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복숭아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 자리엔
야휜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 쓰고
꽃 진 자리마다엔 또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살구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복숭아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그러니까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써야 할까
내 마음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달이 뜨면
누군가 아이를 갖겠구나 혼자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대로 써야 할까
2
꽃 진 자리에 나는
한 꽃 진 사람을 보내어
내게 편지를 쓰게 하네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잘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그 바람에
뺨을 기대보기도 한다고
나는 오지도않는 그 편지를
오래도록 앉아서
꽃 진 자리마다
애기들 눈동자를 읽듯
읽어내고 있네
인천 덕적도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1년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5년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지성사
1998 <젖은 눈>솔
2000년 산문집 <물의 정거장>이레
2001년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5년<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2008년 산문집<물 긷는 소리>해토
1992년 김수영문학상. 1999년 현대문학상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편 지 / 최문자
가는 길이 어두워
내 편지는 네게 닿지 못한다.
어둠 위에 육필의 자모가 나가고
어둠이 뜯어버린 단어들이
하던 말을 멈추고 있다.
어두워 못 가는 편지
그대, 모든 촉수 터질 듯 높여
반짝이는 그리움의 자모를 맞춰보라.
가슴털 뽑힌 우표 한 장 붙이고
네 이름의 외곽에서
쓰러져 잠든 내 언어들을 해독해보라
1943년 서울 출생.
성신여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귀 안에 슬픈 말 있네』『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울음 소리 작아지다』『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등
현재 협성대학교 총장.
연애편지 / 안도현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 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 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1961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 신문 신춘문예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리운 여우>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바닷가 우체국>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등
1996년 제1회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수상
제13회 소월시문학상, 2005년 이수문학상
전주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그리움에게 / 곽재구
그대에게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전라선, 지나치는 시골역마다 겨울은 은빛 꿈으로 펄럭이고
성에가 낀 차창에 볼을 부비며 나는
오늘 아침 용접공인 동생 녀석이 마련해준
때묻은 만원권 지폐 한 장을 생각했다
가슴의 뜨거움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래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건축공사장 막일을 하면서
기술학교 야간을 우등으로 졸업한
이등기사인 그놈의 자랑스런 작업복에 대해서
절망보다 강하게 그놈이 쏘아대던 카바이트 불꽃에 대해서
월말이면 그놈이 들고 오는 십만원의 월급봉투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쓰고 싶었다
얼굴 한번 거리에서 마주친 적도
어깨 나란히 걸음 한번 옮긴 적 없어도
나는 절망보다 먼저 그대를 만났고
슬픔보다 먼저 화해인 그대를 만났고
길고 근적한 우리들 삶의 미로를 돌아
어머님이 사들고 오는 봉지쌀 속의 가난보다 오래
그대와 겨울 저녁의 평화를 이야기했고
밤늦게 계속되던 어머님의 찬송가 몇 구절과
재봉틀 소리 속에 그대의 따뜻한 숨소리를 들었다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가슴으로 기쁨으로 눈송이의 꽃으로 쓴다
지나간 겨울은 추웠고 마음으로 맞는 겨울은 따뜻했다
전라선, 밤열차는 덜컹대며 눈발 속으로 떠나고
문득 피곤한 그대의 모습이 내 옆자리에 앉아 웃고 있는 것을 본다
그대의 사랑이 어느결에 내 자리에 앉아
가슴의 뜨거움으로 창 밖 어둠을 바라보게 한다
멀리 반짝이는 포구의 불빛이 보이고
그대의 불빛이 흰 수국송이로 피어나는 것을
나는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대에게 뜨거운 편지를 쓰고 싶었다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외지에서 사랑으로 희망으로 식구들의 희망으로 쓰고 싶었다.
1954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등장한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를
상자했다. 또 『아기 참새 찌구』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장면』 등의 동화집과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등이 있다.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다
여름편지 / 정일근
여름은 부산우체국 신호등 앞에 서있다
바다로 가는 푸른 신호를 기다리며
중앙동 플라타너스 잎새 위에 여름편지를 쓴다
지난여름은 찬란하였다
추억은 소금에 절여 싱싱하게 되살아나고
먼 바다 더 먼 섬들이 푸른 잎맥을 타고 떠오른다
그리운 바다는 오늘도 만조이리라
그리운 사람들은 만조바다에 섬을 띄우고
밤이 오면 별빛 더욱 푸르리라
여름은 부산우체국 신호등을 건너 바다로 가고 있다
나는 바다로 돌아가 사유하리라
주머니 속에 넣어둔 섬들을 풀어주며
그리운 그대에게 파도소리를 담아 편지를 쓰리라
이름 부르면 더욱 빛나는 7월의 바다가
그대 손금 위에 떠오를 때까지
1958년 경남 진해 출생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1984년 『월간문학』신인상 시조 당선
1984년 『실천문학』(5권) 신인작품 시 당선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바다가 보이는 교실』,『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처용의 도시』,『경주 남산』, 시선집『첫사랑을 덮다』
1996년 문학의 해 기념 문체부장관 표창
편지 / 유 하
늘상 길 위에서 흠뻑 비를 맞습니다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났더라면,
매양 한 발씩 마음이 늦는 게 탈입니다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당신의 음성도
내가 마음을 일으켰을 땐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벚꽃으로 만개한 봄날의 생도
도착했을 땐 어느덧 잔설로 진 후였지요
쉼 없이 날갯짓을 하는 벌새만이
꿀을 음미할 수 있는 靜止의 시간을 갖습니다
지금 후회처럼 소낙비를 맞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예비된 게 없어요
사랑도 감동도, 예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아무도 없는 들판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게으른 몽상만이 내겐, 비를 그을수 없는 우산이었어요
푸르른 날이 언제 내 방을 다녀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어둑한 귀가 길, 다 늦은 마음으로 비를 맞습니다
1963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세종대 영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영화과를 졸업
1988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단에 등단.
시집<무림일기>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에 가야 한다>
<세상의 모든 저녁>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등
물속의 편지 / 김경인
멋대로 출렁이는 파문이 좋아
파문에 쓸려 가라앉은 누더기 입술이 좋아
지문이 다 지워진 손가락으로 쓸래
고요한 밤하늘을 찢으며 떨어지는
별똥별의 푸른 비명이 좋아
도마뱀의 잘린 꼬리는 더 좋아
호수를 잔뜩 뒤덮은 플랑크톤처럼
내 위로 번식하는 내 얼굴이 좋아
불투명 유리창이 좋아
유리창 뒤의 염탐꾼이 좋아
나를 바라보는 깨지지 않는 유리눈알이 좋아
녹지 않는 눈깔사탕이 좋아
물 속 가득 차오르는 거품이 좋아
산산이 흩어지는 물방울과 함께
네 귀퉁이부터 사라지는 편지지에 쓸래
당신이 좋아
조각난 손거울이 좋아
1972년 서울출생
카톨릭대학교 국문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2001년 계간 『문예중앙』등단
시집으로 『한밤의 퀼트』(랜덤하우스, 2007)등
가난한 꽃편지 / 김해화
개망초 까마중이 애기나팔꽃 며느리밑씻개
내 삶보다 환한 꽃 피어 차마 뽑아낼 수 없습니다
캄캄하게 누워 뒤척이다 일어난 자리 돌아보니
시 한편 드러누울 만합니다
철근쟁이 스물몇해 사람노릇 못하여
시가 될 말 한마디 챙기지 못했습니다
녹슨 쇠토막 갈고 닦아 서둘러 만든 말
세우고 엮어 시를 짓습니다
사는 일 느을 하루같이
새벽밥 먹고 나가 돌아오지 못한 내 목숨
대충 헤아려도 수천입니다
지금 나가면 또 한목숨 버려질 일
마음 급하여 비뚤어지고 어긋납니다
아 참, 노동이 마지막 남은 삶의 끈입니다
새벽밥 한그릇이 노동의 시작입니다
열어본 밥통에 밥이 없습니다
새벽밥 지어야겠습니다
짓던 시를 버립니다
개망초 까마중이 애기나팔꽃 며느리밑씻개
환한 꽃이나 우거지겠습니다
1957년 전남 승주 출생.
승주 주암초등학교 졸업.
1984년 실천문학사의 ‘14인 신인작품집'에「비닐을 걷어내며」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우리들의 사랑가>, <누워서 부르는 사랑 노래> 등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대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1938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영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 영국 에딘버러 대학 등에서 수학.
1958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한 이래 <어떤 개인 날>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풍장><외계인><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등
11권의 시집과 산문집 <겨울 노래><젖은 손으로 돌아보라> 등을 펴냄.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
편지 / 정한용
두 점 사이에 우린 있습니다
내가 엎드린 섬 하나와
당신이 지은 섬 하나
구불구불 먼 길 돌아 아득히 이어집니다
세상 밖 저쪽에서 당신은
안개 내음 봄 빛깔로 써보냅니다
잘 지냈어... 보고픈... 나만의...
그건 시작이 아니라 끝, 끝이며 또한 처음
맑은 흔적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혹시 압니까
온 세상 왕창 뒤집혀 마른 잎 다시 솟고
사람들 이마에 꽃잎 날릴 때
그 너울 사이사이
흰 빛 내릴 때
그쪽 섬에 내 편지 한 구절 깊숙이 스미고
이쪽 섬에 당신 편지 한 구절 높이 새겨져
혹시 압니까
눈물겨운 가락이 될지 섭리가 될지
아프게 그리운
한 흙이 될지
1958 충북 충주 출생
경희대에서 박사학위
1980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1985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
저서로 [민족문학 주체논쟁] (1989 편저),[슬픈 산타 페](1994 시집),
[지옥에 대한 두 개의 보고서](1995 평론집), [나나 이야기](1999 시집) 등
현재 <정신과 표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등의 편집위원
인터넷 문학동인회 [빈터] 대표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고두현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 여름 푸른 상처
온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빛으로 물 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 리 해안 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채는 파도
그렇게 돌아앉아 있지만 말로
속 타는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아요.
1963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
경남대 국문과를 졸업
프랑스 파리7 대학과 콜레주 드 파랑스에서 공부함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현재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시집으로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붉은 우체통
- 황지우
버즘나무 아래
붉은 우체통이
멍하니, 입 벌리고 서 있다
소식이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思想이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여, 비록 그대가
폐인이 될지라도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고 쓴 편지 한 통 없지만,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길가에서 안개꽃 한 묶음을 사는데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뱃가죽에 타이어 조각을 대고
이쪽으로 기어서 온다
-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 지성, 1990
편지
-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 쓰면 한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부치지 않은 편지
- 정 호 승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이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새벽편지」(민음사. 1987) 中에서 -
마지막 편지
- 안 도 현
내 사는 마을 쪽에
쥐똥 같은 불빛 멀리 가물거리거든
사랑이여
이 밤에도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 마음인 줄 알아라
우리가 세상 어느 모퉁이에서
헤어져 남남으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듯
서로 다른 길이 되어 가더라도
어둠은 또 이불이 되어
우리를 덮고
슬픔도 가려주리라
그대 진정 나를 사랑하거든
사랑했었다는 그 말은 하지 말라
그대가 뜨락에 혼자 서 있더라도
등 뒤로 지는 잎들을
내게 보여주지는 말고
잠들지 못하는 밤
그대의 외딴집 창문이 덜컹댄다 해도
행여 내가 바람되어 두드리는 소리로
여기지 말라
모든 것을 내주고도
알 수 없는 그윽한 기쁨에
돌아앉아 몸을 떠는 것이 사랑이라지만
이제 이 세상을 나누어 껴안고
우리는 괴로워하리라
내 마지막 편지가 쓸쓸하게
그대 손에 닿거든
사랑이여
부디 울지 마라
길 잃은 아이처럼 서 있지 말고
그대가 길이 되어 가거라
- 「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숲. 1991) 中에서 -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 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 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