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이 땅을, 필자가 어렸을 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배웠는데, 언제부터인가는 후손에게 빌려 쓰는 것이라고들 한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거나, 후손에게 빌려 쓰는 거나 같은 뜻이겠지만 막 쓰지 말자는 의미로 후자를 쓴다고 생각하지만, 빌려 쓴다는 것보다는 물려받아 내 것을 쓴다는 전자의 표현이 개인적으로는 좋다.
개발과 자연보전은 선택이지 선악의 개념이 아닌데 개발은 악이고 보존이 선이라는 흑백논리를 펼치는 사이비 환경 보존론자 들이 많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기회비용을 부담하더라도 보존이 낫다고 생각되면 보존을 하는 것이고, 개발의 편익이 보존의 이익보다 크다면 개발을 선택하는 것이다.
몇백 년 후의 환경 보존도 중요하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사패산 터널, 천성산 터널, 새만금 간척 사업 등이 논란이 된 것은 충분한 여론 수렴을 거쳐 개발이냐 보존이냐를 결정했으면 엄청난 비용과 사회적 혼란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주말엔 제주도 섭지코지를 다녀왔다. 예전의 하얀 등대와 파란 잔디 사이로 난 오솔길과 목책, 검은 돌 해변을 떠올렸는데 지금은 KBS '올인'인가 뭔가 하는 드라마 촬영 세트가 가운데 떡 버티며 서 있고 입구엔 리조트(보광 휘닉스 아일랜드 리조트)가 건설된다고 하고, 등대 옆에는 건물이 신축 중이어서 성산 일출봉을 가렸다.
이젠 섭지코지마저 하는 마음에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천편일률적인 우리의 관광지 - 주위 경관을 고려하지 않고 숙박 시설과 먹고 마시고 놀 수 있는 곳이 즐비한 그런 관광지는 지금도 많은데 섭지코지만이라도 그대로 둘 수는 없었을까? 다른 곳과 다른, 조용히 산책도 하고 잔디밭에 앉아 철석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바라기나 별바라기도 하고, 도란도란 얘기라도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은 왜 있으면 안 되는 걸까?
지자체 처지에서는 입장료나 주차료 몇 푼 받는 것보다 리조트 숙박비 수입(세금)이 훨씬 짭짤할 테고, 몇 사람 오는 것보다는 떼 지어 오는 것이 훨씬 수익이 높을 것이다. 보존으로 인한 지자체의 세수 부족으로 인한 행정 서비스 부재쯤 이해하고 감수하지 못하는 국민은 없을 터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돈이나 물질만으로 채우지 못하는 것도 많다. 예전의 섭지코지 같은 관광지 한곳쯤 그대로 두면 안 되는 것일까?
필자 역시 꽉 막히고 결벽종적인 환경 보존론 자는 아니다. 사안에 따라서는 개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섭지코지만큼은 아니다. 이 화냄이 필자만의 고약한 보존 지상주의 넋두리이고 집착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내가 도지사라면, 섭지코지 휴양 시설 공사 허가를 내주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지켰을 것이다.
남산의 외인 아파트가 헐리듯이 먼 훗날 섭지코지의 인공 조형물은 반드시 헐릴 것이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나 긴 세월이고 남은 내 수명이 짧다. 파란 잔디 사이 흙길을 산책하고, 수평선을 바라보며 해바라기 하는 그런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다. (2008년에 쓴 글입니다)
(추신)
이글은 2008년에 쓴 글입니다. 제주도에 가면 섭지코지는 의례 들렀었는데 2008년에 가니 KBS 드라마 촬영 세트가 건립되어 있고 리조트 신축이 계획되어 아쉬웠다. 섭지코지의 변화에 실망하여 2008년 이후엔 섭지코지를 가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