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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碑林)
원래는 비림박물관과 섬서성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하던 섬서성 박물관이
이곳에 함께 있었는데,
섬서성 박물관이 신축되어 이전하면서 이곳에는 석조로된 유물만 보관하는
비림박물관만 남게 되었다 한다.
비림의 역사는 살펴보면..
당나라 소종때 장안성을 다시 쌓을 때 중요한 비석의 유실을 염려해,
그것을 모아서 황성의 상서성(尙書省) 서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옮겨진 것이 석대효경(石臺孝經)이다.
그후 당나라때 완성된 개성석경(開成石經)도 옮겨졌으나,
석경은 당 말의 전란으로 혼란해지면서 성 밖에 버려졌다.
그후 석경 전부(북송 1087년)와 당대 명필 구양순과 안진경, 이양수 등의 친필 석각과
조철, 소식, 조맹부 등 명사들의 진적비 등 중요한 비석을 지금의 비림 소재지로 옮겼다고 한다.
이렇듯 비림(碑林)은 비석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중국 최고의 석조 서고이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작은 연못이 나타나고, 그 연못위의 다리를 지나면
담쟁이 덩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이드가 일러준 대로 자세히 보니
문묘(文廟)라는 글씨가 보인다.
그 글씨는 비림이 원래 공자문묘(孔子文廟)였던 곳에 지어졌음을 알려준다.
제2전시실에는 비림박물관에서 세계적으로 지명도가 있는 비석이 있는데
바로 '대진경고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이다.
대진경교(大秦景敎)란 로마의 네스토리우스교를 의미하며,
비석에는 기독교의 전파(635년 즉, 1300여년 전)와 그 교율이 담겨져있으며
그 문헌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한다.
이 비석에는 한자와 시리아 문자 모두 1,870여 자의 글씨가 쓰여있는데
정면 아래쪽에는 경교의 신자 82명의 이름과 직함이 시리아 문자로 쓰고 있고
그 중 77명은 시리아 출신의 이름이라 한다.
이 비석은 서안이 서역문화가 들어오는 관문이었다는 증거물 이기도 하다.
이 비석은 지하에 묻히고 7백 년이 지난 명대인 1623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잡초 속에 버려져 있던 것을
청나라 광서 33년(1907년)에 함(Halm) 이라는 덴마크인이 학자를 사칭하여
이 비석을 은 3천냥에 사서 비밀리에 뉴욕 박물관으로 반출하려하다
북경 정부에서 이 사실을 알고 반출을 막고, 함에게는 모조비석을 주어 가지고 가게 했다고 한다.
뭐든 있을 자리에 제대로 있어야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테고,
왜 모르는 척 하는건지..
* 관람객이 너무 많아 비석 전부는 찍지 못하고 그냥 오기 서운하여 상단 부분만...
중국에서 1천년의 전성기를 누리던 경고 왜 사라졌나?
우리는 중국 기독교 역사하면 그 시작은 흔히 16세기로부터 본다.
즉 1807년 6월에 25세의 모리슨은
광동(廣東)에서 선교시작으로부터
헨리 메드할스트(1796-1857), 3)데이빗아빌(1804-1846)과
브릿지멘(1801-1861)헨리를 초기선교 그리고 3자 토착화선교를 주장한 네비우스(1861), 1368명의 세계에서 제일 큰 선교회를 세운 허드슨 테일러(1854년)의 선교를 중국선교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중국선교는 썩 그전에 있었다.
AD 635년에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온 기독교(경교)가 서역에서 수도 장안에 걸쳐 1천년의 전파와 전성기를 걸쳤다.
그 존재의 생생한 증언이 오늘의 서안(옛중국수도-장안)에서
출토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中國碑)’에서도 똑똑히 나타나는 것이다.
5천년 중국역사의 대서사시를 담은 1095개의 비석을 소장하고 있는 서안 비림박물관의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中國碑)’는 경교의 역사를 그대로 담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서안 비림박물관에 소장된 경교비이다.
이 비석은 총 219개의 글자로
경교의 교리와 역사를 기록하고있다.
이 비석은 총 219개의 글자로 경교의 교리와 인간 타락의 결과,
메시아 구원의 역사, 삼위일체, 생활법전 등에 대한 내용
그리고 신자들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어
중국 경교의 전성기를 말해주는 결정적인 유물이다.
당시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온 경교에 대해
당태종은 자신이 직접 이 종교에 대하여 배운 뒤,
다음과 같이 포교를 명령하였다고 한다.
"이 교는 도덕적으로 숭고하고 심오한 신비성을 풍부히 가지고 평화를 존중하는 종교임으로 나라가 공인하는 종교로 한다."
태종에 이어 고종 황제의 통치기간에도 경교는 더욱 견고한 지위를 얻어
당시에 국내 13도 358주에 경교 사원을 하나씩 건축하게 하였다고 한다.
사진: 페르시아로부터 중국 실크로드를 통하여
들어온 네스토리우스의 경교의 역사 유물이
서안 비림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그러면 경교는 어찌하여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 왔을가?
역사는 이러했다.
AD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치적 음모로 이단정죄를 받고 추방당한 경교의 주교인 네스토리우스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키릴루스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정치싸움이 벌어졌었다.
이 싸움에서 결국 키릴의 승리로 끝났다.
방심했던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자가 되어(이후 복권) 이집트와 리비아 사막을 떠돌며
회복의 날을 기다리다 AD 451년에 세상을 떠났다.
네스토리우스가 추방될 당시 그를 따르던 무리가 당시 로마 기독교 인구의 1/5이였다고 하니 적은 수가 아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은 동로마 제국에 인접한 강국인 페르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상거래를 배워 사막 실크로드를 달려 중국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경교, ‘빛나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AD 635년 당태종의 환대를 받으며
중국에 입성한 네스토리안들은 무섭게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당시 수천 개의 경교교회당과 기도처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역사적 수천개의 교회당도 기도처도 흔적을 찾기가 막막하다.
사진: 실크로드의 금자탑이라고 불리우는 막고굴이다. 여기서 기독교(경교)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오직 실크로드의 금자탑이라 불리우는 돈황의 ‘막고굴’에서 그 흔적이 나타났다.
중국 4대의 불교 석굴로 유명한 막고굴은 크고 작은 735개의 석굴로 이뤄졌다.
사실 불교 석굴이라 하지만
문명과 문화 교류의 관문이었던 이곳은 여러 종교가 거쳐 가면서
처음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이 중에 한 곳인 193호 석굴에서 경교의 역사가 발견되어있다.
그리고 실크로드 여러 박물관에서 막고굴(16~17호)에서
발견된 경교와 관련된 문서들이 나타나 사진으로나마 박물관들에서 볼수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1천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중국에서 경교는 사라졌을가?
경교의 실패원인은
첫째: 당시 중국황궁의 무자비한 박해로하여 쇠퇴기에 들어섰다고 본다.
고종이 죽은 후 불교의 숭배자인 즉천무후(則天武后)가 집권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경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예종, 현종(712-756)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열열한 도교신자인 무종 때에 이르러서는
경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극심해졌다.
이때 많은 경교 사원들이 파괴되었고 교회의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많은 경교승들이 환속되는 등 점차로 경교는 쇠퇴하여 갔다.
둘째는 자체의 교리적 문제 이단성에서 기인된다고 본다.
당시의 경교 신앙은 전통 기독교의 교리와는 다른 교리체계로서 이단의 색채가 풍겼다.
경교비의 내용을 보면 창조, 타락, 메시야의 출생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으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하여는 언급이 애매하며,
그리고 매 7일마다 성찬식을 행하며,
십자가, 연꽃, 구름 문양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
동쪽을 향하여 절하고 예배 시에는 목탁을 쳤다고 한다.
즉 경교의 제 모습을 지켜내지 못하고 상황화에 실패했다는 말이다.
(참고, 선교학자료-박준석, 라토렛 교수)
세째는 경교는 토착화에 실패하여 계속 외국인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원주민 지도자의 양성에 실패하였다.
그들의 황실을 통하여서만 세력 확장을 꾀하였는데
황실의 황제와 정치가 바뀌움에 따라
오히려 더큰 압제를 받고 그 영향력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 실크로드의 주요도시 쿠처의 이슬람 사원이다.
옛날엔 이슬람종교 법정까지 설취되어 있던 역사적 사원이다.
네째는 당시의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갈 당시에는
로마의 국가종교나 철학이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을 때였으므로 재빨리 확장되었다.
그러나 경교의 경우에는 불교가 이미 중국 사람들의 영적인 공백을 메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교는 오히려 불교의 한 종파로 간주되었으므로 경교의 포교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다섯째, 경교의 선교사들이 본국의 교회와 선교 본부로부터 너무 멀리 있었으며
또 외부적세력의 비난과 견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경교는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사진: 실크로드 중심도시 우루무치의 주요 이슬람 사원이다.
아름다운 사원에 내부도 잘꾸려진 대표적인 사원의 하나이다.
경교를 역사 속에서 깨운 이 경교비를 없애려는 움직임도
유럽기독교로 부터 감지되고 있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로마 가톨릭이 중심이 된 라틴 기독교는 경교비에 대해 위작 또는 네스토리우스에 의해 전래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며 격하시키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얘기도있다.
10세기, 경교에 이어 바로 뒤따라온 것이 이슬람이었다.
이슬람은 막강의 위력으로 실크로드로 동진하며 위그르족과 카자흐족 등
민족을 이슬람 종교로 개종시켜 갔다. 오늘 이슬람은 하루에 5차례의 예배를 드리는 진지한 모습을 실크로드 도시들에서 쉽게 볼 수있는 것이다.
중국서안, 우루무치, 돈황 등 실크로드의 주요도시 이슬람 청진사는 AD 700년대에 만들어진 모습 그대로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슬람 사원을 상징하는 둥근 돔이나 양쪽의 기둥은 없었고
중국 건축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웅장한 사원을 가득 메우고도 마당까지 채우고 진지하게 예배를 드리는 이슬람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경교의 실패는 아쉬움이 더해 가는 것이다.
사진: 실크로드도시중 가장큰 사원인 카스 청진사이다.
기념일이면 사원내와 앞광장까지 이슬람숭배자 3만여명이 모이는 곳이기도하다.
중국에서 경교 역사의 자료가 AD 1401년까지 나와 있는데
마테오리치가 중국선교를 시작한 582년까지 경교가 좀 더 자리를 지켜주었다면
이후 유럽에서 들어온 기독교와 함께 힘을 모을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을 가져보기도 한다.
중국 본토에서 기독교의 찬란한
수백년의 역사를 7세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기독교 역사를 16세기로 명명하게 된 슬픈 역사를 제 위치로 되돌리고 발굴하는 것 또한 오늘을 사는 크리스찬들의 몫이 되고 있다.
오늘중국 땅에 AD 635년 페르시아로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되어
1천여 년 동안 교세를 유지했던 경교의 역사이지만
오늘에는 무엇 하나 그럴듯한 흔적 없이 역사 속에 묻혀버린 현장을
실크로드의 역사적 발자취에서 아쉬움으로 확인해 갔다.
한국교회사요약
제1장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신부들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1. 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2. 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 아주었 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자도 순교함. 이벽, 이승훈, 권철신, 귄일신, 정약종의묘가 조성되어있다. 경기도 광주 군 퇴촌면 우촌리 소재. 1) 선교사 들어 오기 전에 나가서 만나서 받아들임.
1636년에 국호를 청이라한 만주의 여진족은 자기들의 요구를 안들어 준다고 10 만을 이끌고 임진란 40여년 만에 한국을 침공. 이때(인조14년)에 우리나라 조종 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 했지만 결국 남한산 성에 ?겨가서 투항했다가 1637 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정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항복. 이때 인조의 소현세자와 대신들이 청의 심양으로 끌려감.
수도를 심양에서 명 의 북경으로 천도(소현세자등도 같이 감)
(2달동안) - 소현세자가 기독교 저술을 읽을 기회가 있었음.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 이때 서양문물, 기독교 서적을 아담 샬이 줌. 그것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는 곧 죽게됨. 정초에 성절사, 원단사, 동지사, 천추사등을 북경에 파송했다. (사절단은 한 행차에 300- 500명 정도가 50일에걸 려 가서 50일 정도 머물고 돌아왔고 진상갈때에는 비단, 금, 은, 보석, 호피, 좋 은약 등을 가지고 갔다.)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일에 보상이 있고 악한 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 고 이웃을 제 2의 나라고 하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 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3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주교책을 가져옴.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 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교리 연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100리를 걸어 왔다고 함. 천주교 교리 서적이 너무 빈약 해 중국에 가서 도움 요청을 하자고 결정함. (이벽은 이때 이승훈에게 가서 이번에 갈때 천주교 교리서 많이 가져오라고 부탁함.) 1789년에 평택 현감이 ?다. 여기서 중국 신부에게 안수 받을 신부를 요청함. 양반은 훈방하고 김범우 는 충청도를 유배하여 그곳에서 타계함. -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에 지금 의 명동성당이 서있음) 이때 이승훈, 이벽도 배교함. 그리고 성직자의 필요성을 느낌. 그래서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
주 신부는 윤유일, 지향 의 인도로 밀입국함.(엽부로 가장) 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부활절 전날밤에 몇 사람에게 영세줌. (최이길 이라는 사람인데 턱수염이 없어 들켜서 처형당함.) 1887년부터 10여년에 걸친 공사끝에 완성되었다. 1) 수난을 불러온 요소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 집의 교리 연구에서 감화 받고 3년후 입교함.
그때 는 사색 당쟁이 극심하던 때이다. 정조 대왕도 성품이 어질어서 당쟁을 줄일려고 힘을썼다. 한성에 베르노 주교가 있었는데 로마 교황청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대 원군이 카톨릭에 관대한 생각이 있음과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에 상당한 지 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왕자의 유모는 영세까지 받은 여자였다 한다.
1865년에는 12명의 선교사와 평 신도 2만 3천으로 늘었다. 당시 상황이 이래서 김기호, 홍범주 등이 의논해서 조, 영, 블 의 3개국이 동맹하여 방하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비밀리에 베르노 주교에게 블과 교섭해서 외세 에서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카톨릭과 많은 교제가 있었다. 카톨릭은 정치적 개입을 원치 않고 방하 책이라는 자체도 부족하다 하여 묵살 하였다.
척외사상과 서학금지 상 소문이 빗발쳤다.
니델이라는 선교사가 포교들을 피해 충청도 해안으로 빠져나가 2명의 신부는 거기남겨 두고 니델과 조선교도들은 아산에서 어선을 빌려타고 중국 산동 성의 지프라는 곳에 다다르게 된다.
공사인 블란서 제독(로쓰)를 만나서 한국 박해를 보고했다. 국적이 미국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 들어왔다.(군함이 아니라 상선) - 여기에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타고 있었다.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 평양 관군괴 제너럴 셔먼호가 싸움이 벌어졌다.
총리 아문을 통해 조선 정부에게 셔먼호 사건을 묻게했다. 일본이 다른나라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일본 정부를 통해 조선의 쇄국 정책을 듣고 이제부터 미국과 조선관계는 일본이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
고대 로마 기독교인들이 당한 고난보다 한국의 4대박해 때 고난이 더컸다고 말했다. 상류에서 하류층으로 신앙의 계층적 구 조로 변모 되었다. 고유의 민족의식에 접촉함 으로서 조선적 기독교에 언문(한글)을 중시하게 되었다. (천주교 서적이 많이 한글 로 되있다.) 사진은 1882년에 간행된 최초의 한글성서(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 이다. 1. 시대적 상황
(나중 이단어 하나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할때 쉬웠다.)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 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된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 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가 억류되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1865년 중국 지프로 옮겼다. 1899년 세례받아 평양 초대 교인 이됨. 그후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짐. 1882년 봄에 요한, 누가복음을 번역 1883년에는 마태,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서상륜은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친척을 따라 홍삼 장사하러 중국을 따라오가다 콜레라에 걸렸는데 맥킨타이어가 그를 살게해 줌.
서경조(서상륜삼춘)과 둘이서 황해도 송천 으로 위험을 옮김. 여기서 송천 소래 교회 를 개척함(1884년- 조선 최초의 개신 교회) 1884년 또 다시 성경을 만들었는데 로쓰목사가 쪽복음 6천부를 제물포 (인천)로 보냄
성경을 분배하는 상인이 하루는 그집 에 머물렀는데 마땅히 줄것은 없고해서 성경을 한권 놓고 갔다. 김재준 박사가 중학교때 Y. M. C. A뒤에 승동교회에 갔다가 설교에서 성경을 읽어야 위대한 사람이 되고 영어 공부 한사람치고 킹제임스 버 젼을 안읽으면 안된다고 해서 그말에 집에 돌아가 그 책을 꺼내 읽고 훌 륭한 목사님 됨.
서경조, 서 경륜 형제가 열심히 전도해서 몇 달안에 50호가 교회에 나왔다. (서경조는 나중에 세문안 교회의 목사됨)
일본에 사절 단으로 파견 되는데 박영효, 이수정이 사절단으로 일본으로 가게 됨. 이수정은 현판 이라는 자리에 있었는데 가서 안돌아 오게됨. 일본 동경 대학의 조선과 교수로 눌러 앉음.
마태복음 산상설교 벽화보고 감명 받고 영접함. 쓰다는 이수정을 야스까와 목사에게 소개한다. 1883년 4월에 마침내 야스까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음.
(그들은 제물포 도착당시 이수정판 성경을 갖고 있었다) 오기전에 일본에서 조선 성경을 보고 기뻐했다.
한국 개신교회의 개척자였으며 절친한 동역자였다. 정동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정동에 대성당을 설립(1891)하고 로마네스크식 건물을 마련(1926)하여 성공회 선교 의 중심으로 삼았다. 개척 선교사 호 가드(중앙의 말탄)의 전도 광경(1912년)이다. 1907년 서울 무교동 에 설립된 이 교회가 오늘의 성결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캐나다출신 선교사 펜윅(가운 데 검은 옷 입은) 에 의해 1889년에 설립되었다 사진은 해방전까지 일본인교회로 사용되다가 해방후 덕수교회 예배당으 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서울 정동에 소재.
(그때는 당장 전도할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887년 9 월 27일에 언드우드가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림. (14명과 같이)- 이교회가 세문안 교회의 전신이다. (정 동 제일교회의 전신이다.) 1주년이 되는때에 고종황제께서 배재학당(인재를 배출하는)이라는 이름을 줌. 그 이유는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많 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모유보다 우유를 먹이는등 자기들도 먹고(악성 우유통 루 머번짐) 광이문(서소문)밖에 콜레라 환자들을 버렸는데 스크렌턴의 모친이 그중 1명의 소녀를 데리고 와서 아들이 고쳐서 이 학교 3회 졸업 소녀가 된다. - 나중에 정신 여자 중고등학교로 바뀜. 전라도 쪽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예수병원"을 설립했다. (당시 7300명 정 도였는데 이중 윤은현, 손흥조가 일본에 들렸다가 안식교 전도사를 만나서 돌 아와 한국에서 안식교가 시작된다.) 한 선교사 가 말하기를 " 이세상의 모든 성서가 불타 없어져도 한국인 5명만 모이면 성서를 재구 성할 수 있을 것이다 "
오늘 날도 그런 경향이 있다. 정치, 경 제, 도덕, 정신적으로 절망 가운데 빠짐. 그래서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95년 서울에 주재하던 선교사가 "한국의 실정을 변해가며 일반 백성들 사이 에 각성의 기미가 보인다"고 보고함.
1896년에는 3276명, 1900년대 와서 는 7690명으로 늘어났다. 1895년 일본 자객에 의해서 민비가 살해되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피신을 하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였지만 선교사들의 말만은 믿었다. 한국에는 미국인들이 250명이 있었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 뿐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그래서 일본인들 에게는 선교사들이 눈에 가시였다. 배제학당 안에 소위 '협성회'를 조직해서 애국운동을 벌였다. 이 협성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 운동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좀더 체계적인 것은 1893년 10월 '황성 기독교 청년회'가 조직됨. (오늘날의 Y.M.C.A가 됨) 서울 종로 2가에 '황성 기 독교 청년회'는 3층 양옥을 건립하고 황태자(순종)가 여기에 참석해 낙성식을 치 뤘다. 황제를 비롯해 이또오 히로부미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 었다. 이 청년회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 체육, 공업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1896년에 서재필은 독립 신문을 발간한다. 그는 그 신문을 통해 대중계몽에 성 공을 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없애고 그곳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
1910년 12월 27일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이 압록강 철교를 놓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그곳에 가던 기차는 선천역에 한 번 정지하게 된다. 헌데 이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한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 가운데서 105인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105인은 여러차례 감형으로 형기를 마치고 나오게 된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저들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9000명이 나와서 그들을 환영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 결 주의'를 내세웠다.
'왜 우리가 일제의 압력 하에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를 품게됨.
33인중 16명이 크리스챤이었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앞장섰고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 주의로 기독교 정신 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기독교인들을 투옥시키고, 체포, 교회를 파괴시킴. 이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4월 15일 12시경 수원 부근 제암리 교회에 일본헌병이 몰려와 교민들을 모이게 하고 창문에 못을 박고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고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찌르고 죽였다.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함. 1919년 일본 보고에 의하면 파괴된 교회가 17개, 일부 파괴된 교회는24개, 그외에 교회에 큰 손해를 본 곳이 41개, 교회 재산 피해가 3만불이 었다. 장로교 보고에 의해 체포된 목사, 장로수가 134명 교인수가 3천 8백 4명, 사살된 신도수가 47명, 감리교 기타 다른 교회의 신도들을 합친수는 타 종교의 신도 숫자를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이일을 통해 교회는 많은 피해를 봤지만 또 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평양 숭실학교에 모우리 모펫이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일제가 그를 잡아갔다. 피신하는 학생들을 은둔 시켜 준 죄였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도 독립운동 시위에 동향을 미국 선교회 에 보고하고 총독과 일제의 잔악상을 세계에 알렸다. 1. 신사참배의 강요와 박해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샌드위치'였 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봄. 이러한 때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저항하면 투옥. 구 약의 모세 5경과 요한 계시록을 그들의 국시사상에 어긋남을 알고 읽지도, 가르 치지도 못하게 함. 사도신조 중에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라 라'를 뺌. 찬송가도 거슬리는 것 모두 빼버리고 예배 중에도 천와에게 목례하고, 일장기를 달고, 목사에게 일본 군복을 입도록 함.
침례교는 재림사상이 강한데 1942년 전국 모든 침례교를 폐쇄시킴. 성결교도 마찬가지로 재림 사상 때문에 1943에 문을 닫게함. 그래서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다른 교단으로 옮김. 많은 성 결교 침례교 성직자들이 체포, 구금됨.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이곳은 신학적으로 보 수적인 경향이었다.
평양 중심의 교회들은 이 학 교가 남쪽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보조를 반대했다.
그래서 평양 신 학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싫어함. 평양신학교는 같은 교단의 사 람이라도 유학생은 별과에 들어가 공부를 시킨후 목사로 만들었다.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교리적 체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 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그를 따르는 다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 회 조건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도덕적이요 신령적인 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감리교는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형용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극 보수적인 신학교수의 영향을 받아 성서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의 교육을 받았다. 김재준은 같은 곳에서 공부하였는데 박씨와는 달리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는 한 국교회 신학의 부재에 대해 비판하였다. 번역 하였다. 이 일을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이 같이 했는데 이 책이 아주 자유주 의적이어서 번역한 자들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Abingdon주석을 교인들로 하여금 사지도, 보지도 못하게 함. 점점 신학적으로 개방적이 되어갔다. " 기독교는 이성을 경멸, 종교외의 과학, 모든 다른 사상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아서 현세를 무시하고 죽어서 천당만 가려고 든다"라 고 혹평. 그 때 사회는 소망이 없었으므로 목사들은 재림, 즉 이세상 보다는 저 세상을 바라는 설교를 했다.
각교회를 돌아다니며 민족의 고난에 울었고 교회 형식주의를 비판. 전형적인 경건주의자 의 모델. 진리는 말에 있지않고 삶에 있다고함.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곧 삶이 다. 믿음보다 사랑에 진리가 있다. 요한 복음서를 제일로 생각. 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방했고 심지어는 사탄, 불경, 사회주의 책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 신학과 기독교 교리를 공격함으로서 신비주의 공통의 오류에 빠짐. 그의 절대적인 사랑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관을 잇는다고 믿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여김. 그를 부 흥사로 초청하지 못하도록 함. 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감리교는 1933년 그에게 휴직 처분함. 얼마후 결핵으로 사망. 절망과 고통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에게 주예수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설교의 주제는 항상 '마라나타'였다. 그에 의해 세례받은 자는 3천명 또한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 로 돌아온 자가 7만을 헤아렸다.
그 가 가는 곳마다 그를 보고 모여드는 신자가 많았다. 심지어는 가정을 버리고 따 라 다니던 유부녀들도 있었다. 그가 서울역에 왔을 때에는 전국 교회가 떠들석 했다. 그는 삼각산에 가서 기도원을 차리고 그곳에서 몸가름, 피가름을 하였다. 황국주가 죽은 후 그의 피가름 교리가 통리교로 이어짐. 공 산당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교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기독교도연맹에 반 대한 박봉옥 전도사에게 전달된 지시문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전쟁고아들로 이루어진 선명회합창단은 음악을 통한 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출옥성도들은 나오자마자 가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던 평양의 삼정현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고 교회 재건에 관한 협의를 함. 그리고 9월 20일 ' 교회 재건 5대 원칙'을 발 표함. 1.)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신사에 참배 해 죄를 졌으니 통회 자복후 사역에 임할 것.
그래서 출옥성도들과 싸움이 벌어졌 다. 교회안에 나기류가 생김. 같은 해 12월 초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북한 5개도 연합회를 조직하고 북한 교회와 남한 교회의 교류를 위해 북한 교회에서 이인식 목사와 김양선 목사를 서울에 파송함. 남한 교회에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 상도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일어남. 이곳은 주기철 목사님의 출생지이고 최상 림, 손양원, 한상동,등 이들의 영향력 때문에 부산이 중심지가 됨. 부산 진교회에 서 회의를 소집하고 경남 재건 노회를 조직함.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선출. 그런데 성결교 교리중 4중 복음이라는 것(성결, 신유, 중생, 재림)이 있는데 이 중 재림에 관한 문제 때문에 성결교가 문을 닫았었다. 해방과 함께 폐쇄되었던 성결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다. 더 좋은나라 를 건설하기 위해 기독교 민주당을 설립했는데 윤영하, 한경직 목사가 중심 인 물이었다. 공산당은 이것을 미리 알고 기독교 민주당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 창 당 대회에서 장로 1명을 살해했고 부근에 있는 교회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에 충격 받은 신의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러시아의 전투기와 탱크를 동원해 학생들을 저지해 많은 학생들이 수난을 당함. (신의주 학생의거 사건) 2년이 지 난 1947년 11월 북한 평양에서 김화시 목사와 고한규 장로가 있었는데, 이들 이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하려 했다. 그런데 역시 이들도 창당 대회 하는날 4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 투옥되거나 러시아로 유배됨. 1948년 북한에서도 공 산 국가를 위해서 주의를 기해 선거일을 정하고 투표를 하는데 모든 기독교인 들을 선거에 동원 시킴. 여기에 반길를 들고 북한 기독교도의 입장을 발표하였 다. 이 때 기독교인들을 찾아볼수 없도록 만들었다. 송창근 목 사,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납북됨.
6.25가 터져서 모든 지방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임. 1951년 5월 당시에 정기 총회를 소집했으나, 이 때 출옥성도들과 일제 때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간에 의견 대립이 생김.
1953년 정기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목사 안수를 예장에서 받을수 없다고 해서 갈라짐.
부정이 있었음을 들고 일어나서 박형용 박사를 지지하 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1977년 그 후 합동에서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짐 그후 사분오열의 분열이 이어져 많은 교단이 생김. |
1. 근대 이전 기독교와의 접촉
1)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 에 에베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했다 가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Ne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년 -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라함.
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 그때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때) 우리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
(신라의 김춘추 여러번 방문)
*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같은수도 이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자(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 가 번창함을 알게됨.
* 이런 여러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2) 몽고를 통해 접촉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 할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거리 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 줘서 고맙게 생각함. 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그래서 서부 교회의 Innocent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을 1246년에 보냄.
* Rubruc은 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 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 당함.
당시 몽고는 우리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
Coree - Korea
3)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
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Francis Xavier 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
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
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기독교 접촉.
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
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 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
(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 1592년 임진연에 전쟁 일으켜 우리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 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 들어 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
은 군인이 기독교인이 었다.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기독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
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 그는 우리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 : 1. 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2. 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 아주었 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 세스 페데스는 6개월 수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새통치자 출현함) - 기도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
선인으로 끌려가 믿은자도 순교함.
* 이 임진란 때문에 우리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특히 일본에 대해)
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대진경교유행비 : 781년(당 건대진 중
2년)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고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 관(숭전)에 소장되어 있다.88.8*177.8cm.
몽천포구 : 임진왜란 중(1594) 한국에 온 최초의 서야 신부 세스페데스가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경남 웅천.
돌십자가 :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 적을 증명한다.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24.5*24*9cm.
오다 쥴리아의 묘 : 임잰왜란 중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 중에는 기리 시단으로 개종하여 순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왕가의 딸로 고시니에 의 해 끌려 갔다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다 쥴리아의 묘. 서울 절두산 순교성 지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