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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가모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날카로운 양날 가진 칼을 가지신 분이 이 일들을 말씀하시느니라(계 2:12).
이 계시록 강해 시리즈의 제목을 "초신자를 위한.."으로 시작하도록 잡았고 그것은 달리 떠오르는 제목이 없어서 그렇게 달았기는 한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유가 있는 듯 싶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소한의 영적 감각만 있다면 누구나 동감할 수 있는 주석을 하자는 취지로 이번 강해를 하고 있는데 과연 그 의도가 얼마나 잘 반영된 글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쉽게 써 보려고 한다.
퍼가모 교회에 대한 말씀을 다루기에 앞서 이 교회의 위치를 알아볼 필요가 있어서 지도를 삽입한다.
내가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은 아니라 몇 안 되는 해외 여행의 경험들 중에 가장 의미 깊었던 여행지가 터키였다. 그 여행은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이었다. 여행 코스에 마침 에베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성경에도 나오는 그 에베소의 유적을 돌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다른 헬레니즘 시대, 로마 시대 도시 유적들처럼 경기장이 있고 도서관, 목욕탕, 그런 건물들의 자리에 대부분 대리적 조각들만 즐비하게 남아서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다소 쓸쓸한 모습이었다.
퍼가모도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일 거라 여겨지는데 이 도시에 대한 언급은 오직 요한계시록에만 나오며 역사적인 퍼가모에 대한 지식을 배제하고 철저히 성경적으로만 고찰하자면 이 도시는 사치와 향락, 퇴폐가 흐르는 도시였던 성 싶다. 가장 비근한 자매 도시가 서양에서는 폼페이가 되겠고 근동 지역에는 바빌론, 혹은 소돔과 고모라 정도가 될 것이다.
그 도시들의 공통된 특성은 사치, 나태, 그리고 인간들이 풍족함 가운데 살 때 잘 빠지는 성적인 타락, 곧 동성애라던지 신전 창녀 같은 행태이다. 퍼가모는 교회사적으로 볼때 배교가 시작된 장소, 순수한 기독교가 상업적 기독교로 변질되기 시작한 그 지점을 말할 것이다.
내가 너의 행위와 네가 거하는 곳을 아노니, 곧 그곳은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네가 나의 이름을 굳게 붙들어서 심지어는 나의 신실한 순교자 안티파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하던 그 날들에도 나의 믿음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여기에서 해석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단어는 "사탄의 자리"라는 용어인데 이 부분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해석은 현재까지 없다. 럭크만 박사는 이것이 바빌론 신비 종교가 로마에 도착하기 전까지 퍼가모라는 도시를 거점으로 삼아 머물렀던 증거라고 하고 있는데 그 도시에서 실제 사탄 숭배가 널리 행해졌는지 내가 연구해서 검증한 것이 없어서 뭐라고 할수는 없겠다. 어쨌건 럭크만 박사가 그리 말한 부분이 근거있게 한 말이라 생각하고 그 역사적 해석은 나도 수용을 한다. 다만, 역사적으로 그랬다 하더라도 교리적, 예언적 의미는 별개이기에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리"(seat)라는 것은 통치자의 보좌와 같은 말인데 재판관이나 제사장처럼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앉는 자리를 뜻할 경우도 있다.
말씀하시기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마 23:2).
다섯째 천사가 자기 호리병을 짐승의 자리에 쏟으니, 그의 왕국이 흑암에 싸이며 그들이 고통으로 인하여 자기 혀를 깨물고(계 16:10).
특히 계 16:10에 나오는 "짐승의 자리"는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보좌를 말하는 것으로서 후3년 반 때 그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의 자비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했던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 있는 것을 볼 때면 (읽는 자는 깨달으라.)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막 13:14).
그렇다면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사탄의 자리"와 "짐승의 자리"가 같은 자리인가, 다른가 하는 부분인데 이것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봐야 하는가?
우선 계 2:12의 맥락, 계 16:10의 맥락이 같은지 다른지 알 필요가 있는데 계 2:12의 경우 지나간 교회사를 언급하면서 미래의 환란 시대도 같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환란 시대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퍼가모 교회는 적그리스도가 활동하는 시대에 존재하고 있는 지역 교회이다. 그리고 퍼가모라는 도시를 문자 그대로 그 도시로 본다면 사탄의 자리는 실제 거기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우주를 뒤덮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큰 붉은 용 사탄이 그 형태 그대로 퍼가모에 내려 앉는다는 것은 아니고 어떤 다른 형태를 취하여 올 것이고 이를테면 천사나 사람의 모양을 하고 나타나서 퍼가모에 자리잡을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맞겠다. 그렇다면 사탄이 형상화된 존재는 다름아닌 적그리스도 그 자체라는 얘기다. 적그리스도가 퍼가모에 나타날 것이고 거기에 자기 보좌를 정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된다.
전3년 반 때 적그리스도는 바티칸이 있는 로마 도성에 자신의 세계 제국 수도를 정하고 머물 것이다. 그래서 그 시절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죄의 사람'이다.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살후 2:3).
죄의 사람이라는 이름은 역대 교황들에게 붙었던 별칭인데 종교 개혁자들은 계시록에서 발견한 이 단어가 로마 교황 체제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교황들에게 이런 별명을 지어 준 것이다. 그것이 우연처럼 보였지만 사실 실제로 적그리스도가 처음 등장할 때 교황으로 올 것이므로 예언적 의미가 있는 별명이라 하겠다.
역사적으로 교황권이 로마에서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을 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하면서 그 도성이 권력 공백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이후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가 문을 닫을 때까지 서로마 황제들은 동로마에 비해 권력이 취약했기 때문에 종교의 힘을 빌어서 제국을 안정시키려고 했고 그 와중에 로마 카톨릭이 권세를 얻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속 황제를 대신해서 로마 교황이 백성의 종교 뿐 아니라 정치에까지 개입하기 시작했고 그 현상은 암흑시대에 이르기까지 점점 확대 일로를 걸었다.
지금도 이스탄불(과거의 비잔티움)은 동서 문물의 교류 현장이자 동로마의 유산을 남겨둔 중요한 국제 도시인데 동로마가 이슬람의 군사력에 밀려서 후퇴를 거듭할 때에도 퍼가모를 포함한 에게해 연안 도시들은 끝까지 사수하려고 애썼다. 이곳은 실크로드가 유럽까지 오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이기에 상업적으로 꼭 유지해야 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기 이름을 딴 그 도시를 건설할 때 그의 심산은 어떠했던가? 그는 제국을 동과 서로 영원히 분단시키겠다는 의도로 그곳에 수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 모두를 장악할 수 있는 동서 교류의 "감제 고지"(내려다 볼 수 있는 관측 지점)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콘스탄틴의 주안점은 아무래도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치중하고 있었기에 보스포러스 해협 건너 아시아쪽에 수도를 정하지 않고 유럽 쪽에 도시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콘스탄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아시아쪽에 자기 보좌를 옮겨놓을 것이다. 그가 전3년 반 중 언제 그렇게 할지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여기 12절에서 말씀하는 "사탄의 자리"가 예언적, 문자적 성취가 된다고 할때 그리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는 점은 안다.
확실한 것은 적그리스도는 럭크만 박사의 기존 해석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전3년 반 동안 주로 로마에서 통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3년 반 중 이미 예루살렘 쪽으로 자리를 옮길 마음이 있으며 그래서 소아시아에 교두보를 만들기 시작할 것이고 퍼가모는 그런 용도로서 의미가 있다.
로마는 종교적, 정치적으로 세계를 지배해 왔으며 서양 문물은 대부분 로마와 그리스에서 기인했는데 그리스는 주로 학문적, 철학적 영역을 담당하고 로마는 문화, 예술, 특히 종교 영역을 담당, 지배하고 있는 구도이다. 그러나 로마가 가진 약점도 있어서 이 도성은 "오리지널"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게 없고 좋은 것은 대부분 근동에서 수입하고 베껴온 약점이 있는 것이다. 로마가 그리스에서 가져온 헬레니즘 철학조차도 솔로몬의 잠언에서 나온 것이기에 사실 로마는 성경에서 베낀 것 말고 자신의 것이 없다. 그래서 역대 교황들도 로마에서 온갖 사치와 권세를 다 누리면서도 뭔가가 빠져 있다, 뭔가가 더 필요하다는 욕구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눈길을 돌렸던 것이다. 결국 십자군 원정들을 통해 예루살렘을 지배하려는 그들의 욕구를 전쟁으로 표출시켰고 그 전쟁은 이슬람과 카톨릭이라는 종교가 싸운 종교 전쟁으로 남았지만 실상은 사탄이 이 세상에 수립할 최종 왕국, 종교적 로마 제국의 완성된 형태가 예루살렘에서 성취될 것임을 역사가 미리 보여준 것이다.
사탄이 예루살렘을 장악하기 위해 그의 화신 적그리스도를 써서 벌일 치명적인 기습 공격, 6일 전쟁보다 더 신속하게 결말을 맺게 될 그 전쟁에 관해 알려면, 주님의 올리브산 설교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전개될지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리니, (읽는 자는 깨달으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마 24:15-16).
어떤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자기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로 들어와 예루살렘 성전까지 진입해서 그곳 지성소에 멸망의 가증한 것, 곧 자기 형상을 세우게 한다. 유대인들은 사태가 그렇게 될때까지 먼산 바라기 하며 지켜볼 것인가? 유대인들이 얼마나 짓고 싶어했던 예루살렘 성전인데 그렇게 허술하게 빼앗기겠는가, 적그리스도의 갑작스런 예루살렘행은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지는 기습 침공을 연상케 한다.
흔히 전쟁을 연구하고 준비하는 군사전략가들은 "워 게임"이라는 것을 통해 계속해서 적을 연구하고 가상으로 전장 상황을 분석하여 미래에 있을 전쟁을 대비한다. 북한도 대한민국을 침공, 정복하기 위해 근래에 공개되었듯이 청와대와 서울의 주요 시설들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고 어떻게 공격하고 차지할지 연습하고 있으며 동일한 연습은 한국과 미국도 북한을 상대로 하고 있다. 전쟁을 염두에 둔 적성 국가들 사이에서는 항상 벌어지는 현상이기에 특별할 것은 없다. 그런데 적그리스도가 정복해야 하는 나라는 그처럼 작은 영토를 가진 나라 중에서 가장 밀집된 군사력을 보유한 강소국 이스라엘이다. 이 나라는 기습에 능한 여호수아식 전법을 구사하는(아이성 공격 때를 보라) 전략 전술의 대가들이 있는 나라다. 어떤 나라도 기습을 통해 현대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것은 다 실패해 왔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그것을 시도할 것이며 또 최초로 성공할 것이다.
그래서 내 생각은 이렇다. 적그리스도는 "퍼가모"를 예행 연습지로 삼아서 이스라엘 상대의 '워 게임 연습'을 벌이는 게 아닌가 한다. 그곳에 "사탄의 자리"가 있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세울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기 세워져 있다는 뜻도 되며 그곳에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어떻게 차지할지 미리 연구하는 것일 수 있다. 죄의 사람이 멸망의 아들로 등극하기 전에 하는 리허설이라 볼 수 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전수받던 40일 동안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신을 섬기면서 영적, 육적으로 타락하고 있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이 상황을 방치하면 이 민족에게 치명적인 결과가 올 것임을 직감하고 두 가지 행동을 취했다. 하나는 십계명 돌판을 깨 버림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백성에게 곧바로 떨어지는 것을 막았고 둘째로 음행과 우상숭배에 참여한 자들을 모두 척살하도록 지시했다. 그 상황이 본문과 오버랩되는 이유는 대환란 때 등장할 두 증인 중 하나가 모세이기 때문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계 2장의 상황은 민수기 25장과 연결되는데 거기서 모세는 발라암의 계략을 통해 이스라엘이 모압인들과 부정한 성적 결합, 곧 잡혼을 하고 우상 숭배에 빠져드는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모세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각기 바알프올에게 가담하였던 자기 남자들을 죽이라.” 하니라(민 25:5).
모세의 방식은 가차없이 그 일에 가담한 자들을 칼로 쳐 죽이는 것이었다. 모세가 그런 지시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단지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 역할 정도가 아닌 여수룬의 왕이었기 때문이다(신 33:5).
7년 환란 때 그 시대의 상황은 모세 때와 같게 된다. 또는 롯의 때와도 같은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이 타락하여 소돔처럼 되기 때문이다. 이미 개전의 여지가 없이 타락해 버린 자들을 징벌하는 모세의 처방은 "그들을 모두 죽여라"(Kill them all)이다. 그래서 모세가 두 증인으로 등장할 때 타락한 죄인들은 벌벌 떠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존 여러 글에서 밝혀 왔다시피 모세와 엘리야가 7년 환란 중 최초로 등장하는 시점을 7년 중 3년이 경과했을 때로 보고 있다. 즉 전3년 반이 끝나기 전 6개월인 시점에 그들이 오는 것이다.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올지 광야에서 바람처럼 등장할지 그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은 내려온다. 그들이 이 땅에 오면 가장 먼저 시행하는 일이 있으니 하늘을 닫아서 비를 안 내리게 하는 사역이다.
이들에게는 하늘을 닫는 권세가 있어서 그들이 예언하는 날 동안 비를 오지 못하게 하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세도 있어 원하는 때면 언제든지 온갖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계 11:6).
두 증인의 강력한 예언과 표적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놀라서 그들의 말을 듣고 회개하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침례인 요한이 등장했을 때 너무나 파격적인 행보와 발언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고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과 같다. 이를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을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인데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범상치 않은 사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더 잘 지켜보기 위해 퍼가모로 순행을 오는 것 같다. 겉으로의 명분은 교황이 해외 순방하듯이 지지자들을 챙기기 위해 오는 것이지만 실제적인 이유는 "발라암의 사역"을 퍼가모에서 벌임으로써 그곳의 유대인들을 타락시켜서 배교자로 만들어 추후 예루살렘에 군대를 몰고 들어갔을 때 그들을 주구로 내세워 식민 통치를 하려 한다.
그 때 많은 사람이 남쪽 왕을 대항하여 일어설 것이며 네 백성의 강도들도 그 환상을 세우려고 스스로를 높일 것이나 그들은 넘어지리라(단 11:14).
그러나 너희는 주를 버린 자들이며, 나의 거룩한 산을 잊어버리고 그 군대를 위하여 식탁을 마련하며 그 수대로 술을 제물로 제공하는도다(사 65:11).
그렇게 하려면 그 자들은 먼저 적그리스도의 종교 곧 로마 카톨릭에 익숙해 있어야 한다. 지금의 로마 카톨릭보다 열 배 정도 더 악해진 바빌론 종교의 본색을 드러낸 그 카톨릭 말이다. 그래서 퍼가모의 환란 교회 유대인들은 양심에 화인 맞고 마음이 탐욕으로 단련되어 배교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음욕이 가득 찬 눈을 가지며 죄로부터 단절될 수 없고, 견고하지 못한 혼들을 유혹하며 그들은 마음이 탐욕으로 단련되었으니 저주받은 자식들이니라(벧후 2:14).
그래서 이 안티파라는 환란 성도, 아마도 유대인이거나 유대인 피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는 이 성도가 뭔가 큰 사건의 핵심이 되는 것 같다. 안티파는 적그리스도가 퍼가모에 순방을 와 있는 기간 중에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는 것 같다. 그가 행하는 거사는 요한 바오로 2세를 암살 시도한 터키 암살자 아흐자가 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일인 것 같다. 그는 "눈에는 눈" 방식, 즉 모세의 방식을 따라 유대인의 배교를 일으키는 악의 종자인 적그리스도를 단번에 제거하기 위해 접근하여 안중근 의사처럼, 탕, 탕, 탕, 거사를 실행하는 것 같다.
양떼를 버려 둔 우상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칼이 그의 팔과 그의 오른눈에 임하리니, 그의 팔은 바싹 마르고 그의 오른눈은 완전히 어둡게 되리라(슼 11:17).
적그리스도는 '양떼를 버려 둔 우상 목자'로 불리는데 이는 그가 양떼로 예시된 유대인들에게 접근해서 그들을 미혹하여 전통 신앙에서 떼어 낸 다음 그들에게 우상 숭배를 하도록 조장하고 무책임하게 버려두기 때문에 붙는 이름이다. 즉, 적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을 미혹하여 범죄케 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보라. 특이한 일이 일어나는데 이 일은 북이스라엘 1대 왕인 여로보암 왕에게도 비슷하게 일어났었다.
그의 오른눈과 한쪽 팔(아마도 오른팔)이 바싹 마르는데 그것은 칼이 거기 임하기 때문이다. 칼이라 해서 문자적 칼이라기보다 그 두 곳을 동시에 타격할 수 있는 무기, 산탄을 발사하는 펌프식 샷건 같은 것이 연상된다. 적그리스도는 요한 바오로 2세처럼 터키 사람에게 총을 맞고 바오로 2세처럼 몸이 불편한 '반병신'이 되어서 후3년 반을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이 일은 우리의 선조 셈이 님롯을 처단했던 방식도 떠올리게 하는데 "두 개의 바빌론"(알렉산더 히슬롭 저)이라는 책을 보면 고대 전설에 남아 있기를 바빌론과 바벨탑의 창건자, 위대한 님롯이 아라라트 산에서 내려온 셈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나온다. 셈은 님롯의 사지를 각을 떠서 각 지방마다 보내어 배교자의 최후에 대한 본을 삼았다 한다.
셈과 님롯의 경우도 그렇고 여로보암도 그렇고,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부수는 것"도 그렇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머리를 부숴 버리고 그의 왕국을 끝장내는 것의 예표가 된다.
즉, 안티파는 적그리스도의 머리를 쳐서 일시 상하게 하는 일, 주님께서 하실 일을 예고편 격으로 먼저 실행하는 성도인데 물론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오바마, 김정은, 교황 같은 자들에 대해 거짓 선지자이자 적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비난은 하지만 그들에 대해 우리가 물리적으로 제거한다던지 실력 행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겠다고 하지는 않는다. 지금 교회시대는 눈에는 눈을 갚아주는 때가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고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7년 환란 때는 율법이 다시 컴백하기 때문에 그때는 성도들도 칼을 갖고 다닐 수 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칼을 도로 그 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들은 모두 칼로 망하리라(마 26:52).
그때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이제는 돈지갑이 있는 사람은 가질 것이요, 식량 주머니도 마찬가지요, 또 칼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겉옷을 팔아서라도 살지니라(눅 22:36).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잡히시기 전에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칼에 관한 것이 있다. 처음에 주께서는 제자들이 "여기 칼 두 자루가 있나이다"(눅 22:38)라고 말씀드릴 때 "충분하도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마 26:52에서는 막상 잡히시는 상황이 되자 그 준비된 칼을 들고 군사들과 싸우려 하는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그 집에 꽂으라"고 하셨던 것이다. 어차피 쓸 수 없고 써서는 안 되는 그 칼을 왜 주님은 있느냐고 물어보셨던 것일까?
나는 이것이 하나의 예표라고 보는데 사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붙잡히실 때 그 현장에는 유다 이스카리옷이 와 있었다. 베드로가 계속 칼춤을 췄더라면 유다 이스카리옷도 타겟이 되었을 터인데 주께서는 베드로가 그의 단검으로 첫 수확을 시작하자마자 "멈추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고작 대제사장의 종 말코의 귀 하나만 벤 상태로 씩씩거리며 칼을 떨궈야 했다. 아무튼 좀더 상황이 벌어졌다면 베드로는 배신자 유다의 가슴팍에 칼을 꽂았을 것이다.
정말 위기 상황이 오게 되면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보잘것없는 적의 수하 중 하나의 귀를 베는 정도밖에 없다. 그는 사실상 주의 성도들의 핵심적인 원수라 할 수 있는 유다 이스카리옷에게 다가가기 바로 전에 살의를 접어야 했다. 왜냐하면 주께서 슼 11:17 예언을 이루셔야 하는데 그러자면 초림 당시 유다가 베드로의 칼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 슼 11:17은 초림이 아닌 재림 때 일어나야 하고 그 예언은 베드로가 아닌 계 2:12의 "안티파 성도"가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주께서는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지 사전에 점검하신 다음 그가 정말 쓰기 시작하자 동작 그만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나는 아마도 베드로가 유다의 얼굴을 알아본 다음 너무나 분노가 치밀어서 칼을 빼어들고 돌진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과정에서 걸거치는 존재인 말코의 귀가 날아갔고 유다에게 칼이 다가가기 직전에 주님께서 그 권능의 말씀으로 멈추게 하셨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를 잡아 가두고 사형시키려 했던 왕의 이름이 기억나는가? 그는 예수님 당대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였다. 이상한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그 당시 '안티파'라는 이름의 왕이 베드로를 죽이려 했었다. 그리고 그 베드로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목을 날릴 뻔 했던 경력이 있다. 물론 성경에는 그냥 헤롯이라 나오지만 그 자의 정식 명칭은 헤롯 안티파다.
그가 베드로를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네 명씩 네 조의 병사들을 붙여 교대로 지키게 하니 이스터가 지나면 그를 백성들 앞에 끌어낼 의도였더라(행 12:4).
베드로가 죽을 뻔 했던 시점은 '이스터 절기'인데 그 때는 4월 경이었던 것이고 기독교는 그때 부활절 행사를 갖는다. 그래서 헤롯의 이스터가 기독교 부활절로 들어와서 카톨릭과 개신교들에 의해 준수되고 있는 것이다.
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네버엔딩 스토리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 같지 않은가? 베드로, 유다 이스카리옷, 헤롯 안티파, 대환란 때의 성도 안티파, 그리고 적그리스도.
결국 이 모든 것은 베드로가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를 찌르는 자의 모형 역할을 한 것이고,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찔러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곤 막상 저지하셨던 것과 유사하게 모형 구실로 베드로를 쓰셨다는 얘기다. 베드로는 모형적으로 그랬지만 안티파 선생은 진짜로 적그리스도의 대갈빡과 오른팔에 총질을 하실 모양이다. 베드로가 칼을 들 정도로 분노했던 이유는 유대인들을 예수님으로부터 배교시키는 선봉장이 다름아닌 자기와 같은 사도직을 받은 유다 이스카리옷이었기 때문이고 안티파가 분노하는 이유도 적그리스도가 발라암의 술수를 쓰면서 유대인들을 정통 신앙에서 분리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시아 순방길에 오른 적그리스도에게 총알 세례를 퍼붓고 안중근, 윤봉길 의사처럼 장렬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운명인 것이다.
그는 계시록에서 이름이 거론된 최초의 환란시대 순교자이자 최후의 순교자이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의 뒤를 잇겠지만 그럼에도 이름이 거론된 사람은 안티파, 딱 한 명 뿐이다. 왜 그럴까, 다른 성도들은 무명 용사로 남고 안티파만 계시록에 이름이 나오는가? 그는 적그리스도가 모든 환란 성도들을 몰살시키는 일에 착수할 이유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 발키리 작전에 나오는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처럼 의롭고 강인한 자로서 용기있는 거사를 치르는 것이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완벽한 계획을 구상하고 히틀러를 폭사시킬 뻔 했지만 사소한 변수가 발생하는 바람에, 히틀러가 벙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는 것 때문에, 또 히틀러 부관이 폭탄 가방의 위치를 탁자 밑으로 옮겼기 때문에 폭발물의 압력이 감소해서 히틀러는 옷만 그슬르는 정도로 그쳤다. 안티파는 좀더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변수를 감소시키는 모든 방안을 강구할 것이다. 사실 인간이 산탄총에 상반신을 저격당한다는 것은 예외 없이 죽음을 의미한다. 상체 어디에 맞더라도 죽음이나 식물인간을 피해가기 힘든 무기가 산탄총이다. 산탄을 머리에 맞는다고 하면 그 탄환들이 머리통을 온통 벌집으로 만들기 때문에 생존 불가능이다. 적그리스도가 그 저격으로 인해 일단 사망 선고를 받게 되는 것은 거의 확실한 예측이다. 그런 근거를 계시록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또 내가 보니, 그의 머리들 가운데 하나가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 같았으나,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니 온 세상이 기이히 여겨 그 짐승을 따르더라(계 13:3).
적그리스도는 그의 '치명적인 상처'(deadly wound)로 인해 거의 즉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데 사탄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적그리스도의 죽어 있는 몸 안에 영체로 들어와서 그를 소생시켜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슷하게 따라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처럼 망자의 세계에서 복귀하여 명부의 왕의 자격으로 명실공히 통치하기 시작한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치명적인 상처를 치유받은 적그리스도의 이름은 전3년 반의 '죄의 사람'이 아닌 후3년 반의 "멸망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적그리스도를 살려내더라도 그 회생은 예수님의 부활처럼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여전히 반병신인 채로 돌아다녀야 하는 것인데 슼 11:17이 그 근거이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책을 보면, 내 기억이 정확지 않을 수 있으니 실수라면 이해해 주시라, 나사로의 부활 이후를 서술하면서 바리새인들이 나사로를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사로의 부활이 완전한 것이 아니었기에 무슨 프랑켄슈타인처럼 곳곳이 누수가 일어나는 상태로 묘사가 된다. 그 작가가 자기 그 악한 아이디어를 사탄에게서 빌려 왔던지, 그게 아니라면 반성경적인 발상을 어디서 했을지 궁금하다. 나사로는 완전한 몸으로 일으켜졌지만 적그리스도는 총 맞은 상처가 다 낫지 않은 채로 겉만 멀쩡하게 일어날 것이다.
안티파는 "사탄의 자리"가 있는 그 퍼가모에서 하루가 아닌 여러 날 동안 심문과 고문을 당하면서 죽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본문은 안티파가 죽는 "날"이 아닌 "날들"이라고 복수를 쓰고 있지 않은가 한다.
안티파가 고초를 당하는 기간은 아마도 사흘 정도일 것인데 이는 적그리스도가 부활하기에 필요로 하는 기간이 예수님을 모방한 72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임당하는 날들 동안 거기에 사탄이 거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계 12장의 사건이 일어날 것이며 사탄이 이 땅에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을 대항하여 싸우고 용과 그의 천사들도 싸우나 그들이 이기지 못하여 하늘에서 더 이상 있을 곳을 찾지 못하더라(계 12:7-8).
그래서, 내가 하는 예상은 이렇다. 계 12장의 미카엘과 용 전쟁이 벌어지고 사탄이 내려오기 직전에 거사가 실행되고 적그리스도가 죽어 자빠지는 것이다. 원래는 용이 지상에 내려오면 곧장 적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사탄의 삼위일체(용, 거짓선지자, 적그리스도)를 완성하려고 했는데 방해꾼이 나타나서 사흘 동안 일이 지연된 것이다. 그러니 분노한 사탄은 악령의 세력들을 총 궐기시켜서 이 암살자를 사흘 동안 고통을 주다가 죽이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적그리스도가 부활하기까지 그 날들 동안 안티파의 배후 세력을 캐면서 환란 성도들을 잡아들여 믿음을 부인하도록 고문하는 것이다. 이 성도들은 끝까지 견디는 환란 성도 믿음의 표본이 될 것이고 그래서 주께서는 대환란에 처한 자들에게 "끝까지" 견딜 것을 주문하신다.
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 10:22).
그러나 내가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게 발라암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음이라. 그가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거치는 것을 놓게 하며,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고 또 음행하도록 하였느니라(계 2:14).
그래서 "발라암의 교리"가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적그리스도의 옆에 등장할 두 번째 짐승, 발라암이 명부로부터 부활하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또 내가 보니,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는데 어린양처럼 두 뿔을 가졌으며 용과 같이 말하더라(계 13:11).
발라암이 언제 등장할지 그것은 좀 유동적인 면이 있다. 그가 전3년 반의 후반부에 올 수도 있고 후3년 반 시작하기 직전에 나타날 수도 있는데 계 13:11을 통해 보면 그는 확실히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발라암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거인의 씨 중에 하나로서 '감옥에 있는 영들' 가운데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여튼 그가 올라올 때 아폴루온보다 앞서서 올라올 것은 분명하다.
또 그들에게는 자기들을 다스리는 왕이 있으니 끝없이 깊은 구렁의 천사요,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아바돈이며 헬라어로 그의 이름은 아폴루온이더라(계 9:11).
아폴루온은 지상에 와서 그 다음 죽어 있는 적그리스도 안에 '영'으로 들어갈 것이며 사탄은 그에게 생명의 호흡을 주어 '살아있는 혼'이 되게 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 발라암이 몸을 얻는 방식은 모르지만 그는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입고 부활하는 것 같다.
"발라암의 교리"가 지켜지기 위해서는 그 교주이자 창시자이신 발라암 선생이 와서 친히 지도를 해야 되기 때문에 사탄은 그를 데려와야 한다. 그는 이스라엘을 파멸시키는 데 있어 혁혁한 공을 세운 사탄의 공헌자이기 때문에 대환란 때에도 그의 사역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발라암이 등장할 시점을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그는 두 증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날 때 동시에 밑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그는 거짓선지자이기 때문에 참선지자들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효과적으로 방해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또 '멸망의 아들'의 등장보다 6개월이 빨라야 하는 이유는 그가 침례인 요한을 모방하는 자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침례인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 시작보다 6개월 정도 앞서서 등장했고 예수님 공사역이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순교했다. 실로 짧은 사역 기간이었던 것이다.
발라암이 거짓선지자의 모델이자 그 자체라면 민수기에서 모압왕 발락은 무슨 모형이겠는가? 당연히 적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형이다. 거기서 바알신이 차지하는 위치가 붉은 용 사탄이기도 하다.
발라암, 발락, 바알, 모두 재수없는 B로 시작하는 마의 단어들이다.
본문 14절에서 발라암과 발락 이야기가 구체성을 띠고 반복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스토리의 주인공 중에 최소 한 명, 발라암은 대환란 현장에 등판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발라암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배교 사건이 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타락이 정점을 이루는 7년의 중간 지점에 안티파의 결단과 거사가 있게 되고, 그 배교를 뒤로 하고 멸망의 아들이 후3년 반을 시작해야 한다.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살후 2:3).
자, 여기서 보통 배교하는 일을 교회 시대 끝에 맞춰 놓고 시간 설정을 하기 때문에 해석의 난해함이 가중된다. 우선 '배교'라고 하는 말이 쓰이는 맥락을 잘 확인해 봐야겠다.
데살로니가후서 2:3에서 단 한 번 쓰이는(우리말 성경 기준이지만 영어 킹제임스도 마찬가지) 이 표현, 곧 falling away(배교)라는 말은 대환란에 대해 묘사하는 와중인 살후 2장에서만 등장한다. 교회시대에 폭넓게 쓰이는 용어이기도 한 이 배교라는 말이(개역성경을 써 온 개신교인들은 배교보다는 배도라는 말에 익숙할 것이다) 의외로 성경에 많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특히 에큐메니칼 무브먼트, 종교 통합, WCC, 그런 사탄적인 연합과 일치 운동에 대해 우리는 아주 빈번하게 "배교"라 비판하는 말을 듣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들이 현재 하는 그 일들이 곧 살후 2:3의 예언을 성취시키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맞다, 틀리다 말하지는 않겠는데 왜냐하면 지금 일어나는 에큐메니칼적 배교 현상이 7년 환란 때 일어날 배교의 전주곡이자 예고편도 될 수 있고, 그렇다면 살후 2:3이 우리에게 전혀 의미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글에서 확인하기로는 살후 2:3의 "배교하는 일"이 상기 묘사했던 7년 환란 중간즘에 일어날 유대인들의 메시아 신앙으로부터의 이탈, 그것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그렇다면 살후 2:1-2에 대해 기존 세대주의적 관점과 조금 다른 해석이 도입되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다른 성구들도 그렇고 "그리스도의 날"이라 할때 그 의미는 공중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 보아 왔다.
우리가 이것을 확신하노니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빌 1:6).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의 날"을 이야기할 때마다 휴거와 공중 재림을 연결시켰다. 그런데 살후 2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용례가 달라졌는가? 실은 달라진 것이 아니라 표현상의 차이를 우리가 캐취하지 못하여 오인한 것 같다.
살후 2:3에서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라는 부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저러한 일들, 곧 적그리스도 등장과 배교가 되어야 7년 환란이 시작되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 왔다. 그런데 "그 날이 온다"는 의미를 휴거의 날, 하루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과연 기존 해석이 맞게 되지만 여기서의 그 날이라는 게 24시간이 아닌 '기간'을 의미한다면, 이를테면 우리가 셋째 하늘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혼인잔치, 혼인식까지 치르는 그 7년이라는 기간을 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7년이라는 기간이 Full로 차기 전까지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날"은 공중 재림으로 시작해서 재림으로 끝나는 기간으로 적용될 수 있고 그 full day의 기간이 차야 그 날이 종료되는 것이고 다시 말해 그 기간 동안 살후 2장의 환란기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맥락 하에서 살후 2장을 읽는다면 "배교하는 일"도 꼭 교회시대 끄트머리, 휴거 직전에 발생할 이유는 없어진다. 7년 환란의 중반부 즈음에 유대인들,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집단 배교하고 죄의 사람이 멸망의 아들로 탈바꿈하는 그 시점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교"는 7년 환란의 중간 지점에 발생할 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리고 그 배교는 지금 교회시대 크리스찬들이 배교하는 것이 아닌 유대인들이 14만4천과 환란기 일곱 교회들을 통해 전파되는 믿음을 거역해서 배교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고 또 음행하도록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등장하는 주제는 교회 시대와 직접 상관이 없다. 여러분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면 지금 시대 크리스찬들이 조상 제사나 돼지머리 고사 지내도 괜찮다는 얘기냐, 하겠지만 내가 상관이 직접 없다는 말은 구원의 관점에서 그렇단 얘기다.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육적, 영적 음행을 한다 해서 이미 받은 구원이 멸실, 취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7년 환란 때는 사정이 바뀌는데 그때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도 그 환란 성도의 구원에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다 이유가 있으니까 여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 이미 율법이 폐한 교회시대가 되어서 먹고 마시는 일이 하늘나라 가는 구원과는 상관없게 된 우리가 새삼 율법의 적용을 받아서 정결례라던지 기타 율법을 지켜야 하늘나라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나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25).
만일 고전 10:25을 7년 환란 때에 어떤 종교 지도자가 인용하면서 실행하라고 한다면 그 지도자는 회중을 실족시키고 심지어 지옥에 보낼 수 있다. 교회시대에는 그렇게 해도 되지만 대환란 때는 큰일 날 짓이다. 바울이 왜 '고기시장' 이야기를 하고 있냐 하면 그 당시의 시장에서는 지금처럼 단순히 상업적으로 도축된 고기만 팔리는 게 아니라 이교 신전에 제물로 바쳤던 고기가 시장에 섞여서 팔리고 있었다는 게 문제다. 물론 이슬람들은 그때의 방식과 같이 '할랄 도축'을 하는데 할랄을 하기 위해서는 이슬람 사제가 와서 그 소나 양에게 의식을 행한 다음 잡는 것이다. 할랄 고기는 말하자면 이교 신에게 바쳐진 부정한 고기 격인 셈인데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태원 중동 식당이나 중동 나라에 가서 양고기 요리를 먹는다면 그 고기는 100% 알라신에게 바쳐진 할랄 미트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슬람식 할랄 고기 안 먹고 뱉어 버려야 되겠는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7년 환란 때는 지금처럼 했다가는 "국물도 없게 될 수" 있어서 그런 부분을 조심하도록 다시 율법이 대두되는 것이다. 지식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기에 율법 선생들이 다시 나와서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면서 무엇을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가르칠 것이다. 이를테면 14만4천의 유대인 남자동정들이 그 일을 할 것이며 그들의 뒤를 이어 두 선지자가 후3년 반에 또 가르칠 것이다. 또 강조하지만 지금 교회시대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피를 먹지 말라는 사도행전의 말씀도 교훈이지 교리는 아니다. 선지국, 먹어도 되고 순대, 마찬가지다. 개고기, 먹고 싶으면 먹어도 된다. 안식교도들처럼 율법 뒤적이면서 "음, 이건 먹고, 저건 못 먹고" 그런 시대가 지금 아닌 것이다. 다만 안 먹는 게 좋다고 하는 것은 피를 먹는 행위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고 건강상으로도 안 좋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이런 폭넓은 자유를 누리는 교회시대에 살고 있는데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휴거 없이 대환란 시대로 곧장 간다면 어떻겠는가? 그때부터는 여러분도 먹을 것 리스트, 못 먹을 것 리스트를 교육받고 나머지 율법 조항들도 다 따져가면서 지켜야 된다. 하나님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부조리한 일을 시키실 거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다. 사도행전 당시의 초기 유대인 크리스찬들은 시대적 과도기에 처해 있었을지라도 최소한 율법 지키는 것이 이제 자기들의 구원과 직접 상관은 없게 된 줄은 알았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알려주시기 때문에 그들은 내심 그럴 것이라 알고 있었고, 그러나 주님께서 바울 서신서들을 통해 명시적으로 신약 시대를 확증하시기 전까지는 만일을 위해 조심했던 것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대환란에 들어가서 통과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좀 잘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하나도 모르는 깡통 지식을 가진 겉발린 지식인들이라는 점을 알아두라.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까맣게 모르는, 즉 신구약 차이점도 잘 모르는 완전 맹구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음행"은 어떠한가?
우리는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이 행한 것처럼 음행하지 말자. 그들은 그러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느니라(고전 10:8).
하나님께서는 뉴올리언스에서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통해 동성애자들 모여 사는 곳을 쓸어 버리셨던 것처럼, 부두교 우상숭배자들이 모여있는 아이티를 지진으로 박살내신 것처럼, 그리고 인도네시아 모슬렘 지역에 수시로 화산, 지진과 쓰나미를 보내시는 것처럼 한국이나 일본에 대해서도 똑 같이 행하실 수 있다. 음행은 하나님께서 어느 시대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서도 죄를 물으시는 사항이기 때문에 교회시대라 해서 피해갈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구약, 또는 7년 환란 시대와 지금 시대의 차이점은 이것이다. 은혜 시대가 아니던 구약이나, 혹은 앞으로 올 환란 시대에는 음행의 죄가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죄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육적 사망, 영적 사망을 동반하는 치명적 죄로 간주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 유대인들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어야 했고 그 정도 선에서 하나님께서 진노를 푸신 것이다. 단지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서 노하심을 푸실 것 같았으면 왜 그렇게 많이 죽이셨겠는가?
소돔과 고모라와 또 그 같은 방식을 따르는 그 주위의 성읍들까지도 자신들을 음행에 내어주어 다른 육체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한 본보기가 되었느니라. 이와 같이 이러한 더러운 꿈을 꾸는 자들도 육체를 더럽히며 다스림을 경시하고 권위 있는 자들을 비방하는도다(유 1:7-8).
소돔과 고모라에서 행해졌던 그 추악한 관행들이 오늘날 소위 민주주의의 절정을 달리는 미국 같은 나라에서 자랑스럽게 행해지고 있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건 공화당이 잡건 이제 호모들의 권세와 입김이 너무 강해져서 그들을 타도할 법적, 제도적 방안이 없어졌다. 7년 환란 때 이 시대의 성도착은 명함도 못 꺼낼 정도로 극심한 타락이 전지구를 덮을 것이다. 성전을 재건한 유대인들이라 해서 여기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며 그들 역시 발라암의 교리를 받아들여 이방인의 타락한 성적 관행을 도입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음행에 동참한 환란 시대 성도들을 곧바로 죽이실 것이다. 지금은 주님께서 범죄한 크리스찬들에게 많은 관용을 베푸셔서 평생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만 환란 시대가 되면 가차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짓는 것을 보거든 간구할지니,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거니와, 나는 그에게 그 죄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지 아니하노라. 모든 불의가 죄이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느니라(요일 5:16-17).
이 구절은 일견 육신적 크리스찬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무시하다가 결국 병을 얻어 일찍 죽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게 된다, 그런 의미로 보인다. 그런데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그게 아니라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는 말이 가리키듯이 여기서의 사망은 영적, 육적 의미를 동시에 수반하고 있는 용어인 것이다. 요한일서 자체가 환란시대 교리를 많이 다루기 때문에 이 구절도 환란 시대에 어떤 특정 죄를 짓는 것은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런 죄가 어디에 있는가? 계시록에는 환란성도가 지을 수 있는 치명적인 죄 두 가지가 나온다.
셋째 천사가 그들을 따라가며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표를 자기 이마나 손에 받는다면(계 14:9).
문제가 되는 행동 두 가지는 "형상 경배"와 "짐승의 표 받기"인데 이 중 "형상 경배" 부분에 함축된 의미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섬겼던 당시, 혹은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여 떼로 죽었던 사건, 거기에 있었던 잡혼과 이방인과의 더러운 성적 결합이라는 게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유다서 1:8에서 "육체를 더럽히며"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인데 더럽히는 것은 '표를 받는 것', '표를 받은 후 짐승의 형상 경배에 참여하며 그 신비 종교 행사와 곁들인 신전 창녀 같은 간음을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들이니 이는 그들이 동정들임이라. 이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들로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열매들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았느니라(계 14:4).
14만4천은 환란시대를 완전히 극복하고 이기는 자들의 표상인 성도들이다. 그 유대인들은 한 명도 실족하지 않고 완전히 성공하여 7장, 14장 사이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유대인 성도들, 또 이방인 환란 성도들은 수없이 탈락하고 실족할 것이 분명하다. 14만4천이 승리할 수 있던 비결은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아예 동정들(모태 솔로)이다. 결혼도 안한 어린 소년들, 바빌론에 끌려가 내시가 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다니엘 같은 청소년들이다. 다니엘이 계시록에서 요한을 이끄는 천사 역할을 한다는 것을 기억해 보라.
이 교리가 현 시대와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은 바울이 했던 말 중에 답이 있다.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삼가라고 명하리니, 이 음식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믿고 아는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받도록 지으신 것이라(딤전 4:3).
만일 계 14:4과 딤전 4:3이 같은 시대의 교리라고 하면 바울은 14만4천을 대적하는 사람이 된다. 왜냐하니 그 유대인 동정들은 모두 결혼을 안 했고 총각들이기 때문이다. 그 14만4천들이 수도승처럼 여자를 멀리 하지 않는다면 대환란 때 여자 문제로 실족하여 타락, 멸망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로 말하고 있으니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삼가"하는 것이 마귀의 교리라고 하고 있다.
왜 바울의 서신서 교리와 계시록의 교리가 이렇게 다른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먹고 마시는 법, 육체의 규례들"은 교회 시대에만 기능이 정지되도록 하신 것이지 대환란 때는 그 법이 다시 작동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멍청한 종교인들이 율법주의를 실행하면서 안식교, 여증처럼 지금도 음식 규례를 지키려 할 때 그들이 바보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환란 시대의 교리와 교회 시대의 교리를 주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것이다.
성경은 두 가지를 최소한 구별하면서 읽어야 그 독자가 제대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첫째는 이 구절이 교리적으로 어느 시대인지 감각을 갖고 읽어야 한다. 교회 시대의 교리인지 다른 율법적 시대의 교리인지 구별해야 한다. 둘째, 그 구절을 지켜야 하는 대상이 교회 시대의 크리스찬인지, 율법적 시대인 구약이나 환란 시대의 성도들인지 그것을 분간하며 읽어야 한다. 또 분간해서 읽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다 보이게끔 되어 있다. 여러분이 그런 것을 신경 안 쓰기 때문에 넘겨 버리는 것이지 의식하면서 읽어가면 잘 보인다. 간혹 멍청한 언약 신학자들이나 칼빈주의자들, 구약 시대에는 오실 예수 바라보고 구원받고 신약 시대에는 오신 예수 보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영적 문외한들도 지금 내가 말하는 이 관점을 수용해서 성경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읽기 시작하면 다 알 수가 있다. 그들이 멍청이 신학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멍청이가 되었기 때문에 뻔한 것이 안 보이고 분명한 진리가 그들에게만 흐려져서 헤매고 있을 뿐이다.
다음 시간에 15절로부터 강해를 속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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