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국사교과서에서는 삼별초가 몽골와의 강화를 거부하고 끝까지 항쟁했던 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재야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그의 저서 '한국사이야기'에서 삼별초를 높이 평가하지만 이들의 활동이 필요 이상으로 과대포장한 건 군사독재정권의 필요에 의해 저질러진 역사조작의 한 예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반란일 수도 항쟁일 수도 있다는 김봉환의 답변을 보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시기는 다르지만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후금과 강화를 맺는 문제에 대한 최명길과 김상헌의 견해 차이를 삼별초의 경우와 비교해보고 싶습니다.
인조가 강화도로 도망치기도 전에 남한산성에 갇혀 꼼짝달싹 못했을때 최명길은 조심스럽게 후금과의 강화를 주장합니다. 물론 김상헌을 비롯한 서인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죠. '오랑캐한테 항복할 순 없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 심하게 말해 '쥐뿔'도 없으면서 후금에 대한 항전을 주장한거죠. 그러면서 강화를 주장하는 최명길을 매국노 다루듯이 대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최명길에 대한 평가가 과연 그런가요?
다시 돌아와서 무신정권에 비롯되었든 어쨌든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한건(몽골군과 싸운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대몽항쟁을 한 4년은 고려가 몽골과의 전쟁을 한 30년이란 기간의 끝자락에 해당됩니다. 이미 피폐해진 국토와 백성의 처지를 생각하면 삼별초의 행동이 과연 항쟁이라 불리울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삼별초가 진압되고 난 뒤 그들의 근거지였던 제주도 백성들이 입은 피해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과연 삼별초는 누구를 위해 몽골군과 싸운 것일까요?
: 게시판에고 썼는데, 다시 한번 묻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학생입니다. 그동안 시험때문에 많은 참여를 하지 못했는데, 이제 부터 열씨미 하겠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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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변, 고려 고종때 최우가 설치한 군사집단 입니다. 우리는(적어도 이 나라의 학생들은) 삼별초가 몽고에게 굴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자주성과 민족성을 떨쳤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얼마전 아주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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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의 난.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 고려 원종때 원의 세력에 반대하여 일어난 반란 사건. 원종이 몽고에 굴복하고 돌아온 후 11년에(1270, 무신정변이 끝나는 해)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듣지 않아 강화에 있는 이들의 명단을 적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명단이 원에 들어가면 불리 할 것을 생각한 배중손과 야별초인 지유, 노영희 등은 11년 6월에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과연 순수한 대몽항쟁이었을까? 삼별초의 세력 기반은 무신정변에 있습니다. 또, 무신의 최고 권위자 최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바로 삼별초고요. 이들은 자신들의 세력 약화와 문신들(권문세족)의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요? 이 의문을 뒤바침 해 주는 것이 바로 승화후 온을 왕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즉 새로운 무신의 왕국을 만들겠다는 의지, 다시 한번 세상을 무신시대로 만들겠다는 증거가 아닐련지.
: 이들은 강화도에서 버티다가 관군에게 몰려 진도로 도망가고 거기서 온이 죽습니다. 이제 이판사판이겠죠. 나머지 사람들은 제주도로 도망가 반항하다가 망하게 되죠.
: 또 하나의 충격적 사실! 삼별초의 잔적이 해적으로 변하여 연안 지대를 약탈하였다고 합니다. 진정으로 대몽항쟁이었다면, 나라와 민족을 위한 항쟁이었다면 어떻게 그 잔적들이 해적이 되어 백성들을 약탈하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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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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