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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22
창세기 47:18-31
애굽에 거하는 이스라엘(2)
17절에서 “요셉이 그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되 곧 그 모든 가축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니라”라고 말씀하였는데 “그 해”의 ‘샤네’는 ‘샤나’(접다, 이중으로 하다, 변경시키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해, 년’이라는 뜻이다. 요셉을 통해 주어지는 양식으로 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말씀으로 보여 주고자 하는 어떤 상태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18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 19 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18-19절). “새 해”의 “새”는 ‘셰니’는 ‘두 번째, 다시, 이중의, 다른’이라는 뜻이다. 언약적 의미에서 중첩하여 보여 주고자 하는 어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라는 표현은 단순히 일 년이 지났다는 말이 아니라 요셉이 주는 양식으로 말미암아 겉 사람이 말씀을 먹어 새 사람이 되는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자신의 몸까지도 바로의 소유가 되는 것으로 말씀한다. 그래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19절)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왕에게 귀속되어 요셉을 통해 주어지는 하늘 양식을 먹는 상태를 반복하여 보여 준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몸과 토지뿐이라”(18절)라고 하였는데 몸은 땅적 존재로서 몸과 토지를 동격의 의미로 나타낸다. “먹을 것”(19절)이라고 번역한 ‘레헴’은 ‘빵, 떡, 음식’이라는 뜻으로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19절)라는 표현은 요셉을 통해 주어지는 진리의 말씀으로 세워달라는 것이다. 그 ‘레헴’이라는 진리의 말씀은 “종자”(19절), 곧 ‘제라’(후손, 씨, 자손)라고 밝히고 있는데 한 분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갈 3:16). 그렇다면 요셉을 통해 주어지는 양식은 언약의 말씀이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주어져야 살아 있는 상태이고 그 해가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새 해”(18절)이다. 하나님은 없음의 상태로 만드시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몰아가심으로 죄인이 얻는 것이 구원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20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21 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22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20-22절).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죄인이 자신의 모든 것이 빼앗기고 죽음에 이르러 그 모든 소유가 바로의 소유가 되는 이 상태가 진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는 하나님 왕국의 실상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모든 것을 팔았지만 본질은 진리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셉은 모든 것을 팔아버린 백성들에게 양식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곡식을 저장해 둔 성읍에서 살게 하였다. 한마디로 죽음을 경험한 요셉을 통해 강을 건너오게 된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 생명 역시 죽음을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단순히 예수 믿는다는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날마다 죽음으로 동참되는 것만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빼앗겨 죽음의 상태가 되어 진리를 얻도록 하시는 성령님의 일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22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제사장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애굽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것에 집중하신 것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들에게 계시를 주시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 불러들이신 것은 제사장 나라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이를 위하여 제사장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 주신다. 이런 점에서 “녹”이라고 번역한 ‘호크’는 ‘규정, 계명, 율법, 법령, 관습, 의무’라는 뜻이다. 즉 제사장이 받는 녹은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않았다는 것은 본래 말씀을 가지고 있음으로 그 자체가 바로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4-6)
율법에 잘 순종하면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조건이 아니라 4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미 애굽에서 건져내셨기에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언약을 품고 있는 상태로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제사장의 이런 모습을 통해 온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참고 벧전 2:9).
“23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23-24절). 요셉은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라고 말한다. 이는 백성들이 바로의 종이 됨으로 이제부터는 주인이 주는 양식만 먹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피로 사서 아버지께 드리신 것과 같다(계 1:5-6).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23절)라는 말씀은 이제 땅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곳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기근이란 씨를 뿌려도 수확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제까지 열매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힘과 노력, 가치관, 세상의 것을 심어 얻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땅은 요셉의 소유가 되었기에 그 땅에서는 요셉이 주는 씨를 통해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24절) 한다는 것은 수적으로 물량적인 것의 오분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미쉬’는 ‘다섯째’라는 뜻이다. 즉 다섯의 다섯째 것, 즉 마지막 모든 것까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로의 성읍에 들어온 자들은 이렇게 얻은 수확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율법적인 모든 것까지도 자신의 것이 아닌 주인의 것으로 드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결국 율법을 문자로 읽었다고 율법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진리의 말씀으로 확인하는 곳이 하나님 왕국이다. 그러므로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24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아르바’는 ‘라바’(사면으로 되어 있다, 네모반듯하다, 정사각형)에서 유래한 단어로 다섯 개 중의 네 개가 아니라 ‘넷, 사면, 네모진’이라는 뜻이다. 성막의 지성소와 제단은 네모반듯하다(출 27:1, 왕상 6:19-20, 겔 43:16).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의 처소 곧 하나님 왕국의 상태를 보여 준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계 21:16)
“25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25-26절). 요셉은 “애굽의 토지법”을 세웠고 백성들은 그 법의 다스림을 받는다. 이 말씀 역시 단순히 애굽을 이렇게 다스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내어 율법을 주심으로 이스라엘이 언약 가운데 있음을 확인시키고자 하시는 것이다.
“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28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29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31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27-31절).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라는 표현은 진리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창조 언약에서 보여 주신 말씀이 야곱 언약 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나타낸다(창 1:28). 이것은 야곱의 죽음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28절)라고 ‘130’에 ‘10’과 ‘7’을 더하여 야곱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이루신 일로 말씀한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29절)라고 말한다. 즉 요셉을 통해 언약을 성취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 것이다. 이에 요셉도 그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한다는 차원에서 손을 야곱의 “허벅지 아래에 넣고”(29절) 맹세한다. “허벅지”의 ‘야레크’는 ‘넓적다리, 허리, 몸, 환도뼈, 옆구리, 산출하는 생식기’라는 뜻인데 힘과 생명이 나오는 것을 상징한다(창 46:26, 시 45:3). 즉 야곱을 통해 나타난 후손이 생명이라는 의미를 담고 그 후손으로 완성되는 언약을 확인한다는 의미이다.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29절),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30절)라고 야곱은 신신당부한다. 이는 단순히 애굽에 묻히기 싫다는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육의 야곱이 죽었으니 이스라엘로서 반드시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한다는 언약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현재 장자의 역할을 하는 자는 요셉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31절)라고 하였는데 ‘이스라엘 알 로쉬 하밋타’는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 위로, 침상 머리에 대하여 경배하였다’라는 말이다. 이 말씀을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그의 지팡이 머리를 향하여, 그의 지팡이를 위하여 경배하였으며’라는 말이다. 야곱의 지팡이는 늙어서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 환도뼈가 부러진 것 때문이다. 이후 야곱은 항상 지팡이보다 한발 늦게 나아가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지팡이는 야곱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언약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성도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께 이끌려가는 존재이다(2025060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