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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지(白雲池) 단소(壇所)의 역사
1. 선성(宣城) 그리고 예안(禮安)
선성(宣城)은 고구려의 매곡현 (買谷縣}이었다가 신라의 경덕왕때에 선곡(善谷)이라 하여 내령군(奈靈郡, 지금의 영주)에 귀속시켰다. 그후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합할 당시 성주(城主) 이능선(李能宣)이 거의(擧義) 하여 귀순 하였으므로 태조가 그 의리를 가상하게 여겨 그의 이름인 "능선"에서 "선"(宣)이라는 글자로 읍호를 선성(宣城)이라하여 군(郡)으로 승격 시켰다. 이때가 929년(고려 문종 20)이다
1018년(고려현종9)에 길주(吉州, 지금의 안동)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고려 우왕때 우왕의 태(胎)를 묻었다하여 군(郡)으로 독립하였으며 공양왕때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예안현(禮安縣)으로하고 현감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에 예안군 읍내면이 되었다가 1914년 안동군 예안면으로 편입되었다.
이곳 예안(禮安)은 "예"(禮)가 땅을 뜻히므로 "살기좋은 편안한 곳" 또는 "기름진 땅"이라는 지명유래를 갖고 있다. 예로부터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고 삼재(三災)를 당하지 않는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보륜(金輔輪)은 선성(禮安)을 "눈앞의 산수가 온통 그림같거니 병풍을 해서 뭣하랴"고 했으며 서거정(徐居正)은 "산과 물이 겹겹으로 도사리고 굽이치는데 길은 구불 구불 서려 뻗었네"라고 선성의 산수를 예찬하기도했다.
2. 백운지(白雲池)
백운지(白雲池)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단천동(丹川洞)에 있으며 조선시대 의동면에 속해있었다. 이곳 산이 부채살 모양의 능선으로 이루어져있었는데 백운지는 이 산의 뒷산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백운지(白雲池)는 고려시대에는 선호(船乎)라 불리어지다가 퇴계(退溪) 선생이 백운(白雲)으로 고쳐 불렀다.
앞의 하천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그 흐름이 완만하여 호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가끔 호수 한가운데 흰 물줄기가 솟아올랐는데 이는 아홉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기 위하여 싸우다 생긴 물줄기라하여 못(池)이름을 "백운지"(白雲池)라하고 마을이름도 못(池)이름을 따서 백운지라하였다.
백운지는 선성(宣城)의 진경(眞境) 구곡(九谷)중 한곳으로 옛 사람들이 하늘과 땅사이에 별천지라 할정도로 수려한곳이다. 이곳 백운지는 조선시대 대장장이가 십여집이 살고 있었는데 안동의 역동서원(易東書院)에 소속되어있었다. 만약 이 대장간이 없었다면 역동 서원에서 매년 거행하는 춘추제향(春秋祭享)에 어려움이 있었을것이니 크게 유익한곳이었다. 백운지는 선성현의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한 제6곡(第六谷)이다. 이곳 백운지가 바로 우리 선성김씨의 성지이며 발원지이다. 현재 이곳 백운지에 우리 시조부터 7세까지의 단(壇)이 모셔져 있다. 이곳 백운지는 1680년(숙종 6)에 산아래에 단을 설치하고 제향을 올리다. 1798년(정조 22)에 제단을 개수하고 전의비(傳疑碑)를 세웠다. 지금의 비단은 1965년에 후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3. 백운지(白雲池) 단소(壇所)의 위차(位次)
이곳 백운산(白雲山)에 시조이하 7세조까지의 분묘(墳墓)가 모셔져 있는데 대부분의 성씨(姓氏)가 그러하듯 우리도 부득이한 사유로 수대(數代)에 걸쳐 성묘(省墓)를 궐(闕)하게 되었고, 또한 묘소(墓所) 인근에 증거(證據)할 만한 표석(標石)이 없어 실전(失傳)하게 되었으므로 산하(山下) 묘소 가까운 곳에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비석(碑石:傳疑碑)을 세웠으며 그 아래 재사(齋舍)가 있다. 또한 매년 음력9월 첫째 일요일에 제사(祭祀)를 올리는 바 7세조까지의 위차(位次)는 아래와 같다.
백운지단소(白雲池壇所) 위차(位次)
시조
상(尙) / 호장(戶長) / 성씨 실전(姓氏失傳)
2세(世)
존성(存誠) / 호장(戶長) / 성씨 실전(姓氏失傳)
3세(世)
돈부(敦富) / 호장(戶長) 중윤(中尹) / 보성조씨(甫城趙氏)
4세(世)
희보(希寶) / 호장(戶長) / 복주권씨(福州權氏)
5세(世)
성세(成世) / 봉익대부 밀직사 상호군(奉翊大夫 密直司 上護軍) / 복주권씨(福州權氏)
6세(世)
뉴(鈕) / 중현대부 비순위 대호군(中顯大夫 備巡衛 大護軍)/삼척김씨(三陟金氏), 안동권씨(安東權氏)
7세(世)
방식(方軾) / 봉선대부 비순위 정용호군(奉善大夫 備巡衛 精勇護軍) / 통정대부 이조참의(吏曹參議) /영정군(永定郡)부인 기주 정씨(基州鄭氏)
[백운지 단소 위치 : 경북 안동시 도산면 단천리 849번지]
4. 정자동(正字洞)
정자동(正字洞)이라는 말이 처음보이는 문헌은 ‘백운지전의비지(白雲池傳疑碑識)’로 이에 의하면「일찌기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의하면 “이 산아래 일명 정자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총재공(文節公)께서 처음에 집현전 정자로 계셨는데······ 산 아래 백성들이 공께서 성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공을 아끼고 부러워한 나머지 동리의 이름을 정자동이라 부르게되었다.」한다. 이때까지만해도 백운지 마을은 정자동으로 불이어졌으며 문절공의 둘째아들 현감공이 백운산에서 10여리 떨어진 곳에 와서 살았다.
5. 백운지단소(白雲池壇所)의 역사
백운지단소가 기록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1435년(세종 17) 문절공이 집현전 정자로 백운산(白雲山) 선조의 묘소를 성소(省掃)한 것이 처음이다. 그후 250년이 지난 1680년(숙종 6) 4월에 이르러 문중 어른들이 선대어른들의 뜻을 받들어 백운산 기슭에 설단(設壇)을 하고 시조이하 7세(世)의 위패를 차례대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1725년(영조 1) 백운지(白雲池)에 재사(齋舍) 9칸 낙성(落成)하였다. 또한 1680년 백운산(白雲山) 설단(設壇) 이후 5년에 1회씩 시제(時祭)를 모셔오다가 1798년경에 약간의 위토를 마련하고 그때부터 3년에 1회씩 시제(時祭)를 모셨다. 1796년(정조 20) 봄 백운산(白雲山)에 흙으로 단(壇)을 만들고, 2년후인 1798년(정조 22) 4월 단(壇)을 옛 단단(壇)보다 아래로 수십보 내려 건립하였다. 그 단(壇)위에 ‘선성김씨7세분영전의비(宣城金氏七世墳塋傳疑碑)’을 건립하였다.「선성김씨7세분영전의비(宣城金氏七世墳塋傳疑碑)」는 두암 김약련(金若鍊)이 썼다.
그후 170년 후인 1964년 10월 3일 후동시제시(後洞時祭時) 백운지(白雲池) 중수(重修) 결정하고 다음해인 1965년 2월 백운지(白雲池)의 백운산 아래 비단(碑壇)을 중수(重修)여 상석(床石)을 설치하였다. 또한 1979년 10월 백운지재사중건(白雲池齋舍重建)을 발기(發起)한후 1984년 8월 백운지재사(白雲池齋舍)를 중건(重建)한 후, 2012년 5월 29일 백운지(白雲池) 단소(壇所) 정비사업기공식을 가진후 2014년 10월 6일 백운지(白雲池) 제단이안고유(祭壇移安告由)행사를 봉행(奉行)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6. 선성김씨7세분영전의비(宣城金氏七世墳塋傳疑碑)
전의비(傳疑碑)는 통비(樋碑)로 비두(碑頭)과 비신(碑身), 비좌(碑座)로 구성되어 있다. 전의비(傳疑碑)는 막돌로 쌓은 사각 담장 안에 둘러싸여 있는데 서쪽에 철제 문을 두고 있으며 전의비(傳疑碑) 앞에는 7개의 상석(床石)이 남북으로 설치되어 있다.
■ 전의비(傳疑碑) 총 자(字) : 849자(字)
▶ 건립연도 : 1798년(정조 22) 4월
▶ 찬자 : 김약련(金若鍊) ▶글씨쓴이 : 김상련(金象鍊)
▶전면 대자 : 1행(行) 11자(字)
▶ 음기 : 총 20행(行) 795자(字)
40자(字) 19행(行), 마지막 행(行) 35자(字)
▶측면 : 4행(行) 43자(字)
7. 선성김씨7세분영전의비(宣城金氏七世墳塋傳疑碑)
우리 김씨는 고려조 때 예안현에서 대대로 살았다. 시조로부터 호장을 지내셨고 5세(世)는 봉익대부(奉翊大夫), 6세(世)는 중현대부(中顯大夫), 7세(世)는 봉선대부(奉善大夫)를 지내셨다.이상 7세(世)의 산소가 예안현 북쪽 백운산에 모셔져 있었다고 대대로 전해왔는데 그 산이 다른 성씨(봉화금씨)의 점장(땅을 차지하고 장사지냄)한 바가 되었다. 지금도 그 묘소의 아래 위에 두 기(基)의 묘가 봉분이 허물어진 채 가운데 산줄기 위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맨 먼저 묘를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산줄기를 따라 내려오면 남쪽으로 몇 개의 산줄기가 나와 있고 그곳에 10여 기(基)의 무덤이 다닥다닥 연이어 있는데 모두가 비석이나 지석이 없어 증명할 수가 없으니 아! 이 슬픔 어이하리요.
봉선공[휘 방식(方軾)]의 자(子)가 낭장(郎將) 벼슬을 하셨고 낭장공의 자(子)가 현령공(縣令公)의 휘(諱) 소량(小良)께서 비로서 영주로 이사하셨는데 영주에서 예안까지의 거리는 하루에 왕래할 수 있는 거리밖에 안 된다. 현령공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교리[증(潧)]이고, 차남은 총재(冢宰)의 벼슬에 올랐으며, 총재공 휘 담(淡)의 둘째 아들 현감공[縣監公 萬鈞]은 다시 백운산에서 10여리 떨어진 곳에 와서 살으셨다. 영주지방에서 사는 자손이 이처럼 번창한 대도 불구하고 언제 실전하여 남이 차지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찌기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이 산 아래 일명 정자동(正字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총재공(문절공)께서 처음에 집현전(集賢殿) 정자(正字)로 계셨는데 집현전은 당세의 우수한 인재들이 엄격한 시험을 거쳐 선발되고, 정자벼슬은 집현전 가운데서도 유망한 벼슬이었으므로 산아래 백성들이 공께서 성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공을 아끼고 부러워한 나머지 동리 이름까지 정자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이 백운산이 분명 우리 김씨의 선영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실전하지 않았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총재공의 백씨 교리공[증(潧)]께서 정실 소생 없이 일찍 별세하셨으며 총재공의 장자인 훈련공[만석(萬石)]께서도 아들이 없어 현감공[만균(萬鈞)]이 그의 중자로 제사를 잇게 하였는데 그도 또한 아들이 없어 종가의 후손이 여러 번 끊기게 되었다.
최후로 현감공의 동생 생원공[만칭(萬稱)]의 후손이 비로소 종사를 잇게 되었으니 이런 동안에 성묘를 궐하였음은 사세 부득이한 일로 여겨진다. 이때에 이르러 산소 아래에는 민가가 드물고 산길에는 풀과 나무가 우거져 어느 무덤이 누구의 집 무덤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러 그 옆이나 아래 위에 다른 성씨의 사람들이 점장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자세한 것은 더 이상 상고할 길이 없다.
대저 우리나라의 김씨성은 신라왕족인 김씨를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또 김해김씨 그리고 영양김씨가 있는바 우리 김씨는 시조이신 호장공 이상의 선계는 증명할 만한 문헌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호장공 이하 4세(世)까지는 호장 그 후 3세(世)는 대부의 벼슬을 지냈으며 현령공[소량(小良)]께서는 조선조 초기의 벼슬을 하신데 이어 총재공께서는 세종 문종조의 명신으로서 문절(文節)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을 뿐 아니라 두 고을에서 공을 제사 지내고 학덕을 우러르는 사당이 세워졌다. 이로부터 훌륭한 인물들이 끊이지 않고 출세하여 살아서는 덕행과 사업으로 이름을 드날리고 죽어서는 향리에서 우러러 제사지내며, 대과(大科), 소과(小科)에 오른 사람이 많고 내외 모든 자손들의 번창함이 20여대에 이르니 이는 선종의 음덕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선영을 지키지 못하고 성묘할 곳이 없어 선조를 사모하고 은공에 보답하려는 조그마한 정성마저 펼 수가 없게 되었단 말인가? 자손된 자 백대에 이르기까지 가슴 아픈 한이 어찌 가실 수 있으리요.
이에 비로소 숙종 경신(肅宗 庚申: 1680)년에 이르러 문중 어른들이 선대어른들의 뜻을 받들어 백운산 기슭에 설단을 하고 시조이하 7세(世)의 위패를 차례대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5년에 한번씩 제사를 올리다가 근년에 와서 약간의 위토를 마련하고 다시 3년에 한번 씩 제사를 올리는 것을 영원히 지키도록 하였는데 처음 제사를 올린 때부터 이때까지 일백 십 수 년이 되었다.
특히 경건한 마음으로 제수를 갖추어 의와 예로 제사를 올리지만 기대고 의지할 곳이 없으니 제사를 지내고도 지내지 않은 것 같아 제사를 마치고 각각 흩어지고 나면 또다시 슬퍼지고 허전하여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그래서 제단을 쌓고 표석을 세워 우러러 의지하는 장소로 하자는 의논을 한 지 몇 해 뒤인 정조 20년 병진(1796)봄에 산소 가까운 산 아래에 흙을 쌓아 단을 만들고 2년 뒤인 무오(1798)년에 돌을 깎아 단위에 세우고 선성김씨 칠세분영 전의지비(宣城金氏七世墳塋 傳疑之碑)라 새겨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이 산중에 우리 선조의 산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게 함이로다.
이어 글을 지어 말하되
산위에는 여러대 선영이요
산아래에는 한조각 비석이 서있네
오랜세월 많은 조상영혼 오신듯 하여라
또 경계하여 말하되
어쩌다 우리 산은 잃었지만
비석만은 상하지 않게 하라
산은 옮기고 비석은 궁굴수 있어도
자손들 제사 받드는 마음만은 대대로 변함 없으리
무오(戊午:一七九八)년 사월(四月) 일 세우다
후손 통훈대부(通訓大夫) 전행사간원헌납(前行司諫院獻納) 약련(若鍊) 지음(撰)
생원(生員) 상련(象鍊)이 쓰다.
치석도감(治石都監) 중현(重玹), 중련(重鍊)
유사(有司) 광련(匡鍊), 영문(永聞), 영천(永天)
8. 봉성금씨 백운산 변의비(城琴氏白雲山辨疑碑)
변의비(辨疑碑)는 선성김씨(宣城金氏) 전래의 의혹을 변별해서 논파(論破)하는 것이다. 무릇 믿음은 믿음을 전하고 의혹은 의혹을 전한다. 만약 신빙할 만한 단서가 없는데도 문득 그것을 신붕하고 의혹될 만한 자취가 없는데도 그것을 의혹스럽게 여긴다면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에 김씨(金氏)들이 그 선조의 분묘(墳墓)를 실전하고서 이 백운산(白雲山)에 의혹을 두어 우리 선조의 묘소아래 백여보되는 곳에 단(壇)을 쌓고 비를 세워 ‘전의비(傳疑碑)’라 하였다.
그 비문에 이르기를 “시조(始祖)로부터 이하 7세의 묘소가 세상에 전하기로는 백운산(白雲山)에 있다는데 타인이 차지하여 묘를 썼다. 지금 두개의 무너진 봉분이 중간 등성이에 있다. ” 또 이르기를 “이 산은 일명 정자동(正字洞)이라 한다. 총재공(冢宰公 金淡)이 처음에 정자의 직함을 띠고 와서 성묘를 했기에 산촌사람들이 이곳을 정자동(正字洞)이라 명명했으니 이 산이 선영(先塋)이되고 그 당시에 실전되지 않았음을 모두 의심할 나위없다.”하였다.
슬프다. 이 말은 어디에서 근거한 것이며 무엇을 가리키는가. 백운산(白雲山)은 바로 우리 가문의 무원인 셈이다. 그 가운데 등성이에는 선조 정략공(定略公) 이하 4세의 묘소가 있으며 그 위에는 성재공(惺齋公)의 옛 묘터가 있다. 또한 그 등성이에는 처음부터 무너진 봉분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거늘 하물며 두 개의 봉분이라니. 우리가 알기로는 김씨(金氏)의 선대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인물이다. 그 묘소의 실전이 어느시기에 있었는지 알수 없으면 그 묘소가 어느 산록에 있는 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유독 중간에 위치한 산등을 명당처로 여기고 김씨(金氏)들이 배회하면서 지적하는 사이에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과 눈이 먼저 쏠려서 이러한 두 개의 봉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믿지 않을까 두려워한 때문에 정자동(正字洞) 세글자를 끌어와서 사실화한 것이다. 이른바 정자동(正字洞)의 주장도 무에서 유를 생성한 것이다. 총재공(冢宰公)이 정자로 있을 때 이곳에 와서 성묘한 여부는 우리가 감히 알수가 없으나 정자 벼슬의 인물이 한번 이골에 왔다 가서 만일 정자골이라는 아름다운 호칭이 흘러 전해진다면 총재공(冢宰公)의 7세(世)의 묘소가 어찌 갑자기 실전되어 전하지 않을 것인가.
삼가 그 세대를 논하면 총재공(冢宰公)은 천순 갑신(1464년)에 졸했고, 우리 선조 정략공(定略公)은 홍치(弘治) 계해(1503년)에 졸했으니 시대의 차이가 40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 집안이 이 산에 장사 지낸 것은 대체로 총재공(冢宰公)의 자제의 시기이다. 그 연대를 상고할 수는 없으나 적자인 훈련공(訓練公 金萬石)은 먼저 졸하고, 그 차자인 현감공(縣監公 金萬鈞)과 생원공(生員公) 두분은 있었다. 생원공(生員公 金萬秤)은 성화 기축(1469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니 계해년 보다 35년이나 빠른 식에 해당한다.
현감공(縣監公)은 정덕 계유(1513년)에 인의(引儀 통례원의 정6품직)의 직함을 띠고 중국에 갔었는데 송재(松齋)재 이우(李堣)의 <귀전록(歸田錄)>에 송별시가 실려있다. 이해는 곧 계해에서 11년 뒤가 된다. 우리 선조의 장례를 지내던 날에 두 공께서 모두 생존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으며 또한 현감공(縣監公)은 이 산에 와서 10여차례나 머물렀던 적도 있다.
그 때를 생각해보면 태평시절이었고 그 세대를 보면 눈과 귀처럼 서로 가깝고 그 땅으로 말한다면 향리에서 지척의 거리였다. 성묘(省墓)를 하지못해 비록 종사가 단절된다 할지라도 먼 선조를 추모하는 데는 종파와 지파의 간격이 없는 법이다. 어찌 친부형이 대대로 수호하던 땅을 남이 차지해서 장사를 지내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뒤 백암(栢巖) 선생과 우리 성재공(惺齋公)이 함께 도산(陶山)에서 공부를 했지만 한마디도 백운산(白雲山)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니 김씨(金氏) 묘소가 세상에 전한다는 소문 자체가 없었고 우리 집안에서 원래 하늘이 숨겨 놓은 곳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김씨(金氏)들은 상고 하지도 않고 단지 사사로이 멋대로 추측하여 형체도 있지 않던 무너진 봉분을 만들고 전하지도 않은 골 이름을 새로 지었다. 선대(先代)의 사적을 기술하되 실제와 어긋나고 의심스러운 일을 지적하되 남이 한말을 꼬집어서 증거로 삼으니 자신의 조상을 위해 의심을 전하는 방법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가.
일찍이 듣기로는 김씨(金氏) 선배들이 숙묘(肅廟) 경신(庚申 1680년)때 비로소 강가에서 제사(祭祀)를 베풀어 몇 년에 한번씩 거행하였다 한다. 아득해서 사실의 유무를 알수 없으나 제를 올리는 일은 의리에 기초하여 이치에 맞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행동은 도리어 뒤바뀌어서 잘못된 것이다 제단(祭壇)은 편벽되게 가운데 산등을 주로해서 설치했으며 비석(碑石)은 고의로 우리 묘소를 핍박해서 세웠다.
우리는 조상의 자손으로서 어찌 변론이 없을 수 있는가. 비(碑)를 세우던 애초에 애써 중지할 것을 바랐으나 김씨(金氏) 서너분이 문중과 상의해서 일정도 잡지 않고 몰래 비(碑)를 세움에 이르렀으니 세상에 이런일이 또한 어디에 있을것인가. 세대가 점점 멀어지면 진위를 분별하지 못할까바 깊이 두렵다. 이에 묘소(墓所) 아래 비를 세워 기록으로 남기니 보는 자는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상감이 즉위한지 23년되는 기미(1799년 정조 23)에 세우다.
9. 禮安(宣城)金氏始祖以下七世之位祭壇 設壇記
우리 禮安(宣城)金氏는 始祖 戶長公 諱 尙께서 入鄕 宣城得姓後 始祖以下七世祖墳塋을 失傳하여 悔恨을 禁할길이 없던중 肅宗 庚申(1680年)에 咸集堂 諱 宗灝께서 山下에 設壇하고 告由祭를 올린후 百十餘年이지나 正祖 戊午(1798年)에 斗庵公 諱 若鍊께서 宣城金氏七世墳塋傳疑碑를 세우시고 崇慕事業을 이어왔으나 二百餘年이 지난 至今 白雲池壇所에는 位次碑없이 祭祀를 올리어 悚懼한 마음을 禁할수 없었다. 이에 여러 宗員에 의해 白雲池靈域整化論이 일어나 大宗會長 恒淵氏를 中心으로 門中諸位께서 論議하여 壇所整化事業을 推進하기로 決議하고 委員會를 構成하여 工事資金調達協助를 온 宗中에 求하니 宗員 모두의 獻誠金이 모아져 2012年 6月에 崇祖敦睦의 뜻을 받들어 數個月의 役事 끝에 門中의 宿願事業을 이루게되었다. 이 事業에 同參하여 誠金을 獻誠하신 宗員분들의 名單을 獻誠碑에 새겨 後世에 傳하노라.
西紀 2012年 9月 日
白雲池壇所整化事業推進委員會 委員長 29世孫 宗煥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