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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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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60년 8월 13일 ~ 1962년 3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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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
출생일 | 1897년 8월 26일(1897-08-26) |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
사망일 | 1990년 7월 18일 (92세) |
사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정당 | 민주당⇒신민당 <퇴임 이후> 신민당⇒민중당⇒신민당 |
별명 | 자(字)는 경천(敬天), 호(號)는 해위(海葦), 별칭은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 |
종교 | 개신교(장로교) |
배우자 | 여흥민씨, 공덕귀 |
자녀 | 윤완구, 윤완희, 윤상구, 윤동구 |
부모 | 아버지 윤치소, 어머니 이범숙 |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 충청남도 아산군 음봉면 출생)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공무원, 정당인, 사회운동가이다. 국회의원과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 시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 ~ 1962년 3월 23일)을 역임하였다. 1960년부터 1962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장면(張勉) 국무총리가 실권을 맡았고 1961년부터 1962년까지 박정희(朴正熙) 장군이 실권을 맡았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가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부에서 대통령직에 있어달라는 요구를 수락, 사퇴성명을 번복했다.
1962년 3월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 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과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주회복국민선언, 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이다. 윤치왕, 윤치창은 그의 당숙이었고,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으며 영선군의 사위 윤원선은 그의 동생이었다. 윤일선, 윤영선 등은 그의 사촌이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을 강조하였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字)는 경천(敬天), 호(號)는 해위(海葦)이다. 해위 라는 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칭타칭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다. 충청남도 아산군 출신.
그러나 가계는 몰락하여 5대조 윤발(尹潑, 1728~1798)은 관직을 지내지 못했다. 고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1823)은 생전 관직이 통덕랑이 최종 관직이었고 사후에 증 이조참의와 증 의정부참찬에 거듭 추증된다. 그러나 윤득실이 일찍 사망하여 형제들은 일찍 고아가 되었지만, 윤득실의 셋째아들이자 윤보선의 증조부였던 윤취동의 대에 농토를 마련해 부농이 되고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관직에 올랐다. 종조부 윤웅렬이 무과에 급제하고 조부 윤영렬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고, 당숙 윤치호가 다시 대한제국에서 외무부, 학부 협판과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다시 가계를 일으킨 조부 대에 100칸의 집을 마련했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윤치영이 태어났는데,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다. 아버지 윤치소는 아산군의 만석꾼이었다.[3] 외가 역시 부유하였는데 어머니 이범숙 역시 아산의 만석꾼의 딸이었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99칸의 대저택에서 살았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집안은 부유하였고 선대(先代)는 대대로 벼슬을 해온 집안이었기에 부러운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스스로 회고하였다.그의 조부 윤영렬은 삼도 토포사를 지낸 고관으로, 윤영렬이 삼남 토포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일가는 충남 아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비상하였던 그는 유아기 때 '조부가 토포사로 직인을 찍거나 먹찰 하는 것, 집안에서 사무를 보며 죄수들과 병사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기억하였다. 그뒤 집안에서 선생을 두고 한문을 익혔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틈틈이 그들 형제를 불러 충과 효를 강조하고 삼국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다. 이때 그는 유비의 의로움과 관운장의 전공치적과 그의 충의에 감동받았다 한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그의 고조부 대에 약주가 과하여 가세를 기울게 하였다 하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훈계를 여러 차례 하였다. 이 때문에 윤보선은 여행지에서나 정계 입문한 뒤에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총명하고 명석했던 그는 한편으로 아쉬울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 성격적으로 다소 고집이 센 측면도 갖게 되었다.
7,8세 때 집안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한국이 일본에 진 국채를 갚기 위해 노력하나 조선 조정의 재정이 딸리므로 국민의 헌금을 바란다는 것이 보도된 이후, 국민 전체가 그 헌금을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벌였다는 것을 들었다. 어린 그는 헌금운동에 참여하고자 점심을 절식하고 그 값을 돈으로 타낼 작정을 하였다가 할머니와 어머니를 염려케 하였다.[6] 10세 때 집 근처의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1910년 4년 과정의 교동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충무로의 일본인 거류민들이 설립하 일출(日出)소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 한일합방 후 귀국해서 1년간 경성 기독교 청년회 총무로 있던 이승만을 만났다. 한국인 최초의 박사이고 철학박사라는 점에 이끌려 그를 존경하기도 했으나 1950년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그와 갈라서게 되었다. 그의 선조들은 당색으로는 서인과 노론 계열이었는데, 서얼 가문이었지만 아버지 윤치소나 조부 윤영렬로부터 가계와 선조들의 이야기를 훈육받고 자란 그는, 양반가의 후예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일출소학교 5학년에 편입학한 뒤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학교 시절의 윤보선은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한편으로 국채보상운동 등이 일어났을 때는 스스로 작은 용돈을 모아서 보내기도 했다. 그뒤 윤보선은 일본으로 유학, 도쿄(東京)로 건너가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의학부에서 공부하다가[9] 2학기를 배우고 그만두었다. 1913년 일본 정칙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 게이오 의숙 의학부에 입학해 두 학기를 다니기도 하다가 2년이 채 못 되어 중퇴하고 귀국했다. 드러내놓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학창시절의 그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그는 어렵지 않은 유학생활을 하였다. 집에서 월 25원의 학비를 부쳐오므로 학업에 별다른 곤란은 없었으나 당시 그의 관심사는 중국의 신해혁명에 쏠려, 학업에 정진하기 힘들어서 귀국하게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일어났던 신해혁명에 자극을 받아 학업을 마칠 수 없었다[3]고 한다. 귀국이후 한동안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그는 신문에서 신해혁명 관련 기사를 찾아서 읽곤 했다.[11] 그는 여운형을 만났는데, 당시 여운형은 독립운동에 가담하려 하는 청년들을 중국으로 비밀리에 망명시키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집안에서 안다면 반대를 할 것이었으므로 그는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며 자금을 모았다. 바로 상하이로 가서 독립 운동에 투신한다면 집안에서 반대할 것이 예상되었으므로 그는 아버지 윤치소에게 미국으로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근처에 사는 어느 양반가의 자제도 기독교 집안이 된 뒤, 목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목사가 된 것을 그의 부친도 알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그에게 상하이로 갈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귀국해 일본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1] 그가 중국으로 건너 가고자 희망할 때 중국에 있던 여운형이 귀국하였다. 그는 청년회관을 통해 여운형의 소재지를 파악, 그가 머무르고 있던 한성은행 사무원의 집을 찾아가 중국으로 갈 의향을 밝혔다. 그의 뜻을 들은 여운형은 윤보선의 망명을 적극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혁명을 하러 중국 상해로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 윤치소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는 신학을 한다는 핑계를 댔다. 아버지 윤치소의 친구들 중에는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목사가 된 이들이 있었고, 그는 아들이 같은 과정으로 목사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여권을 얻기 위해 상해를 경유해 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아들의 출국을 허락해 주었다. 이후 윤보선은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여운형의 주선으로 그는 배편을 타고 인천항을 떠나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가 출국한 뒤에야 그의 집안에서는 윤보선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러 상하이로 망명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승만이 궤변으로 그를 현혹하여 버려놓았다며 원망하기도 했다.윤보선의 당숙 윤치호, 아버지 윤치소, 백부 윤치오 등은 이승만과 인연이 있었는데, 그가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유학한 뒤에야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게 된다.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쓸 자금을 모금해오라는 임정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지시를 받고 국내 잠입을 계획한다. 이승만과 이시영, 김규식은 국내에 있던 이상재, 윤치호, 윤치소 등에게 자금을 보내달라고 연락을 띄웠고, 이들은 윤보선의 동생 윤완선 등에게 자금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을 거쳐서 도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으나, 노선을 바꾸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하기 직전 그는 중국 법무장관 서겸(徐謙)이 주일 중국대사 앞으로 쓴 소개장을 받고 서겸의 조카이자 일본으로 유학하는 중국인 유학생으로 가장하여, 변장 후 일본 경찰들을 피해 배편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 갔다. 국내에 잠입하면 신분노출을 우려해 비밀리에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재일본 중국 기독교 청년회 간부 집에 은신하며 동생 윤완선과 접촉, 그곳에 체류중인 동생 윤완선을 시켜 고국에서 활동자금을 가져오도록 했다.[9] 국내로 잠입한 윤완선은 집안의 사재 3천원의 자금을 마련해 왔고 윤보선은 이 자금을 들고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동경에 있는 백관수, 유억겸, 김준연, 김도연 등을 만나고 윤치영과도 만났다. 이들과 손을 잡고 독립운동을 할 목적으로 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이월회(二月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자금을 싣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1919년말 최연소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었다. 연령 미달로 의정원 의원 피선거자 자격이 없었으나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승인으로 20대 초반에 의정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장래를 위해 유럽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신규식, 이시영, 신익희 등의 충고로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상하이 체류 중 신규식은 그에게 해위 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신규식이 그에게 해위(海葦)라는 호를 준 것은 '바닷가에 선 갈대처럼 연약해보이면서도 억센 파도에도 꺾일 줄 모르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뜻이었다.
1921년 6월 고국에 들러 아내 여흥 민씨를 데리고 영국으로 간다. 뒤에 그는 스승 신규식과 인척이 되는데, 이는 신규식의 아들 신준호와 그의 둘째 딸 윤완희의 결혼으로 사돈이 된다. 신규식의 딸 신명호는 다시 독립운동가인 민필호와 결혼하여 후일 민필호, 김준엽 등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상하이 생활 3년 만에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유학하였다.[1] 1921년 6월 경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여행권을 소지하고, 중국인 유학생들 틈에 끼어서 프랑스 배로 출항하였다. 이때 선상에서 임정 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한인들의 승선을 눈치챈 일본 관헌들이 호출해 중국언어로 대화하라고 시켰고.[18] 윤보선은 간단한 단어로 대답하여 중국인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이동휘의 정체가 탄로나 하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20]
중국 학생을 가장하고 3등 선실에 숨어서 42일만에 마르세유에서 하선, 프랑스로 가는 열차를 탑승했다. 이후 정기 여객선을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는 의학공부 중인 그의 당숙 윤치왕이 와 있었다. 영국에 도착하여 화물을 취급하는 하물표를 발급받으려다가 거절당하고, 당숙 윤치왕(尹致旺)을 만나 영국에 도착했다. 당숙인 윤치왕이 공부하던 영국에서 체류하며 우드블록 대학에서 약 1년동안 영문학을 공부하고[3] 중퇴하였다.
그뒤 영국 글래스고의 스캘리쉬 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버밍엄으로 건너가 퀘이커 교단에서 설립한 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이후 다시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3개월간 수학하다가 다시 에든버러 대학교로 옮겼다. 이후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 대학에서 고고학을 선택·전공하였다. 그가 고고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로는 인간으로서 그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 주는 것은 정치학이나 신학 보다는 순수과학일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재학 중 정신적 스트레스와 과로로 신경쇠약에 걸려 2년간 병중에 있었다. 의사는 절대휴양을 위해 귀국을 처방하였으나, 학업을 마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으로 귀국권유를 사양했다.[24] 이후 병으로 2년간 휴학하였다. 병으로 2년간 휴학한 기간을 합쳐 6년 만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에든버러 대학 졸업 이후에도 에든버러를 근거지로 하여 구주를 순방하였다.[24] 대학재학 중 3년간 한반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수학하였으나 일본인 학생들의 접근을 피하고 멀리하였다.[25] 영국 체류 중 그는 꾸준히 기금을 마련하여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구미위원부로 100불씩 송금했다가 일본 경찰의 첩보망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재외 유학생 신분이었고 일본 조계나 일본 영사관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으므로, 일본 경찰 역시 그를 쉽게 체포할수 없었다.
윤보선은 1930년 12월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후 독립운동의 장소로 미국과 중국 상하이를 고민하던 중 졸업했으니 집에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집에는 졸업사실을 전하지 않았으나, 논문을 쓰기 위해 영국에 2년간 머물렀던 장덕수가 귀국후 윤보선 댁에 들러 아버지 윤치소에게 그의 졸업사실을 전했던 것이다.[26] 아버지 윤치소를 비롯하여 문중에서는 그에게 귀국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6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후 조선총독부 왜경으로부터의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집에서는 여비를 보내며 귀국을 독촉하였고, 귀국하기 싫어했던 그는 귀국 대신 구주 여행을 떠났다.[27] 두 번째 여비를 발송했을 때도 유럽여행을 하다가 세 번째 여비와 함께 '부자지정을 생각해 다시 여비를 보내나 다음에는 보내지 않는다'는 최후통첩을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유럽을 여행하며 지내던 그는 생활비가 떨어지자 1932년에 귀국했다.
귀국 이후 그는 조용히 지냈다. 그의 생활은 대부분 조부모에게 문안 인사하러 찾아오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경의 심한 감시를 받았고, 안국동 집밖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시찰인물로 분류된 그는 일본경찰이 찾아와 그의 동향을 살펴보고 질문을 하면 고개를 숙이고 한시간, 두시간, 일본경찰이 자리를 뜰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일본인형사는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하였다. 한동안 몇몇 신뢰 가능한 지인들을 통해 이승만의 은신처로 방문, 이승만을 간간히 만나곤 했다 한다. 1937년 아내 여흥 민씨와 사별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10년 이상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활했다.
1938년부터 그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사에 칼럼, 기고문 발표 등으로 소일하였다.
1940년대 이후 그는 외부출입을 줄이고 가택에 칩거생활하였다. 때로는 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별장에 내려가서 지내기도 했다. 미니 골프장을 갖추고 석왕사(釋王寺)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이 별장은 은둔하기에 너무나 좋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1940년 1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에도 그는 성을 바꾸기를 거절했다. 부친과 숙부들의 설득에도 고집을 부렸던 그는, 당시 그는 아내와도 사별한 상태였고 딸만 두 명 있었으므로 자녀들에게 가해질 불이익 같은 것에 쉽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1943년 2월 폐렴(肺炎)을 앓았다. 부친상 직전 아버지 윤치소가 있는 사랑방이 추운가 하는 걱정으로 야밤에 일어나 부엌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오한을 느낀 것이 그대로 폐렴으로 발전하였다. 부친상 5일상을 탈상한 후 폐렴의 위기를 넘겼으나 그는 흡연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귀국한 뒤에는 엽권연을 입에 물고 있다시피 할 정도로 애연가였다. 그러나 폐렴을 계기로 담배를 꼭 피워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뒤 담배를 꼭 피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자 그는 금연을 하였다. 1942년 이후 숙부 윤치영이나 송진우, 김성수 등으로부터 이승만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접하였으나 그는 이를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문중에서 결의된 창씨개명을 거절했던 그는 바깥 출입으로는 기독교 선교 활동과 강연, 문중 종친회 관련 행사 이외에는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후반 그는 집안에 칩거하면서 함경남도 안변군 사기리에 있는 문중의 별장을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9월 송진우가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개설하자, 그는 국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9일 그의 5촌 당숙 좌옹 윤치호가 친일파로 몰려 심한 비판 끝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도 아니었고 문중에서 창씨개명 할 당시 창씨개명하지 않았으며, 임시의정원과 임정에도 참여하였으므로 연좌되지 않았다. 12월 30일 송진우 피살 소식을 듣고, 그는 새벽 6시경 제일 먼저 송진우의 원서동 자택으로 달려갔다.
그뒤 김구, 김성수 등의 주도로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소극적으로나마 반탁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1946년 민중일보사 사장을 맡았고, 미군정청에서 임명한 경기도지사 고문직에 피선되었다.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6월 29일 민족통일본부 협의원에 지명되었다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지도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에는 우남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서정주 등과 함께 이승만 일대기 편찬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그에게 어떤 직위로든 자신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윤보선은 사회단체 활동과 민중일보 사장직으로 만족하겠다며 번번히 사양하였다. 1947년 12월 장덕수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바로 찾아갔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론을 지지했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승만, 김구, 프란체스카 도너, 김병로, 엄항섭 등과 함께 회의에 참관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이승만의 노선을 줄곧 지지해왔다. 1948년4월 단독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나타났을 때 그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했다. 그 해 2월에 이미 북한이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사실상의 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단체를 조직한 이상, 북한의 정부 수립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10일 5·10총선거 때 고향인 충남 아산시에서 한민당 공천으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총선 낙선 이후 한동안 칩거하였다. 그러나 칩거 20일만인 5월 30일 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의 비서관이 되어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되었으나, 7월 국회의장 비서실장 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그는 민중일보사 사장으로 복귀하여 신문사 경영 활동을 하고 있었다. 7월 22일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그에게 장관직을 제의하였으나 그는 민중일보사의 사주로 있겠다며 입각제의를 사양하였다. 초대 내각 구성을 놓고, 내각을 조직한 사람이 이승만의 최측근이자 그의 숙부였던 윤치영이었기 때문에 시중의 험담과 비방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입각 제의를 모두 사양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호의를 거부한다며 서운한 의사를 나타냈으나 그는 향후 다른 직책으로 그를 도와주겠다며 안심시켰다.
1948년 8월 15일 윤보선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주중국 대사 권유를 받자 그는 가정 사정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이기붕을 통해 다시 주일본공사직을 요청했고, 윤보선은 자리를 회피하며 주일본공사직 요청은 불응하였다. 세 번째로 상공장관 임영신을 통해 미국 대사직을 권하며 국무회의에서 이미 결의되었다고 하였으나, 민중일보를 통해 할일이 많다며 이 역시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여러번 사람을 보내 그의 외교관 파견을 종용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과연 특별시장이라는 중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에는 의문이나, 나로서는 전력을 다하여 서울시의 건전한 발전에 노력할 각오이니 일백 오십만 시민여러분의 끊임없는 성원을 바라 마지 않는다
서울시장 취임 담화문
서울시장 재직 중 공덕귀(孔德貴)와 재혼하게 되었다. 어머니 윤명사(尹明師)가 덕수교회 목사 최거덕(崔巨德)에게 아들의 혼사를 부탁하자, 최거덕 목사는 다시 한국신학대학장 송창근(宋昌根)을 통해 공덕귀와 중매를 섰다. 안동교회는 윤치소 등이 주도로 설립한 교회였다. 공덕귀는 호주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송창근의 만류로 중단하고, 윤보선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혼수는 최목사 사저에서 마련했고, 결혼식은 1949년 1월 6일 윤보선의 안국동 집에서 함태영 목사의 주례하에 간소하게 했다.
1949년 3월 12일 제9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3월 18일 고려역도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1949년에는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고밝혔으며,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고 회상했다. 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상공부 장관 재직 중 두 가지 문제로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다. 고무조합 배정사건과 경전사장 이태환 경질문제였다. 그 동안 외자청을 거쳐 상공부로 와서 고무조합에 배정되어 오던 생고무를 금융조합 연합회가 이승만 대통령을 움직여 상공부장관 재가 없이 임의로 처리했고, 그 명분은 짚신을 신는 농부들에게 고무신을 신기겠다는 명분으로 처리되었다. 한편 한민당과 대한국민당이 합당하여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그는 민국당원이 되었다.
1950년 2월 25일 대한축구협회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1950년초 경전사장으로 있던 이태환을 미워한 대통령 이승만은 그를 해임하려 하였으나, 윤보선이 볼때 해임이유가 없어서 취체역 회장으로 전임시켰다. 이에 이승만이 진노하여 그후 책상에는 윤보선은 내말을 안듣는 사람이라고 메모를 해 두었다 한다. 또한 이승만이 한민당계 정당을 멀리하고 배척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이승만의 배척을 당하게 되었던 그는 이승만의 독단으로 국무회의가 공전하자 흥미를 잃어오던 그는 1950년 5월 상공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이승만에게 사태를 바로 볼 것을 촉구했고, 주변에서 아첨하는 측근들을 내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윤보선이 그의 숙부인 윤치영이 자신에게 총애를 잃은 것에 불만을 품고 사적으로 청탁하는 것으로 여겨 이를 멀리했다. 실망한 그는 이승만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승만과의 결별을 계기로, 1920년대부터 이승만의 열성적인 추종자였던 숙부 윤치영과 멀어지게 된다. 그는 그 대로 한민당을 탈당한 윤치영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윤치영은 윤치영 대로 그가 이승만 박사에게 대든다고 판단했다. 1950년 5월 9일 상공부장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민주국민당의 원내총무를 거쳐 한영협회(韓英協會) 회장직에 선출되었다.
1950년 11월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정위원의 1인으로에 피선되었다. 그해 1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선출된 뒤 1951년 상이군인신생회의 회장으로 초빙되었다. 1952년 한정협회(韓丁協會) 회장 등을 지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재야정치인이 되었다. 1954년 5월 10일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서울 종로갑구 후보자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제3대 민의원이 되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김도연과 유진산이 있었음에도 그는 유진산의 양보로 그는 구파 몫의 민주당 최고위원직에 선출되었다. 별로 야심이 없었으므로 민주당의 당내 주도권을 쥐려던 민주당 신파 인사들의 견제를 받지 않은 것도, 그가 구파로서 최고위직에 오르게 된 원인이었다.
1960년 곽상훈 등과 함께 김구(金九)선생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 직접 커튼을 벗겼다.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던 조병옥이 사망하자 민주당 구파의 대부였던 유진산의 추천으로 조병옥(趙炳玉) 사후 구파 리더로 추대되었다. 유진산의 양보로 그는 구파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윤보선은 당시 민주당 구파의 얼굴마담격으로 등장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은 제3차 개헌을 통해 의원 내각제(양원제)를 채택하였다. 5월의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출석의원 263명 중 259명의 출석으로 열린 1차 투표에서 208표를 얻은 윤보선은 29표를 얻은 김창숙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내각책임제 개헌 뒤 실권자가 국무총리라는 점에서 그는 한때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민주당 신파가 그를 적극적으로 대통령으로 지지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