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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5월 13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but your grief will become joy." 말씀의 초대
바오로 일행은 코린토에서 선교를 시작한다. 먼저 그곳의 회당에 들러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했다. 그러나 모욕적인 말로 반대하기에 그들을 떠나야 했다. 그렇지만 인근의 이방인들은 반가이 맞이한다. 일행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쁨을 나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이별을 예감하신다. 그리하여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스승님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직 성령께서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오셔야 제자들은 말씀을 알아들을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탓입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떠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적으로 그분께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헤어짐은 일상사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체험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결국은 ‘혼자’ 가는 길입니다. ☆☆☆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비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함께 계실 분으로만 믿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그들은 이렇게 서로 수군거릴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직은 현실이 아닙니다.
어머니이신 하느님의 이미지 - 정순옥 수녀- 노동수녀로 10여 년간 공장 세 곳에서 일을 했는데, 대림동의 한 사업장은 20명이 함께 일하는 곳으로 사장도 직원들도 모두 여성이었고 대부분 결혼한 분들이었다. 그곳 분위기는 특별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분들이라서 가족 같은 분위기로 그야말로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그곳에서 성실히 사는 소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배울 수 있었다.
‘떠나심’과 ‘다시 오심’ 사이에서 -이준석신부- 예수님께서 고별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양승국신부- <비가 오면 비를 맞지요> 하루 온종일을 괜한 근심, 잡다한 걱정으로 지새는 사람들을 봅니다. 물론 그런 모든 근심걱정들이 자신과 가족의 만사형통을 바라는 마음, 모두가 별탈 없기를 바라는 기원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삶의 한 부분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걱정이 너무 지나치게 될 때 삶은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합니다. 비가 오면 비를 좀 맞으면 될텐데...행사가 잡혀있으면 연기하면 될텐데...다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알고 이해할텐데...행사가 서서히 다가오면 지레 걱정부터 앞섭니다. 행사 당일 날씨가 맑을 수도 있고, 구름이 낄 수도 있고, 비가 올 수도 있는데...꼭 최악의 상황만을 상상합니다. 우리의 근심 걱정, 그 근원을 찾아가 보면 언제부턴가 체득된 비관론적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관론적 사고방식은 부정적인 행동양식을 양산하고, 그로 인해 우리 삶 전체가 피곤해집니다. 영적생활 역시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는 것이 늘 팍팍하고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부정적, 비관적 사고방식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삶을 개선시켜나갈 수 있겠지요. 그 원인은 다름 아닌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결핍, 부족하디 부족한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면 그분께서 든든한 내 바위, 내 성체, 내 보루이자 지주이신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진정한 신앙인은 철저하게도 낙관주의자입니다. 낙관적 신앙인은 극진한 주님의 사랑을 잘 알기에, 그분께서 나를 당신 자신보다 더 챙기심을 알기에 늘 기쁘고 행복하게 삽니다. 낙관적 신앙인은 부끄럼뿐인 지난날들에 계속 연연해하지 않고 그 모든 부끄럼조차도 과감하게 주님께 봉헌합니다. 낙관적인 신앙인은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걱정거리들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근심하지도 않습니다. 낙관적인 신앙인은 비록 오늘 고통의 가시밭길을 지날지라도 지금 현재에 충실합니다. 오늘 아무리 찌부러져도 절대로 낙담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주님께서 찌부러진 우리를 다시 원상복귀시켜주실 것을 굳게 확신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이 희망의 종교를 믿는 사람은 비록 오늘 부족하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내 인생도 한번은 활짝 꽃피어 날거야"하고 마음먹습니다. 비록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앞이 막막하더라도 주님께서 내 의지처가 되시기에 마음 푹 놓고 하루를 지냅니다. 그 날 걱정은 그 날로 충분하기에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매일 아침 훌훌 털고 일어섭니다.
사랑을 향한 근심은 주님을 뵈옵는 기쁨 -김우성 신부-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어느 만큼 돌볼 수 있을까요? 스스로의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 이영석 신부-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의 고별사를 들려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어둔 밤 -전삼용신부-
마더 데레사의 시성 조사를 맡으셨던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거의 전 생애가 어둔 밤이었습니다. 마지막 30년간은 영적으로 특별한 것을 체험한 것이 없으셨고 매우 메마른 기도생활을 하셨습니다.” ‘어둔 밤’이란 내면에 있던 하느님의 빛을 잃어버리는 때입니다. 즉, 그 전까지 기도할 때 많은 것을 깨달아 기쁘기도 하고, 그 분께서 함께 계심을 느끼며 기도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어둔 밤이 찾아오면, 기도의 맛도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사막을 걷는 것과 같게 됩니다. 사실 ‘어둔 밤’을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은 어둔 밤을 느껴보았을지언정 성인들이 겪는 참된 어둔 밤을 경험해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작은 어둔 밤을 겪게 됩니다. 즉, 기도가 메마르고 재미없고 힘들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되는 때입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이 단계를 거치셨습니다. 그분께서 어둔 밤일 때가 언제였는가는 그 분이 부르짖은 말씀 때문에 너무나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도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잃어버린 고통을 겪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죄를 지을 때 하느님을 외면하기 위해 스스로 눈을 감아버려 그 분을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에 대한 보속이었습니다. 인간이 먼저 죄를 지어 하느님을 외면하였기에 하느님도 인간을 외면하시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지옥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그 지옥의 어두운 고통을 우리를 대신해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 ‘어둔 밤’이 바로 ‘믿음을 증거하는 시험대’가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버리셨다는 고통에 어찌할 바를 모르시지만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어둔 밤은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존재의 빛을 거두어 간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영혼이 빛에 더 가까이 감으로써 빛을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웬만한 빛을 볼 수는 있지만 태양과 같은 큰 빛은 직접적으로 볼 수 없고 그것을 바라보며 계속 다가간다면 오히려 시력을 잃어 모든 것이 검게 보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어둔 밤은 믿음이 부족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큰 믿음을 가진 이들을 더 큰 믿음으로 이끌기 위해 주시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이 어둔 밤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삼년을 함께 계시며 그들의 빛이 되어주셨지만 이젠 그들에게 어느 정도 어둠의 시대가 도래 할 것임을 미리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 어둔 밤의 때에도 당신께 대한 믿음을 지켜 줄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어 세상에 빛이 사라졌을 때 대부분의 제자들은 고통 가운데 참답게 그들의 믿음을 증거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그들에게는 귀중한 진보의 시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어둔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지만 결국 그 경험으로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증거 할 믿음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려움이 닥쳐오면 정말 하느님이 당신을 버렸다고 하며 믿음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어둔 밤의 예고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영적 메마름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사셨던 마더 데레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은 하느님께서 보상으로 주시는 영적인 즐거움 안에서 일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 메마름 속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평생 이웃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셨기에 참다운 성인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둔 밤을 겪고 있으면 세상은 ‘저렇게 될 줄 알았다.’하며 좋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새로운 영광의 빛을 다시 보게 될 것이고 세상은 그 빛이 두려워 영원한 어둠으로 몰려나고 말 것입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갑자기 임신하여 온 마리아를 보고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둔 밤을 잘 참아내고 결국 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것을 알고는 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기도가 재미가 없고 메마르고, 세상 적으로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 날 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지금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은총의 ‘어둔 밤’이 아닌지를 말입니다.
감각, 무감각, 초감각 -김찬선신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시간을 초월하신 분 -백남해 신부-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진 속의 얼굴은 늘 웃고 있습니다. 아마도 좋은
그래도 줄을 선다면 -서영남-
만남 안에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 안에 만남이 있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상의 이면을 보게 해주는 하느님 나라가 그렇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양승국신부- <화사한 날개와 기다림의 껍질> 얼마 전 우연히 어느 미술품 가게에 걸려있는 포스터를 보았습니다. 불타는 하늘을 배경으로 황금빛 나비가 날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당신의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다.”라는 제목이 붙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포스터 왼쪽 아래 구석에 빈 번데기고치 껍질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화려한 날개와 예술작품이 결코 저절로 되지 않음을 아프게 일깨워주고 있었습니다. 옛것을 버리고 고치를 짜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영혼을 빚는 우리는 번데기고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화사한 새 날개가 있는 곳마다 구석 어딘가에는 늘 기다림의 껍질이 있는 법이다.”(수몽크 키드 저, ‘기다림’, 복 있는 사람들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떠나감’으’로 으로 당혹해할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제비새끼 같은 어린 자녀들만 집에 두고 집밖으로 나서는 부모의 심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엄마, 아빠, 금방 돌아올 테니, 아무 걱정들 말고 사이좋게 잘 놀고 있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당신의 부재로 인해 우선 답답하고, 우선 힘겹겠지만,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라는 당부입니다. 기다림, 그것은 가슴 설레는 영적 사도직입니다. 기다림이란 영혼의 깊은 바닥, 심오한 하느님의 사랑, 삶의 뿌리로 내려가는 작업입니다. 제대로 기다리기 위해서는 그동안 완강하게 거부했던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진정한 기다림이란 내 영혼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내가 쓰고 있는 거짓 자아의 가면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삶의 중요한 전환기가 닥쳐올 때 마다 기다리셨습니다. 광야에 나가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동산에 올라가 밤을 지새우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셨습니다. 결국 십자가형에 처해진 후 무덤 속에 들어가셔서 영광스런 부활을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 위에 실천하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기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오늘 아무리 우리 삶이 비참해도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이 아무리 궁핍해도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흔들린다 할지라도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습니다.
-경규봉 신부-
새벽을 열며 얼굴도 못생기고 특별히 잘하는 것 하나 없다고 자신을 평가하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자기 학교의 남학생들 전부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생일을 맞은 그녀는 절친한 친구에게서 예쁜 머리띠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녀는 그 친구 앞에서 머리띠를 해보았습니다. 친구가 이야기합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파이팅 외치며 오늘을 시작하세요. 빠다킹신부
떼낼 수 없는 사이
- 김동하 신부- 땅과 하늘이 힘을 합하여 사람을 키웁니다. 땅은 변하지 않는 덕을 발휘하여
새로운 시작 -윤영수 수녀- 요한복음 15장에 이어 16장에서도 주님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와 주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난 후 제자들과 주님을 배척했던 세상의 반응에 대해 정확히 규명해 주십니다. 특히 오늘 복음은 주님의 고별사 중에서도 제자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염려 그리고 희망, 세상 어둠의 세력들의 움직임에 대한 유언입니다.
부활 제6주간 목요일 - 도정호 신부 오늘 복음도 어제처럼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이 다가왔다고 생각하시면서 제자들과 시간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을 염두에 두면서 묵상을 했으면 합니다. 중요한 것을 알려주고, 남겨주려는 예수님의 심정을 먼저 헤아릴 수 있을 때 오늘 복음의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봐도 제대로 못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제대로, 올바로 볼 수 있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변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그것이 신약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당신 덕분에 정치, 경제적으로 한 자리나 한 몫을 차지할 생각으로, 당신 덕을 볼 생각으로 곁에 머물렀던 제자들이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시간이 지나도 당신의 참 모습은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는 말씀은 이때는 참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확신했을 때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이고, 그때 가서는 제대로 보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세상에 연연했던 모든 근심 걱정은 하느님께 맡기게 되고, 예수님 한 분으로, 하느님으로 충분하기에 모든 것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거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봅시다. 현실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먼저고 부귀와 명예, 권력이 중요합니다. 그로인해 걱정도 근심도 많아집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제자들이 짧게 생각했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산다면 오늘 복음처럼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돌아가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 앞에서는 극악한 죄인도, 권력자도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순수함 앞에 세상의 죄악과 권력은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욕심 없는 마음에 세상 부귀영화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주님으로 만족하게 되고,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지금까지의 우리의 근심과 걱정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많은 위로를 받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가진 것 나누고,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산다면 “조금 있으면 나이 세상을 통해서 나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 부자(富者)"
-이수철신부- 영감을, 깨달음을 주는 책이 좋은 책입니다. 만날 때 마다 영감을, 깨달음을 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현대판 고전이 생택쥐베리의 ‘어린왕자’입니다. ‘어린 왕자’ 해설에서 역자 김화영 교수의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어린이들이 잘 아는 비밀을 어른들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게 아닌지요?” 이걸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지닌 자들이 진정 부자들입니다. 바로 주님을 믿는 우리들, 보이는 것들로 살아가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 믿음으로, 사랑으로, 희망으로 살아가는 참 부자들입니다. 꽃들이 졌다하여, 꽃다운 젊음이 지났다하여 슬퍼하지도, 허무해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세월 흘러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열매 익어가는 인생에 기뻐합니다. 꽃들이 진 슬픔의 자리마다 탐스럽게 커가는 기쁨의 열매와 아름다운 사랑으로 물들 노년의 단풍 인생을 내다봅니다. 우리 요셉수도원 성당이 비록 조립식으로 단순하기 그지없지만 얼마나 내적으로 부자인지 모릅니다. 지난 밤, 어는 젊은 부부가 잠든 아기를 앞에 뉘어놓고 밤샘 기도하는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마치 성당의 숨은 보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수도자들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숱한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이 수도원을 내적으로 부요하게 하는 보물들이자 수도원의 내적 힘입니다. 재회의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재회의 기쁨을 앞당겨 살 수 있는 이들이 진정 믿음의 사람들이요 내적으로 부자들입니다. 하여 부활하신 주님이란 내면의 보물을 지닌 이들, 절망 중에도 희망을, 어둠 중에도 빛을, 죽음 중에도 생명을, 슬픔 중에도 기쁨을 삽니다. 세상의 거짓들 중에서도 진실을, 추한 것들 중에서도 아름다움을, 악한 것들 중에서도 좋은 것들을 보는 믿음의 눈, 마음의 눈을 지닌 자들입니다. 보이는 것들 넘어 보이지 않는 주님 향해 늘 시선을 두고 살기에 가능한 삶입니다. 하여 어떤 환경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낙관적 인생을 삽니다. 부활하신 메시아 예수님이란 보물을 지녔기에 지칠 줄 모르는 선교사의 삶입니다. 천막을 만드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기회 닿는 대로 말씀을 전파하는 바오로 사도의 열정의 원천은 바로 늘 함께 계신 부활하신 주님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매일의 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를 기쁨 가득한 내적 부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멘.
기쁘게 삽시다 -노성호 신부- 어느 시골 마을에 몸이 불편한 아들을 둔 어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양승국신부- <뜻밖의 행운> 한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 내일의 생사여부도 확실시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평소에 걱정이 많고 무척이나 소심했던 포로가 한명 있었는데, 그는 계속되는 수용소 생활로 인해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배급이 소홀하다보니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게다가 심한 우울증에 스트레스까지 겹쳤습니다. 안타깝게도 청춘의 나이에 수용소 안에서 세상을 뜨게 되었지요. 다른 한 포로가 있었습니다. 낙관적인 성격에다 신앙심까지 깊었습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봤습니다. 이 전쟁 반드시 끝이 있을 것이다, 이 고통 끝에 반드시 큰 축복에 찾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꼭 나를 살리실 것이고, 언젠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해 봉사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반드시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매일 다짐했습니다. 그 결과 피 말리는 수용소 생활이었지만 그는 기적 같은 환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최대한 기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들 우거지상으로 지냈지만, 그는 그 열악한 수용소 생활 가운데서도 반드시 자신의 인생을 살찌우는 돌파구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찾아냈습니다. 같은 감방 안에는 다양한 국적을 지닌 포로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포로들에게 제안했습니다. 자신들의 모국어를 감방 안 다른 동료들에게 서로 가르쳐주자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외국어 선생님이 되어주자고. 다들 심심하던 참에 좋은 아이디어라며 무릎을 탁, 쳤습니다. 순식간에 지루하기 그지없던 수용소는 아주 수준 높은 외국어 학원이 되었습니다. 약 2년간의 수용소 생활 동안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폴란드어, 체코어 등 수많은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그는 수용소에서 배운 외국어를 바탕으로 무역회사를 설립하게 되었고 나중에 크게 번창시켰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그가 원했던 사회봉사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참으로 예수님의 행복한 언약입니다. 정녕 은혜로운 선물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다시금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 어찌 보면 시련의 연속입니다. 끝도 없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고개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더 큰 고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큰 폭풍우를 겨우 피했다 싶어 안심하면 어느새 또 다시 먹구름이 몰려듭니다. 어떻게 보면 고난은 우리 삶의 한 부분입니다. 아니 우리 삶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교 안에서 시련은 기쁨의 서곡입니다. 고통은 머지않아 기쁨을 낳습니다. 그 기쁨은 이 세상 그 어떤 기쁨보다도 큰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한번 맛본 사람은 고통이야말로 인생의 보약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기다리는 일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비관적이라 할지라도 근심하지 않는 일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거듭되는 실패와 끝도 없는 추락과 좌절, 무의미 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살아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입니다. 끝도 없는 어둠의 터널이 계속된다할지라도, 이 어둠에는 반드시 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삶을 낙관적, 긍정적, 적극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있습니다. 뜻밖의 행운입니다.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입니다. 그의 인생은 슬픔의 장막이 걷히고 샘솟는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감각의 세계를 넘어서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세기의 역전극 -박상대신부-
<조금 있으면> (요한 16, 16-20) -유광수 신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 * * * * * *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한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더 이상 육안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 더 있으면 보게 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다. 조금 더 있으면 보게 될 예수님의 모습은 죽음을 극복하신 예수님,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 이전의 예수님과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예수님이시다.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되게 해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어제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아주 오래 전에 우리 수도회에서 지원자로 생활했었던 어떤 형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형제가 전화로 "신부님, 오늘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신부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전화 드렸어요. 신부님은 나의 어버지이시잖아요. 내 인생에 신부님을 만나 것은 큰 축복이라고 생각됩니다. 비록 수도생활을 끝까지 하지는 못했지만 신부님을 통해서 나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올바로 갖을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요즈음 들어 부쩍 신부님 생각이 많이 나고 신부님을 생각하면 마음의 고향같은 생각이 듭니다. 신부님 건강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작은 선물을 부쳤는데 내일 받아 보실꺼예요. 작은 것이지만 신부님 건강에 좋은 것이니까 냉장고에 넣었다고 조금씩 드세요."라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 형제와 통화를 하면서 "내가 너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해 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래 열심히 살아라. 그리고 '다가오시는 예수'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시 잘 읽어보아라. 그러면 많은 은혜 받을 것이다."라고 통화를 마쳤다. 죽은 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묶어서 책을 내었는데 "하늘 나라 우체국"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 이런 글이 있다. "이젠 목메도록 그립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젠 죽을 정도로 후회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젠 가슴속에 사무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젠 사랑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우리가 부모를 떠나 보내고 난 다음에, 또는 정말로 사랑하는 애인을 떠나 보내고 난 다음에서야 고백할 수 있는 참회록과도 같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조금 지나고 보면 그 사람이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아니 제자들은 그것을 몰랐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나 보다. 반드시 제자들이 지금은 당신의 죽음으로 슬퍼하겠지만 당신의 부활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지금 받아야할 은혜가 있다면 그리고 복음을 묵상하면서 받는 은혜가 있다면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복음을 묵상하면서 조금씩 진리를 깨닫게 되기 때문에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된다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복음 묵상의 의미가 없다. 아니 복음을 묵상할 필요가 없다. 분명히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죽음을 승리하신 예수님,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모든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즉 복음 묵상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부활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통해서 우리들이 부활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지 못하고 죽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결코 기쁠 수가 없다. 모든 일이 근심일 뿐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죽음을 물리치신 승리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내 삶의 의미가 달라지고 삶의 목표가 달라질 것이다. 근심이 기쁨으로 바뀐다는 것은 분명 기적이다. 은혜이다. 근심이란 무엇인가? 괴롭게 애를 쓰는 마음이다. 심리적으로 어떤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언제 우리는 근심하게 되는가? 근심은 어떤 일이나 사건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 보통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아무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근심하게 된다. 그러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면 기쁨으로 바뀐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근심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지금 당장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심하는 많은 것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세상에 국한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더 넓고 깊은 세계 즉 부활이라는 세계에서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무엇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또 지금 갖지 못한다고 해서 근심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의 일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에 있어서 초연해질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에 맡긴다. 많은 경우 내가 근심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부활의 관점에서 보면 근심거리라고 하는 모든 것들도 다 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단순히 당신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알려 주는 것만은 아니다. 조금 더 묵상해보면 이 말씀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영적으로 부활하지 못하면 보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부활하면 새롭게 보이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영적으로 보지 못하던 것들이 영적으로 눈이 뜨이니까 보이기 시작하는 그 단계에로 넘어가기까지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묵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씩 볼 수 있는 단계로 넘어가는 시간이어야 한다. 1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30년의 신앙 생활을 했으면서도 조금도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아니 영적으로 눈이 뜨지 못한 생활이다.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 있으면 다시 보게되는 영성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부활한 삶을 사는 사람은 부활하지 못했을 때에는 근심이었던 생활이 이제는 모두 기쁨으로 다가올 것이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 있으면" 볼 수 있게 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그 "조금 있으면"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될 것인가는 각자의 영성 생활에 달려 있을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성령 체험을 통한 기쁨의 삶으로 초대 †
(요한 16,16-20)
You will grieve,
주님의 제자들도 불안해했습니다. 그러기에 세례를 받은 후 신자들이 ‘신앙생활의 실망’을 체험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불과 몇 개월만 교육받은 교리 지식이 앞날을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그야말로 ‘입교 예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스스로의 노력과 구도의 자세가 절실합니다. 그러기에 공동체의 체험을 권하고 있습니다. 흔히 만날 수 있는 단체가 ‘레지오 마리애’입니다.
신앙과 재미는 별개의 사항입니다. 믿음의 기쁨은 언제나 은총의 이끄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총의 체험을 늘 우선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이면 성령께서는 반드시 함께하십니다. 그렇게 해야 신앙의 ‘홀로서기’가 가능해집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수난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에게는 ‘낯선 말씀’이었습니다. 지나고 보면 평범한 가르침인데, 당시는 너무 몰랐습니다. 영적 공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나고 보면 축복이 담긴 고통이건만, 대부분은 너무 불평합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지했던 사람이 떠나가면 누구나 허우적거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방황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 ‘홀로서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야 당신의 참제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모든 것’이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이도 없습니다. 알아서 해야 합니다. 고해성사도 봐야 하고, 묵주 기도도 알아서 바쳐야 합니다. 힘든 것을 스스로 해야만 ‘홀로서기’가 가능해집니다. 그 사람은 머지않아 은총의 이끄심을 만나게 됩니다.
신앙심은 저절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부딪치고 어울려야 자라납니다. 지식 위주의 교리는 언제나 안내자일 뿐입니다.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실천하는 믿음’이라야 신앙생활이 공허해지지 않습니다. 사막을 걷지 않으면 오아시스를 만날 수 없는 법입니다.
그중에 40대 중반의 김 씨 아주머니 이야기다. 아주머니는 약간의 장애를 가진 남편과 일찍 결혼했다. 딸만 넷을 두었는데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반듯하게 키웠다. 어느 날 함께 일하는 한 아가씨가 부모님의 전화를 받는 것을 듣고 부모 마음에 대해 말씀하셨다. 부모의 마음은 자식에게 너무나 예민하여 전화 목소리만 들어도 자식의 상태가 전달되고, 퇴근해 들어오는 눈빛만 보아도 자녀의 하루가 어떤 하루였는지 읽을 수 있다고 하면서 부모도 가끔 자식이 어렵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분은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참 지혜롭게 부모의 마음을 전달하면서도 젊은이가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도록 조언해 주셨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녀가 없는 수도자의 처지에서 부모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보는 감사의 기회가 되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그 어머니의 마음이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가 청하기 전에 자녀들의 필요를 알고 계시는 하느님, 그분 안에는 아버지의 이미지와 생명을 살리시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함께 있다. 마닐라 동아시아 사목센터 다국적 사목자들은 다양한 전례를 통해 ‘어머니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느님’ 을 불러 기도하곤 했다. 처음에는 무척 생소했지만 반복할수록 완전하신 하느님의 이미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주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모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저희도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소서.’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일에 음식점을 열지 않으니 단골손님들이 떨어지고 장사가 잘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십일조까지 봉헌을 하니 재정 상태는 더욱 더 어려워졌지요. 주님을 믿으면 행복해진다고 했는데, 경제적으로 점점 어려워지니 행복과 멀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신부님과 상담을 했지만,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어렵고 힘든 시간도 은총의 시간이라면서 감사의 마음을 갖고 더 열심히 생활하라는 말씀만 하십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성당에 다녔고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더욱 더 참담했습니다. 옆집은 손님들로 가득한 반면에, 자기 가게는 파리만 날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웃 사람들은 이 음식점이 예수님을 믿어서 망했다고 비웃었습니다. 결국 창피해서 이사를 갔답니다. 그런데 집을 판 지 일주일 후, 우연히 신문에서 팔았던 그 지역이 도로 확장으로 모든 집을 철거한다는 기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은 기사가 나가기 전에 팔아서 제 값 다 받고 나올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많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이제야 그 자매님께서는 “감사합니다.”를 외칠 수가 있었답니다. 즉, 장사가 안 된 것도 이사를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주님의 배려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의 일은 이렇게 인간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그 결과를 보면서는 “감사합니다.”를 외칠 수가 있지만, 그 전까지는 얼마나 많은 아픔과 시련 속에서 힘들어합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늘 좋은 것만을 주신다는 것, 그래서 세상의 기준과 다를지라도 끝까지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주님의 기준이 다름을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을 믿음으로 인해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상처 입은 그 순간이 나의 삶을 완전히 역전시킬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의 힘으로 큰 기쁨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못할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다시금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은
주님의 ‘떠나심’과 ‘다시 오심’ 사이에서 상실과 희망을 복합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은 이천 년 전의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도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재不在를 자주 체험합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절망적이고
안타까운 소식들, 생명을 경시하고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태,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부유한 사람의 부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희망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분께서 오시리라는
약속을 믿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한 번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주님께서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근심하지만 주님께서 오시면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니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잘했어, 기도해줄게, 넌 항상 믿음직해, 넌 잘 될 거야, 네가 곁에 있어서 참 좋아. 등등…….”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명 저서를 남긴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런 말을 했지요.
“성공의 비결은 험담을 하지 않고 상대의 장점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렇게 우리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바로 나의 모습을 상대방에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런 체험을 한 가지 했지요.
어제 저는 사람, 생명, 평화의 길을 위해 순례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 순례단과 함께 했습니다.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위를 땅에 대고 절하는 순례. 혹자는 왜 가톨릭 신부가 불교에서 행하는 절을 하냐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형태만을 따르는 것일 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또 다른 방법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생각보다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몸도 아팠지만, 아스팔트에서 나는 냄새를 참기도 쉽지 않더군요. 그런데 세 분의 성직자는 작년 9월 13일부터 지리산에서부터 이 모든 것을 참고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의 말이었습니다. 도로 복잡하게 한다면서 욕을 해대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쓸데없는 것은 왜 하냐면서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말을 들으면서 슬프더군요. 그리고 그렇게 얼굴에 핏대를 올리면서 비판하는 그 사람의 모습이 참 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정적이고 남을 욕하는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 예뻐 보이고 멋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은 그 사람의 삶을 말해준다고 하지요.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은 사랑의 말을 하며, 미움의 삶을 사는 사람은 끊임없이 미움의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자신의 얼굴을 통해서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미래를 암시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체험한 제자들이 당황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이러한 말을 나의 이웃에게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으면 합니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 행복할 때 우리는 더욱 더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자신에게 어느 만큼 참 위안이 될 수 있을까요?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어느 만큼 빛을 밝힐 수 있는 걸까요? 믿음 안에서 성찰해보면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오직 내가 주님의 뜻과 사랑의 길에 온 마음을 내어드릴 때, 지극한 믿음으로
따를 때, 나는 비로소 있는 그 자체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완벽하게
구원받으리라 믿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은 유혹도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세상 안에서 군림할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그런 유혹이 우리 자신 밖에 있는 하느님의 자비를 망각하도록 이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뜻하는 근심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에게
갇히는 근심이 아닙니다. 게다가 앞으로 닥쳐올 사건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근심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향해 하느님 백성을
모아들이기 위한 근심, 복음의 생명을 나누어주기 위해 자기를 비워내는
근심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향하게 하는 근심은 스스로의 힘이 아닌,
바로 은총으로 주시는, 주님을 뵈옵는 기쁨으로 인도하는 근심입니다.
예수님의 고별사를 전하는 오늘 복음을 들으며 제 신앙 여정을 돌아보니 지금까지 똑같은 날이 하루도 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날은 무엇인가를 보았는데, 또 어떤 날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날은 기뻤고 어떤 날은 슬펐습니다.
어떤 날은 매사에 적극적이었지만 어떤 날은 소극적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주님의 숨소리마저 들으며 그분의 손길에 감사했고, 어떤 날은 주님께서 그 어느 곳에도 계시지 않은 것 같아 허전하고 고독했습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모든 것 안에 계신 주님의 현존에 들뜨기도 했지만, 또 때로는 그 눈이 어두워져서 미사 중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이는 저에게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우리 대부분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압니다. 곧 다시 주님의 현존 속에서 기쁨과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라는 것을.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욱더 간절하게 우리를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주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모든 주도권을 쥐고 계신 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함께 머무르기도 하고, 또 떠나기도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지 못할 때, 주님께서 ‘언제, 왜’ 떠나셨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더 큰 은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보다가 못 보는 경우는 두 가집니다.
무엇이 있다가 사라진 경우와
눈이 성했는데 멀게 된 경우입니다.
못 보다가 보는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무엇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경우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볼 수 있게 된 경우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뜻은
지금까지 함께 계셔 주시던 주님께서 이제 사라질 것이고
얼마 후 다시 나타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지금까지 내내 나와 함께 계시던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뭔가에 차츰 눈이 사로 잡혀 그렇게 되거나
차츰 자기에게 너무 몰두하게 되어 그렇게 됩니다.
즉, 집착과 교만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머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당신의 모습을 감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감각안에 계시던 하느님이 마치 장난치듯 감각너머로 숨으시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시겠습니까?
아니라면 부러 당신을 감추시는 것이겠지요.
감각으로 보지 말고 초감각으로 보라고.
많은 사람들이 흰 미사수건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신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활동을 하면서 하느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분향이나 성당의 분위기에서 하느님을 느낍니다.
그러나 미사 수건의 하느님은 미사 수건과 함께 사라지시지요.
그래서 이런 하느님은 무감각의 하느님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초감각의 하느님이 되심입니다.
絶對無로 계시는 하느님,
아니 계신 듯이 계시는 하느님,
초감각으로 감각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육화되어 감각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승천하시어 감각 너머로 숨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성령 강림으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
일이 있거나 행사 때에 사진을 찍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그런가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은 좋은 기억들을 많이 돌려줍니다. 사진은 아무리 최근에 찍어도 지금보다는 과거의 일입니다. 오래된 사진일수록 주인공은 더 젊습니다.
30년 전, 갓 중학교에 입학한 까까머리 소년의 반짝거리는 눈을 봅니다.
몸집이 커질 것을 생각하여 산 교복은, 소매가 손등을 덮고 좁은 어깨보다 옷이 더 커서 가난한 시절 부모님의 아픔이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꼭 다문 입술은
어설프지만 야무져 보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러나 아직은
풋풋합니다. 사진을 놓고 거울을 봅니다. 중년의 사내가 겸연쩍게 웃고
있습니다.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30년 뒤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사진 속의 내가 지금 현재를 알지 못했어도 웃고 있듯, 30년 후의 나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나는 다시 꿈을 꾸듯 눈을 감습니다. 사람은 시간 속에서 시간에
매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활한 새 생명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을 초월한
부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민들레 국숫집에는 손님들이 앉을 수 있는 간이의자가 열 개뿐입니다. 그런데 하루 일곱 시간 동안 삼백 명이 넘게 식사할 때도 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쉰 명이 넘게 식사를 하는 셈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날입니다. 급하게 반찬거리를 사서 돌아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손님에게 담배를 하나씩 나눠드리면서 “줄을 서지 맙시다. 줄서기에서 밀려나 밥 한 끼 마음껏 먹을 수 없는 우리인데, 여기에서마저 선착순에 따라 밥을 먹는다면 너무 마음 아픈 일입니다. 약하고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어야 순서가 맞습니다. 그래도 줄을 선다면 꼴찌부터 밥을 먹어야 합니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순식간에 줄이 흐트러졌습니다.
“어제저녁도 못 드신 분?” 하자 몇 분이 손을 듭니다. 어제저녁도 드시지 못한 분이 먼저 식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손님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더 배고픈 사람, 더 불편한 사람, 더 약한 사람을 조금만 배려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따뜻한 배려로 먼저 식사하게 된 손님들은 양보해 준 뒷사람들을 배려해 줍니다. 반찬도 다음 사람이 드시기 좋도록 남겨드립니다. 고마운 마음에 조금 더 빨리 식사를 합니다. 어느새 밖에서 기다리는 손님이 한 분도 없습니다.
고린토는 당시 로마 제국의 속주인 아카이아 주의 수도로서 로마 총독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이 도시는 전략상 요충지이며 무역이 활발한 항구도시였다. 때문에 시민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윤리 도덕적으로는 타락하여 고린토 사람이란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을 뜻할 정도였다. 또한 이 도시에는 많은 이방 신전들이 있어서 우상숭배가 심한 도시이기도 했다.
이 도시에는 로마에서 추방된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천막제조업자였다. 바울로는 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갔고,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특히 실라와 디모테오가 온 후에는 오직 복음전파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계획적으로 바울로를 적대하며 복음전파를 방해하였다.
그리하여 바울로는 “누구든지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든 그 동네를 떠나라. 떠날 때에는 그들에게 경고하는 표시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려라.”(루가 9,5)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옷의 먼지를 털면서 그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파한다.
성경에서 옷을 터는 것은 엄숙한 맹세나 저주의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느헤 5,13). 당시 발이나 옷에서 먼지를 떠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마을에 들어갔다 나올 때 부정한 모든 것을 거룩한 곳인 자신들의 땅에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취해진 행동이었다. 즉 종교적으로 이방인들의 영향력을 없애는 동시에 자신들은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행동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를 역이용하여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은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의 방법대로 보여준 것이다. 바울로는 유대인들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디도 유스도(Titus justus)의 집으로 갔다.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방인이었는데, 그의 집은 고린토 교회의 최초 집회 장소가 되었다. 그 후 회당장 그리스보와 많은 고린토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고린토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다른 지역에서보다 더욱 심하게 바울로를 방해했다. 이는 그들이 타락과 우상숭배의 도시 고린토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더욱 완고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마음의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는데 급급하고 있었다. 때문에 바울로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울로를 적극적으로 방해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서는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는 바울로가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울로가 홀로 사목하지 않고 실라와 디모테오와 더불어 사목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 혼자 보내지 않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마태 6,7; 루가 10,1). 복음을 전파하는데 홀로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편이 더 좋기 때문이다. 병을 고쳐주고 악령을 제어하는 데에도 함께 하는 편이 더 좋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단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시겠다(마태 18,19)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에게 힘을 주신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자기 홀로 하기보다 이웃과 함께 일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겠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서로 상의하고 협력하며 서로 용기와 힘을 줄 수 있도록 힘을 합해야 하겠다. 그 때 주님께서는 더 큰 결실을 맺게 해주실 것이다.................◆
“야, 너무 예쁘다. 네가 이렇게 예쁜 아이었어?”
친구의 입에 발린 칭찬일지언정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머리띠를 다시 해보았습니다. 자신의 마음에도 쏙 들었습니다.
다음 날 학교로 간 그녀는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머리를 하고 있는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요. 아니나 다를까, 평소 짝사랑하던 남학생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 주말에 시간 있니? 영화 보러 갈래?”
그녀는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띠 하나가 이렇게나 큰 힘을 발휘하다니.
‘이게 다 이 예쁜 머리띠 덕분이야.'
바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머리를 만지는데 글쎄 머리띠가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소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머리띠는 자신의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아침에 머리를 감는다고 벗어두고는 머리띠를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 소녀는 자신이 예뻐진 것은 머리띠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소녀를 정말로 예쁘게 만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래서 평소 짝사랑하던 남학생에게까지 데이트 신청을 받게끔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감이었습니다. ‘머리띠를 한 나는 예쁘고 매력적이다.’라는 자신감이 머리띠를 하지 않아도 예쁘고 매력적인 아이로 변신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이 모든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죽음이 부활의 영광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미리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감을 잃지 않게 하려는 그래서 고통과 시련에 대해 좌절하지 않고 항상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게 하려는 주님의 배려가 아닐까요?
자신감을 잃는다는 것은 내 인생을 어렵게 만다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러한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이렇게 항상 배려해주시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믿음을 말하고 하늘은 끊임없이 움직여서 사랑을 일깨웁니다.
사이에 선 사람은 땅과 하늘을 닮아가면서 아름답게 빛을 냅니다.
땅은 믿음을 뿌리로 하여 캄캄한 근심을 알려주고 하늘은 사랑을 낳아서
환한 기쁨을 깨닫게 해줍니다. 땅과 하늘은 서로 멀리 떨어진 듯하지만
동무가 되어서 사람을 일으키고 이끌어줍니다. 캄캄하고 아픈 근심을 지나서야
얻게 되는 덕이 믿음이라면 믿음을 받들어 일으키는 덕이 사랑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한 가지로 이어진 것처럼 땅과 하늘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절친한 동무입니다. 사람은 기쁨을 바라고 근심을 버릴 것으로 여기지만
둘은 떼낼 수 없는 사이입니다. 힘들지만 근심의 아득함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믿음을 덕으로 입을 수 있습니다. 믿음을 입을 수 있다면 환하게 다가오는 기쁨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근심과 기쁨을 믿음과 사랑으로 키울 수 있는
사람이 아름답게 빛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살아 계실 때보다 돌아가신 후에 더 깊이 느끼고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전에 부모님은 이걸 좋아하셨고, 이런 경우에 칭찬해 주셨고 혼내셨고 기뻐하셨고 등. 청개구리 예화처럼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평소 그분이 나에게 기대했던 바람을 제대로 깨우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상태를 잘 아셨기에 미리 유언하시며 헤매지 않도록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진리가 세상의 어둠에 묻히는 현실을 보고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의 어둠은 자신의 승리인 양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의 말씀이 승리하는 기쁨을 삶 안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말씀과 함께 주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금 인식할 수 있게 해줍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희망이고 기쁨이 되는 삶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이유를 제자들은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현실을 바탕으로, 짧은 생각이었지만 현실적인 생각으로 예수님 곁에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들이 현실의 영향으로 인해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있고 짧은 생각과 잘못된 신앙심이 신앙생활에서 많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항구한 사람도 있고, 어렵고 힘들 때만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으로 고통을 이겨낸 후 감사는 드리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자기가 먼저고,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해 하느님께 대한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도 금방 잊어버리는 겁니다. 이럴 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무엇을 해 주시는 분입니까?
읽을 때마다
부피는 얇지만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것,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의 눈을 지닌 내적 부자들은
내적으로 부요해야 진정 부자입니다.
도둑맞거나 화재의 염려가 없는 내면의 보물입니다.
주님 고별 담화 중 다음 말씀이 참 좋습니다.
주님은 이별의 슬픔에 이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별의 슬픔 중에도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평생소원은 아들 손잡고 성당에 한 번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던 어머니는 매주마다 강론말씀을 듣고 와서 그대로 아들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그 전 날의 힘든 일과 때문이었던지 강론 시간에 졸았던
어머니는 전체를 다 기억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아들아! 오늘은 신부님께서 소 꼭지 사지 말고, 젖꼭지를 사라시더구나.”
이상하게 생각된 아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어머니에게 거듭 여쭤 보았지만,
어머니는 계속 같은 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기어이 신부님께 전화를
걸었고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 그거요? 제가 요즘 신자들이 하도
생동감 없게 사시는 것 같아서 ‘소극적으로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자’라고
말씀드렸던 것인데 잘못 알아들으셨나 보네요.”
아직도 근심 중에 계신 분들이 있나요? 그렇다면 짧은 이야기 하나 더
해 드리겠습니다. 매 미사 때 파견을 하기 전 ‘영성체 후 기도’를 바칩니다.
그런데 주일 같은 경우에는 공지사항을 잠깐 말씀드리고 나서 그 기도를
하기 때문에 공지사항 끝에 해설자의 멘트 없이 그냥 제가 “기도합시다” 하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다른 신자들은 아무 말 없이 다 일어서는데, 유독
제 곁의 복사 녀석만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기도합시다”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딱 한 마디 하는 겁니다. “그럽시다.”
-강영구신부-
감각의 세계를 뛰어넘는 사람이 믿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어 확인함으로서 믿음을 가지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음입니다. 감각(感覺)의 세계는 항상(恒常)하는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변덕스럽게 변화하는 상대적인 감성(感性)의 세계에서 절대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풀어보면 ‘감각의 세계(色界)는 비어있다. 비어있는 것이 감각의 세계이다.
보고 만지고 듣고 인식하는 작용도 역시 같다.’라는 말입니다.
변하고 공허한 감각의 세계를 뛰어넘지 못하면 믿음의 세계에 도달 할 수 없고,
믿음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귀의처(歸依處)를 찾지 못해서 끊임없이 방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감각의 세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눈앞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두 귀로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실망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감각의 세계를 넘어 믿음의 세계에 들어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예수님을 만나고 가슴으로도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버리고 비워 하느님께 귀의(歸依)하는 사람이 믿음의 세계에 도달합니다.
당신도 언제나 믿음의 세계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一明)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의 복음(15,26-16,15)에서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 하느님의 정체는 실제적이고 학습적인 차원으로 계시되었다. 성령 하느님의 실제적인 차원은 굳건한 신앙의 행위에 대한 ‘보호자’로 계시된 점이고, 학습적인 차원은 올바른 신앙의 내용에 대한 ‘진리’로서의 계시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파견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조건으로 가능한 것이기에(16,7) 다시금 예수님의 ‘떠남’이 언급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떠남’은 ‘잠시 동안’에 해당한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게 되었다가 ‘조금 더 있으면’, 즉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6절) 오랜만에 제자들이 반응을 보인다. 2차 고별사가 시작되고 꽤나 오랫동안 침묵으로 스승의 말씀을 듣고 있던 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함’, ‘조금 더 있으면 다시 보게 됨’, ‘아버지께 가심’ 등의 말씀에 대한 몰이해를 나타내 보이면서 서로 수군거린다.(17-18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의아심을 직감하시지만 직접적인 해답을 주시기보다는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임을, 그러나 제자들의 근심이 곧 기쁨으로 전환될 것임을 예고하신다.(19-20절)
제자들의 머릿속이 꽤나 혼란스럽다. 보지 못한다? 보게 된다? 못 본다? 본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인가? 보면 보는 것이고, 못 보면 못 보는 것이지, 보지 못하겠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된다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인가? 제자들의 머릿속에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는 말씀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사실 예수님은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을 못 보게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신가. 성경을 앞에 둔 우리는 이 대목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과 발현, 승천과 성령강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림(再臨)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당연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다.
우리 인간은 만나서 헤어질 때 “그럼, 잘 가. 다시 보자”, “또 보자”고 말한다. 꼭 언제 다시 볼 것을 약속하지 않더라도 막연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별이 죽음이라면 그런 말은 더 이상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못 본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실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있으면 “다시 보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 죽음과 부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이 곧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예수님의 고통에서 기쁨이 솟아나고 죽음에서 생명이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생명과 기쁨이 죽음과 고통을 대체할 수는 없다. 죽음 없이 생명이 있을 수 없고, 고통 없이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과 고통은 참혹하고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제자들 또한 스승의 고통과 죽음의 시간에 죽어가는 스승과 함께 어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두 번 다시는 없을 가장 참담하고 비통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죽였다.”고 세상은 말한다. “우리가 예수를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로 제거했다.”고 세상은 확신한다. 세상은 이렇게 자신의 권력으로 예수를 제거했음을 오만과 자만으로 기뻐할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기쁨도 제자들의 슬픔도 그 어느 것도 오래 가지 못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 둘을 바꾸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20절)
세상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그분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겠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자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눈을 가진 자도 잠시 동안은 못 보게 되겠지만,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오시게 될 성령’ 안에서 그분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강림 사이에 존재하는 예수님의 시간적 부재(不在)는 제자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살아나고, 고통으로부터 기쁨이 태어난다. 다시없을 세기(世紀)의 역전극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사건을 보는 자만이 참된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참된 생명과 기쁨은 사실상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함께 살 때에는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참으로 감사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왜냐하면 함께 있었을 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서야 그의 존재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늦게서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과 제자들간의 고별장면은 이제 클라이막스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죽음의 사건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이별과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무언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이별의 슬픔보다 더 큰 기쁨을 향한 신앙인들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내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참고 기다려라. 반드시 기쁨이 찾아 올 것이며 그 기쁨은 슬픔보다 더 값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인간사에서 모든 헤어짐은 슬픈 일입니다. 그 슬픔의 기간이 잠시라 하더라도 다시 만나는 시간까지는 근심과 슬픔에 쌓여 지내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여러가지 말씀으로 희망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 중에서 성령에 관한 말씀이 지금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도 그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해 왔던 사랑하는 제자들과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닥아오는 상황에서 인간적인 슬픔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잘 못알아듣지만, 주님은 이 헤어짐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이며 다시 만남은 영원한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슬픔과 제자들의 슬픔의 질적 차이입니다.
아마 주님께서 지금 시점에서 헤어지셨다면 다음의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우리도 피정이나 어떤 모임을 가졌다가 헤어질 때 자주 부르는 노래입니다. 노사연님의 '만남' 이라는 노랫말입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아 -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이 정도 노래맛을 제자들이 들으면 화답송으로 만해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으로 송답해 볼만 합니다. 내친 김에 '님의 침묵'도 적어 보겠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옯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사고 돕니다.
會者定離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만난 사람은 얼마 후 헤어지는 것이 세상이 정한 이치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삶이란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으며, 또 헤어진 다음에는 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희망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은 어디까지나 소망이지, 확신을 아닌 것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있을 때 잘해!'라고 말하듯이, 서로 만나고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며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 대문호인 톨스토이의 말입니다. 톨스토이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현재 자기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시말하면 현재가 가장 소중하다는 뜻인데,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므로 사람이 다시 돌이킬 수는 없는 신의 영역이며, 미래도 아직 오지 않은 것이므로 그 미래가 그에게 과연 주어 질지는 알 수 없으므로 미래 역시 신의 영역이라는 대답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의 시간만이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이므로, 소중하며 가장 의미있는 사람은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의 제자들은 미래의 불확실한 '다시 오심, 다시 뵙게됨'보다는 지금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심정 뿐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정이 들었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그들이 이제와서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또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생각으로 주님만 따르면 한자리씩 걺머질 것으로 생각했던 희망도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주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가능한 시간의 단축적 의미인 '조금 있으면, 얼마 안가서'라는 짧은 시제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고 또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되리라든지,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든지 하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고 수군거렸고, 또 “‘얼마 안 가서’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하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고 얼마 안 가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한 내 말을 가지고 서로들 논의하고 있는 것이냐? 정말 잘 들어두어라....너희는 (지금) 근심에 잠길지라도 (얼마 안가서)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위로를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곧 오시게 될 성령에 의해 제자들이 받을 기쁨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받을 성령님은 기쁨의 성령으로 기억하면 됩니다.
성령을 받아들이는 신자와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자들에 대한 신앙적 삶의 차이에 대해 ‘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 어느 대주교님의 '성령의 역할'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이 아니 계시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는 과거의 인물에 불과하고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고,
교회는 한낱 조직에 불과하고 …..
전례는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이고
그리스도교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불과하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으며, 그것을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복음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어찌 자신의 능력만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어제복음에서 묵상했듯이, 주님께서는 성령과 그분과의 관계 그리고 그의 역할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아멘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고 참된 믿음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오시고 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성령에 대한 이해가 너무 사변적으로 흘러 성령과 그분의 역할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머무시고 계십니다. 성령은 ‘하느님 사랑의 힘’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힘이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머무시며 우리는 그분의 협조(조력)을 통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또 그 사랑을 이웃에 전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현존을 우리 삶 안에서 시시각각 체험하도록 노력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Time Management(시간관리) 이론에 보면, 사람들의 시간 사용이 소비성이냐 생산성이냐...를 구분하면서 효율적인 시간관리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들의 시간관리를 보면 좀 반성해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시간)를 소모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현재를 살아가면서 질 못 헛되이 사용하여, 그 현재라는 시간들을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또 다른 현재의 시간, 즉 미래에 대해 약속어음(희망)을 발행하는 삶을 보냅니다. 그 약속어음이 부도가 나느냐, 안나느냐 하는 것은 시간관리의 주체인 나의 삶의 습성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도 우리는 미래에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 미래가 주어진다는 것에 대해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래가 현실로 실현되고 목적이 성취되는 날,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주님은 오늘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얼마 안가서 알게 될 보증수표적 기쁨, 즉, 주님께 감사할 일이 곧 닥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멘입니다. 주님은 진리이시기에, 합당하고 옳은 말씀만 하십니다. 주여 그렇게 되게 해주소서. 무엇이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시라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은 믿지 못했습니다만, 얼마 안가서 주님의 말씀 그대로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주님에게로 부터 훈련, 학습받은 복음을 온 세상에 복음화로 전환시켰으며, 성령의 협조하에 기쁨과 감사를 함께 했습니다. 우리도 성령을 통한 기쁨을 체험합시다....◆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