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반 봄 야외수업기 <12년 논어강의 졸업 기념여행> 2015.4.24
올해 봄 야외수업 일정과 장소는 일찌감치 정하고 수강인원이 많은 점을 감안, 선착순, 선납조건으로 신청을 받았다. 몇몇 장소 후보지를 거론했으나 전남 구례의 화엄사, 사성암이 결정되었다. 화엄사는 워낙 유명한 고찰이라 안 가본 사람이 없겠지만 사성암은 좀 생소한 사찰인지라 호기심이 발동한 것 같다. 버스 최대 탑승인원이 45명-선생님을 빼면 44명까지 신청이 가능하다. 항상 신청하고도 갑작스런 일로 못가는 일들이 생기기 때문에 여분을 더 받는게 과거 관례다. 그러다 보면 어느해는 인원이 오버하여 보조좌석으로 불편을 겪기도 하고 어느해는 빈자리를 여럿 두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올해도 마지막까지 꽉찬 신청이었으나 아침에 탑승을 하고 출발시간에 체크하니 네자리가 남는다. 모두 돈을 선납한 동지들이다. 나이가 많다보니 본인의 신병도, 혹은 부모님의 위급한 상황도 생기기 마련이다.
아침식사로 김밥,떡,귤,과자,물을 배급한다. 반장이 늘 하는 일이지만 너무나 수고가 많다. 동기 친구들이 도우긴 하지만 얼마나 노고가 많을까? 고맙기도 하고 그녀의 봉사정신에 동지들 다같이 감사를 드린다. 늘 오던 버스 최기사가 이제 사장이 되었다며 딴 기사가 연락을 해왔다. 좋은 기사를 보내주어 안락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여행의 기획과 진행을 담당한 필자인지라 버스 도착부터 버스상태,기사의 운행까지 신경이 쓰인다. 우선 버스가 좋다. VIP전용이라면서~ 승차감이 아주 좋았다.
노선생이 사회를 시작한다. 버스기사에게 안전운행을 바라는 박수. 아침 먹거리와 출결을 체크하며 수고한 반장과 그 일행들께 박수, 여행 차량과 장소확정,해설사 예약,식당예약을 한 필자께 박수, 집에서 격려해주는 남편과 아내에게 박수 --박수를 치다보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여행은 늘 즐겁다. 어린 학창시절 소풍이나 수학여행 갈때면 잠을 설친다. 지금 일흔이 넘는 이 나이에도 잠을 설치고 뭔지 설레는 이 기분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나이 들수록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여기에도 통용되는 것일까? 장소가 멀기 때문에 30분을 당겨 7시30분에 출발한다고 알렸고, 정시에 떠남을 수없이 강조했기에 지각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불행히 한분이 늦어 참가치 못해 너무나 안타까웠다. 선생님과 39명의 노학생들을 태운 버스는 학생들의 즐거운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몸도 가볍게 싱싱 잘도 달린다.
선생님의 화엄사에 대한 관광안내가 시작되었다. 평소 논어시간에도 꼼꼼한 준비에 놀라곤 하는데 역시 여행지에 대한 사전 준비도 철저했다. 화엄사 소개와 화엄사가 소유하고 있는 국보4점과 보물8점에 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고~아는만큼 보인다는 진리를 깨달으려면 유심히 들어야 한다.
여행스케쥴을 안내하는 필자의 시간이다. 여행을 준비한 필자도 화엄사와 사성암에 대한 많은 준비를 해 갔지만 화엄사는 생략하고 사성암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다. 사성암에 대한 사찰 소개와 꼭 유념해서 구경할 곳도 소개했다. 그리고 사성암의 네분 스님 즉 원효대사,의상대사,도선국사,진각국사에 대해서도 소개하면서 특히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당나라 유학가는 길,원효대사의 "一切唯心造"에 관해서-또 의상대사의 당나라 유학과 귀국후 부석사 건립과정, 선묘 낭자와의 사랑이야기도 곁들였다.
정암휴게소에서 15분간 휴식을 한후 다시 일로 화엄사를 향해 달린다. 도중에 문화해설사가 연거푸 연락이 온다. 감이 좋다. 열성적인 점이 마음에 든다. 3시간 반만에 화엄사 일주문에 도착했다. 해설사와 일주문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바깥 일주문에 도착하니 해설사는 안쪽으로 더 들어오란다.일주문이 두개인 모양. 바깥 일주문에 智異山大華嚴寺(지리산대화엄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 글씨는 석전 황욱(石田 黃旭, 1898~1993) 선생이 91세에 쓰신 글씨이다
한참을 들어가니 원래 사찰의 일주문이 나왔다.
일주문에서 해설사의 안내를 받다. 일주문에서 만난 해설사는 예상대로 자상하면서도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진 자였다. 버스 유리창에서 본 "논어반"이라는 자막을 보고 바짝 긴장이 되었다며 예의를 갖춘다. 일주문 앞에서 전반적인 화엄사의 개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일주문을 들어갔다. 일주문에는 智異山華嚴寺 라는 해서체로 쓴 현판이 시선을 끌었다. 이 글씨는 선조의 8번째 아들(서자)인 의창군(義昌君; 李珖)이 1636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큰 벽면에 또 하나의 멋진 붓글씨체가 눈에 뜬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불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문귀이다. 사자 등에 서 있는 저 비석은 무엇인가? 궁금해서 가보니 인조 때 화엄사 대웅전 등을 중건한 벽암대선사의 공적비였다. 벽암대선사께서는 임란때 승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후 인조 때는 남한산성을 축성하면서 전국 승려들을 동원,팔도도총섭으로 공을 세우신 분이다. 화엄사를 중건한 것과 함께 또 한가지 유명한 것은 화엄사 올벚나무 군락지를 조성한 분이 바로 벽암선사이다. 당시 전쟁에 사용되는 화살을 만드는데 이 올벚나무가 쓰였기 때문이다.문화재의 보고로 일컫는 화엄사의 역사와 보물에 대해 알아본다.
천년고찰 문화재 보고(寶庫) 화엄사(華嚴寺) 민족의 영산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 스님이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 후, 백제법왕(599)때 3천여 명의 스님들이 머물며 화엄종을 선양한 명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 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4사자 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웠고, 원효스님은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기초를 닦았다. 문무왕 17년(677)에 의상 스님은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 법당(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했다. 경덕왕(742~764)때 이르러 8원 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었다.
당우와 암자를 중수했다. 조선시대에 세종 6년(1426)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는 배불의 와중에도 설응, 숭인, 부휴, 중관, 무렴 등의 고승대덕들이 주석했고, 임진왜란(1592~1598)때는 호남의 관문 구례 석주관에서 승병 300여 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 앙갚음으로 왜장 가등청정은 화엄사를 전소시키는 환란을 맞는다.
(어린 영조)의 시주로 지어졌다고. 근대에 이르러 도광 대종사의 전면적인 중수에 힘입어 지금의 화엄사로 모습을 갖추었다. 또 한번의 시련이 있었다. 6.25사변시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사찰과 암자를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차일혁경무관이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는 어록과 함께 각황사 문짝만 떼어 불태우고 천년고찰을 지켜내었다고 한다. 차일혁 경무관의 공덕비가 본당 입구 우측 모퉁이에 서 있다.
화엄사는 화엄경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화엄사라 명명되었으며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각황전과 세련된 조각이 아름다운 사사자 삼층석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기가 큰 각황전 앞 석등, 각황전 안의 영산회괘불탱 등 4점의 국보와 대웅전, 화엄석경, 동·서 오층석탑 등 8점의 보물을 비롯해 천연기념물 제1040호로 지정된 올벚나무까지, 빛나는 문화유산을 간직한 천년 고찰 말하자면 보물창고이다.
금강문과 천왕문을 거쳐 보제루 행랑마루에서 다시 설명이 이어진다. 화엄사에는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금강문이 더 있다. 금강문 역시 천왕문처럼 외부의 잡신과 악귀를 물리치고 불법을 수호하는 대문 역할을 하는데 두명의 금강장사가 안치되어 있다. 금강역사 옆에는 문수보살이 동자로 화현한 문수동자가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서 있고 또 한쪽에는 보현보살이 동자로 화현한 보현동자가 행원의 실현을 상징하는 코끼리의 등에 타고 있다. 일직선이 아니게 비켜 배치한 점이 특이하였다.
천왕문 앞에는 하얀꽃이 피어 있는 보리수나무가 이채롭다. 보리수나무는 불교의 상징이다.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불국 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인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이다. 화엄사 사천왕상은 흙으로 만든 소조불(塑造佛)이며 높이는 378㎝이다. 1630년(인조 8)에서 1636년(인조 14) 사이에 벽암(碧巖)선사가 화엄사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금강문·보제루·천왕문·적묵당·일주문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을 때 사천왕상도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천왕문 내부 왼쪽으로는 비파를 든 동방 지국천왕과 칼을 쥔 남방 중장천왕이, 오른쪽으로는 용과 여의주를 든 서방 광목천왕 그리고 깃발 달린 창과 사자를 쥔 북방 다문천왕이 있다. 네 구의 사천왕상은 공통으로 화염 무늬가 새겨진 화관을 쓰고 갑옷을 입고 있으며,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네명의 천왕들 모두 목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는데 무섭고 험상궂은 얼굴에도 예쁘게 스카프를 두른 모습이 의외로 조화를 이룬다.
천왕문을 지나 계단으로 오르면 보제루가 나오는데 계단 아래 마당에는 목마른 나그네의 갈증을 풀어주는 샘물이 있고 1964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소나무가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다. 또 두개의 당간지주가 그 옆에 서 있다. 원래 당간지주는 일주문 밖에 있는게 원칙임에 비추어 화엄사 배치가 원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짐작케 한다. 계단을 오르니 정면으로 보제루(普濟樓)가 있는데 화엄사 보제루는 다른 사찰의 보제루와는 달리 기둥 아래층으로 지날 수가 없다. 옆으로 돌아가야 하는 특이한 구조로 건축되어 있다. 보제루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으로 법회 때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강당으로 지어진 2층 누각 건물이다. 인조 때 벽암대사가 창건하였고 1827년 순조 때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계단 층계를 돌아 마당에서 보면 정면에 멋진 글씨의 현판이 걸려 있다. 꽃비그림과 함께 걸린 현판에는 "華藏"이라는 명필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다.보제루는 장식을 배제하고 단청도 하지 않아 그야말로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보제루 마당에서 멀리 해발 1,500m가 넘는 지리산 노고단이 보인다. 시간이 되면 야생화꽃이 반기는 성삼재-노고단길을 걸어보란다. 몇년전 보견회멤바들과 걸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국보4점과 보물8점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일주문 일체유심조 가람배치도 벽암대사 공덕비 차일혁경무관 공덕비 금강문 금강장사와 사자 등에 탄 문수동자 금강장사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천왕문의 사천왕상/험상궂은 얼굴이나 머플러가 예쁘다. 샘물 법고루 보제루로 오르는 계단 문화해설사의 열강 멀리 지리산 노고단이 보인다. 대웅전 마당에는 초파일을 앞두고 등불이 요란하다. 각황전
적묵당과 범종각 보제루 보제루 화장 현판 보제루 꽃무늬 창살 상왕문앞 까치집이 눈에 띄고 소나무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기념식수 보제루 화장-해설사 열강에 경청 당간지주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좌/만든지 얼마 안되는 괘불걸이.화엄사에는 11.95 메다 크기의 영산회괘불탱화가 있다.. 야외행사(야단법석 때)시 사용 목적으로 만든것임 우/보제루 안에 걸려있는 영산회괘불탱(국보)의 모사품 주련을 해석하는 노선생
국보 4점 화엄사에는 국보가 4점 그리고 보물이 8점이 있다. 어느 사찰보다 중요한 문화재가 많은 편이다. 국보보물이 많은 사찰은 경주 불국사,영주 부석사 그리고 구례 화엄사가 꼽힌다. 먼저 국보 4점을 소개한다.
화엄사 각황전 (覺皇殿):국보 제67호로 본래 각황전 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 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숙빈 최씨와 영인군(영조)의 시주로 1703년(숙종 29)에 세워졌으며,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이고 양식은 중층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원래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그 후 숙종 때 계파(桂波)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완공 후 숙종이 사액(賜額)하여 각황전이라 하였다. 현재 건물 중앙에 길게 설치된 불단 밑에는 석각(石刻) 화엄경석(華嚴經石)이 수장되어 있다.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건물은 원래 3층이었으나 임란때 소실후 2층으로 건축되었다.
건물 안쪽은 위 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건물 옆 활주가 휘어진 것이 시선을 끈다. 전각 문살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단청이 되지 않았는데 알료가 없어 단청을 못했다 한다. 편액 글씨는 숙종시 형조참판을 지낸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각황전 앞 석등(石燈): 국보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크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멀리 퍼지게 한다는 의미로 장고 모양을 택하였다고 한다.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8각은 불교의 8정도를,4개의 창은 사지법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4사자삼층석탑 마침 공사중이라 직접 올라서 보지는 못해 아쉬웠다.예전에 가본 기록을 살펴본다. 적멸보궁 안내판을 따라 각황전 뒷길을 따라 108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35호인 4사자삼층석탑이 있다.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와 어머니의 전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불사리 73과를 모셔와 연기조사의 공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고 하여 불사리공양탑이라고도 한다.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각기 모양이 다른 네마리의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곳을 효대언덕이라고 부른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4사자삼층석탑이 세워진 이곳은 백두대간의 기가 멈춘 곳으로 풍토지리상 명당으로 꼽힌다 한다. 언제 심어진 지는 모르나 크고 아름다운 소나무 한그루가 이 명당을 지키고 있는데 그 아름다운 모습에 모두 탄성을 지른다.
국보 제301호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화엄사에 있는 이 괘불의 크기는 길이 11.95m, 폭 7.76m이다. 석가모니불과 문수·보현보살을 중심으로 사천왕과 십대제자, 2구의 분신불, 시방제불(十方諸佛) 등이 적절하게 배치된 군집도 형식의 영산회상도이다. 화면 중앙의 석가불은 높다랗게 만들어진 단의 연꽃 받침 위에 앉아 있으며, 마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의 손가락을 땅으로 향한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사천왕 중 2구는 그림의 하단에, 2구는 상단에 배치해 마치 네 모서리를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홍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중간색을 사용해 은은하면서도 밝은 느낌을 주며 채색무늬와 금색무늬가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각 상들의 늘씬하고 균형잡힌 형태, 밝고 선명하며 다양한 색채, 치밀하고 화려한 꽃무늬장식 등에서 17세기 중엽의 불화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화엄사 보물 8점 (보물 제133호)이 있고, 대웅전내 삼신탱불은 보물 제1363호이다. 그 외 서오층석탑 사리장엄구(보물 제1348호)와 목비로자나삼신불좌상(보물 제1548호) 등 모두 8점이나 된다.
화엄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299호로 조선 인조 때 건립된 것으로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현존하는 화엄사의 당우(堂宇)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인조 14) 벽암대사(碧巖大師)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동.서5층석탑 대웅전 마당 앞 2개의 5층석탑이 서 있다. 모두 국가보물로 지정된 유적이다. 동5층석탑(보물 제132호)와 서5층석탑(보물 제133호)이다.통일신라 9세기말-10세기초에 건축된 두개의 탑은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다. 우측 동5층석탑은 조각이 전혀 없고 아래 기단도 밋밋한 데 반해 좌측 서5층석탑은 화려한 조각이 되어 있고 기단 하단부에는 12지신과 여덟무리의 신들 사천왕이 함께 새겨져 있다. 1995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롯한 유물 47점이 탑 속에서 발견되었다.
원통전 앞 사자탑 대웅전 옆 영전과 나한전 중간에 위치한 원통전(圓通殿) 앞에 보물제300호인 사자탑이 서 있다.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무늬없는 석재로 구성된 소박 한 모습이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탑신(塔身)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이곳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이나, 조각수법은 이에 못미처 이보다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각황전 아래 묻힌 석경(보물 제1040호)은 원래 3층이던 장육전이 불타고 그 사방의 벽에 부처님의 말씀을 적은 기록(석경:石經)이 있었으나 불타고 1000여개의 조각이 각황전 밑에 보관되어 있다. 그외 보물로는 대웅전 내 삼실불탱(보물 제1363호)이 있다. 대웅전 내부 뒤면 중앙의 비로자나불화를 중심으로 왼쪽에 노사나불화, 오른쪽에 석가모니불화를 각 1폭씩 그린 3폭의 삼신불화로, 18세기 전라남도 순천의 조계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겸(義謙) 등 13명의 화승이 조성한 것이다. 그외 서5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도 보물(제1348호)로 지정되었다. 화엄사 서오층석탑 해체보수작업을 하던 중 탑 내부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1층 탑신 중앙에 지름 22㎝ 정도의 둥근 홈에 청동불상범(불상주조틀)과 청동방울 및 장식, 철제칼, 금속편, 수정 등 사리장엄구가 안치되어 있었고 그 옆 33㎝×10㎝의 네모난 홈에 백지묵서다라니경(白紙墨書陀羅尼經)이 탑인(塔印) 찍힌 종이와 함께 뭉치로 발견된 것이다. 또 한점의 보물은 목비로자나삼신불화상(보물 제1548호)이다.
원통전,나한전과 영전,명부전 원통전(圓通殿)은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불전인데 주불전일 때는 원통전, 부속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고 부른다. 닷집으로 전각이 매우 아름답다. 단청도 화려하고 곱다. 화엄사에는 삼성각(산신각,칠성각,독성각)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대신 원통전내에 독성,칠성 그리고 산신을 모셔져 있다.원통전에는 각황전을 건립하도록 시주한 숙빈최씨와 영인군(영조)의 고마움을 적은 글이 있다. 원통전 계단돌은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장육전의 계단과 기단을 옮겨 사용하였다. 원통전 옆에 아담한 크기의 나한전이 위치한다. 나한전은 부처님의 500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나한전(羅漢殿)에 봉안되었던 영산회상도는 석가불이 영취산에서《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이다. 가섭존자, 아난존자 등 석가의 18제자가 둘러싸고 있으며, 하단에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서 있는 모습의 불화이다. 나한전은 그 자체 건물보다 후불탱화가 더 유명하다.
아울러 나한전 앞 홍매화도 유명하다. 워낙 꽃색상이 검붉어 흑매라고도 한다. 수령 300년을 자랑하는 이 매화나무는 조선조 임진왜란 시절에 화마를 입은 자리에 각황전이 세워지고나서 중건불사를 했던 스님이 기념식수로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3월말경부터 4월초까지 이 홍매화를 보러 오는 관광객,사진사들로 "일당 천"이라는 격찬을 듣는다고 한다. 마침 지금은 매화꽃이 지고 난 후라 좀 아쉬웠다.
대웅전 좌우에 영전과 명부전이 있다.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한 영전(影殿)은 조사(祖師)들을 모신 전각인데 영전 기둥에 쓴 주련이 유명하다. 치문경훈(淄門警訓)이라는 책의 제현송구(諸賢頌句) 둘째편에 나오는 송나라 때의 굉지(宏智) 스님의 시귀인데 모두 8句 중 6句가 주련에 행서체로 멋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명부전은 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하며 이 법당의 주불은 지장보살이며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하며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고 있다. 해설사는 특히 명부전 앞에서 보충설명을 했다. 지장보살은 부처가 될수 있는 자격을 가졌음에도 그는 모든 중생, 특히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헤매는 중생, 지옥의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중생들 모두가 빠짐없이 성불하기 전에는 자신도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중생의 성불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므로 지장보살은 성불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장보살을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지옥에 떨어질 것을 걱정하는 후손들에 의해서 지장보살은 널리 신봉되었다. 즉 현실의 죄나 고통을 없애 주는 보살로서는 관음보살이 으뜸인 데 비하여, 죽은 뒤의 육도윤회나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구제해 주는 데는 지장보살이 으뜸인 것이다. 따라서, 지장보살은 육도윤회를 심판하는 명부(冥府)의 구세주로 등장하게 되었고, 우리 나라 사찰에서는 명부전(冥府殿)의 주존으로 신앙하게 되었다. 특히 죽은 사람을 위한 49재(齋) 때에는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는 보살로 받들어지고 있다.우리 사찰의 명부전에서 볼수 있는 지장보살은 천관 가사가 없는 삭발한 머리에 석장을 짚고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화엄사 경내를 해설사와 같이 설명을 들으며 돌아본 후 버스를 타고 예약한 식당(지리각식당)으로 갔다. 미리 산채비빔밥을 단체로 주문해 놓았기에 일사분란하게 식사가 진행 되었고 시간이 많이 절약되었다. 걱정이 많았는데 일행들이 식사가 맛이 있었다고 평해주어 다행이었다. 동동주 한잔씩 마시고 커피까지 얻어마신 후 바로 10분 거리에 있는 사성암으로 향했다.
각황전 각황전 불상 각황전 문살 탐구심에 진지한 표정들 석등 석등 귀두부 보궁 가는길 적멸보궁 가는 길--보수중, 출입이 금지되어 아쉽다. 사사자삼층석탑 영산회괘불탱 대웅전 대웅전 현판 대웅전 비로자나불과 협신불 노사나불,석가모니불 그리고 삼신불 후불탱화
서5층석탑/동5층석탑 서오층석탑에는 화려한 문양과 기단에 12지신 여덟무리의 신 사천왕이 그려져 있다. 동오층석탑은 밋밋한 형태의 탑신이다. 원통전 앞 사자탑 원통전 나한전 나한전은 500나한을 모시고 있다. 나한전 앞 300년 수령의 홍매화 명부전 앞에서 열강 명부전 명부전의 지장보살 영전 행서체의 영전 주련 청풍당의 주련은 한글이다. 종무소와 템플스테이수련원으로 들어가는 반야문 각황전 계단에서 출석부 화엄사 일주문 입구의 放下着 다리 식당 식사는 산채비빔밥으로 통일
사성암(四聖庵) 사성암으로 가는 길은 좁고 꼬불꼬불하여 작은 샤틀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정류장에서 인당 3천원의 왕복표를 사서 나누어 준다. 하산시 표를 주어야 하산차를 탈 수 있단다. 일행이 많아 두대로 나누어 탔다. 고맙게도 해설사가 사성암까지 가 주었다. 샤틀버스로 10여분 꼬불꼬불한 험한 산길을 오른다. 능수능란한 기사양반의 운전솜씨에 칭찬이 자자하다. 걸어서 오른다면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하면서 고마워 한다. 버스에서 내려서 또 150m 정도를 걸어야 한다. 드디어 사성암의 진기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치 바위벽에 제비집을 지어놓은 듯한 풍경에 고개를 든채 감탄연발이다.
사성암(四聖庵)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3호로서 구례읍에서 약 2km 남쪽인 죽마리 오산(鰲山)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원래 오산암이라 불렀는데, 544년(성왕 22) 연기조사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성암 사적(四聖庵史蹟)》에 4명의 고승, 즉 원효(元曉)·도선국사(道詵國師)·진각(眞覺)·의상(義湘)이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부르고 있다. 오산은 해발 531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경승지이다. 지은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암자 근처 암벽에 고려시대 초기 작품인 음각마애여래입상이 있어 창건 내력을 짐작한다. 현재 이 암자는 작은 규모의 목조기와집으로 되어 있다
오른 쪽 전각인 약사전으로 오른다. 유리광전(琉璃光殿)이라는 편액이 크게 걸려 있다.약사전 안을 보면 정면 뒤쪽벽에 음각으로 암각한 마애여래 입상이 보인다. 이것은 원효대사께서 손톱으로 음각하여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왼손에는 애민중생을 위해 약사발을 들고 있다. 왼쪽 전각에는 스님들이 수도하는 곳이다. 바로 옆에 있는 지장전을 끼고 도는 돌계단을 오르면 팔백년 묵은 귀목나무가 섬진강 줄기를 내려다보고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어루만지기만 해도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원바위가 있다. 소원바위에 얽힌 전설도 있다.
이곳 사성암은 수년전 "추노"라는 드라마를 촬영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카메라 앵글 속에 비친 아름다운 풍경에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과 함께--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도선굴과 진각국사가 참선을 했던 ‘좌선대’등을 지나 오산 정상부 쪽으로 가면서 반대쪽 시야가 확 트인다. 구비구비 도는 섬진강이 역사를 흘러보내고 있고 넓은 구례 곡성평야가 그림처럼 펼처져 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멀리 보이는 사도리(沙圖里)를 보면서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모래위에 그린 그림 사도리 사상마을이 있다. 신라말기 승 도선이 마을앞 강변에서 우연히 이인을 만나 세사를 물어 보았던바 이인은 말을 하지 않고 모래위에 삼국도를 그려 삼국통일의 징조를 암시해 주어 도선이 이를 크게 깨닫고 고려 태조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큰공을 세웠다.후인이 모래위에 그림을 그렸다하여 사도리라 칭하였으며 일제때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각각 상사리와 하사리로 분동하였다.사도리에는 유형문화재인 구례사도리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이 있다. 서시천과 서불에 대한 설명도 이어진다.
구례읍과 마산면을 경계로 흐르는 서시천(徐市川)이 있다.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라는 명을 받은 서불(일명 서복)이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을 헤맨다. 서불이 구례 마산면 냉천리에서 우물물을 얻어 마셨는데 물맛이 너무 좋아 냉천이라 이름 지어졌다. 서불이 지나갔다고 하여 서불천(徐巿川)이라고 하던 것이 한자가 비슷하여 서시천이 되었다고 한다. 구례를 특징지어 하는 말로 3대3미(三大三美)로 표현한다. 삼대란 지리산,섬진강,구례평야를 말하며 삼미(三美)는 아름다운 풍경,풍부한 소출,좋은 인심이 꼽힌다. 시간관계로 정상에는 오르지 않았다. 정상에는 530.8m의 정상표지석과 팔각정이 있다. 사성암에서 꼭 보아야 할 3가지는 절벽에 음각으로 그린 마애부처상,소원바위와 뜀바위 그리고 지리산 오산 섬진강 구례들판을 보는 경관이 그것이다.
휴양숲 안내도
샤틀버스에서 내려 150m를 걸어 오른다. 전각 앞으로 보이는 명 풍경 암벽에 붙어서 있는 전각들 유리광전(약사전) 유리광전 안 유리로 비쳐 보이는 암각 마애약사여래불 입상 좀더 크게~ 전각 기둥과 암벽 사이로 보이는 마애약사여래입상 800년 수령의 귀목나무 극락전
극락전 내부/예쁘게 쌓은 돌담 소원바위에서
소원바위에서 무엇을 기원했을까?
이것도 소원이 되나?/강아지를 사게해 주세요
소원바위와 뜀바위
소원지를 걸때 부처님의 미소를 친견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답니다.
도선굴 산왕전 구례곡성평야 다시 올려다 보는 사성암
사성암의 절경을 뒤로 하고 버스는 귀경길에 올랐다. 도중에 화개장터,운조루 등 일부 동지들이 추가명소를 희망하였으나 원안대로 바로 상경키로 결정하고- 오는 도중에 배영호 동지가 두차레에 걸쳐 우스개소리로 피로를 풀어 주었다. 여학생들을 의식해서 강도나 낮다고 하여 두번째는 수위를 높여가며~ 고마운 봉사정신이다. 선생님은 구례화엄사의 글자로 글짓기를 재미있게 풀었다. 도중에 정안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후 예정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대치동에 도착하였다.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오늘 봄 야외수업이자. 논어 책씻이 여행을 모두 마쳤다. 몇몇 친구들은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하루 여행의 소회를 담소하면서 나누었다. 즐거운 논어반 봄여행을 무사히 마친 점, 긴 여행기를 읽어준 동지들께 감사를 드린다. 본 여행기의 상당부분은 필자가 예전 다니며 기록한 내용들을 이기한 것임을 밝힌다.
감사합니다
|
|
첫댓글 이번 긴급사로 함께 참여못하여 몹시 서운 하였는데 米田의여행기가 큰 위로가 되네요.잘 보았습니다.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우당이 빠져 비상사태가 되었습니다. 청계가 대신 수고를 많이 했고 노선생님이 수고했지요. 그나 다행입니다.
자세한 여행기에 정말 놀랍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감사합니다^^
너무 길어 읽기가 지루하리라 생각됩니다만 기록으로 남기려다 보니~ 감사합니다.
정말 학창시절 공부를 잘 하신 분이라는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우등생이 아니고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기행문입니다. 매번 행사때마다 논어반을 위해 너무 애를 많이 쓰시네요~ 고맙습니다!
과찬--공부와는 관계없이 여행을 좋아하고 후기를 쓰는 숩관 때문에--감사합니다.
미전의 여행기는 만주 봉천(옛날이름)이남에서는 제일 입니다
ㅎㅎ청계까지 왜 이러시나? 나이값 못하게시리.하여간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