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다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율법의 한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에 선뜻 동의하기에는 그들의 의식 속에 율법이 너무나 뿌리 깊게 박혀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바울은 혼인 관계로 비유해서 율법의 역할과 한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혼한 여인이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매여 있지만 남편이 죽으면 남편으로부터 해방되어 재혼을 해도 간음죄가 성립되지 않듯이, 그리스도인은 율법과는 사별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역할은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어주기 위해 한시적으로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맺어진 사람이 옛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에 매어있으면 새로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면서 자신의 체험을 소개합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어서 22~24절을 보겠습니다.
22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보수적인 신학자들 중에는, 이 본문이 바울이 율법 아래서 살았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고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바울이 지금은 은혜의 법 아래 살고 있지만, 이 본문은 과거 율법의 법 아래 살고 있을 때의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지만, 율법은 의롭고 선한 것이지만, 그 율법으로는 자신의 불의만 드러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 안에는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지만 악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도 함께 있어서 이 두 본성이 늘 긴장관계에 있는데, 결국은 의지가 욕망에 의해 꺾이게 되는 절망스런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데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다’고 현재형으로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산 이후에도 여전히 겪는 문제라고 해석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7장에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고뇌가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의 상황에 대해 고백한 것이라는 보수적인 신학자들의 해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7장에 나타나는 바울의 고뇌를 ‘과거의 일에 대한 고백’이라고 말하는 보수 신학자들의 주장은 믿음과 불신의 경계를 명확히 나누고 싶어하는 교리주의적 사고의 결과가 아닐까요?
파스칼은 인간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렸습니다. ‘인간은 천사와 악마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존재다.’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존일 것입니다. 어느 순간 신앙고백을 했다고 해서 사람이 일순간에 180도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