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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運命)과 숙명(宿命)과 신(God)의 은총(恩寵)
본 카페지기의 인생 회고
(2024.4.18.목, 어제오늘 중국발 황사로 이곳 부산도 공기가 온종일 매우 탁함)
목전고희(目前古稀)로써 이제는 나에게도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세월이 익으니 저절로 회고(回顧)가 된다. 아찔한 순간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당하면서도 그냥 잘들 지나갔는데, 나이가 들어 기(氣)가 쇠잔(衰殘)해지니 옛날의 큰 상처들이 악몽이 되어 스멀스멀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끔 나를 황망(慌忙)하게 하는 것을 몇 개 돌아보자. 이런 예(例)들은 모두의 인간사(人間事)로서 많은 분들에게 긴요(緊要)한 참조요목(參照要目)이 될 것이다.
1970년 내가 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아마도 가을로 여겨진다. 고향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배도 고프고 교복도 너무나 낡았다. 속옷도 냄새가 배어 있었고, 목욕을 못해 몸도 더러웠다. 가을이라 아직 크게 춥지는 않았다. 특히 배가 자주 고팠다. 몸이 한창 클 나이인데 때를 계속 놓치고 있었다. 중2까지는 부모님과 함께 같이 그럭저럭 살았다하더라도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빈궁한 모습(冒襲)의 생활이 시작되었으니 배가 고픈지가 벌써 수년째이다. 점심은 거의 없었고 어떤 날은 하루 한 끼의 죽(粥)도 어려웠다. 나와 두 살 터울인 동생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이고 키가 1년간 아예 전혀 자라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이 내내 고생하다가 조부님의 부름으로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 나는 중3으로 혼자 남았다. 어머니가 구해 준 방에서 자취를 해야 했다. 어머니가 방을 처음 볼 적에는 전기불이 등(燈)으로 하나가 있었는데, 이사를 오자마자 집주인 할머니가 전기는 허가 낸 것이 아니라면서 전기선을 없애는 통에 석유램프로 어두운 저녁을 1년 내내 보냈다.
혼자 있던 그런 어느 날 자주 지나치는 읍내의 이면도로(裏面道路)를 가다가 배가 고파 잠시 멈추었다. 조용했지만 3톤 짐차도 간혹 지나는 길가의 기와집 입구이다. 자취를 한 후로 등하교로 자주 다니는 길가이다. 주(主)도로는 아니지만 읍내로서는 다음 순으로 큰길가이다. 그런 길가에서 마당이 크게 보이는 입구가 열린 제법 큰 집이다. 저녁이고 어둑어둑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서 있는데 그 집의 아이가 나를 보더니 무슨 일로 왔는지 하고 나에게 물었다. 너무나 공손하였고 예의가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연하이니 중학교 1학년생이다. 위로는 그의 형들이 고등학생 급으로 둘이나 된다. 이렇게 나름 잘 아는 이유는 작은 읍내로서 그곳에는 가깝거나 먼 나의 씨족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도 나의 집안 친척뻘이다.
형제들이 모두 키도 크고 영양상태도 좋고 또 무척 준수한 미남스타일이었다. 내가 보기에 옷도 잘 차려 입었다. 그기에 비하여 나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도 없고 더욱이 굶어서 힘도 없었다. 영양부실로 무척 병약(病弱)하게 여위었고 항상 어지러웠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조금만 더 분별(分別)이 있거나, 멀리 부산에 계시는 조부님이라도 눈치를 채고 나를 조금이라도 알아서 보살펴 주었으면 이렇게 안쓰럽지는 않은 텐데 말이다. 빈곤한 생활이 오랜 기간 수년으로 누적이 되니 배가 고프고 옷이 헤지고 허름해도 이미 당연한 걸로 여겨진다.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지나가는 중이야.’하고는 그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나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런 것을 더 생각할 이유도, 연유도 없었다. 그냥 나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당시 뭔가 불길했다. 자라나는 이런 시기를 그냥 이렇게 누추하게 보내야만 하는 나의 모습에 무의식이나마 미래가 엄청 불안하고 두려웠다. 같은 집안의 부계 후손인데 그들과 나의 모습에서 차이가 너무나 엄청 컸다. 이미 회복이 불가할 정도이다. 나보다 나이 어린 아이의 말에 당황하여 바로 사라져야만 하는 나의 이런 몰골에 정말 당혹스러웠다. 내가 정말 이래야만 하는가? 무의식적이지만 나는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이라서 아직은 서로 잘 몰라도 같은 집안의 직계 후손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때 그냥 사라진 그 기억이 스멀스멀하게 되살아나 고희(古稀)를 앞둔 나를 수년 전부터 이리저리 시간 틈틈이 무언중(無言中)에 괴롭히고 있다. 그 당시에 부모님들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궁핍하여 조부님이 부산으로 나의 가족을 부른 것이었다. 부모와 동생이 먼저 가고 나 홀로 자취를 하는 와중(渦中)이었다. 생각나는 유년기 이후 아동시절 내내 시골에서 이런저런 연유로 고생은 날로 골라서 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 후 운 좋게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고, 또 남들이 잘 안 배우는 철학(哲學)을 대학에서 전공까지 했다. 철학은 인간을 그 자체로 학습하는 격조(格調)의 학문이다. 운명과 숙명에서는 매우 불안했지만 신의 은총이 그래도 나에게 하나는 크게 있었다.
그런데 진짜를 회고해야한다면, 내가 느껴야만 하는 문제는 따로 있다. 배고픈 상태로 자취방에 혼자 자야하는 나의 옛 모습에서 나는 무엇을 더 느껴야하는지 그것이 궁금하고, 그것 때문에 내가 나도 모르게 불안해한 것이다. 쌀도 부족하고, 땔감도 모자랐다. 이불도 꽤 더러웠다. 돈도 이미 떨어졌다. 내가 알아서 하루 한 끼의 죽(粥)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때는 전혀 몰랐는데 바로 이것이다. 내가 여자아이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내가 여자아이였다면 큰 봉변을 당했을 것이다. 시골에서 부모가 방패가 안 된다면 과년한 여자아이들은 언제라도 봉변을 당할 수가 있다. 곤히 자다가도 봉변을 당할 수가 있다. 그만큼 나이든 여자아이들이 위험한 곳이 시골이다. 시골은 모든 것이 다들 노출이 되어 있다. 저절로 회고 당하니 실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의 부모님들은 부실하여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런 시골에서 어린 손자가 홀로 자취로 있는데도 할아버지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다. 간혹 부쳐주는 아버지의 용돈으로는 너무나 부족했다. 같은 읍내에 종조부내외분도 계셨으나 이분들 역시 타인(他人)으로서 방계(傍系) 남이었다. 12월이 되니 쌀도 떨어지고 배가 너무 고파 등교하기 전에, 추운 아침에 매번 가서 한 달간 밥을 얻어먹었다. 아침에 갈 때마다 허겁지겁 먹었다. 저녁에는 가질 않았다. 그냥 굶었다. 그래도 종조부 집에서 한 달간 아침은 얻어먹었으니 큰 다행이다. 실로 아사(餓死)할 뻔 했다. 어떤 학생 하나가 농촌시골이라 자신도 돈이 매우 귀할 텐데 점심시간에 교내 식당에 나를 데려 가서 우동 두 그릇을 사서 하나를 나에게 주었다. 나의 반 학생이 아니라서 그런지 얼굴도 이름도 잊어 버렸다. 그 흔한 고구마나 감자도 나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고구마나 감자라도 많이 먹을 수 있었다면 엄청 좋았을 텐데 말이다.
또 하나 더 아찔한 것은 나의 자취방에 매일 나 혼자만 자는 것이 아니었다. 벽지(壁紙)로 막은 천정에 뱀이 살고 있었다, 능구렁이인데 실로 컸다. 나의 자취방이 집주인 댁의 할머니가 닭들을 키우는 닭장에 붙어 있었는데 그 닭들의 병아리나 달걀을 노려 뱀이 나의 방 천정에 살고 있었다. 천정에 난 벽지구멍으로 두 번이나 뱀이 머리를 쑥 내미는 통에 ‘꽥~’하고 크게 괴성기급(魁聲氣急)을 했다. 또 한 번은 생쥐가 나의 천정에 뭣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뱀에 혼비백산하여 그대로 천정구멍에서 바로 직하(直下)로 뛰어내린 적도 있었다. 닭장 위의 짚단 속에서 서서히 구르는 뱀을 본 적이 있는데 목에 푸른색이 감도는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무서웠다. 그래도 나는 그 방에서 잠을 1년간 잤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말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고민을 할 수도 없었다. 천정의 벽지종이위에서 서서히 꿈틀거리는 뱀의 윤곽을 보면서 그냥 그 방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자야만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12월 말에 겨울방학을 맞아 고향 생활을 다 정리하고 부산으로 홀로 가면서 그런 일들은 저절로 까맣게 잊어 버렸다. 나이가 어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고생도 망각으로 바로 처리한다. 신의 섭리인 것 같다. 한데 이제 나이가 깊어지니 강한 기억으로 약해진 마음속에서 스멀스멀하게 그대로의 모양으로 살아서 나타나고 있다.
한데 나에게 몹시도 매우 아쉬운 것은 내가 너무 부실하고 모자라서 현실적 진리를 그대로 당하고도 필요한 깨달음이 배움의 시기에 전혀 없었다. 바로 여자들의 안전 문제이다. 아시아까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에서만큼은 위험할 수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안전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처지의 일들이 많을 텐데 말이다. 교직을 하면서 교활한 여교사들에게 몇 번 당했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여자들이 교활하든 사기를 치든 간음을 하든 그런 것은 다 모조리 신의 뜻으로 돌리고, 나의 어린 시절을 유추하여 살펴보면 여성들의 안전을 위하여 무조건 내가 깨달아 할 일들이 엄청 많을 텐데 말이다. 이제 하는 수 없이 노객(老客)으로서 사라져야만 하는가? 아니면 이미 나 말고도 그런 소임(所任)을 하는 분들이 많은가? 내가 걱정 안 해도 될 만큼이면 무척 다행이다. 그래서 나는 시골보다는 도회지(都會地)가 낫다. 훨씬 자유롭고 안전하다. 경찰도 변호사도 무척 일들을 잘 한다. 인간들이 무수히 많아도 다 진짜 서로들 전혀 몰라도 되는 타인들뿐이다. 이게 진짜, 안전하고 자유(自由)로 가는 행복의 길이다. 또 높은 상식(常識)의 배운 분들도 많다. 또 대학에서 공부할 적에 도서관에 가보면 나보다 더 똑똑하고 기가 센 여자남자아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많았다.
또 하나 더 생각나는 것도 있구나. 내가 고향생활을 기쁘게 정리하고 부산으로 홀로 올 족에 교복이 너무나 낡았었다. 검정색이라 때는 덜 타 보였지만 여윈 나는 색이 바라고 매우 낡고 헐헐한 초라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읍내 정거장에서 부산행 버스를 보고 탑승한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찼다. 오후 한 시에 고향을 떠난 천일여객의 완행버스가 의령을 막 지날 적에 나 또래의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반반(半半) 3명씩 탔다. 그들은 모두 말없이 나만 쳐다봤다. 모두들 건강해 보였다. 나쁜 기운은 느끼지 못했다. 여위고 혈색이 창백한 모습의 내가 초라한 교복차림으로 앞좌석에 앉아 있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길거리의 나무들과 함께하는 나의 역사의 한 순간이었다. 몇 구역 후 그들은 모두 차에서 내리면서도 나를 빤히 보고 갔다. 회고하는 정말 고마운 추억이다. 지독한 근시와 난시, 26세 때 앓은 뇌염 후유증의 뇌병변과 팔과 손, 다리의 반신불수, 말도 판단력도 어눌한 장애 불구인 아버지와 모(母)로서 매번 독(毒)이 되는 등 낙담(落膽)과 실망의 격(格)에 무진장 떨어지는 어머니이지만 그래도 부모님 쪽으로 가는 당시 15세의 소년인 나는 너무나 기뻤다. 기쁘게 간다고 가 봤자 큰길가 안쪽의 무허가 판잣집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신(神)의 은총(恩寵)이 나모르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의 은총이란 것도 원래는 필요 없어야 한다. 불청객 뇌성마비(腦性麻痺)의 부(父)의 부실함과 몰귀적(沒歸的) 귀태(鬼胎)로 우리 가정을 세 번이나 폭삭 망하게 한 모(母)의 실행(失行)이 신(神)의 자행(恣行) 이상으로 소년에겐 엄청난 불가적(不可的) 해독(害毒)인 것이다. 이런데 무슨 신의 은총이란 말인가? 가정의 폭망은 누구에게도 원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로 인연으로 두번 다시는 당하기 싫은 끔찍한 부모들이다. 천형(天刑)으로 소년의 가슴에 형극(荊棘)으로 박혀 평생을 부담으로 담고 지난(至難)하게 살아야 한다. 그만큼 신의 은총도 나에겐 이미 불비적(不非的) 해독(害毒)의 정신적 맹독(猛毒)으로 불구(不具)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부(父)가 부실하니 아버지의 형제들도 전혀 도와 주지 않았다. 오히려 삼촌이란 자는 뇌성마비와 반신불수인 형의 재산을 노려 사기를 쳐서 가져갔다. 더욱이 자신의 빚탕감을 위해 형을 채무연대보증인으로 세워 재기불능신용불량자로 만들어 버렸다. 가족이든 남이든 도움이란 것도 서로 주고받는 것일 뿐이다. 신의 은총도 나에겐 병받고 약받는 격이다. 던져주는 피체(被逮)의 고기덩이로 운 좋게 받으면 다행이고, 혹시 못받으면 거기서 그만이다. 굶주리고 야위고 힘이 부치는 어린 소년이 흐르는 강물에서 수명이 다한 물고기를 운좋게 구(求)하는 격이다. 거룩하다는 천신(天神)이 허기(虛氣)진 나를 우습게 보고 마지막으로 몇번 양심상 고민하다가 겨우 한두번 정도 동정(同情)해 보는 것이다. 그래도 남자가 아니었으면 그마저도 없었을 것이다. 그건 인간의 역사가 더럽게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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