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에 이연규권사님의 시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경북김천 장례식장에 다녀왔습니다. 갔다가 오는 동안에 차 안에서 박수를 치자며 어떤 박수가 어디에 좋은가를 물어보며 손가락 박수와 합장 박수, 손목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장례식장을 다녀오며 박수를 치는 것은 건강하게 오래 살겠다는 의지가 숨어져 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런가하면 제가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마침 옆에 형조청년회장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물을 마셔야 건강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덕분에 웃었습니다. 먼저 감사하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는데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을 해 주어서 말입니다.
매 순간 감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지를 가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음에 새기고 또 생각하고 입으로 고백 한다면 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며칠 전 금요일에 사건 하나는 먼저 감사하자고 한 그 말씀에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도 대부분 보셨을 것입니다.
연합뉴스에 실린 제목입니다. 시리아 어린이들 하루 평균 7명씩 죽어…사망어린이 1만명 넘어
이런 제목에 주인공은 3살에 쿠르디 아일란입니다.
쿠르디는 2일 새벽 6시 터키 휴양지 보드럼 해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그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IS)의 위협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시리아 북부에서 터키로 탈출해 소형보트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로 가려했지만, 배가 전복돼 엄마(35), 형 갈립(5)과 함께 숨졌습니다. 이 아이는 죽어서야 가려고 했던 터키에 도착한 것입니다.
쿠르디 아일란의 시신은 전 세계를 울렸습니다. 난민에 대해서 인색했던 영국이 더 많은 난민을 받겠다고 하였으며 쿠르디의 이름을 따 개설된 모금펀드에는 하루 만에 473명이 3천만원 정도를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먼저 이일을 보며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맴돕니다.
터키 경찰이 3살 된 아이의 시체를 안고 바닷가에서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분노가 몸 안쪽에서 치밀어 오르는데 말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속상함과 안타까움과 아픔이 베어 나오는데 먼저 감사합니다. 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아 예 저희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일이 있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우리나라는 극단주의 이슬람 단체의 위협이 없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익명의 기부자의 글을 기부자는 올려놓았는데 그는 감사의 의미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부하며 글을 남겼습니다.
익명의 기부자는 "아일란, 너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냈단다. 너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게 했어. 이제 편히 쉬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익명의 기부자의 글이 더욱 화를 돋우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욥에게 시련이 닥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하고 의로우며 사랑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엄청난 재앙이 닥쳤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일을 성경을 통해서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스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소와 나귀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늘에서는 불이 떨어져 양과 종들을 살랐습니다. 그리고 갈대아 사람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나타나 낙타를 빼앗고 종들을 죽였으며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집 네 모퉁이를 쳐서 주인의 자녀들이 한꺼번에 다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자 욥의 아내가 그의 남편에게 보인 반응입니다.
욥 2: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훨씬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욥의 아내가 더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용기 있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인간적이고 솔직하며 용기 있는 여인임에는 틀림없지만 욥의 말처럼 어리석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욥의 아내는 자신의 삶의 자리를 보고 이야기 한 것이고 욥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감사하자고 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을 것이라 믿고 문제를 바라보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보거나 나의 환경이나 나의 원하는 바람을 본다면 감사는 결과에 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다면 먼저 감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것입니다.
결국 성경을 믿는 우리에게 욥의 아내가 틀렸고 결국 욥이 옳았다는 것을 욥기의 결말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감사하는 일이 자신의 일에 머물러 있다면 오히려 더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회에 공통적인 문제를 바라 볼 때 감사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014년4월16일에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배는 건지지 못했으며 아직도 9구의 시신을 찾지 못했고 그 가족들은 가정과 일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진도 앞바다 쪽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이야기가 잊어질까봐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탑승객은 476명 이었고 172명이 구조되었으며 295명이 사망했습니다. 대부분 안산에 학생들이어서 온 국민이 아파하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합니까? 내 자식이 그 배를 타지 않아서 나는 전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까?
감사가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그 감사는 어쩌면 거짓이며 부적과 같은 것일 것입니다. 설교가 꼭 무엇인가 답을 줘야 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설교가 선포되어 스스로 답을 얻기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의 이야기 앞에 “감사합시다.” 라고 이야기하기에 머뭇거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기에 감사해야 합니다. 꼭 동의하지 않아도 됩니다. 때로 우리는 전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어떤 일들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일은 기억 속에서 떨쳐 버리고 싶습니다. 그 일들이 바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나에게 전해져서 알게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감방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것입니다.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자신들에게 벌어진 것입니다. 두 사람은 다 로마의 시민권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자신들을 방어할 아무런 권리를 사용해 보지 못하고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져 지하 감방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한 일은 감사의 찬양이었습니다. 그 감사의 찬양은 옥문을 열게 하고 기적이 나타나 오히려 그를 지키던 간수장의 가족들이 다 세례를 받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에 우리에게 전해지는 일들 앞에서 먼저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진실한 마음을 실어서 말입니다.
며칠 전에 전에 섬기던 제자가 전화가 왔습니다. 이 제자는 의료사고로 몸이 망가졌고 그리고 오랜 재판을 통해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법원의 판결이 남았지만 그 제자를 변호했던 변호사는 더 이상의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병원에서 걸어 놓은 공탁금을 찾으라고 해서 그 돈을 찾아 필리핀의 유치원을 세우는데 사용해 달라고 1500만원을 사용해 달라고 가져 왔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은 아산 쪽에 땅을 사서 거기에 은퇴하는 목사님이나 선교사님들이 잠시 쉴 수 있는 주택을 짓고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빚을 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 제자가 대법원에서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며칠 동안은 심란했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제자에게 먼저 감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감사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절대적이지 않고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그가 일하시고 계심을 믿는다면 감사가 넘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저녁에 울음이 깃들었지만 아침이면 기쁨이 올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녁에 울음이 깃들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캄캄할 정도로 앞이 보이지 않는 다는 의미입니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고 보면 놀랍게도 모든 일들이 풀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삶의 고백입니다. 그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당장에 죽을 만한 일들이 캄캄하게 펼쳐 져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은 기쁨으로 그 일이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그 어둠의 정체는 하나님의 노염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여움보다 더한 은총이 하나님에게 있는데 그것은 영원하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삶이 나락에 빠지고 나라가 어려움에 빠지고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그에게 찾아와도 그 문제의 답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너무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너희들은 하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뒤를 돌아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어떤 것이 발견되어집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셨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한 놀라운 고백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대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123층 롯데 건물을 보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주를 날아가고 또 달을 촬영하고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는 인간의 그 대단함을 생각하면 전율이 흐릅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길에 떨어져 나뒹구는 돌 하나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둠을 무슨 수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감사하는 이들에게는 나에게 찾아오는 어둠은 하나님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그러므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구구단을 외울 때 2단은 쉬워 보이는데 9단은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알고 보니 9단은 매우 쉬운 것이었습니다. 2*9=18이었습니다. 9*2역시 18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구구단이 앞에서 외우는 것이 힘들면 뒤로 계산을 해 보면 그 답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4*7이 어려우면 7*4로 해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래도 감사를 해야 하는 이유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문제라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에게는 쉬운 문제이며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감당하기 힘들며 납득하기 어렵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거기에 감사할 일들이 넘친다는 사실입니다.
내 인생을 감사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내 순간들을 감사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어둔 현실을 감사로 찬양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감사가 옳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 알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