 잔심부름이나 할 뿐
나라일에는 간섭한 적이 없습니다.
장군은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저를 죽이려 하지 마십시오.
제 목숨은 장군의 손에 달렸으니
부디 가엾게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황호는 그렇게 말하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줄줄 눈물을 흘렸다.
이미 후주가 나서 용서를 전한 데다
황호까지 그렇게 나오니 강유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후원을 빠져나갔다.
강유는 그 길로 극정을 찾아가 대궐 안에서 있었던 일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듣고 난 극정이 쓰게 입맛을 다시며 말햇다.
"장군께 화가 멀지 않아 닥칠 듯합니다.
그리고 만약 장군이 위태롭게 되면 이 나라도 따라 망할 것입니다."
"그럼 이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선생께서는 부디 내게 내 한몸도 보살피고
나라도 지킬 수 있는 계책을 일러주시오."
강유가 극정에게 매달리듯 계책을 물었다.
극정이 한참 생각하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농서에 답중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매우 기름집니다.
장군께서는 어찌 지난날 무후께서
둔전(군사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함)하시던 일을 본받지 않으십니까?
천자께 말씀을 올려 답중에 자리잡고 둔전을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첫째로는 보리를 얻어 군량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요,
둘째는
농우의 여러 고을을 엿볼 수 있으며,
셋째로는
위나라 사람들이 감히 한중을 넘보지 못할 것이고,
넷째로는
장군이 밖에서 병권을 쥐고 있어 딴 사람이 해치려 들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화를 피하고 장군의
한몸과 나라를 아울러 지키는 계책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강유도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기쁜 얼굴로 극정에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선생의 말씀은 실로 금옥보다 귀하외다.
꼭 그대로 따르겠소."
뿐만 아니었다.
다음날 후주에게 표문을 올리고 답중에 둔전하여 공명이
하던 대로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황호에게만 정을 쏟고 있던 후주는
거북스런 강유가 스스로 멀리 떠나가 있겠다 하니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못 이긴 체 강유의 청을 들어주었다.
한중으로 돌아간 강유는 장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내가 여러 번 군사를 냈으나
번번이 군량이 모자라 공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나는 8만 군사를 이끌고 답중으로 가서 보리씨를 뿌리고
둔전하며 천천히 일을 꾀해 보겠다.
그대들은 오랜 싸움에 힘들고 괴로웠을 것이니
군사를 정돈해 돌아가 한중이나 잘 지키도록 하라.
설령 위병이 온다 해도 천리나 군량을 나르고
험한 산과 언덕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지켜빠질 것이고,
그리됨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틈을 타 뒤쫓으며 치면 못 이길 리 없으니,
모두 마음에 새겨듣고 그대로 따르라."
그리고 호제에게는 한수성을 ,
왕함은 낙성을 장빈은 한성을 지키게 하고
장서와 부첨에게는 나머지 관애를 맡겼다.
모든 장수들이 각기 맡은 곳으로 떠난 뒤에
강유도 8만 군사를 이끌고 답중으로 갔다.
싸움을 서두는 대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멀리
내다보고 하는 싸움 준비에 들어갔다.
강유가 답중에 둔전하여 길을 따라 마흔 곳에 영채를 세우고
긴 뱀 같은 진세를 펼쳤다는 말을 들은 등애는 놀랐다.
곧 세작을 풀어 강유가 자리잡은 곳의 지형을 살피고
그걸 도본으로 그려오게 했다.
강유의 뜻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며칠 안 돼 세작들이 도본을 그려왔다.
그걸 본 등애는 비로소 강유의 뜻이 원대함을 알았다.
그대로 두어서는 안돌 일이라 여겨 도본과 함께 그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대략 위의 경원 4년, 서기로 263년 봄의 일이었다.
촉으로는 염흥 원년, 공명이 죽은지 서른한 해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