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54편 1~7절
[서론] 동족의 배신과 십 광야의 고독
삶에서 가장 깊은 상처는 전혀 모르는 이가 아니라, 내가 같은 피를 나누었다고 믿었던 이들에게서 찾아옵니다. 다윗에게 ‘십 광야’가 바로 그런 절망의 자리였습니다. 사울의 추격을 피해 십 광야에 숨어든 다윗을 밀고한 자들은,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 친족이었던 ‘십 사람들’이었습니다. 얼마 전 블레셋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준 은인을 정치적 생존과 권력의 이익을 위해 사울 왕에게 넘겨버린 것입니다.
이 비극은 미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남북전쟁을 치러내야 했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의 삶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링컨이 직면한 가장 큰 고통은 외적의 침략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연방의 국민이요 형제였던 남부의 이탈과 배신이었으며, 북부 내에서조차 그를 ‘시골뜨기 멍청이’라 부르며 끊임없이 음해하고 밀고하던 내부 정적들의 모의였습니다. 가장 믿었던 군대와 동료 정치인들이 그를 저버렸을 때, 링컨은 워싱턴의 백악관이라는 비어 있는 공간 한복판에서 완벽히 고립된 ‘십 광야’를 경험했습니다.
우리 역시 삶을 살아가며 이러한 십 광야를 만납니다. 함께 피와 땀을 흘렸던 동료의 배신, 충성을 다했던 공동체에서의 외면, 가까운 이들의 냉소는 우리를 극심한 실존적 절망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고립의 자리에서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시선을 바꾸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십 광야라는 배신과 절망 속에서 성도가 어떻게 영적 반전을 이루며 승리할 수 있는지 그 길을 보여줍니다.
첫째, 세상의 배신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라
다윗은 자신을 밀고한 십 사람들을 향해 3절에서 “낮선 자들(자림, זרים)”이 일어나 나를 친다고 고백합니다. '자림'은 원래 하나님과의 언약 바깥에 있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혈통적으로는 유다 지파 친족이었지만, 하나님과의 언약적 신실함(헤세드)을 버리고 의인을 대적에게 넘기는 순간, 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J. P. Sartre)의 말처럼, 하나님을 상실한 타인은 나를 존재 자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환원시킵니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을 향해 칼을 겨눈 남부의 동족들과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북부의 정치인들 역시 링컨을 국정의 파트너가 아닌 자신들의 권력을 위한 매물로 취급했습니다. 동족이라는 울타리와 인간적 연대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 보호막이 사라졌을 때, 다윗은 1절에서 선언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베심카, בְּשִׁמְךָ) 나를 구원하시고...” 여기서 ‘이름(שֵׁם, 솀)’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성품과 계시된 권능 전체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법정과 동맹이 무너졌을 때, 쇠렌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가 말한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다윗은 자신의 자격이나 세속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과 '이름'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링컨 역시 전쟁의 가장 어두운 밤, 세속의 지지도와 군사적 세력에 의지하지 않고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공의만을 구하며 기도하는 '단독자'로 섰습니다.
이 고백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벽히 성취됩니다. 예수님 역시 가장 가까웠던 제자 가롯 유다의 밀고와 동족 유대인들의 배신 속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동정이나 세속의 힘을 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과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연대가 무너지고 가장 가까운 이들이 배신할 때, 변함없는 언약의 이름,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단독자로 서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절망의 포위망 속에서, 돕는 하나님을 보라
1~3절까지 대적들의 압제와 죽음의 공포를 토로하던 다윗의 시선은 4절에 이르러 극적인 반전을 맞이합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오제르)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원문 4절 첫머리에는 개역개정 성경 번역에서는 생략된 감탄사 “보라!(히네, הִנֵּה)”가 선명하게 위치합니다. 나를 포위한 '대적들과 배신자들'을 바라보던 시인의 의식이, 포위망 너머에 계신 '하나님'께로 전환되는 인식론적 대반전의 순간입니다. 다윗이 바라본 하나님은 “돕는 이(오제르, עֹזֵר)”이셨습니다. 오제르는 옆에서 거들어주는 보조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는 탈출할 수 없는 절대적 한계상황 속에서 강력한 권능으로 건져내시는 궁극적 구원자입니다. 인간의 도우심이 완전히 실패한 십 광야의 한복판에서, 다윗은 유일한 오제르이신 하나님을 목도한 것입니다.
남북전쟁의 참혹한 패전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고, 모함과 비난이 극에 달했을 때 링컨에게 한 참모가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북부의 편에 서 계실까요?" 그때 링컨은 시선을 바꾸어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가 아닌가는 내 관심사가 아니네. 나의 유일한 기도제목은 '내가, 그리고 우리가 과연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네." 링컨은 자신을 둘러싼 대적들의 음모나 연합군의 숫자(현실)를 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들어 시대를 주관하시고 생명을 붙드시는 유일한 오제르(하나님)를 바라본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고난받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위기의 순간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붙드시는 궁극적인 오제르이십니다.
십자가상에서 세상에 완벽히 버려진 것 같았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시어 참된 구원자임을 증명하셨듯, 오늘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믿음의 눈을 들어 "보라!(히네)"를 외치십시오. 세상은 나를 파멸시키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생명을 붙드시는 유일한 오제르가 되십니다.
셋째, 현실을 넘어선 확신으로, 감사와 자원제를 드려라
시편 54편의 가장 위대한 영적 승리는 마지막 6~7절에 나타납니다. “내가 낙헌제로(네다바) 주께 제사하리이다...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여기서 “낙헌제(네다바, נְדָבָה)”는 의무나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는 자발적인 기쁨의 제사(Freewill offering)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7절의 "나를 건지시고"라는 동사 히칠라니(הִצִּילָנִי)의 시제입니다. 히브리어 문법상 이 구절은 이미 일어난 일처럼 표현된 ‘확신적 완료형’으로 쓰였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의 말처럼, 시간은 흘러가는 크로노스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결단을 통해 미래의 구원을 현재로 끌어당기는 '선구적 결단'이 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사울의 군대가 산을 둘러싸고 있었으나, 다윗은 기도를 통해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미래를 현재로 가져와 미리 감사의 찬양과 네다바(낙헌제)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포위해 잡기 직전 블레셋의 침공 소식이 전해져 회군하는 역전(셀라하마느곳)이 일어납니다.
링컨 역시 전쟁의 끝이 전혀 보이지 않던 가장 어두운 시기, 국가 감사절(Thanksgiving Day)을 공식 공휴일로 선포하며 하나님께 먼저 감사의 제사를 올렸습니다. 눈앞의 현실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으나,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결국 치료하시고 구원하실 것을 믿음으로 선점하며 감사를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성만찬 자리에서, 자신의 몸이 찢길 것을 아시면서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셨고,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완료형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이미 얻은 부활의 승리를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직 여러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관계의 포위망이 풀리지 않았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을 바라보며 감사와 찬양의 네다바를 선포하십시오. 감사는 상황이 바뀐 뒤에 드리는 부산물이 아니라, 응답을 확신하는 자가 드리는 가장 강력한 믿음의 선전포고입니다.
[결론] 십 광야에서 드리는 승리의 노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십 광야’입니까? 동족이라 여겼던 이들이 하나님을 잊고 ‘낯선 사람(자림, זרים)’이 되어 여러분을 아프게 합니까?
ㆍ사람과 환경을 의지하지 마시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름(솀)’을 부르며 단독자로 서십시오.
ㆍ환경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보라!(히네, הִנֵּה)”를 외치며, 나를 '도우시는(오제르, עֹזֵר)' 유일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ㆍ그리고 비록 환경은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승리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기쁨의 ‘낙헌제(네다바, נְדָבָה)’를 지금 이 자리에서 먼저 올려드리십시오.
세상은 밀고와 배신으로 우리를 무너뜨리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믿음의 눈을 드는 성도는 십 광야 한복판에서도 이미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성도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