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월 15일 서울 출생
1974년 입단. 84년 4단
제1, 2, 9회 후지쯔배 본선. 제 1회 삼성화재배 본선
그는 노름꾼인가, 프로 기사인가. 우문이다. 그냥 프로페셔널이다.
그런 직업도 존재할 수 있음을 한 사나이가 입증해 보였다. 바둑과 포커, 스포츠와 예술, 종교와 자선 사업에 이르기까지 수십개 분야가 극상(極上)의 프로인데 다른 어떤 호칭으로 그를 부르겠는가. 차민수라고 했다.
아니 지미 차(Jimmy Cha)란 ‘국제용 이름’이 더 잘 통한다.
다음에 한 항목이라도 해당되는 부문이 있는 분은 손들어주기 바란다.
단 하루 밤 사이 37만 달러를 벌어 본 사람. 평생 포커로 2천만 달러에 육박하는 수입을 올려 본 사람. 세계 최고수들이 모조리 출전한 국제 바둑 토너먼트에서 2회 연속 8강에 진출해 본 사람. 1년간 비행기 탑승 횟수가 120회에 이르러 본 사람. 살의(殺意) 속에 칼로 무장한 채 습격해 온 30여명의 갱들을 격파술과 기합 하나로 물리쳐 본 사람?. ----------- 됐네요. 손 내려 주세요.
직업의 여러 기능 중 호구지책을 그 첫째로 친다면 차민수의 직업은 일단 갬블러다.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에선 매주 2회, 연중 내내 각종 도박이 이뤄진다.
이곳을 무대로 활약중인 세계 각지의 프로 갬블러 수는 물경 2천만명. 매 대회마다 난다 긴다하는 프로 2천여명이 몰려드는데 우승 상금이 최고 150만 달러에 이른다. 이 무시무시한 별세계에서 차민수 그는 췹 리즈, 돌 브론슨 등과 함께 세계 3대 플레이어로 꼽히는 실력이다.
차민수는 86년 처음 연간 수입 1백만 달러 돌파 이후 96년까지 거의 기복없는 승률을 지켜왔다. 스터드(stud), 리미트 홀름(limit hol’em), 노 리미트(no limit) 부문 등 종목도 많은 모양인데 이걸 빠짐없이 석권했다. 눈치 육감 배짱 수읽기 기억력 두뇌회전?의 종합예술(?)인 포커에서 수천만대1의 경쟁을 뚫고 정상에 오른 것이다. 가치는 별개로 치더라도 난이도에서 이 만한 성취를 이룬 한국인이 과연 몇이나 있었는가.
포커인으로서 그의 전성기는 이 10년간이었다.
1년간 비행기를 평균 90회, 최고 120회나 타고 옮겨다녔던 것도 그 무렵이다. 요즘의 차민수는 한 해에 30회 정도 원정 길에 오른다. 나이를 먹으면서 실력이 부쳐서일까. 아니다. 어머니 때문이다. 그는 99년 이후 노환에 시달리고 계신 홀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절반 가까이는 국내에 머물고 있다. 바람처럼 사라졌다간 다시 바람처럼 돌아오곤 한다. 어디갔었느냐고 물으면 “나도 벌어 먹어야지요” 하며 웃는다.
그의 어머니 이기련 여사(81)는 차민수 스토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등장 인물이다. 2남 2녀 중 막내인 차민수가 아직 어머니 뱃속서 놀고 있는 사이 아버지가 납북됐다. 유복자인 셈이다. 서울 시청 공무원이던 부친은 자전거를 타고 강북 쪽 시찰을 나갔다가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잡혀갔다.
어머니는 억척에다 명석했고 부지런했다. 남자들 뺨치는 사업능력이 빛을 발하면서, 영등포 경원극장 일대를 완전 장악하는 부(富)를 형성했다. 지금도 이 일대는 이들 집안의 아성이다. 그 어머니의 유복자 민수에 대한 사랑은 상상을 초월했다.
차민수는 어린 나이부터 가위 브루조아적 황태자 수업을 받았다. 당수 수영 탁구 피아노 바이올린? 레슨은 거의 10가지에 육박할 정도였다. 이 중 대부분은 고등학교때 까지 계속됐으며, 특히 바이올린은 전공을 해도 충분할 정도의 솜씨를 지금까지 지니고 있다.
숱한 레슨 가운데 바둑이 포함돼 있었다. 8살이던 초등학교 2학년 때 사촌 형들의 대국을 어깨너머로 보다가 익혔는데, 그 재주에 반한 사촌 형의 강력한 주장으로 영등포 어느 기원서 정식 수업을 받게된 것이다. 사촌 형의 이름은 지봉운 씨. 60년대 아마 바둑계를 주름잡던 이 아마 강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올드 팬들이 적지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레슨도 여전히 계속됐었으니 오늘날과 같은 사관학교 식 바둑 교육은 아니었다. 그나마 중학입시 때문에 3년만에 바둑 돌을 놓아야 했다.
용산중에 입학한 차민수는 다시 바둑을 가까이 한다. 그리고 막바로 강 1급 대열에 올라서더니 고 2때는 입단 대회 본선 멤버 수준의 실력으로 발전했다. 동국대 경제과 입학 후엔 대학은 물론 아마 바둑계의 최강자로 떴다. 국제 아마대회에도 한국 대표로 용명을 휘날렸다.
이런 일화가 남아있다. 중국과의 수교가 임박해 오면서 한국기원은 고민에 빠졌다. 양국 바둑 대결이 곧 펼쳐질텐데, 아마 강자들이 프로로 빠져버리면 큰 일이었다. 중국은 당시 프로 제도가 없었으므로 전력이 막강했다. 한국기원이 고심끝에 짜낸 아이디어는 “차민수의 입단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차민수는 몇년 간 입단대회를 외면하다가 3학년 말 프로가 된다. 74년 39기로 김일환(현 九단)과 함께 였다. 입단 직후 그는 대뜸 패왕전 본선에 오르는 등 발군의 실력을 떨쳤다.
방위로 군 복무를 마친 차민수는 미국으로 떠난다. “워낙 노는 것을 좋아해 어머니 눈 밖에 났다. 미국 사람들이 열심히 산다니까 가서 보고 배우라는 뜻이었다.” 어쨌거나 그의 인생은 여기서 큰 전환점을 맞게된다. 76년. 바둑은 여전히 초단의 신분이었다.
프로기사가 이민을 왔다는 소식에 바둑을 좋아하는 우리 교민과 미국인들이 큰 관심을 보여왔다. 그 중엔 남가주 대학(USC)의 저명한 학자 리처드 도렌 교수도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미국 중국 일본인 합작 기원에 가서 바둑 강의도 했다. 해외 보급의 첫 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차민수의 첫 미국 생활은 노동에 가까왔다. 궂은 일과 맞부딛치면서 땀의 고귀함, 노동의 가치를 느껴갔다. 하지만 미국이란 사회는 풍요와 질서의 이면에 거칠고 어두운 얼굴도 함께 지니고 있다. 여기서 유명한 그의 ‘쿵푸 신화’가 만들어진다. 주유소 직원으로 취직해 ‘빵값’을 벌고 있던, 미국 도착 한달 만의 사건이다.
멕시칸 3명이 차를 대고 기름을 넣는데 한 눈에 건달들이었다. 그 중 한놈의 허리에 대검이 보였다. 시동을 건 채 주유하는 것은 뻔하다. 가득 채운 뒤 그냥 튀겠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돈을 내는 척 그대로 출발했다. 차민수는 이미 해 둔 수읽기를 실행에 옮겼다. 핸들과 문짝을 동시에 잡아 채 차를 일단 정지시킨 뒤, 조수석에 앉았던 거구의 한 녀석을 잡아 일으켜 내던져 버렸다.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녀석은 잠시 주춤하더니 대검을 뽑았다. 차민수는 틈을 주지 않고 몸을 날려 놈의 목을 밟은 채 “네가 칼을 빼면 그 순간 너를 죽이겠다”고 외쳤다(도미 한 달째 치곤 영어도 만만찮았던 모양이다). 흉기든 사람은 죽여도 정당방위로 무죄로 처리된다. 놈들은 돈을 내고 비실비실 사라져갔다.
하지만 끝난게 아니었다. 한 주일 뒤 어느 날, 혼자 주유소를 지키며 창밖을 내다보는데 한 떼거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30명은 족히 넘는데 지난 주 혼내줬던 세 놈의 얼굴이 보였다. 음 오늘 나는 죽었구나. 일단 무대를 넓게 갖기 위해 주유소 뜰을 향해 제발로 걸어나갔다. 수십개의 재크 나이프가 푸른 검광을 번뜩이는 가운데 정원은 살기로 가득찼다.
차민수는 등 뒤의 느티나무를 목표물로 잡았다. 호흡을 가다듬어 단전에 기를 가득 모은 뒤 비호 처럼 몸을 날려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앉은 자세 그대로 2, 3미터 상공을 양 발로 걷어차쟈 굵은 나무가지들이 거짓말 처럼 뿌지직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극한 상황서의 살기(殺氣)는 종종 초능력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모두들 얼이 빠져있는 사이로 두목인 듯한 녀석이 물어왔다. “Are you Bruce Lee?” 브루스 리는 홍콩 출신의 배우로, 당시 쿵푸 영화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던 이소룡의 영문 이름이다. 브루스 리, 아니 지미 차가 예의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그저 같은 운동을 한 사람일 뿐이다. 나는 주유소를 지키는 직원일 뿐인데 내게 무슨 유감이 있길래 이렇게 행패를 부리느냐” 두목은 한참 차민수를 바라보더니 “네가 백인이었으면 우리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부하들에게 철수를 지시했다. 사건을 전해들은 이웃 사람들은 그들이 저 유명한 카사블랑카 갱 단이라며 몸서리를 쳤다. 그의 쿵푸 실력은 바둑과 똑같은 4단이다.
미국 생활에 적응해 갈 무렵 큰 변화가 찾아왔다. 오일 쇼크가 닥치면서 미국 경제가 위축되기 시작했고, 차민수의 슈퍼 마킷도 경영난에 빠졌다. 이 대목에서 그가 유명한 포커학 교수 칩 존슨을 만난 것은 운명적이었다. 포커라면 한국에 있을 때부터 고수로 꼽혔었지만 존슨 교수의 이론과 실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차민수는 이때의 수업을 밑거름으로 80년대 중반 이후 미국 포커계를 주름잡거니와, 그 이전의 80년대 초반은 그에겐 최대의 시련기에 해당했다. 무엇보다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그는 72년 22세의 젊은 나이에 결혼했고, 그 때 나은 아들이 98년 결혼해 머지않아 손자를 볼 입장이다. 하지만 첫 결혼은 순탄치 않았으며, 결국 이혼의 아픔을 남긴 채 헤어졌다. 이 무렵 마약에 까지 손을 댈 만큼 차민수는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바둑계에 끊임없이 눈 길을 돌린 걸 보면 그의 ‘본직’은 역시 바둑인 모양이다. 차민수는 미국 프로 국수전, 어린이 선수권전, 장주주(江鑄久)배 아마 국수전 등을 직접 창설하거나 스폰서를 연결시켜 주면서 전미 바둑협회(AGA) 회장을 맡는 등 미국 바둑계의 비약적 발전을 주도했다.
중국에선 우정배란 대회를 만들었다. 당시 중국 프로들은 수입의 90%를 국가에 바쳐야 했는데, 이걸 개선하는 조건으로 대회 운영비 30%를 그가 떠맡은 것이다.
중국 기사들이 차민수와 마주치면 하느님 대하듯 하는 이유는 그 때 노예제도(?)가 종식된 때문이다. 루이나이웨이와 장주주가 한국에 똬리를 틀 수 있었던 것도 차민수의 노력 덕분이었다.
83년엔 조훈현 대 섭위평, 김인 대 유소광의 사상 첫 한 중 정상 대결이 미국서 열렸다. 세계 대회는 아직 꿈도 못꾸던 시절이고 중국과는 미수교 상태였다. 훗날 양국 바둑 교류에서 상당한 기초로 활용된 이 행사도 차민수가 마련한 것이었다. 이런 저런 공로를 인정받아 84년 한국기원은 그에게 일약 四단을 인정했다.
그러나 四단이 뭐 대수랴.
차민수는 얼마 뒤 내로라하는 九단들을 공식 석상에서 개망신 준다. 89년 그는 제2회 후지쓰배에 미국 대표로 출전했다. 프로 갬블러로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무렵이었다. 도대체가 프로 시합에 출전하는 자체가 15년 만이었다.
하지만 차민수는 놀랍게도 야마시로(山城宏) 오히라(大平修三) 등 일본의 1류 九단들을 연파하며 8강에 올랐다. 8강전 상대는 한반도서 거의 전관왕을 누리고 있던 조훈현. 둘은 절친한 사이다. 이 바둑서 차민수는 월등하게 앞섰다가 패배해 주변으로부터 의혹의 눈길을 받았다. 고바야시(小林光一)가 “종반 30수 이상 실수를 거듭한 것은 일부러 져 준 것이라고 밖에 볼 수없다”고 했을 정도다.
차민수의 회고. “끝내기에 들어갈 무렵 계가해 보니 16집 가량 앞서있었다. 하지만 친한 건 친한 거고, 져준다는 생각은 결단코 없었다. 다만 내가 이기면 한국이 시끄러워질텐데 하는 생각은 들었고, 그 결과 집중력이 흩어지면서 난조에 빠진 것이다”
이듬해 3회 대회서도 그는 유창혁을 꺾고 올라온 조치훈을 눕혀 또 한번 8강 신화를 재현했다. 교통 사고 후유증에서 완전 회복되진 않았어도, 당시 조치훈은 본인방을 따낸 일본 최정상급 기사였다. 차민수는 일본 기사들에게 유난히 강해 생애 통산 8승 1패의 호성적을 갖고 있다.
86년 재혼 후 꼭 10년만에 태어난 아들 조셉이 현재 만 네살이다. 이 늦둥이가 또 애비 뒤를 이으려는지 벌써 쿵푸를 포함한 너댓가지 레슨을 받는다. 차민수 말에 따르면 자신은 비교도 안되게 모든 면에서 비상하다. 천하의 풍운아도 이럴 때보면 어쩔 수없이 팔불출(?)이다. LA 근교 라 하브라 라는 주택가서 세 식구가 산다.
그 많은 돈을 다 어디에 쓸까. 연간 생활비 40만달러(약 4억 8천만원) 중 우선 39%가 세금이다. 항공료가 7만불, 우정배 보조금이 또 그 정도 된다. 나머지는 신앙적 지출이다. 중학교 때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자 집사인 차민수가 돌보는 주변의 가구 수가 무려 60집에 달한다는 얘기도 있다. 차민수 스토리는 노승일 씨에 의해 소설화, 바둑 출판물 사상 공전의 히트를 쳤으며 2001년 봄엔 안방 극장에도 올라갈 모양이다. 하긴 그의 인생 이상으로 더 극적인 픽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