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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1606년 편찬 晉陽河氏世譜(萬曆本)의 분석을 중심으로
1)孫 炳 圭**
Ⅰ. 머리말
Ⅱ. 晉陽河氏世譜의 구조
Ⅲ. 晉陽河氏世譜의 혼인네트워크
Ⅳ. 1600년경 족보의 계보형태
Ⅴ. 맺음말; 조선왕조시대 족보의 편찬원리
•국문초록
조선왕조시대의 족보는 신분제의 유동성에서 기인하고 신분적 배타성에 의거하여
동일계층의 사회집단을 결집하려는 의도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족보 편찬
에는 네트워크의 개방성에 기인하여 편찬에 참가하는 가계가 끊임없이 확산되고 교
체되는 변화를 겪는다. 말하자면 선별적이고 계층적인 집단화의 배타성과, 혼인과
더불어 무한히 확대되는 네트워크의 개방성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원리로 족보
가 편찬되었다. 조선시대 족보의 계보형태와 기재사항이 부계혈연집단의 결집을 강
화하는 방향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600년경에 편찬된 족보들은 그 전과 후에 편찬된 족보들의 계보형태와 그 특성
이 갖는 연속성과 변화를 동시에 보여준다. 특히 진양하씨세보(만력본)에서 주목
되는 것은 편자의 선조들 가운데 부계남성으로 시작하는 계보를 ‘子派’, 부계여성의
배우자인 사위로부터 시작하는 계보를 ‘女派’라 구분하여 기록할 뿐 아니라, ‘外譜’
라고 부르면서 부계남성의 배우자, 妻家의 계보를 수용했다는 점이다. 이전의 족보
* 이 논문은 2007년 정부지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
2007-361-AL0014).
**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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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들과 딸 양쪽으로 이어지는 계보형태를 띠어 ‘子女譜’라 불린다. 이 족보는 기
본적으로 이전의 ‘자녀보’ 형태를 유지하지만, ‘자파’ ‘여파’와 같은 여러 개의 네트
워크를 설정하고 여기에 더해 편자의 직계선조의 처가쪽 혼인네트워크까지 끌어들
여 각 네트워크를 혼인관계로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네트워크를 ‘링크(link)’시키는 접점을 ‘노드(node)’라고 한다. 사위로
부터 이어지는 ‘女派’의 계보나 처가의 계보인 ‘外譜’를 서로 잇는 연결점, 즉 족보
에서 네트워크 사이를 링크하는 노드는 夫婦이다. 이전의 족보는 딸과 그의 남편이
연결점의 역할을 했으며, 1600년경부터 그것에 더해 아들과 며느리가 연결점으로
등장했다.
족보편찬의 그러한 원리는 17세기 이후의 족보편찬에도 지속적으로 적용되었다.
부계남성의 계보로 단일화되는 경향이 있는 17세기 이후의 일반적인 족보에는 각
부계남성들의 배우자측, 즉 妻父의 기록이 네트워크의 연결점으로 기능했다.
•주제어
진양하씨세보, 자녀보, 외보, 혼인네트워크, 계보형태
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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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明․淸代의 중국 족보는 宗族 집단에서 ‘만들어진’ 계보를 중심으로 하는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1) ‘부계친족집단’의 결집과 통제를 위한 의도가 족보에
개재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족보의 계보를 검토하려는 입장에서 우선 족보가
과거의 인물에 대한 편찬 당시의 의도된 기록이라는 점에 공감을 갖는다. 그
런데 족보편찬의 의도로서 ‘부계친족집단’이라는 종족의 조직화, 종족간의 연
합과 연대라는 점2)에 대해서는 그것을 한국의 족보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
을지 의문이다. 족보의 계보 형태와 개인정보 기재사항에 나타나는 차이는 족
보의 편찬 의도만이 아니라 사회시스템의 상이함을 강조하는 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시대의 족보는 그 계보형태와 개인정보 기재사항을 가지고 편찬
시기를 기준으로 17세기 이전과 그 이후로 크게 대별되고 있다. 15∼16세기에
편찬된 족보는 계보상 아들과 딸-사실은 사위- 모두의 후손들을 망라하여 기
재하여 소위 ‘子女譜’로 불린다.3) 17세기 이후에 편찬되는 일반적인 족보에
는 사위의 후손 계보가 단축되거나 생략되고, 同姓의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계보가 그려진다.4) 이 때문에 종래의 연구에서는 조선후기의 족보가 중국의
1) 多賀秋五郞, 中國宗譜の硏究 上, 日本學術振興會, 1981, 1면.
2) 瀨川昌久, 族譜-華南漢族の宗族·風水·移住, 風響社, 1996, ‘第三章 宗族間の連合と連
帶’, 83∼128면; 常建華, 明代宗族硏究, 上海人民出版社, 2005, ‘明代的宗族鄕約化’
258∼302면.
3) 金京蘭, 「조선후기 가족제도 연구의 현황과 과제」, 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姜萬
吉敎授停年紀念), 창작과비평사, 2000, 376∼406면; 권기석, 「15∼17세기 족보의 편제 방
식과 성격-서발문의 내용 분석을 중심으로-」, 奎章閣 30,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07, 53
∼93면; 권기석, 「15∼17세기 족보 편찬과 참여계층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10, 1
∼465면. 권기석은 부계와 비부계, 동성과 이성을 무제한 수록하는 것을 ‘內外譜’라 하여
부계 자손만을 선택적으로 기재하는 ‘同姓譜’와 상대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내외보’는 부
계의 자녀로 이어지는 ‘자녀보’에 처가의 족보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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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와 같이 ‘부계친족집단의 결집을 강화하기 위한 물적 근거’로 여겨졌다.
그러나 자녀보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처에 대한 정보가 조선후기 족보에 나
타나는 것에 대한 다른 이해로부터 ‘부계친족집단의 결집’이라는 관점이 비판
되고 있다.5) 17세기 이전의 자녀로 이어지는 족보에 여러 성씨의 인물이 등
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후기 족보도 처의 정보에 여러 성씨의 妻父들이
기재되는 집합체로 존재하여 ‘부계친족’을 거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15∼16세기의 자녀보 형태의 족보로부터 17세기 이후에 일반화되는 부계남
성중심 형태의 족보로 전환되기 직전, 1600년경에 편찬된 족보들이 있다.6) 慶
尙道 宜寧 출신 李魯(1544∼1598)에 의해서 1590년대에 편찬된 四姓綱目7)과 慶尙道 陜川 출신 河渾(1548∼1620)이 1606년에 편찬한 晉陽河氏世
譜(萬曆本)8)이 그런 사례다. 이 족보들은 이전 시기의 족보들이 갖는 특징
을 그대로 가지면서도 이후 시기의 족보에 보이는 특징을 계보형태와 개인정
보기록에 나타내고 있다.
두 족보는 모두 경상도 진주권에서 활동하는 南冥 曺植 문하인들에 의해
서 편찬되었으며, 족보에 기재된 인물들과의 관계와 특징에 대해서는 두 자료
4) 17세기 후반 이후에도 자녀보, 내외보의 형태를 고수하는 족보가 지속적으로 편찬되었다
(成鳳鉉, 「固城李氏 先世外家族譜와 八高祖圖」, 古文書硏究 24, 한국고문서연구
회, 2004, 205∼236면; 박홍갑, 「고성이씨 족보의 간행과 그 특징」, 고성이씨 가문의 인물
과 활동, 일지사, 2010, 284∼317면). 성봉현은 이 논문에서 배우자 집안의 족보를 함께 기
록하는 족보로, 17세기 말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고성이씨의 先世外家族譜 이외에도,
18세기 중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평해황씨의 外譜, 19세기 초반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고령김씨의 姻婭譜를 소개하고 있다.
5) 宮嶋博史, 「東洋文化硏究所所藏の朝鮮半島族譜資料について」, 明日の東洋學 7, 東京
大東洋文化硏究所, 2007
6) 15∼17세기 족보의 편찬 상황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序跋文을 분석한 권기석, 앞의 2010 논
문에 상세하다.
7) 원창애, 「松巖世譜四姓綱目解題」, 경남문화자료총서 1; 四姓綱目·春坡心易,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 2002, 7∼13면. 이 자료는 위의 先世外家族譜에 이르는 고성이씨족보
의 연원적 자료의 하나로도 소개되었다(박홍갑, 앞의 2010 논문, 284∼317면).
8) 장인진,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晉陽河氏世譜(萬曆本) 해제」, 계명대학교 동산
도서관 고문헌총서 13-晉陽河氏世譜(萬曆本)-, 계명대학출판부, 2010, 398∼4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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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해제에 상세하다. 본고에서는 특히 후자의 晉陽河氏世譜(萬曆本)-이후
로 진양하씨세보로 통칭함-를 주된 검토대상으로, 계보의 類型, 編纂原理,
개인정보 기재사항과의 관련성을 분석하기로 한다. 1600년경의 족보들은 족
보의 속성이 전환되는 과도적 형태와 성격을 나타낼지도 모르며, 조선시대 족
보의 특성을 관통하는 연속적 편찬원리를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Ⅱ. 晉陽河氏世譜의 구조
<그림 1> 편자 하혼의 선조계보로 보는 진양하씨세보 상․하집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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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편자 하혼의 선조계보로 보는 진양하씨세보 ‘外譜’의 구조
진양하씨세보는 상하 두 권의 본집과 한 권의 外譜로 이루어지는데, 그
내용은 세 가지 서로 다른 계보로 제시되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를 나누어 간
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上集; (1) 편찬자 河渾의 玄祖-5대조-인 河演의 자식들 河孝明(상1집), 河悌
明(상4집), 河友明(상5집)을 ‘子派’로 하여 그들로부터 자녀 후손
들로 이어지는 계보와 사위인 柳京生(상2집), 金孟廉(상3집)을
‘女派’로 하여 그 선조로부터 그들 자녀 후손들로 연결되는 계보
下集; (2) 河演을 제외한 그 형제자매들(하1집), 즉 李楊(권1), 河광(水+廣;
권2), 河泂(권3), 河潔(권4)등으로부터 자녀 후손들로 연결되는
계보와 하연의 삼촌 河啓宗(권5)으로부터 그의 자녀 후손들로 연
결되는 계보
(3) 하연의 증조인 河楫의 사위 姜蓍(하2집)의 선조로부터 그의 자녀
후손으로 이어지는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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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譜; (4) 편찬자 직계조상의 처가 계보. 즉, 현조 하연의 처가 星山李氏(외
보1집), 고조 河友明의 처가 順天朴氏(외보2집), 증조 河哲石의 처
가 冶爐宋氏(외보3집), 조 河漢佑의 처가 檜原兪氏(외보4집), 부
河千壽의 처가 善山金氏(외보5집) 각각의 선조로부터 각 처의 형
제자매 각각의 후손에 이르는 계보.
(5) 여기에 더해 편찬자의 조모와 모에 대해서는 그녀들의 친가만이
아니라 외가, 즉 하한우의 처 회원유씨(외보4집)의 외가인 李氏
와 하천수의 처 선산김씨(외보5집)의 외가인 鄭氏의 친가 형제자
매와 그 후손이 ‘외보의 외보’로 등재되는 계보.
* 追錄 및 別譜, 續集; 편찬 후에 상․하․외보의 각 권집 말미 공간에 누락
되었다고 여겨진 계보들을 추가로 기록함.
진양하씨세보는 1467년 편찬의 安東權氏世譜(成化譜)-이후 안동권
씨성화보로 통칭함-와 마찬가지로 아들로 이어지는 계보와 딸로 이어지는
계보가 모두 존재하는 ‘子女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자녀보의 특징은 출생
순으로 자녀들의 계보를 기록하고 딸로 연결되는 계보에 제한을 두지 않으며,
딸에게는 그녀들의 남편 이름을 기록하지만, 아들에게는 그들의 처가 기록되
지 않는다는 것이다.9) 그러나 이 족보에는 그것과 또 다른 형태의 기록이 보
이기 시작한다.
이 족보는 편자 개인의 입장에서 가까운 친인척 순으로 그들로부터 시작되
는 몇 개의 계보를 차례로 제시하는 식으로 편성되어 있다. 여러 계보들의 출
발점으로서 이 족보 구성에 계기가 되는 인물들은 첫째로 하혼의 부계 직계
조상들의 자녀, 둘째로 부계 직계조상들의 배우자들이다. 족보에 등재되는 인
물의 범위는 편자의 의도에 좌우되기 마련인데, 이 족보에 나타나는 여러 계
보들은 편자 河渾 개인의 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그의 족보편찬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말한다.
우선 부계 직계조상들의 자녀들로 시작되는 계보는 편자의 高祖父인 河友
明의 형제들 계보로부터 시작된다. 다음으로 하우명의 4촌 형제자매들-伯叔
9) 宮嶋博史, 「安東權氏成化譜를 통해서 본 한국 족보의 구조적 특성」, 대동문화연구
62,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9, 201∼24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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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와 姑母들의 자식들-이 있는 계보, 다음으로 하우명의 6촌 형제자매들-伯
叔祖父와 祖姑母들의 손자·손녀들-이 있는 계보, 끝으로 하우명의 8촌 형제
자매들-伯叔曾祖父와 曾祖姑母들의 증손들-이 있는 계보라는 식의 순서로
기재된다. 가령 姜蓍의 계보를 보면 그의 증손과 증손녀들 이름 옆에 ‘河同知
八寸’이라 부기하고 있다. ‘河同知’는 하우명을 이르는 말로, 계보들이 하우명
을 기준으로 하는 관계로 구성됨을 의미한다. 물론 8촌이라는 관계는 부계의
하씨에 한정되지 않는다.
또한 「上集」에 하우명을 포함한 형제자매들의 5계보는 하연의 세 아들과
두 딸의 계보인데, 아들로부터 시작되는 계보를 ‘子派’로, 사위로부터 시작되
는 게보를 ‘女派’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계보 하나하나가 각각 자녀
보의 형태를 띠고 있음도 기억해두어야 한다. ‘자파’의 계보든 ‘여파’의 계보든
아들과 딸=사위로부터 시작하여 다시 그들의 자녀들로 이어지는 계보형태를
갖추고 있다.
「下集1」에는 하우명의 4촌 형제자매들이 있는, 즉 하우명의 조부인 河自宗
의 다섯 자식들의 계보와, 6촌 형제자매들이 있는, 즉 하자종의 형제인 河啓
宗의 두 아들의 계보가 등재된다. 여기서 하자종의 자식들 계보에는 상집의
하연의 계보를 제외하고 있으나, 하계종의 자식들의 계보와 연속적으로 등재
하여 마치 이들 부친인 河允源의 계보인 것처럼 되어있다. 하윤원의 첫째 河
有宗은 ‘無后’10)로 자식이 없지만, 아마도 이 진양하씨세보가 편찬되기 전
부터 하자종과 하계종으로부터 시작하는 자녀보가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
다. 사위 鄭璡의 계보도 보이지 않는다. 하자종의 계보 가운데 하연 자식들의
계보를 특화하고 전래하던 나머지 계보를 이 족보에 실은 것으로 볼 수 있다.
「下集2」에는 하우명의 8촌 형제자매들, 즉 이 하윤원의 여동생들 가운데
姜蓍의 두 아들 계보를 특별히 등재하였다. 하윤원의 다른 여동생의 남편인
姜壽明에 대해서는 ‘未考’라 하여 그 후손들의 계보가 조사되지 않았다. 강시
의 두 아들 姜淮伯과 姜淮仲의 계보도 하윤원 자식들의 계보와 같이 이전부
10) 이 족보에서 ‘無后’는 부계를 계승할 적자가 없다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아들만이 아니
라 딸도 없는 경우에 ‘무후’라 기록하였다. 자녀보의 계보 연속관계를 의미하는 용어로 이
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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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존재했을 것이다. 다만 뒤에서 보듯이 이들의 족보에 등재된 양적 방대함
으로부터 주로 한성에서 활동하던 강시의 후손들이 출원지인 진주에서 진양
하씨와 같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렇게 부계 직계조상들의 계보는 하우명 형제들 5가계와 이들을 제외한
기왕의 하윤원 자식들 2계보, 그리고 하윤원의 여동생 1계보 등, 계보 각각의
자녀보를 합해서 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부계 직계조상들의 배우자들 계보는 河演에 이르는 편자 하혼의
부계직계선조들의 배우자들 5가계의 계보를 다섯 개의 ‘外譜’로, 다시 하혼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외가 2가계를 두 개의 ‘外譜의 外譜’로 등재하고 있는 것
을 말한다. 물론 이들 일곱 계보도 각각 ‘자녀보’다. 그것보다 주목되는 것은
이 ‘외보’와 ‘외보의 외보’는 하혼의 부계직계선조들의 戶籍에 등재되는 ‘四
祖’ 기록의 모계선조들을 계기로 한다는 점이다. 호적에는 해당 호를 대표하
는 자 부부에게 모두 父․祖․曾祖와 外祖라는 부계 및 모계 선조의 인적사
항을 기록하게 되어 있다. 그 후손으로 이 호적 기록 정보가 전달되어 부계직
계선조들의 배우자와 그녀들의 부계 및 모계 선조에 대한 정보가 축적된
다.11) 이것이 외보의 각 계보를 구성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다음 절에서 진양하씨세보의 내용분석에 들어가기 전에 계보의 구성과 관
계하여 각 계보상에 등재된 인물의 양적분포를 살펴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여기에 추록 및 별보로 기록된 인원은 제외했다.
11) 孫炳圭, 「13∼16세기 호적과 족보의 계보형태와 그 특성」, 대동문화연구 71,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10, 7∼4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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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진양하씨세보에 기재된 자녀별 인물의 양적분포 (단위; 名, %)
區分系派
자녀계 河氏자녀 하씨
자녀
B/A%
하씨
남성
a/A%
중복등재
子女계(A) 子(a) 女계(B) 인원 %
上集
河允源-河自宗-河演-河孝明609 318 927 77 42 119 13% 8% 17 1.8%
-柳京生436 277 713 1 1 27 3.8%
-金孟廉712 414 1126 1 1 27 2.4%
-河悌明52 30 82 8 2 10 12% 10% 1 1.2%
-河友明243 153 396 93 66 159 40% 23% 25 6.3%
소계 2052 1192 3244 178 112 290 9% 5% 97 3.0%
下集
河允源-河自宗-李楊82 38 120 1 1 17 14.2%
-河廣19 12 31 9 3 12 39% 29%
-河浻72 20 92 40 11 51 55% 43%
-河潔25 2 27 20 2 22 81% 74%
-李希若2 2 1 1
-河啓宗75 42 117 30 13 43 37% 26% 8 6.8%
姜蓍864 412 1276 1 1 54 4.2%
소계 1137 528 1665 99 32 131 8% 6% 79 4.7%
外譜
河演처 星山李氏1 2 3 1 1 2 66.7%
河友明처 順天朴氏196 125 321 1 1 40 12.5%
河哲石처 冶爐宋氏264 167 431 1 1 36 8.4%
河漢佑처 檜原兪氏17 11 28 1 1 1 3.6%
外譜李氏32 24 56 5 8.9%
河千壽처 善山金氏98 56 154 1 1 13 8.4%
外譜鄭氏118 69 187 10 5.3%
소계 726 454 1180 5 5 107 9.1%
계 3915 2174 6089 277 149 426 7% 5% 283 4.6%
<참고> 1. 外譜의 숫자는 당사자의 부친대부터 계산했다. 단, 하천수처 선산김씨는 고조대부터 계산했다.
2. ‘중복등재’되는 자도 계산에 포함시켰는데, ‘見○’로 적혀있는 경우를 말한다.
진양하씨세보에 등재된 인물은 중복등재를 포함해서 6089명에 이른다-
중복등재를 감안하면 6천명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 가운데 아들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4천명으로 전체의 64%이며 딸=사위로 이어지는 경우가 전체의
36%다. 아들로 이어지는 등재에 치중하여 많은 수의 딸이 누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하씨자녀들이 4백여 명으로 전체의 7%에 지나지 않는데, 하씨
남성만을 계산하면 이보다 적은 5%다. 모계의 가계인 외보를 제외해도 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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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6%에 머문다. 중심이 되는 부계남성 계보를 빌미로 여러 성씨의 가계를
혼인네크워크로 망라하는 조선전기 자녀보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한편, 편자 하혼의 가까운 선조 범위순으로 등재하는 진양하씨세보에서
계보마다 전체등재인물의 수, 하씨자녀의 수 등에 흥미로운 양상이 발견된다.
먼저 하연의 자식들 계보를 살펴보면 하혼의 직계선조인 하우명의 계보에
400명 가까운 인물이 등재되고 하씨자녀가 가장 많이 등재된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의 계보에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연의 장남인
하효명의 가계에는 많은 인물이 등재될 뿐 아니라 하씨자녀들의 수도 하우명
의 계보에 버금갈 정도로 많다. 흥미로운 점은 하연의 딸=사위 계보에, 특히
金孟廉 가계에 천명이 넘을 정도로 많은 인물이 등재된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더 먼 선조인 강시의 계보에는 다른 계보에서보다 월
등히 많은 1,270여 명의 인물을 싣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연의 자식들 계보를
제외한 하자종의 계보와 하계종의 계보에는 모두 합해도 하우명의 계보에 등
재된 인물의 수치에 미치지 못한다. 상대적으로 하씨자녀의 비중은 높은데 그
만큼 혼인네트워크의 범위도 축소되어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현
실적인 후손들의 자연적인 번식이 아니라 진양하씨세보에 등재하기 위해서
얻을 수 있었던 정보의 양이며, 동일 계층 내에 혼인네트워크가 확산된 정도
의 차이를 의미할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見○’라고 기재되어 다른 곳에 중복으로 기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경우
를 검토해보면, 이 진양하씨세보에 등재된 인물들 가운데 혼인네크워크의
친밀도를 짐작할 수 있다. ‘見○’란 천자문의 순서로 정해진 해당 쪽수를 보라
는 뜻이다. 이 책자에 등재된 인물에 한해서 동일한 혼인관계가 서로 다른 네
크워크에 동시에 얽혀 있음을 의미한다. 하연의 사위 柳京生의 계보와 하자
종의 사위 李楊의 계보, 강시의 계보, 그리고 외보의 각 계보에서 이러한 중
첩된 등재가 하씨남성으로부터 시작되는 자녀보에 비해 많이 발견된다. 이들
계보는 하씨 가계의 확산된 혼인네트워크의 증거로써 확보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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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河漢佑의 계보 약도
(子)漢佑-(女)李有茂-----------------------------<중략>
-(女)盧湜-(女)朴應德-(養女)朴而章(見草)
-(子)眉壽-(子)沃(見發)-(子)應寶-(子)櫓
-(女)裵溟(見黎)
-(女)邢孝甲
-(子)以檣
-(女)
-(女)李東賓
-(子)應濩
-(子)湜-(女)李信男
-(女)崔得忠---------------------<중략>
-(女)裵明遠(見黎)-(女)成墩(見首, 無后)
-(子)裵誠立(見雨)-(子)
-(子)
-(子)裵敬立-(子)
-(子)
-(子)淏(見皇)
-(子)希壽(見良)--------------------------<중략>
-(子)千壽-(女)文應洙-(子)文景虎-(繼子)文哲男
-(女)愼浩-(子)愼先覺(無后)
-(子)愼公覺(見敷)-(子)愼仁吉
-(子)愼仁甲
-(女)
-(子)濬-(女)鄭之允(無后)
-(女)李巘-(子)李龍瑞
Ⅲ. 晉陽河氏世譜의 혼인네트워크
진양하씨세보의 부자간 계보기록 방법과 혼인관계의 중첩현황을 편자
하혼의 조부 河漢佑의 계보로부터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하한우는 李有茂,
盧湜에게 시집간 두 딸이 있으며, 네명의 아들 眉壽, 希壽, 千壽, 鍾壽를 두
었는데, 하종수는 약관의 나이로 일찍이 사망했다. 이들의 자녀계보를 족보가
편찬될 당시에 이르기까지 약도로 나타낸 것이 <그림 3>이다.
딸에서 딸로 이
어지는 소위 ‘女系’
의 계보가 하한우
의 차녀의 계보에
서 바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특
이하게도 ‘養女’의
기록이 발견된다. 사
위 盧湜에게는 딸
하나만 있었는데 그
의 계보를 잇는 그
사위 朴應德도 자
식이 전혀 없었으나
양녀를 들여서 朴
而章에게 시집을 보
냈다. 박이장은 ‘草’
쪽(외보2) 고조 하
우명의 부인 순천
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 121 -
-(女)李東膺-(女)
-(子)景咸
-(子)景恒
-(子)渾-(子)景受-(女)
-(子)景量-(女)
-(子)景紀-(子)以柱
-(子)景中
-(女)成繼甲
-(子)漑-(女)文景龍(無后)
-(子)景新
-(子)鍾壽(弱冠而夭)
박씨의 계보에 순
천박씨부인의 高孫
朴良佐의 둘째 아
들로 기재되어있다.
여기에 박이장은 4
녀2남을 등재한다.
혈연관계도 없는 더
구나 양녀를 매개
로 혼인관계를 기
록하는 데에는 그 혼인관계가 그만큼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하혼의 생질인 文景虎에게도 적자가 없어서 계자를 두었다. 또한 河
眉壽의 막내 淏는 증조 河哲石의 장남 河漢輔, 그 장남 河安壽의 계자로 出
後한 경우(見皇)이다. 고조 하우명의 맏집으로 계부는 호의 5촌이 된다. 그러
나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을 뿐, 족보편찬시에 아직도 적자를 얻지 못하고 있
다. 이 사례들을 포함하여 계자의 사례는 하우명 계보에 3건, 하효명 계보에
는 8건등이 발견되나 다른 계보에서는 한두 건이 발견되는 데에 그친다. 당시
에는 이후시기에 비해 계자를 두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양녀와 혼재하는 상
황인 만큼 적자로 계보를 잇거나 부계친족 가운데서 계자를 찾아 부계남성의
계보를 확보해야 한다는 인식은 아직 강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하혼의 숙부인 希壽의 ‘見良’ 경우를 보면, ‘上集續集’에 ‘二室子’ 1
여1남을 별도로 싣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첫째 부
인의 자식들과 함께 기록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속집에는
본집을 편찬한 후, 이러한 종류의 새롭게 첨가되는 계보를 모아서 기록하였
다. 진양하씨세보에 동일인물이 등재됨을 나타내는 ‘見○’의 복수 등재에는
동일혼인관계가 다른 네트워크에도 나타남을 보이는 것이 아닌 경우도 있음
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복등재 사례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혼인관계와 관련된다. 하미
수의 아들 沃의 ‘見發’ 경우는 ‘하집1’에 하계종의 손자 河孟晊-하우명의 6촌
이라 기록됨-의 계보에 盧富昌의 첫째 사위로 기재되어 있다. 여기에 하옥의
大東文化硏究 제77집
- 122 -
<그림 4> 하집2 姜蓍의 계보 가운데 裵彦昌의 계보 약도
(자)金鑑-(여)裵彦昌-(자)裵應秀-(여)河洪(見皇)
-(여)卞希琇----------<중략>
-(자)裵慶遠-(자)裵瀷
-(자)裵溟(見文)
-(여)朴景鸞
-(여)河沉(見乃)
-(자)裵德秀-(자)裵明遠(見文)
-(자)裵亨遠----------<중략>
자식들은 기재되지 않는다. 愼公覺(見敷)의 경우는 ‘외보5’ 하혼 외조부의
‘선산김씨보’에 表璉의 둘째 사위로 등재되어 있다. 여기서도 그의 자손은 기
재되지 않는다. 즉, 중복기재의 경우는 부계남성계보에 자손을 기록하면, 사
위로 등재된 곳에는 생략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하미수의 둘째 사위 裵
明遠(見黎)의 경우에는 사위로 등재되었음에도 그 뒤로 그의 자손들을 싣고
있다. ‘하집2’ ‘姜蓍’의 자녀보에 배씨들의 부계남성계보에 나타나는데, 여기
에는 자손을 기재하지 않고 처가의 계보에 자손을 싣고 있는 것이다.
얽히고 섥히는 혼인관계 가운데 두 가계 사이에 혼사가 빈번히 일어나는
경우도 발견된다. 하미수의 조부인 하철석 가계와 裵彦昌 가계가 그러하다.
위의 하한우의 후손 계보와 대비해서 배언창의 계보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혼
인관계가 발견된다.
河眉壽의 둘째
사위 裵明遠은 裵
彦昌의 둘째 손자
인데, 미수의 맏
손자 河應寶의 첫
째사위 裵溟은 배
명원의 5촌질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배명원은 처
가에서 배명과 4촌 관계이고 2세대가 차이나는 할아버지벌이나, 친가에서는
5촌 관계이고 1세대 차이나는 조카벌이라는 사실이다. 혼인에 부계의 항렬을
반드시 맞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철석과 배언창 가계에
는 이 이외에도 혼인관계가 있었다. 배명원의 4촌누이들은 河洪과 河沉에게
시집갔는데, 河洪은 하철석의 차남 河漢弼의 맏손자다. 河沉은 하철석의 사
남 하한좌의 맏손자다. 이들은 모두 배명원과 같은 항렬이다. 배명원의 처가
에서 이들은 모두 배명원과 6촌간이다. 배명은 친가에서 이들의 처조카이나
처가에서는 이들의 8촌 손자벌이다.
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 123 -
혼인관계 기록이 복잡하게 중첩되기도 하지만, 이름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
고 계보의 말단에 적힌 자는 하나의 가족을 형성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사위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딸이 혼인을 하여 가족을 구성함을 의미한다. 이
름이 없이 ‘자’, 혹은 ‘여’라는 기록만 있는 경우를 비추어 보건대 아들에게도
이름이 있으면 혼인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혼의 생질 愼公覺의 사례를
보면, 세 자식 가운데 막내딸은 이름이 없다. 두 아들은 혼인하여 가족을 이
루었는데, 자신과 시집가지 않은 딸은 두 아들 가운데 한 아들 부부와 함께
가족을 유지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두 가족이 존재하는 셈이다. 신공각이 다른
계보상에 중복 기재되나, 그곳에서는 혼인관계를 나타낼 뿐이다. 그리고 신공
각의 형 愼先覺은 ‘無后’로 후손이 없어 가계가 단절되었다.
또 하나 더 裵明遠의 사례를 다시 보면, 그의 장남 裵誠立과 차남 裵敬立
에게 자식들이 두 명씩 있지만, 모두 이름이 없다. 미혼 자식들과 각각 가족
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배성립은 다른 계보에 중복 기재되
는데, 그곳에서는 혼인관계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첫째 사위 成墩도 다른
계보에서 중복 기재되어 여기서는 혼인관계를 나타낼 뿐인데, 더구나 자손이
없어서 계보가 단절되었다. 이미 가족이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이러한 식으로 계보를 더듬어가서 계보의 말단에 존재하는 자를 분류하여
어느 정도의 가족이 계보를 연속시켜 족보를 편찬할 당시에 현존하게 되었는
지를 집계한 것이 다음의 표이다. 각 자녀보마다 현존하는 가족의 수치는 어
느 정도의 가족들이 족보편찬에 관여하였는지를 나타내는 셈이다. 이 표는 또
한 가계의 연속과 단절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가족의 연속성에
의거하여 네트워크를 관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계보상의 말단에 적힌 후손은 대부분 족보를 편찬할 당시에 현존하면서 편
찬에 참여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위의 사례에서와 같이 ‘견○’라는
식으로 중첩 기재되어 있는 자들이 있다. 그 가운데 사위의 경우는 다른 곳에
서 아들로 가족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제외했다. 또한 계보 말단
에 기재된 자들 가운데 이름을 쓰지 않은 미혼자들이 있어 아버지-장남의 직
계가족에 속하는 자는 하나의 가족으로 카운트하기 위해 제외했다. 그리고
‘夭’라고 하여 혼인 전에 죽은 1사례도 제외했다. 계보상 말단에 기재된 자들
大東文化硏究 제77집
- 124 -
로부터 이들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을 형성하는 자들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
이다.
<표 2> 진양하씨세보에 기재된 가족수와 단절율 (단위; 名, %)
상집, 하집, 외보 구분
계보말
단인원
제외
가족수
(A)
단절
연속
가족
단절율
(a/A)%
비고
(왕실)
未
考
無
后
系
子
계(a)
河允源-河自宗-河演-河孝明556 25 531 6 5 8 19 512 3.6% 7-25
(30) (30) (2) (3) (5) (25) (16.7%)
-柳京生410 25 385 1 3 5 9 376 2.3% 1-1
-金孟廉651 20 631 3 6 1 10 621 1.6% 25-29
-河悌明42 42 1 5 1 7 35 16.7% 14-6
(3) (3) (1) (1) (2) (33.3%)
-河友明221 15 206 25 3 28 178 13.6% 2-1
(30) (30) (3) (1) (4) (26) (13.3%)
상집계 1880 85 1795 11 44 18 73 1722 4.1%
河允源-河自宗(하연계보제외) 197 9 188 5 5 183 2.7%
(30) (1) (29) (2) (2) (27) (6.9%)
-河啓宗64 7 57 1 1 56 1.8%
(8) (1) (7) (1) (1) (6) (14.3%)
姜蓍694 31 663 5 4 4 13 650 2.0% 17-21
하집계 955 47 908 11 4 4 19 889 2.1%
河演妻 星山李氏2 2 0
河友明妻 順川朴氏176 29 147 1 1 2 145 1.4% 1-7
河哲石妻 冶爐宋氏239 27 212 2 5 7 205 3.3%
河漢佑妻 檜原兪氏18 2 16 3 3 13 18.8%
檜原兪氏外譜 李氏28 2 26 1 1 25 3.8%
河千壽妻 善山金氏84 10 74 2 1 3 71 4.1%
善山金氏外譜 鄭氏108 6 102 4 1 5 97 4.9%
외보계 655 78 577 8 10 3 21 556 3.6%
총계 3490 210 3280 30 58 25 113 3167 3.4% 67-90
(하씨남성, 가족) (101) (2) (99) (3) (6) (4) (13) (86) (13.1%)
<참고> ( )안은 윗칸 수량 가운데 하씨남성의 수이다. 비고의 ‘왕실’은 종친부인물-가족수다.
그러나 여기서도 오래전에 후손의 계승 여부를 알지 못하고 계보를 지속시
키지 못하는 자들이 ‘未考’등의 형태로 존재한다. ‘無后(=無後)’라고 해서 후
계를 잇지 못함을 분명히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래서 ‘系子’를 둔 경우
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 125 -
도 나타난다. 어쩐 일인지 진양하씨세보에는 오래된 세대의 계자라도 그
후계를 잇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게 나타난다. 이 경우는 정통의 계보를 잇지
못하는 것으로 여겼는지 의심된다. 이들은 모두 단절된 가족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을 가족총수에서 빼면 족보를 편찬할 때까지 연속된 3천여 가족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들이 족보 편찬의 주된 구성원들이었다.
각 자녀보마다 가족의 총수나 족보편찬시까지 연속된 가족의 수는 족보 등
재인물의 수량적 분석에서 살펴본 경향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목하고자 하
는 것은 6천명에 이르는 진양하씨세보 등재인물들의 반이 이들 가족의 네
트워크 형성과정을 연원적으로, 계보상의 정당성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존재
한다는 점이다. 족보편찬시의 가족들로부터 바라보는 관점은 진양하씨세보
에 등재된 인물이나 가족들이 혈연적인 정당성으로 당연히 등재된 것이 아니
라 당시의 족보편찬 필요성에 의거해서 선별적으로 등재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편자 하혼의 직계선조인 하우명 형제들의 자녀보를 싣고 있는 상편에는 우
선 하우명 후손들로 200여 명의 가족을 등재하는데, 맏형 하효명의 계보에 연
원을 두는 가족들이 그 두 배를 넘는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더구나 누이들의
계보에 연원을 두는 가족들이 훨씬 더 많다. 이것은 하우명으로부터 먼 친족관
계를 갖는 하집의 강시 계보에서 더욱 뚜렷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더
폭넓은 네트워크를 진양하씨 족보에 끌여들일 필요성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상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 진양하씨 남성의 가족들이 타성씨 가족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단절율을 보인다는 것이 눈에 띤다. 실제로 이들 가족이 세
대간 연속으로 계승되기 어려웠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후계가 단절
되거나 후손들을 알지 못하여 타성씨 계보에는 등장하지 않았을 선조들이 상
세히 소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족보를 편찬할 때에 진양하씨남성의 가
족들에 대해서는 선조들의 기록을 더 많이 확보하도록 요구된 반면, 타성씨
가족에 대해서는 연원이 분명한 것을 광범위하게 연결시켜서 파악하고자 하
는 방법을 취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12)
12) 진양하씨남성 가족들에 대한 정보가 손에 넣기 쉬웠고, 더 폭넓게 확산된 가족을 망라하기
위해 기왕에 확실한 연원을 갖는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던 타성씨의 자녀보를 그대로 받
大東文化硏究 제77집
- 126 -
가족의 연대를 확대시키는 방법으로 진양하씨세보에서 취한 독특한 방
법은 ‘외보’라는 형식으로 타성씨의 자녀보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자녀보는
아들과 딸, 즉 부계 남성과 여성을 계기로 그 이후의 계보를 잇는 것이라면,
외보는 부계남성의 ‘배우자’를 계기로 그 네트워크를 포함시키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편자 하혼의 외가, 즉 부친의 배우자로부터 직계부계선조들의 배우
자들에 이르기까지의 가계들이 제시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하혼의 증조 河哲
石의 妻家 冶爐宋氏와 고조 河友明의 처가 順川朴氏의 가계에 연원을 두는
가족들이 대거 편입되었다. 편자 하혼의 외가 가계를 연원으로 두는 가족들
수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 미미하기는 하지만 하씨남성 가족들에게 단절율이
높았던 것과 유사하게 하혼으로부터 먼 직계조상으로 갈수록 단절율이 낮아
지는 경향이 있다-등재 가족이 적은 조모 가계의 사례를 예외로-.
이러한 외보의 제시와 더불어 이후의 족보에 일반화되는 것과 같이 부계남
성에게 妻父에 대한 정보가 적히는 경우가 나타난다는 것,13) 그리고 부계여
성, 즉 딸에 대해서도 그 남편의 이름과 함께 ‘前室’ 혹은 ‘後室’ ‘二室’ 등, 처
로서의 상황이 구분되어 기록된다는 것도 새로운 기재방법이다. 네트워크의
확산을 드러내는 데에 처에 대한 기록이 족보상에 표면화되기 시작한다는 것
은 족보편찬 방법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점을 포함해서 다음 절에서는 진양하씨세보가 갖는 계보형태상의 특징을 전후하는 다른 족보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살펴보기로 한다.
Ⅳ. 1600년경 족보의 계보형태
1. 四姓綱目과의 비교
진양하씨세보가 편찬되기 얼마 전인 1590년대의 倭亂 시기에 慶尙道 宜
아들이는 식의, 손쉬운 방법을 취했다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13) 외보를 제시할 수 없는 주요한 몇몇 선조들에게만 배우자에 대한 정보를 기록했다.
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 127 -
寧 출신 李魯(1544∼1598)에 의해서 四姓綱目이 편찬되었다. 하혼과 이로
는 모두 경상도 晉州 권역 출신으로 儒學者 曹植의 문인들이다. 이 지역 지
식인들이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될 당시에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하였다.14) 사
성강목은 수록범위가 그리 넓지는 않지만, 계보형태에서 진양하씨세보의
편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사성강목의 四姓은 편찬자 父母의 ‘四祖’에 해당하는 네 가계를 가리킨
다. ‘사조’란 호적상의 호 대표자 부부에게 기재되는 각각의 父․祖․曾祖와
外祖 인적사항을 말하므로, 한 호에는 이들 부부 각각의 친가와 외가, 4가족의
가장들이 기재되는 셈이다. 즉 편자의 부계인 固城李氏와 조모의 가계인 昌寧
成氏, 어머니의 부계인 南平文氏와 외조모의 가계인 安岳李氏를 말한다. 이
4가족의 가계를 기준으로 4개의 계보가 하나의 족보로 묶여서 편찬된 것이다. 진양하씨세보의 외보로 제시하는 족보 편성방법의 원리와 같다. 즉, 이로의
친가인 固城李氏 가계를 기준으로 조모의 昌寧成氏와 모의 南平文氏는 그
‘외보’가 된다. 그리고 외보인 남평문씨의 외보가 安岳李氏인 셈이다.
그런데 각각의 가계에 인물을 등재하는 방법은 당시까지의 일반적인 자녀
보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사성강목의 ‘綱’과 ‘目’은 각 성씨의 세로[縱]와
가로[橫], 즉 직계와 방계의 계보를 말한다. 세로라는 것은 성씨마다 각각의
시조로부터 조부, 조모, 외조부, 외조모에 이르는 직계의 단선적 계보를 기본
적인 축으로 삼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가로로는 각 세대의 부계선조 한
사람마다 그의 처의 사조를 기록하고 다음은 그들 부부가 낳은 자식들의 계
보를 주요 인물들 중심으로 나열하고 있다. 각 성씨의 방계계보는 문장으로
설명하는 형식으로 기재되는데, 한 가계의 일 사례를 일반적인 계보형식에 따
라 간략하게 도식화해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15)
14) 하혼은 李魯의 스승 崔永慶의 伸寃을 함께 한 일이 있다(장인진, 「계명대학교 동산도서
관 소장 晉陽河氏世譜(萬曆本) 해제」,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고문헌총서 13-晉陽河
氏世譜(萬曆本)-, 계명대학출판부, 2010, 398∼405면 참조).
15) 十二世 …… 山命 少子 …(출생년-1387-, 등과여부, 경력 등의 인적사항)… 配 淑人朴
氏, 籍咸陽, 考 立紀 尙州判官, 祖 大猷 吉州牧使, 曾祖 慄 監門衛上將軍, 外祖 洪師
舟 直長同正 豊山系也. 生二子. 次 克元, …(인적사항, 묘소위치 등)… 李克元 娶 ……
尹安仁之女, 子繼藩 別侍衛, 女元淑孫 副護軍. ○別侍衛 李繼藩 生四子一女, 子 桓
大東文化硏究 제7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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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固城李氏 12世 李山命의 계보
山命-(자)[13세 克仁]
-(자)克元-(자)繼藩-(자)桓 -(여)金光弼
[次子] -(자)柱 -(자)成逵[無后]
-(자)楨 -(자)永鑑 -(자)仁亨
-(여)崔銖
-(자)植 -(자)順貞
-(여)韓雄
* 李山命의 配[咸陽朴氏, 父 立紀, 祖 大猷, 曾祖 慄, 外祖 豊山洪氏
師舟], 李克元의 配[尹安仁의 딸], 李繼藩의 配[元淑孫의 딸]
* 元淑孫-(여)許士良-(여)孫潤屋
-(여)李崔-(여)金光遠
<그림 6> 固城李氏 13世 李克仁의 계보
克仁-(자)[14세]
-(여)李翼[無后]
-(여)宋祥-(자)世彦[無后]
-(자)世俊-(여)朴良佑
-(여)朱悅
-(자)世豪-(여)李涵-(자)有慶
-(자)善慶
-(여)朴世貞-(여)李仁恢-(자)夢記
* 李克仁의 配[善山金氏, 父 從智, 祖 薿, 曾祖 璆, 外祖 李審言]
* 金從智-(여)鄭天民-(자)嵩祐-(자)銓-(여)梁世節-(자)士元
-(자)士亨
-(자)士義
-(자)銛
-(여)林憲
<참고> (자), (여)등은 일반적인 족보계보형식에 맞추기 위해 임의로 부기
한 것이다.
柱 楨 植, 女 韓雄 李桓女 …金光弼, 李柱子 成逵 無後, 李楨子 永鑑, 永鑑子 …… 仁亨
女 崔銖, 李植子 順貞… ○副護軍 元淑孫女 …許士良 李崔, 許士良之壻 孫潤屋, 李崔之
壻 金光遠
十三世 …… 克仁 長子 …(출생년-1426-, 등과여부, 경력 등의 인적사항)… 配 宜人善山金
氏 …… 從智之女, …… 薿之孫, …… 璆之曾孫, …… 李審言之外孫 丹溪氏 …(묘소위
치)… 生一男二女. 女長 李翼 無後且早歿, 次 內禁衛 宋祥. ○內禁衛 宋祥 子 世彦 世俊
世豪 皆無繼姓. 宋世俊 女 朴良佑 朱悅 …… 宋世豪之壻 …… 李涵 朴世貞, 朴世貞女 李
仁恢 仁恢子 夢記, 李涵子 有慶 善慶 …… ○附錄 生員 李從智之壻 一曰 縣監 鄭天民,
鄭天民子 嵩祐, 嵩祐子 銓 銛 女 林憲, 鄭銓之壻 梁世節, 世節之子 士元 士亨 士義 …….
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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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이씨의 경우를 보면, 각 세대별 부계직계선조를 기준으로 우선 그 자
녀의 계보가 기록된다. 길어야 6대정도에 그치지만 일반적인 자녀보의 형태
를 띠고 있다. 단지 다음대에 기준이 되는 자의 계보는 중첩해서 기록하지 않
는다. 여기서 진양하씨세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부계남성들의 처
에 대한 정보가 이미 더욱 상세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즉, 妻
父의 인적사항만이 아니라 호적에 기록되는 것과 같이 처의 ‘사조’가 모두 적
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간략하기는 하나, 처부로부터 시작하는
자녀 계보가 부록된다. 배우자의 기록과 함께 후대의 족보에서나 볼 수 있는
묘소의 위치가 기록된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이러한 식으로 부계직계선조마다 방계 형제들과 그 배우자의 간략한 자녀
보가 기록되어 고성이씨 부분의 여러 성씨의 가족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고성이씨를 포함하여 네 개의 네트워크가 하나의 족보로 통합되
어 있는 것이다. 다기적인 여러 개의 혼인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가능한 한 그
지역 상층계급의 가족들을 망라하려는 시도가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계보기록은 안동권씨성화보와 같이 하나의 계보에 연결되지 않는 가족들까
지 포함하여 선별적으로 등재하는 데에 유효한 방법이었다.
<그림 7> 진양하씨세보에 등재된 梁世節 가족의 계보 약도
柳京生-(자)柳惠-(여)梁承文-(자)梁荃-(자)梁世節-(자)梁士元-(자)梁秬
-(자)梁士亨
-(자)梁士義
사성강목의 편자인 이로는 진양하씨세보에 외보 회원유씨의 외보인
이씨 계보에 鄭渭의 사위로 나오는 데에 그친다. 그의 부계직계선조들의 계
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령 위에 사성강목의 사례로 든 고성이씨 李
克仁의 처부 金從智의 계보 가운데 梁世節 가족이 진양하씨세보에서 하우
명의 누이 柳京生의 자녀보에 양승문의 손자 가족으로 등재되어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진양하씨세보는 사성강목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았
大東文化硏究 제77집
- 130 -
지만, 각자 필요한 범위에서 중첩되는 네트워크가 선별적으로 등재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조선중기를 전후로 하는 계보형태의 변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476년에 편찬된 안동권씨성화보는 안동권씨
시조 ‘權幸’으로부터 이어지는 하나의 ‘자녀보’로 편성되어 있다. 우선 자녀보
는 부계남성의 ‘子’로 이어질 뿐 아니라 부계여성인 ‘女’로-실은 딸의 남편인
사위로-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중국의 족보와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음은 주
지하는 바이다.16) 중국의 족보는 부계남성으로 단일화되어 장자로 이어지는
직계후손의 배타성과 방계의 형제로 무한히 확대되어가는 개방성이 그 편성
원리라고 할 수 있다.17) 이에 반해 조선왕조시대의 자녀보는 선별적인 등재
로 말미암아 계층적으로 집단화하려는 배타성과 부계남성으로 계보가 단일화
되지 않고 혼인과 더불어 무한히 확대되는 네트워크의 개방성을 편성원리로
한다.18)
안동권씨성화보는 안동권씨 가계 여성들의 혼인관계를 매개로 편찬되었
기 때문에 기준이 된 안동권씨 가계의 남성은 750명에 미치지 못하여 족보에
등재된 전체인원 1만여 명 가운데 7%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19) 성씨
16) 宮嶋博史, 「東洋文化硏究所所藏の朝鮮半島族譜資料について」 明日の東洋學 7, 東
京大 東洋文化硏究所, 2007; 孫炳圭, 「인구사적 측면에서 본 호적과 족보의 자료적 성
격」, 大東文化硏究 46,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4, 79∼110면.
17) Martina Deuchler,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 Council on East Asian Studies, Cambridge, 1992.
18) 안동권씨성화보는 조선왕조 건국과 신분제의 변동으로 인하여 중앙관료들이 고려의 귀
족제도-양반- 붕괴에 대응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사회계층적 재결합을 시도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孫炳圭, 「13∼16세기 호적과 족보의 계보형태와 그 특성」, 대동문화연구
71,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10, 7∼41면 참조).
19) 宮嶋博史, 「安東權氏成化譜를 통해서 본 한국 족보의 구조적 특성」, 대동문화연구
62,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9, 201∼241면; Lee, Sangkuk, & Park, Hyunjoon.
“Marriage, social status, and family succession in the medieval Korea (thirteenth∼
fifteenth centuries)”. Journal of Family History 33, 2008, pp. 123∼138.
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 131 -
를 달리하는 여러 가족들은 족보 편찬을 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선조들
의 계보 정보를 제공하였다. 계보 정보는 父․祖․曾祖라는 부계남성의 계보
만이 아니라 母, 祖母, 外祖母 등의 계보를 포함한다. 이 정보는 두 가문이
혼인과 함께 서로 교환한 중첩된 ‘四祖’ 기록과 부계직계선조들을 자신에 이
르기까지 단선으로 기록해 오던 ‘世系’등을 말한다.20) 이러한 계보정보는 다
른 가계들과의 혼인관계를 찾아 안동권씨 가계에 연결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런데 사성강목과 진양하씨세보는 안동권씨성화보와 같이 중앙을
주무대로 전국적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혼인네트워크가 아니라, 벽지의 한 지
역에 한정된 혼인네트워크를 증명하는 계보라 할 수 있다. 중앙정계는 권력의
부침이 심하여 여러 성씨, 여러 가문이 장기적으로 연대를 유지하기 어려우
나, 향촌사회는 한정된 지역에서 한정된 가문 사이의 장기적인 연대가 가능했
다. 향촌사회에서는 하나의 행정구역에 여러 성씨의 상층계급 가족이 자치조
직을 결성하여 지방관을 보좌하고 그 자문기관을 통해 지방통치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 조직은 현지출신 사이에 혼인한 자들로 한정된 배타적인 조직이었
다. 그들 내부의 ‘通婚圈’을 형성하여 그들 사이의 혼인관계를 지속시키기 위
해 역대 혼인관계를 족보에서 증명하고자 하였다.
1600년경은 통치 권력의 중앙집권화 경향 가운데 지방 세력이 중앙으로부
터 소외되어가고, 여기에 일본의 침략에 대응한 義兵 창립과 항쟁, 주민의 이
동 등을 계기로 지방의 지배질서가 새롭게 재편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중앙
에서 장기적으로 거주하는 가문과의 혼인은 드물어져 지방적 성향을 띠기 시
작하지만 중앙정계와의 연계라는 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왕실 인물과의 혼인을 계기로 하는 계보를 진양하씨세보에서 확인해보
는 것은 당시의 이러한 특징을 확인하는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표 2>의
‘비고’란 참조).21) 진양하씨세보에는 70명에 가까운 왕실 인물이 등재되고
편찬당시 90개의 가족이 관계되어 있다. 그런데 하우명의 자녀보에는 2명의
왕실인물과 하나의 가족밖에 보이지 않는 데에 반해, 특히 金孟廉의 자녀보
에 25명의 왕실인물과 29개의 가족이, 그리고 편자로부터 먼 친척관계인 강시
20) 孫炳圭, 앞의 2010 논문, 7∼41면.
21) ‘왕실인물’이란 宗親府나 敦寧府에 소속된 君, 都正, 正, 守, 令등을 말한다.
大東文化硏究 제7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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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자녀보에도 17명의 왕실인물과 21개의 가족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더구
나 김맹렴의 계보에는 仁祖가, 강시의 계보에는 明宗과 宣祖, 그리고 광해군
이 등재되어 있다. 진양하씨세보에 이들 김맹렴과 강시의 자녀보에 등재된
인물과 가족이 월등히 많이 등재되어 있음은 이미 본 바와 같다. 이것은 왕실
인물의 등재 경향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통혼권을 편자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족보에 모두 표현해내기 위
해서는 계보를 작성하는 다양한 방안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몇 개의 가계
로 분산시켜 여러 개의 계보 기준을 부여함으로써 확대된 네크워크를 하나의
족보에 수용하는 방식이 택해졌다. 딸의 혼인을 매개로 사위의 자녀보를 확보
하는 기존의 족보편찬 방법에 아들의 혼인, 즉 처를 매개로 처가의 자녀보를
확보하는 새로운 방안이 제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1600년 전후의 족보
가 갖는 계보형태상의 특징이다.
그러나 처에 대한 기록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조선건국 이전부
터 호적의 대표자 부부에게 ‘사조’라는 각자의 계보적 연원을 밝히도록 하는
신분제적 기재가 존재했다. 이 기록이 ‘世系’와 같은 단선으로 이어지는 직계
후손 계보와 더불어 안동권씨성화보와 같은 초기의 자녀보를 작성하는 하
나의 근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축적된 호적의 계보 정보에 기초하여 혼인관
계를 연원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안동권씨 부계계보에 연결시켰던 것이다.
1600년 전후에는 여기에 더해 별도의 혼인네트워크를 연결하는 계기로 처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거나 처가의 자녀보가 제시되었다.
1600년 전후의 족보에는 ‘內外譜’의 ‘外’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이 존재한
다. 현전하지 않지만 1606년에 편찬되었다고 하는 安東權氏乙巳譜는 부계
남성(아들)만이 아니라 부계여성(딸=사위)으로 가계가 길게 연결되는 자녀
보라고 한다.22) 그런데 여기서 부계여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外派’라 칭했
다. 물론 사위로부터 이어지는 이러한 계보도 또 하나의 자녀보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계남성의 배우자 집안의 계보를 ‘外譜’라 할 때의 ‘外’와 다르
다는 점이다.
22) 宮嶋博史, 앞의 2009 논문, 201∼241면.
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 133 -
진양하씨세보에서는 이러한 ‘외파’를 부계남성으로 시작하는 ‘子派’에 대
해 ‘女派’라 부르고, 부계남성의 배우자 가계, 즉 처가의 계보를 ‘외보’라 칭하
여 ‘내외보’의 ‘외’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물론 이것도 자녀보다. 처의 정보를
기록하는 족보도 부계남성=‘내’에 대해 ‘외’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사성강
목의 4성 각각의 계보는 편자 부모의 四祖를 계기로 연결되는데, 각 성씨별
계보에는 자녀보와 함께 처의 정보를 기록하여 더 확산될 네트워크의 연결점
을 확보해 두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처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는 17세기 이후
의 족보도 ‘내외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이후 족보에도 아들과 딸 양쪽으로 이어지는 ‘자녀보’ 형태에 기초
하여 처가 족보를 포함하는 ‘내외보’가 지속적으로 편찬되었지만,23) 부계남성
중심의 계보로 단일화되는 족보가 일반화되었다. 처에 대한 정보를 기록함으
로써 딸에 대한 정보를 줄이는 계보형태로 전환이 일어났다. 여러 성씨가 이
러한 부계남성의 계보를 중심으로 하는 족보의 편찬을 분담하게 된 것이다.
그 족보에 그들의 처를 다른 부계남성 중심 계보와의 연결점으로 기록해 두
도록 했다. 부계남성의 계보에 처의 정보가 기록되는 대신에 그 남편은 처가
의 가계에 사위로 등재되는 것이다.
1476년 안동권씨성화보는 선조들의 혼인관계로부터 안동권씨 부계계보
로 연결되는-혹은 연결시킨- 부부들을 한 권의 책자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러
나 후대로 가면서 등재되는 후손이 늘어나고 새롭게 선조대의 계보를 잇는
자들이 첨입되면서 혼인네트워크의 정보량이 방대해졌을 것이다. 안동권씨
성화보에 이어서 같은 자녀보의 형식으로 1605년에 편찬되었다는 안동권씨
을사보는 19책이나 된다. 그러나 반세기 뒤인 1654년에 편찬한 安東權氏甲
午譜는 새로운 여러 부계 계파가 첨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24) 부계남성 중
23) 오히려 ‘외보’는 17세기 이후에나 가능하다고도 한다(成鳳鉉, 「固城李氏 先世外家族譜
와 八高祖圖」, 古文書硏究 24, 한국고문서연구회, 2004). 고성이씨의 先世外家族譜
는 편자의 처가와 부계 및 모계 선대의 여러 집안의 계보를 망라하여 각각의 ‘외보’로 기
록하는 족보이다. 이 외보는 17세기 이후에 이미 편찬된 각 집안의 부계적 족보를 구해서
기록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 ‘외보’가 자녀보 형태라면 1600년 이전에 만들어
진 계보일 가능성도 있다.
24) 安東權氏甲午譜, 1654년 편찬.
大東文化硏究 제77집
- 134 -
심으로 계보를 단일화하는 대신에 그들의 처에 대한 정보를 기록함으로써, 다
시 한권의 책자로 편찬될 수 있었다.
<그림 8> 각 족보의 배우자 기록을 계기로 하는 혼인네트워크의 연결 개념도
Ⅴ. 맺음말; 조선왕조시대 족보의 편찬원리
조선왕조시대의 족보는 신분제의 유동성에서 기인하고 신분적 배타성에
의거하여 동일계층의 사회집단을 결집하려는 의도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족보 편찬에는 네트워크의 개방성에 기인하여 편찬에 참가하는 가계
가 끊임없이 확산되고 교체되는 변화를 겪는다. 말하자면 선별적이고 계층적
인 집단화의 배타성과 혼인과 더불어 무한히 확대되는 네트워크의 개방성이
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원리로 족보가 편찬되었다. 조선왕조시대 족보의 계
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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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보형태와 기재사항이 부계혈연집단의 결집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작용하지
는 않았다는 것이다.
1600년경에 편찬된 족보들은 그 전과 후에 편찬된 족보들의 계보형태와 그
특성이 갖는 연속성과 변화를 동시에 보여준다. 특히 진양하씨세보(만력본)
에서 주목되는 것은 무엇보다 부계여성의 배우자인 사위의 가계에 더해서 부
계남성의 배우자인 처가쪽 계보를 수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외보로 처가의 계
보를 수용하지 못한 주요 선조 몇 명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부계남성 개
인의 정보에 배우자에 관해 기록하는 경우가 있다. 처에 대한 정보는 이미 사성강목과 같은 다른 족보에도 더욱 상세하게 기록된 예가 있다. 이러한
족보는 편찬자 개인의 선조를 중심으로 계보를 선택했지만, 여러 다른 계보
정보를 하나의 족보에 취합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된다.
이전의 족보에는 딸과 사위를 잇는 방법으로 한정된 가족들을 연결하여 하
나의 네트워크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1600년경에는 아들의 계보를 확충하고
사위의 계보를 독립적으
로 설정하며, 여기에 아
들의 처가 계보를 더하여
네트워크의 확산에 대응
했다. 특히 아들과 그의
처를 매개로 네트워크를
잇는 방법이 고안되어
족보편찬에 활용되기 시
작했다. 서로 다른 네트
워크를 ‘링크’시키는 접
점을 ‘노드(node)’라고
한다. 사위로부터 이어지는 ‘女派’의 계보나 처가의 계보인 ‘外譜’를 서로 잇
는 연결점, 즉 족보에서 네트워크 사이를 링크하는 노드는 부부이다. 1600년
경까지의 족보는 딸과 그의 남편이 연결점의 역할을 했으며, 이때부터 그것에
더해 아들과 며느리가 연결점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또한 부부의 혼인으로 링크됨으로써 확산되어 가는 사회네트워크의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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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11.12.30 심사일: 2012.2.17 게재확정일: 2012.2.21
성으로 인하여 족보편찬이 마무리된 뒤에도 ‘追錄’이나 ‘別譜’의 형식으로 끊
임없이 계보가 첨가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족보편찬의 그러한 원리는 17세기
이후의 족보편찬에도 지속적으로 적용되었다. 부계남성의 계보로 단일화되는
경향이 있는 17세기 이후의 일반적인 족보에는 각 부계남성들의 배우자, 처의
기록이 네트워크의 연결점으로 기능했다.
17세기 이후에 편찬되는 족보가 부계남성을 중심으로 그 배우자=처부의
정보를 기록하는 형태로 전환된 이유는 신규 등재자와 가계들의 증가로 인하
여 하나의 책자로 기록할 수 없어 족보편찬을 분담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으
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면 그러한 네트워크의 분담체제를 합의하는 것이 가능
했던 사회시스템의 성격과 인식의 변화는 무엇일까? 17세기 이후 족보에는
배우자-정확히는 妻父-가 기재되고 그녀의 신분에 따라 후손의 등재여부가
달라진다. 통혼권과 신분제 상에서 여성의 위상이 갖는 중요성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문중’의 형성이 강하게 주장되고 있으나 섣불
리 변화를 증명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다. 변화는 네트워크의 확산을
차단하고자 할 때의 상황과 차단하는 방법에 있는 듯한데, 이 문제는 앞으로
의 연구에서 커다란 숙제다.
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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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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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rm and characteristic of pedigree in the
1600's genealogy of Joseon Dynasty
― focusing on the Chinyang Hassi Genealogy (Mallyŏ
edition)made in 1606
Son, Byung-giu
The genealogy of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derived from the
mobility of a caste system, was compiled in order to unite the social group
that had the same status according to status exclusionism. However, on the
other hand, the compilation of the genealogy was also derived from the
openness of their network, which caused lineage inclusion that continuously
spread and replaced existing networks. In other words, the genealogy was
compiled by two different principles, the selective and hierarchical
collectivization's exclusion and the infinitely expanding network's openness
through marriage. Therefore, the pedigree' form and the items recorded not
only had the effect of reinforcing the paternal descent group.
The genealogies which were compiled around 1600 show the continuity
and change in the same time, compared to the genealogy before and after
that. In particular, among the compilation of ancestors in the Chinyang
Hassi Genealogy (Mallyŏ edition) ‘晉陽河氏世譜(萬曆本)’, the lineage
started from paternal males was called Japa ‘子派’, the lineage started
from the son-in-law of paternal females was called Yŏpa ‘女派’, and the
spouse of the paternal males are called Oebo ‘外譜’. The genealogies
before this which includes both son and daughter's lineage are called
Janyŏbo ‘子女譜’. This genealogy fundamentally not only maintains the
form of previous Janyŏbo ‘子女譜’, but also sets up several networks like
Japa ‘子派’, Yŏpa ‘女派’, and even includes the marrige network of lineal
大東文化硏究 제77집
- 140 -
K e y W o rd s : Chinyang Hassi Genealogy, Janyŏbo, Oebo, marriage network, node
ancestor's wife, and link these networks with marriage.
The point that links the different networks is called a node. Like the
node link the Yŏpa ‘女派’lineage which started from the son-in-law and the
Oebo ‘外譜’lineage of the wife, the node link the network in the genealogy
is the couple. In the previous geneology, daughter and her husband works
as node, and from 1600 son and his wife became the node too.
The link through marriage makes the social network's openness spread,
even after the compilation of the genealogy, the lineages are included
through Ch’urok ‘追錄’ or Pyŏlbo ‘別譜’. And the principle of genealogy
is continuously applied after the 17th century. The genealogy which has an
unification trend of paternal line after the 17th century, the record of
paternal males' wife's side functions as a node of 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