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에 성바오로딸 수도회 한국 관구에서는 처음으로 서원 25주년 맞이한 수녀들을 위하여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배려하였다. 그 해 은경축 맞은 수녀님들과 그전에 이미 맞이한 선배수녀님들이 함께 성지 순례를 다녀와서는 그 은혜를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2년후에는 우리 차례려니 하고 기다렸다가 아뿔사 1999년에는 불행히도 I.M.F를 맞이하는 바람에 부풀었던 꿈을 접어야했다.
그리고 다시 2년 후인 2001년이 열리면서 포기했던 선물을 다시 받게된 그 기쁨이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라 경제 사정이나 수도회 사정이 썩좋아진 것도 아닌데 선물을 덥썩 받아도 되나 하는 죄스러움도 한편 컸다. 그런데 그 꿈이 이뤄진 데에는 "언니들이 다녀와야 다음 차례가 지장이 없을 것이 아니냐"는 후배 수녀들의 애교 어린 압력도 작용을 하였다.
수련동기수녀들이 몇 차례 모임을 거쳐 마련된 순례일정은 에집트, 이스라엘, 터키, 그리스를 16박 17일로 순례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행운이 있었다면 광주 가톨릭대학의 이영헌 신부님께서 순례를 함께 해주시기로 한 것이었다.
떠나기 전 하루는 피정으로 마음준비를 하고 떠나는 날 오전 시간을 내어 모두 한자리에 앉아 나눔 기도를 하면서 그리운 우리 주님의 체취와 얼이 담겨 있는 땅을 이제 가게된 기쁨을 맘껏 표현하였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우리는 몹씨 기뻤노라"는 시편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면서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성지를 다녀오신 선배 수녀님들은 당신들도 또 순례를 가는것처럼 기뻐하셨고 동생들은 '다음은 우리차례야' 하는 듯 부러운 축하인사를 받으며 김포공항을 향하였다.
2001년 2월 26일 오후 8시에 출발한 서울-카이로행 비행기는 17시간을 계속 밤하늘을 날아 새벽 6시에 카이로에 도착하였다. 한국과 중동지역은 7시간의 시차가 있었다. 에집트 사막의 열기를 느끼며 카이로 시내를 들어섰다. 도시의 전체적인 첫인상은 한마디로 잿빛의 더러움과 무질서였다.
낡고 우중충한 건물들, 검은색 피부의 아랍인들과 차선도 없는 차도에 가득 찬 차들은 자기가 가고싶은 대로 가는 것처럼 보였다. 횡단보도나 신호등도 안보였고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태연히 길을 건너고 있었다. 그야말로 차와 사람들이 사이좋게 헤집고 다니는 풍경이었다.
시내 가운데 커다란 무덤지역도 있었는데 또 하나의 충격은 갈곳 없는 빈민들이 그 무덤 안에 아예 주거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에집트 순례 안내를 맡은 아주 씩씩한 손프란체스카 자매님은 "수녀님들 많이 놀라셨지요? 언뜻 보기에 무질서해 보이지만 무질서 안에도 질서가 있답니다."하고 우리를 이해시키기에 바빴다.
저 멀리 갈대 숲이 무성한 나일강이 카이로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굉장히 큰 강으로 상상을 한 것에 비해 강폭은 한강의 절반밖에 안돼 보였다. 저렇게 무성한 갈대 숲 어디쯤에 아기 모세의 광주리가 떠 있었을까. 사막나라의 유일한 강인 만큼 나일강은 생명의 젓줄로서 온 에집트인들의 흠모에 가까운 애정을 받고 있었다. 일년내내 나일강 가에서는 축제가 열린다고 하였다.
에집트 아랍 공화국은 95%가 사막지대이며 인구는 약 6400만명, 수도 카이로에만 1700 만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국교인 회교도가 82%이며 크리스챤이 17%라고 한다. 낯선 도시에서 한국말 간판이 걸려있는 한국식 식당을 찾아 아침식사를 한 후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아기예수의 에집트 피난 성당이었다.
그리스 정교회 소속인 이 성당 안에는 양쪽 벽면과 천정에 이콘 성화가 가득차 있었고 신부님의 설명으로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성당 어디에도 입체 조각상은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빛이신 하느님 앞에서 입체상들의 그림자로 빛을 가리우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위치한 모세 기념교회는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탈출하기전에 이곳에서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현재는 유다인의 회당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헤로데왕의 죽임의 손길을 피하여 아기 예수님이 피난처로 택하신 에집트, 우리 순례일정의 첫날 미사를 성당 안에서는 봉헌할 수가 없어 뒷마당으로 돌아갔는데 가까이에 있던 마을인 몇이 주변정리를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에집트-더럽고 무질서한 곳, 그러나 무질서 가운데 질서가 있으며 더러움 가운데 성스러움이 있다. 이런 가운데 주님이 오셨고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성스러움인 것이다. 무질서한 혼돈 가운데서 질서를 찾아 나가는 삶이 중요한 것이라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나 자신 안의 죄의 더러움과 혼돈을 정리하고 영적 질서를 찾고자하는 것이 바로 이번 순례의 의미라는 것을 생각하며 다음 행선지인 에집트 박물관을 향하였다.
도심지 길거리의 인상과는 달리 고대의 찬란한 문명을 그대로 간직한 거대한 규모의 박물관은 그대로 우리를 압도하고 말았다. 열심히 안내자를 따라 다니며 설명 들으랴, 유물들 관람하랴, 너무나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는데 놀랍기만한 사적과 유물들을 잠시 눈여겨 보는 사이 어느새 일행을 놓치기 쉬운 때문이었다.
출애굽시대의 파라오 람세스 2세의 미라며 가장 혁명적인 왕 아케나톤, 클레오파트라보다 더 최고 미인으로 여긴다는 아케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의 입상, 흉상은 과연 그 아름다움을 증명하고 있었다. 에집트가 정복한 주변국가들의 이름이 석판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 중에 "히브리"가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태부족이었으나 짜여진 일정에 따라 다음 행선지인 기자 지역의 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앞에 서서도 그 놀라움에 감탄만 거듭될 뿐이었다. 더럽고 미개해 보이던 에집트의 첫인상이 박물관과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웅장함 앞에서 그만 다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렇게 순례 첫날 일정을 마치고서 카이로시내의 호텔에 투숙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