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뒤늦게 퇴근한 후 무얼할까 생각하다 며칠전 서예전문지 <묵가(墨家)>에서 본 하석 선생 전시가 생각나 젊어서부터 서예 및 미술 감상활동을 함께 한 양헌 형에게 전화를 하니 바로 서예박물관 있다한다. 서둘러 나가 버스를 기다리니 왜 그리 오지 않는지...
난 하석 박원규 선생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서예애호가로서 먼발치서 우연히 사진을 통해 본 얼굴로 그분이리라 추측했을 뿐으로, 신문이나 잡지, 작품집을 통해 또는 서단의 풍문으로 그분의 동정과 작품 경향을 보고, 들으며 알았을 뿐이다. 워낙 작품이 일반 작가들에 비해 개성적이어서 그저 한 서예 애호인으로써 선생의 작품경향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았다. 또 최근엔 재작년까지 선생이 주재한 <까마>란 잡지를 통해서 선생의 폭넓은 연구와 서예관을 읽고 배울 수 있었다.
(내 나이 많다한들 게 무엇이 많을손가 두 스물 홑다섯 열다섯 뿐이로쇠 규)
하석 박원규 선생의 이름을 처음 대한건 제1회 동아미전 때였다. 1979년 인맥과 부조리로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국전을 탈피하여 새로운 민전(民展)시대를 열어 서예의 발전을 선도한다는 뜻에서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친다는 사고(社告)부터가 신선하였다. 소위 국전규격이란 화선지 한 장 반정도 큰 규모의 3작품을 서체를 달리하여 출품해야 하는 까다로운 출품 요강이다. 그리고 서예 분야도 서부(書部), 전각부(篆刻部), 문인화부(文人畵部) 등 3부분으로 나누어 여러 단계의 검증방법과 청신한 선발방법 때문인지 뜻있는 서학도들과 다른 공모전에서 검증을 받은 중견 서예인들도 많이들 도전하였다. 그 때 서부(書部)의 최우수상을 중국 위(魏)나라 서예가 종요(鍾繇)의 작품인 천계직표(薦季直表)를 임서하여 출품한 바로 하석 박원규선생이 수상하였다.
그 때 전시장인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에서 국전규격보다 상당히 큰 어마어마한(?) 규격의 작품을 경이롭게 본 기억이 선명하다. 후일담으로 임서작품을 대상으로 선정했다해서 이야기들이 돌은 것도 같다. 또 《천계직표》는 계직이라는 인물을 종요가 문제(文帝)에게 추천한 상표문(上表文)으로 왕희지에 선행하는 고체(古體)의 해서로 씌어 있는데 후세의 위작(僞作)이라는 설도 있어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었다는 후일담을 듣기도 했다. 그 때 나는 열화당에서 나온 복견충경(伏見沖敬)이란 일본인이 쓰고 석지현 님이 번역한 <서예의 역사>란 문고본 책을 통해 서예사에서 종요(鐘繇, 151~230)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고 이론서가 많지 않던 그 시절 그 책을 통해 <서예사>의 갈증을 풀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선지 그분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아마 말 많던 공모전엔 아예 눈을 돌리지 않고 대만으로 건너가 서예의 본고장 자유중국 대만에서 홀로 내공을 다지며 본격적인 서예 수련을 받던 유학시절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몇 년 후 대형서점 서예부를 기웃거려보니 그분의 작품집이 발견되어 들춰보니 일반적인 서체라기엔 다른 색다른 서풍의 서체를 선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하석 선생은 공부한 내용을 개인전 대신 자신이 연구하고 도전한 새로운 서풍을 작품집을 통해 발표하였다. 그 후 후진들을 양성하는 교육 방식에서 아주 철저한 지도방식이 회자되기도 하였다. 그 만큼 서예의 기초부터 철저한 지도를 하기 때문에 그분이 주도한 그룹전이 주목을 받고 공모전에서도 상당한 인정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래선지 서예에 목표를 둔 유능한 젊은 인재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다며 서단의 괴짜이면서도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집요하게 서예 한 분야에 파고들고 있다는 내심 시샘어린 이야기 속에 선생을 존경하는 의미가 담겨진 말을 듣곤 했다.
(四時春 : 四鶴時紹春硏會 余之六十 初度日 于昨非書庠合作之 何石 題 맞는지요?)
이론에 목마른 서예 애호가들은 일본의 책을 베껴 출판한 법첩과 원서로 갈증을 풀기도 한 7~80년대엔 서단의 소식지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서단에 구태의연한 편집의 잡지들이 창간되다 얼마 안 있어 사라지곤 했다. 열악한 서단에 지원을 받을 형편도 없는 힘든 상황에서 90년대 말 선생은 월간지 <까마>를 창간하여 기존에 보지 못하던 시대 감각에 맞는 전문잡지로서 위상을 제고하며 서예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의 생활화로 서예가 차츰 대중의 인기에서 멀어지려할 때 서예를 필요로 하는 분야에 눈을 돌려 과감히 도전하여 디자인, 상업 광고 등에 접목하는 모습도 멋지게 보였다.
(현대 한국서단을 이끌어 가는 작가들)
지난해 우리 현대 한국 서단을 역동적으로 이끄는 세분의 서예가들이 의기투합 그 제자들이 한자리에 작품을 모아 삼문전(三門展)이란 전시가 있었으나 난 깜박 그 전시를 놓치고 말았다. 그 전시의 연장선상으로 올해 하석 선생의 주갑(周甲)을 맞는 큰 전시가 기획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꼭 현장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다 마침 전시가 열리고 있는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을 지난 토요일 찾은 것이다.
(壽 連作 : 대만 작가들의 작품인듯)
박물관 기획 전시인 추사 김정희 전에 이어 열리는 그의 야심적인 전시라는 건 박물관외벽에 내건 프랑카드에서 엿볼 수 있었다. 전시장엔 가늠하기도 어려운 큰 작품에서부터 각종 사진을 엮어 모자이크를 여러개 제작하여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면과 전시장 벽에 대형 걸개작품을 걸어 지금까지 선생이 걸어온 서활동의 질과 폭을 가늠할 수 있었다.
(敬頌 何石 朴元圭 先生 壽安 2007년 崔惇相 拜)
우선 하석 선생 및 문하생들의 단체인 겸수회의 작품을 연배별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등 5팀으로 나누어 전시했고 국내에선 광주에서 활동하는 학정 이돈흥 선생 및 문하생, 서울의 소헌 정도준 선생및 문하생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였다. 또한 대만에서 활동하는 연농 두충고 선생과 문하생들인 일지서학회원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하여 국제전의 형식을 띄어 오늘날 우리의 현대 서예 뿐 아니라 대만의 서활동도 엿볼 수 있는 전시이기도 하였다.
또 하석선생의 작품만을 따로 모아 전시한 작품중에 <서벽(書癖)>이란 서제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 바로 선생 자신의 모습을 대변한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참을 눈여겨 보았다. 그렇다! 우리 시대에 그처럼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작품 앞에 선 분이 몇이나 될까? 많은 선배, 동료, 후배들과 문하생들이 작품 후기에 선생에게 바치는 헌사에 깊은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는 글을 대하며 모처럼 따뜻한 서단의 일면을 보는듯 하여 흐뭇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丁亥 正月 何石 吾師의 周甲大慶에 老師의 한글서체를 본받아써 보았습니다...김두경)
내가 하석 선생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그 분의 현대적인 서예의 실험 뒤에는 우리의 전통적인 인문학적인 뿌리가 깊이 내재하고 있다고 믿기때문이다. 또한 서예의 좁은 틀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서예 속에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투영하려는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을 작품에서 읽기 때문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겸사처럼 이제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제2의 서활동을 펼칠 하석 선생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선생의 주갑을 기화로 우리 서단의 기라성같은 작가들의 주옥같은 작품으로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 하석 선생께 감사드리며 건강과 행운이 가득하길 빈다.
(하석 선생과 연분이 있는 분들과의 사진 모자이크 걸개사진)
(天祥雲集 華甲을 맞이하신 존경하는 하석 선생님...)
첫댓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보았습니다 늘 좋은날 되십시요...
지향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십시오.
덕분에 가 보고 싶었지만 못본 전시작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종종 서울 전시소식 감상할 기회 주세요. 이번 답사여행에도 함께 하시면 좋겠네요. 茂林님
종종 감상기를 올려 보겠습니다. 예원님 이번 답사에 참석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즐거운 감상입니다..
좀 지난 전시였지만 그 여운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눈이 확 트이는군요
하석 선생은 서예계를 앞에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시는 분이랄까요... 감사합니다.
저도 시야가 확~~~~~~~~! 트이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올 2월에 있었던 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