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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심리의 통합적 틀: 심정심리의 개념적 분석
최 상 진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한국 사람다운 한국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 질문과 관련된 그 동안의 논의나 글들은 국문학, 사학, 철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정신의학, 민속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자의 관심과 연구 초점에 따라 다양한 제목(예컨대, 국민성, 의식구조, 가치관, 태도, 정신문화, 정체성, 성격, 사고의 원형, 사회적 성격, 한국인의 원형 등)으로 발표되어 왔다. 지금까지 발표된 한국인의 특성을 일별해 보면, 그 수에서 무려 50개가 넘으며 그 각각의 특성 내용도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나 논리성을 가지고 있어 어느 하나도 한국인의 특성이 아닌 것으로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여러 저서에서 한국인의 특성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들은 정(情), 형식주의, 권위 및 서열의식, 체면(體面), 한(恨), 현세․현실중심(現世·現實中心), 의리와 명분, 책임회피(탓)의식, 가족주의의식, 집단의식, 연줄의식, 눈치, 숙명의식, 낙천주의, 의존의식, 피해의식, 개성결여, 효의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특성들은 그 강도나 서열에 있어서는 학자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어도 그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상당한 동의를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특성에 대한 기술이 다양하다는 것은 한국인의 특성을 다각적 측면에서 세밀하게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편 장점을 가질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특성간의 관계성 정립이 어려우며,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심리특성을 이론화시키는데 어려움을 갖게 된다는 문제점이 따른다. 이에 덧붙여 지금까지 제안된 한국인의 특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실증적이며 심층적인 분석적 연구가 뒤따르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직도 한국인의 특성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이론적 체계화보다는 탐색적 발굴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시사한다.
필자는 이점에 착안하여 한국인의 특성에 대한 새로운 항목의 추가보다는 기발굴된 한국인의 특성에 대한 실증적, 심층적 분석연구를 수행해 왔으며, 그 동안 분석된 특성은 정(情), 우리성, 한(恨), 체면(體面), 눈치, 의례성(儀禮性), 핑계, 심정(心情), 홧병(火病) 등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자는 심정을 한국인의 심리특성의 통합적 틀로 파악한 바 있으며, 이에 대한 글을 이미 발표한 바 있다(최상진, 1993a; 1994; 1996; 1997). 여기서 필자는 심정을 한국인의 일상적 대화 속에서 찾아내고 심정이 우리성, 정, 한 등과 어떻게 관련되는 개념인가를 설명하였으며, 이것이 서구의 심리학적 개념 및 서구인의 심리학과 어떻게 구분되는가를 논하였다. 이를 중심으로 한국인의 심정이 한국인의 심리적 한국인성(Koreaness)으로 논해보고자 한다.
1. 심정을 읽으면 한국인이 보인다
미국계 한국인인 元一漢(Horace G. Underwood)선생은 한-미우호협의회에서 개최한 한 토론회에서 미국인과 한국인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였다.
한국인들의 정서에는 ‘恨’의 감정이 흐르고 있으며...... 미국인들이 가지는 서구적 사고방식에서는 개인성과 독립성이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는데, 한국에서는 ‘개인성’이라는 것이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서구에서는 행위 또는 행동을 중시하여 행동으로써의 반응을 가리켜 책임이라고 보는데 비해 한국적 책임의식은 그 자리나 위치를 중시한다......미국에서는 규칙이나 기준이 구체적이고 실행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잣대로 사용되고......한국인에게는 원칙 이전에 사람의 사정이 앞서는 한국적 판단 기준을 가져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미래의 세계, 한미우호협의회, 1993. 9).
앞의 내용과 더불어 그는 미국 유학 중인 한 한국 학생이 교통법규 위반으로 경찰관에게 적발되었을 때 “Look at me, Please(좀 봐주세요)” 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들면서, 이를 규칙보다 인간적인 사정을 우선하는 한국적 사고방식의 한 예로 들고 있다. 元一漢 선생의 눈에 이러한 한국인의 행동이 이상스럽게 보여진 것은 미국에서 사정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의 인용에서 말한 것처럼 미국인에게는 위반했다는 그 행동 자체가 중요하며 사정이나 심정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쩌면 행동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마음이다. “등 시린 절 받기 싫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정 자체보다는 정 이면에 있는 마음이 중요함을 뜻한다. 한국인은 대인관계에서 행위의 이면이 있는 마음(mind)과 감정(emotion)을 읽는 것이 필수적이다. 미국인의 대인관계 화폐가 행동이라면 한국인의 대인관계 화폐는 마음이며 심정이다(최상진, 1993a; 1994; Choi, 1994).
우리 한국 사람은 일상적 대인관계나 의사소통에서 자신의 심정을 상대 또는 제삼자에게 표출하는 말이나 표정 짓기, 행동을 많이 한다.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는 언어를 보면, ‘분하다’, ‘억울하다’, ‘한스럽다’, ‘섭섭하다’, ‘속상하다’ 등과 같이 무드(mood)형태의 감정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있는가하면, ‘패 죽이고 싶다’, ‘껴안아주고 싶다’, ‘죽어도 안 만나겠다’ 등과 같이 행위 의도형태도 있다(최상진, 유승엽, 1996).
심정은 반드시 언어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얼굴표정(예컨대 상가에서 문상객의 조의의 표정 또는 교통위반에 걸린 운전자가 경찰관에게 “한번만 봐주세요”라고 말하면서 사정하는 얼굴 등)에 자신의 심정을 담아 전달하기도 하며, 또 행동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상대방이나 제삼자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전원일기에서 일용어머니인 김수미씨가 자식이 섭섭하게 대할 때 밥상을 밀치는 행동이나 농성장에서 근로자들이 드러눕는 행동, 또한 LA올림픽에서 우리 나라 권투선수가 링에 주저앉아 항의하는 행동 등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거부라기보다는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는 한국적 커뮤니케이션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나라 가정연속극은 한마디로 심정의 경연장이요 한국적 심정 상호작용과 심정게임의 산 전시장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영화 「서편제」에서 송화의 노랫가락과 목소리는 기구한 운명을 ‘한’이라는 한국적 심정에 실어 승화시킨 데서 한국인의 공감을 사고 있으며, 송화와 그녀의 남동생 동호가 밤새껏 소리를 하면서 말 한마디 안한 것은 말보다 심정의 교감이 더욱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흥부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등과 같은 고전문학작품을 읽으면서 독자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주인공에 대한 심정적 공감대에서 연유한다. 소월의 시 ‘진달래’가 한국의 근대 시문학에서 백미로 꼽힐 수 있는 것도 반어적으로 자신의 애절한 심정을 전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바보처럼 살았군요’, ‘나는 못난이’ 등과 같은 유행가가 한국의 대중에게 공감을 유발하는 것은 바보의 심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한국인의 심정 심리적 문화문법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우리 나라 여성 민요나 민담은 대다수가 여성의 고통이나 차별대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심정토로 문학이다. 신문이나 대중잡지와 같은 매스컴에서 ‘김옥숙 여사의 심정’, ‘전두환의 심정’, 이중국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송자총장의 심정’ 등과 같은 헤드라인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한국인이 심정에 대한 쉐마와 관심이 발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 나라 부인들은 남편이 부인의 심정을 잘 몰라준다 하여 남편에게 토라지기를 잘하거나 강짜를 부린다. 우리 나라 놀이에서 흔히 단판승부보다 삼세판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것도 필연 억울하게 졌다는 분한 심정을 씻어주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참고로 일본의 스모는 단판승부이다).
우리 나라 일상 대화 속에 ‘지가 나에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은 상대방에 대한 섭섭하고 야박한 심정을 여과없이 표출한 말이다. 우리 나라 부모가 자식을 설득할 때 ‘니 에미 심정을 생각해서라도’라는 말로 시작한다(인질범을 설득할 때 어머니를 동원하여 자식의 자수를 권유하는 과정에서 흔히 쓰는 말). ‘네 심정은 내가 안다’, ‘내 심정 건드리지 마’, ‘심정적으로는 …’ 등과 같은 말을 우리는 친숙한 관계에서 흔히 사용한다. 술좌석에서의 대화는 심정토로식 대화가 많다. 우리 나라의 직장에서 대인관계나 업무관계에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술좌석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다. 술좌석을 마련하는 이유는 문제의 핵심에 ‘인간사’의 문제가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인간사의 문제해결에서는 자신의 심정에 대한 상대의 공감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술좌석 대화의 화법은 사무적, 논리적 대화가 아닌 심정적 대화가 기조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한국인이 흔히 사용하는 국민정서, 지역정서, 광주시민의 정서 등과 같은 말에서 ‘정서’라는 말속에는 ‘심정’이라는 심리상태가 진하게 함축되어 있다. 우리 나라의 정치나 사회문제 해결에서 국민이나 주민의 정서 문제가 자주 등장하는 바, 이는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상대의 공감과 지원을 이끌어 내는데 심정이 중요한 변수가 됨을 시사한다. 선거에서 자신의 이성적 판단보다는 동향이나 동창과 같은 연고유대 관계로 표를 찍어주는 것도 그 심중에는 찍어 주지 않을 때 오는 심정적 부담을 줄이려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심정심리는 사적인 관계에서 관여되는 한국적 문화문법이다. 그러나 공적인 상황에서까지도 심정이 중요하게 고려되는 경우도 많다. 수년 전에 고위공직자 자녀의 부정입학사건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된 일이 있었다. 미국이나 서구사회의 경우였다면 이들 고위공직자들은 당연히 공직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언론이나 국민적 정서는 이를 용서하는 방향으로 사건을 묵과하였다. 이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심정을 참작한 데서 연유된 사적인 심정심리가 관여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부정부패의 상당부분은 표면적이든 실질적이든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청탁에 대한 거절부담 심정에서 출발하여 금품수수로 촉진되는 사례가 허다하다.
또한 최근 우리 사회의 뜨거운 논쟁이슈였던 한․약학 분쟁에서 객관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제시되어야할 주장이 그 형식을 깨고 심정에 호소하는 광고가 등장한 적이 있다. 한․약학 분쟁이 고조되었던 당시 93년 6월 26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되었던 대한약사회 광고의 머리말은 ‘우리는 너무나 억울했습니다’였다. 과학자 집단인 약사회에서까지도 억울이라는 심정에 호소하는 광고를 게재한 것이다. 이처럼 심정은 한국인의 인간관계와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물론 예술, 문학, 정치, 경제, 가족관계 등에 중요하게 관여되는 한국인의 보편적 심리기제라 할 수 있다. 심정은 한국인의 삶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한국인의 역사 문화적 심리유산이며 유전적 심리체질이다.
2. 심정의 심리학적 개념화
심정은 마음을 뜻하는 心과 감정을 의미하는 情의 복합어로서 그 개별 어의에 충실하게 해석해 보면 다음의 두 가지가 가능하다. 첫째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정이며, 둘째는 감정이 개입된 마음 또는 마음이 개입된 감정이다. 심정에 가까운 종래의 심리학적 개념인 feeling, emotion, affect와의 차이점을 찾아본다면 심정에는 마음이라는 요소 또는 과정이 감정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보통 심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맥락에 관여되는 마음은 일어난 감정과 관련된 연유, 이유, 상황 등에 대한 설명 등이 포함된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의 성격을 갖는다. 즉 불쾌 또는 섭섭의 심정이 일어나게 된 인지적 배경을 포함한다.
심정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긍정적 감정보다 부정적 감정과 결부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낼 때 더욱 빈번히 사용된다. 이처럼 심정이 부정적 감정과 관련하여 더욱 빈번히 사용되는 배경은 심정의 발생과정과 밀접히 관련된다. 심정발생과정에는 그것이 유쾌하든 불쾌하든 상대방의 마음읽기가 관여된다. 심정과정에는 상대방의 행위나 상대에 의해 유발된 사건이 자신의 이해관계나 자존심에 관계된다고 생각될 때 상대의 의도나 자신과 관련된 마음의 상태를 추론하는 과정이 일어난다. 그 추론의 종착역은 나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나를 해치려는 것이냐의 판단이다. 물론 그 중간에 특별한 의도 없음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불쾌한 심정은 자신을 해치려는 상대의 마음이, 유쾌한 심정은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추론되었을 때 발생한다. 즉 심정의 발원은 나에 대한 상대의 마음씀씀이의 질(도움 대 해침)과 그 강도에 대한 자기 판단이다.
일반적으로 상대가 나에게 즐거운 일, 좋은 일을 했을 때, 우리는 고맙게 느끼거나, '고맙다’고 말하는 것으로서 추론은 일단락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행동을 상대가 할 때에는, ‘왜’라는 자기질문과 더불어 그 연유나 이유를 추론해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추론이 상대의 나에 대한 ‘좋은’ 또는 ‘나쁜’마음으로 귀결될 때 상대의 나에 대한 부정적 행위로 발생된 불쾌한 감정은 불(유)쾌한 심정으로 발전된다. 따라서 심정은 그 성질상 유쾌한 질보다는 불유쾌한 질의 감정사건을 단서로 하여 경험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 성질의 심정은 반드시 자신을 해하는 상대의 행동과 이와 관련된 자신을 해하려는 상대의 마음읽기(추론)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나를 위하는 행동을 했을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다. 상대가 나에 대한 긍정적(도움, 이익주기)행위를 했을 경우에도 그 행동이 자신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때 섭섭하거나 야박하다는 심정이 유발되기도 한다. 따라서 심정은 상대의 나에 대한 마음씀씀이 기대치에서 상대의 언행으로부터 추론된 상대 마음씀씀이의 정도간에 존재하는 격차의 크기에 비례하여 그 질과 강도가 결정된다고 하겠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 마음씀씀이의 기대치는 어떻게 형성되느냐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심정은 전혀 생면부지의 사람이나 관계가 없거나, 인간적 접촉의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과 관련해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적어도 어느 정도 사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간에 심정이 개입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상대 마음씀씀이의 기대치는 자신의 상대에 대한 자각된 마음씀씀이의 질과 강도에 의해 결정된다. 예컨대 자신이 끔찍이 아껴주고 도와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보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 마음쓰기의 기대치가 높을 가능성이 크다.
긍정적 마음쓰기가 높은 집단은 ‘우리성’집단이며, 그러한 집단은 실질적이건 전제적이건 성원들간에 情을 주고받는 집단이다. 情의 핵심적 속성은 아껴주는 마음(최상진, 최수향, 1990; 최상진, 유승엽, 1994b; 1995)이며, 아껴주는 마음은 곧 상대방을 위해 긍정적 마음을 써주는 마음이다. 상대로부터 기대했던 정을 되돌려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정떨어졌다는 말로 자신의 부정적 심성을 나타낸다. 정을 바탕으로 한 우리집단은 단순히 상대방을 위해 긍정적 마음을 써주려는 마음씨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심정을 사전에 배려하여 의도적으로 상대방의 부정적 심정을 유발하는 언행을 삼가거나 긍정적 심정을 유발하는 언행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이를 상대심정배려 마음써주기라고 칭할 수 있다.
한국인의 대인관계에서 자주 나타나는 의례적 언행 중에 상대의 심정을 배려하여 의례적 언행을 하는 상대심정배려의례성(최상진, 유승엽, 1994a; 유승엽, 최상진, 1995; 유승엽, 1995)은 앞에서 언급된 상대심정배려 마음써주기의 범주에 속하는 예의 하나이며, 이러한 의례적 언행을 언행자의 동기적 측면에서 이해할 때 비록 그것이 사실과 다르더라도 자신을 위해 마음을 써주었다는 생각 때문에 심정적으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
공공적 사태에서 합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의식하여 행하는 언행을 사리중심적 언행이라 한다면, 사적인 관계상황에서 인간관계를 의식하여 이루어지는 언행을 심정언행이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언행과정에서 보통 이 두가지 차원 또는 형태의 언행을 교차 또는 복합시켜 행한다. 사리중심적 언행에서는 사적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마음써주기식 언행이 합리성과 공공적 타당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되도록 억제되거나 위장된다. 반면 심정언행에서는 공공관계에서 나타나는 합리적 언행이 마음써주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억제된다. 따라서 전자의 discourse 형태를 공공논리적 discourse라 한다면, 후자는 심정논리적 discourse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한국인들에게 있어 심정이 왜 중요하며, 한국인은 왜 심정표현이나 심정토로를 많이 하는가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한다. 우선 이 논의를 위한 몇 가지 공리적 전제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인의 인간관계적 심리지향은 사리중심적이기보다 관계지향적이다.
2) 한국인은 인간관계에서 행위 자체보다 행위의 이면에 있다고 믿고 있는 마음, 특히 마음써 주기를 중요시한다.
3) 인간관계에서의 마음써주기에 대응하여 나타나는 마음읽기에서 가장 신뢰로운 지표는 상대의 언행에서 결과되는 수용자의 심정이라는 생각을 한국인들은 공유하고 있다. 즉 한국인들은 말은 속일 수 있어도 심정은 속일 수 없다는 ‘심정진실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유쾌한 심정은 말할 것도 없이 불유쾌한 심정까지도 시의성과 사태적 적합성에 맞고 대화의 형식이 맺힌 감정을 풀거나 건설적 관계회복을 위한 동기를 내포하며 이를 상대로부터 인정받을 때 부정적 심정토로도 심정진실관에 입각하여 상대에 의해 공감되고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 술좌석에서 자신의 불유쾌한 심정을 상대에게 있는 그대로 토로할 수 있는 것은 시의적 적절성, 사태적 적합성, 심정진실관의 3박자가 술좌석에서 맞아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정토로가 위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자칫 불평이나 불만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상대의 심정진실관도 흔들리게 된다. 부정적 심정의 토로는 상대와의 관계개선이 그 궁극적 목표일 수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심정에 대한 상대나 제삼자의 공감적 수용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만족을 당사자에게 줄 수 있다. 흔히 푸념은 반드시 문제의 해결보다는 자신의 심정을 상대나 제삼자에게 공감시키는 것에 일차적 목적을 둔 심정토로이다.
恨이 맺힌 사람이 상대나 제삼자에게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한탄조로 토로하는 것도 억울의 원천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거나 교정할 수 없다는 자의식하에 자신의 억울한 심정에 대한 공감을 얻기 위한 discourse양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기실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억울함이였다면 한으로 맺히지도 않으며 심정공감을 통한 한풀기 노력도 불필요한 행동이다. 국내에 존재하는 억울한 사람의 모임의 한 세미나에서 사례발표자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돈 없고 빽없어 억울하게 당했다’는 심정토로식 discourse 형태를 띄었다는 점이었다. 김열규(1980)나 이어령(1982)이 恨은 푸는 것으로 정의한 것도 이러한 점에서 심리학적 해석이 가능하다.
끝으로 심정의 연구가 확대 또는 응용될 수 있는 분야에는 심정커뮤니케이션, 심정광고 및 마케팅, 심정치료 및 상담, 심정언어학, 심정문학, 심정가족심리 등 다양하고 많다.
3. 맺음말
심정이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심리 또는 심리상태인가 아니면 문화보편적인 현상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본 논문의 입장은 이미 한국인의 심정심리학이라는 제목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전자의 입장을 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에 있다. 그 하나는 적극적 입장으로 한국인이 ‘심정에 대한’ 말을 많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며 심정토로식 또는 심정함유적 대화를 많이 한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심정에 대한 관심이 크며 심정에 대한 표상과 쉐마가 발달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에 대한 생각이 많다는 것은 곧 무엇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Wason & Johnson-Laird, 1972). 이는 한국인의 심정에 대한 큰 관심 자체가 한국인의 심정에 대한 심리적 구성과 쉐마가 발달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가능케 한다. 또한 앞에서 심정의 내포적 속성으로 지적된 정과 한이 한국인의 독특한 심리적 특성이며 구성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최상진 등에 의해 밝혀진 바, 이는 심정이 한국인의 독특한 심리나 심리상태로 가정하는 뒷받침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소극적 입장에서, 비록 심정이라는 말이나 심리현상이 다른 문화권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경험의 구성적 질과 체험양식, 설명체계로서의 표상 등에서 문화간에 차이와 특성이 있을 수 있다는 안전한 판단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시각은 최근의 정서에 대한 연구(예컨데 Harré, 1994; Kitayama & Markus, 1995)에서 지지되고 있다.
첫 번째든 두 번째 이유든 이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심정에 대한 한국문화내적 분석을 토대로 하여 문화간의 비교연구(문화비교 심리학적 접근이 아니라 문화내연구를 각 문화권에서 시행하여 그 결과를 비교하는)를 통해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본 개념화 탐색연구에서 심정에 대한 구성적이건 조작적이건 정의를 내리는 일을 회피한 이유는 심정이라는 경험현상에 대한 일상 삶적 자료수집이나 현상적 경험분석이 미흡한 상태에서 단정성을 함축하는 정의를 내릴 때 수반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작용, 예컨대, 인식론적 분석과 정의에 의한 현상의 현상학적 매몰화, 황폐화, 부분적 단서를 전체적인 현상으로 오인하는 왜곡개념화, 잘못된 정의가 차후의 연구방향과 내용을 일방적으로 유도하는 연구의 오도 등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끝으로 본 논문도 위에서 열거한 부작용을 심정에 대한 개념에서 똑같이 수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본 글을 논문이 아닌 주관적 에세이 형태로 작성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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