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순태, ‘말하는 돌’ 줄거리
세운 버스 중에서 다섯 번째서야 가까스로 보듬은 돌을 안고 버스에 탈 수 있었다. 나는 돌을 깔고 앉아서 피곤한 몸을 버스의 흔들림에 내어 맡겼다. 내 몸무게만큼이나 무거운 내가 깔고 앉아 있는 돌에 짓눌려 온몸이 오징어처럼 납작하게 으깨져 버린 것 모양 나른했다. 승객들은 내 몰골과 못생긴 돌을 비교해 가면서 번갈아 훔쳐보며 그 돌을 어디다 놓아 둘 거냐고 물었다. 나는 "글쎄요. 안방에다 모실까 합니다만." 하고 대답했다. 내가 깔고 앉은 돌을 안방에 모시고 싶다는 말은, 내 마음 속 가장 깊숙한 밑바닥으로부터 우러나온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나는 그 돌을 죽는 날까지 아버지의 육신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갓 못생기고 평범한 그 돌이, 아무도 없는 산꼭대기에서 30년 동안이나 아버지를 지켜 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엎드려 큰절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참으로 마음이 끌렸다. 아버지는 부면장네 머슴이었다. 내 생각에 월곡리 안동에서 아버지만큼 키가 크고 힘이 센 남자는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동네 앞 윗 당산의 늙은 팽나무만큼이나 우람하고 단단하게 보였으며, 명절이나 2월 초하루 머슴 날을 제외하고는 1년 내내 쉬는 날 없이 소처럼 일을 해도 앓아 눕는 때가 없었다. 나는 부면장네 사랑채 쇠죽 방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나는 항상 말뚝처럼 단단한 아버지의 팔뚝을 떠올리면서 자라서 아버지처럼 힘센 머슴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거렁뱅이가 되더라도 도회지로 나가야 한다. 도회지 거렁뱅이는 머슴보다 낫다고 말씀하시고는 열 살이 되면 도회지로 내쫓을 거라 하셨다. 그 때문에 나는 열 살이 되는 것이 죽기만큼이나 무서웠다. 하지만 기다리지도 않은 열 살은 너무나 빨리 왔고, 그 해 마을 앞 신작로에 수많은 탱크들이 으르렁거리며 지나갔다. 전쟁이 터졌다고들 했다. 며칠 후, 아버지는 이 댁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이 길 뿐이라 하시며 대창을 깎아 들고 마을 청년들과 어울렸다. 그 날 밤에 대밭에 굴을 파고 숨어 있었던 부면장 부자와, 월곡리 이장이 까치산 참나무 숲에 끌려가 대창에 죽음을 당했다. 새벽녘에야 대창을 들지 않고 휘주근하게 기운이 빠져 돌아온 아버지는 털썩 주저앉더니, 두발로 땅을 찍어 차며 통곡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아버지는 대창을 들고 마을 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이 없었다. 때가 되어도 밥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빈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같은 한숨만 계속 토하며 푹푹 찌는 쇠죽방 안에만 붙 박혀 있었다. 대창에 찔려 죽은 부면장 부자를 안산 철쭉꽃밭에 묻고 돌아온 아버지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되련님이 오실때꺼정, 우리는 이 집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헐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란다."나는 그때 전쟁이 끝나지 않고 도련님이 돌아오지 않더라고 아버지와 함께 부면장네 큰집을 지키고 살았으면 싶었다. 나는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온종일 집안에 있으면서 아버지 눈을 피해 안방이고 부엌이고 마음놓고 생쥐처럼 들락거릴 수도 있었다. 푸른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린 까치 밥이 없어지던 날, 월곡리에 있던 붉은 별을 붙인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들이 사라지자 피난 갔던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다. 친정에 가 있었던 부면장네 부인과 아이들도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으며, 서울에 있던 도련님은 푸른 제복에 권총을 차고 나타났다. 집에 돌아온 부면장네 가족들은 얼굴에 서서히 슬픔과 분노를 함께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창을 깎아 들고 한데 어울려 횃불을 밝히며 산을 오르내리던 젊은 사람들은 죽은 듯 숨을 죽였다. 그러던 그들이 어느 날 아침 우르르 부면장 집으로 몰려오더니 쇠죽을 끓이고 있던 아버지의 목에 삼으로 꼰 밧줄 홀랑이를 걸고 개 끌 듯 끌고 나갔다. "부면장 어르신 부자를 죽인 이 개만도 못한 놈아. 네놈이 부면장네 살림을 차지헐라고 눈이 뒤집혀서......""이놈들이 네눔들 죄를 왜 나헌테 뒤집어 씌우냐. 천벌을 받을 눔들아."나는 이미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아버지를 부르며 뒤따라갔다. 그러자 그 청년들이 나를 붙잡아 미루나무에 묶어 버렸다.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아버지의 슬픔과 분노가 범벅된 울부짖음만이 산울림처럼 쩌렁쩌렁 울려왔다. 월곡리 사람들은 아무도 아버지의 죽음을 말리지 않았고, 아무도 미루나무에 묶여 있는 나를 끌러주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서야 째보네 주막 아줌마가 미루나무에 묶인 나를 풀어주었으나 부면장네 집에서는 나를 안으로 들여 넣어 주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친구인 장돌식이와 함께 까치산을 올랐다. 아버지는 까치산 꼭대기에 있었다. 홀랑이에 목이 감긴 채, 잎새들 사이로 찔러 오는 햇살을 담뿍 받고 큰 소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그 날 우리들은 썩은 돌비늘이 두껍게 깔린 땅을 파고 아버지를 묻었다. 흙을 져나를 수도, 떼를 뜰 수도 없어 평장을 하고 둘이서 끙끙거리며 돌을 날라다 무덤 위에 덮었다. 나는 상여집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날이 밝기 전에 쫓기듯 월곡리를 떠났다. 나는 장돌식이한테, 월곡리 사람들을 머슴으로 부릴 수 있을 만큼 큰돈을 벌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나는 어금니를 물고 30년 동안 시장바닥에서 뼈가 굵고 손바닥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 돈을 벌었고 두 눈을 부릅뜨고 고향에 돌아갔다. 30년만에 대하는 고향이었는데도 별다른 감동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다행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나는 장돌식을 만날 수 있었다. 밤이 되자 우리들은 물레방아간이 있었던 자리의 팽나무 아래에 앉아서 줄담배를 피우며 서로 지금껏 살아왔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비록 가난하지만, 병신인 자신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사는 건강한 아내와 말 잘 듣는 여섯 아이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참 부면장네는 어떻게 사는가?" "살림이 작살이 났다네, 부면장 손자 놈이 다 쌔그라 묵었으니께."장돌식이는 아버님이 애매하게 죽은 것이 다 폭로되었다고 말을 했다. 나는 비로소 장돌식이한테 월곡리에 돌아와서 해야 할 일들을 말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우선 그 날 밤 안으로 당장 돈은 얼마를 주고라도 까치 산을 사달라고 했고, 내일 아버지를 까치산 꼭대기에 이장을 해야 겠으니 준비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특히 이장을 할 때는, 30년 전 아버지를 까치산으로 끌고 간 네 사람 모두를 인부로 쓸 수 있도록 하고, 월곡리 사람들에 한해서 누구든지 까치산 꼭대기까지 떼를 떠오면 한 장에 천 원 씩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모든 준비를 맡아서 해 달라고 장돌식이한테 1만 원 권 지폐 한 묶음을 건네주었다. 문득 30년 전 아버지가 죽던 날 밤, 부면장 집에서 쫓겨 나와 상여집에서 추위와 무서움에 떨었던 때의 기억이 달빛 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 날 밤의 슬픈 기억을 보상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 오랫동안 밤이 깊어 가는 것도 잊은 채 물레방아 옛터에 혼자 앉아 있었다. 장돌식이 돌아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사뭇 달빛을 휘저으며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노라고 하였다. 그는 내일 아침에 건너 마을에서 지관까지 오기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장돌식을 깨워 삽과 괭이를 들고 까치산으로 올라갔다. 아버지의 무덤이 보였다. 나는 그 돌무더기 앞에 털썩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버지의 유골은 거의 흙이 되어 버렸고, 두개골 부스러기만 흙속에 뒤섞여 있었다. 나는 준비해 간 백지 위에 흙덩이와 함께 두개골의 부스러기를 소중하게 싸서 비닐봉지 속에 놓았다. 그 한 줌의 뼈 부스러기를 찾아내기 위해 30년 동안을 시장바닥에서 발바닥에 불이 붓도록 뛰었던 일이 허무하기만 했다. 얼핏보니 인부들의 얼굴을 대충 알아볼 수가 있었고 아버지를 까치산으로 끌고 갔던 네 사람이 모두 보였으나 늙고 찌든 그들이 불쌍하게만 보였다. 월곡리 사람들은 개미떼처럼 까치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와 노인들도 보였다. 나는 비닐봉지 속의 아버지 유골 부스러기를 향해 마음속으로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아버님, 이제 한이 풀리십니까. 옛날 아버님을 소처럼 부리고 개처럼 천대하던 주인의 아들들이 내가 시킨 대로 아버님 무덤에 덮을 뗏장을 떠왔습니다. 그리고 자기네들 죄를 벗으로 죄 없는 아버님을 죽인 네 사람들이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이만하면 저의 한이 풀렸으니 아버님의 한도 풀리셨겠지요.' 이장 일을 모두 끝내고 나서 나는 계획대로 내 신분을 밝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을 사람들 표정에 별로 크게 놀라는 빛이 없었다. 특히 나는 부면장네 아들과, 아버지를 죽인 네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죄스러움이나 위축감 따위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월곡리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지막 남은 한 잔의 술까지 깡그리 털어 마시고 기분 좋게 흥얼거리며 내려가 버렸다. 나는 순간 까치산에서 내려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기조차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장돌식이한테 인부를 불러 아버지의 돌무덤에서 한쪽 다박솔 옆에 숨겨 놓다시피 한 못 생긴 큰돌을 버스길까지 운반해 주도록 부탁하고, 아버지의 큰 무덤 위에 올라앉아 월곡리를 내려다보았다. 장돌식이 이제야 한이 풀리느냐고 물었지만, 분명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기는커녕 되레 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만 것 같았다. 나는 마치 내 심장을 떼어서 아버지의 유골 부스러기와 함께 무덤 속에 파묻어 버린 것처럼 마음이 공허해졌다. 꿈속에서 나는 아버지를 깔고 앉아 있었다. 내 엉덩이 아래 깔린 아버지가 몹시 괴로운 듯 버둥거리더니 '이 불효 막심한 놈아' 하고 고함을 쳤다. 버스는 불빛 사이에 낡은 기억처럼 어둠이 출렁이는 도시로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