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정선 사북(舍北)에는 광부들이 살았다. 방좌수(方座首)라는 부잣집 땅지기(사음·舍音)가 있었다고 해서 사북이다. 그 부잣집 땅에 탄광이 생기고, 장정들이 팔도에서 몰려와 탄을 캐며 살았다. 장정들이 많아지자 사북에서 고한(古汗)이 분리됐다. 사람도 돈도 흘러넘쳤던지라, 사북과 고한은 한동안 개들이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문득 탄광들이 문을 닫았다. 장정들은 희끄무레한 머리카락을 이고 흩어졌다.
그러다 카지노와 스키장이 문을 열고 사통팔달 길이 뚫리면서 폐광지에는 기묘한 풍경이 등장했다. 탄가루 덜 벗겨진 잿빛 액자를 나들이복 차려입은 관광객과 문화답사꾼들이 채우고 있는 것이다. 석탄 대신에 문화와 자연을 캐러 온 그 사람들, 그 땅 이야기다. 이야기 순서는 삼탄아트마인-정암사-만항재-백전리 물레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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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이 예술로, 삼탄아트마인
정선에서 가장 컸던 삼척탄좌 정암광업소가 2001년 문을 닫았다. 봄이면 들꽃이 만발하는 만항재 고개 가는 길이다. 폐광은 12년이 지난 작년 5월 그 을씨년스러운 외형을 유지한 채 혁명적으로 변신했다.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에 새 신부가 탄생하면 광산에서는
공동으로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빌려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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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탄아트마인이다. 삼탄은 삼척탄좌, 아트는 예술, 마인(mine)은 탄광이라는 뜻이다. 3000명 넘는 광부들이 쓰던 샤워장, 화장실, 기계실, 통제실, 수직갱도가 예술공간으로 바뀌었다.
샤워꼭지마다 엑스레이 필름과 서류, 차용증이 걸려 있는 샤워장에 들어서면 가슴이 먹먹하다. 막장에서 올라온 장정들은 몸은 씻었으되 폐에 들어찬 탄가루는 끝내 씻지 못했다. 수직갱 출입구 한쪽에는 대형세탁기들이, 한쪽에는 장화를 씻었던 세화장이 있다. 세탁기에서는 작업복으로 만든 인형이 하늘로 솟구치고 세화장에는 그때 새 신부들이 결혼식날 빌려 입었던 웨딩드레스들이 하늘에서 너울거린다. 역시 가슴이 먹먹하다.
사무실을 활용한 전시장에서는 현대예술작품들이 전시중이다. 각층 유리창 안쪽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수집된 예술품 10만 점이 전시를 기다리고 있다. 작가들에게 무료로 공간을 빌려주는 레지던시 프로그램도 있는데, 침구나 가구도 작품급이다. 빈 방은 일반인 숙박시설로 사용된다. 당시 시설을 활용한 레스토랑도 근사하다.
입장료 1만3000원이 부담스럽지만 실내 1600평, 전체 1만5000평 부지를 채운 예술적인 충격은 입장료 값을 하고 남는다.
정암사 적멸보궁
한반도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정암사
삼탄아트마인에서 만항재쪽으로 800m만 올라가면 작은 절이 나온다. 정암사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이 절은 한반도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셨기에 법당에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 절이다.
열목어가 사는 작은 개울을 건너 10분 정도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진신사리를 모신 수마노탑이 있다. 적멸보궁 뒷산이다. 흔히 보는 화강암이 아니라 석회석 벽돌로 쌓았다. 가만히 서서 탑에 걸린 풍경(風磬) 소리를 들으며 앞산을 바라본다. 대개 한국 절은 대웅전 정면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최고다. 정암사에서는 수마노탑이 바로 그 자리다.
설국(雪國) 만항재
설국(雪國)으로 변한 만항재. 수직으로 뻗은 나목(裸木)들과
평평한 눈밭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만항재는 정암사에서 6km 떨어져 있다. 포장도로가 있는 가장 높은 고개다. 해발 1330m다. 지금 만항재는 설국(雪國)이다.
잘 녹은 아스팔트 양옆으로 온통 흰색이다. 수직으로 뻗은 나목(裸木)들과 평평한 눈밭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휴게소 주변에 작은 공원이 있다. 휴게소 직전에는 함백산으로 가는 도로가 있다. 제설작업이 안 돼 있어서 사륜구동차량이 아니면 진입금지다. 그 길 끝에 함백산 등산로가 있다. 시간이 없는 사람은 고개 주변 눈세상에 만족하기로 한다.
120년 된 백전리 물레방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전리 물레방아
만항재에서 내려왔으면 이번에는 사북읍에서 화암면쪽으로 들어가 물레방아를 만난다. 고개에서 정선, 사북쪽으로 25km 거리에 있다.
엄동설한에도 굳이 만나야 하는 이 물레방아는 1890년에 만들어졌다. 한국 최고(最古)다. 화전민들에게 필수불가결한 도구였던 방아는 정선아리랑 가사에도 나온다.
방아계 계원들 관리 덕분에 지금도 사용하는 현역이다.
온천지가 얼어붙었지만 물레에 떨어지는 물은 수량도 많고 거세다. 얼음을 젖히고 콸콸 떨어지는 그 기운을 느껴본다.
보너스, 59번 국도
정선 단임골 하류의 전경
기실, 물레방아까지 순례하면 날은 어둑하고 몸은 피곤하다.
사북읍이나 고한 하이원리조트 주변에서 하루를 묵는다. ‘아티스틱’한 밤을 원한다면 삼탄아트마인 레지던시를 이용한다. 허니문 같은 화려한 밤을 원한다면 백전리에서 18km 떨어진 펜션을 추천한다. 38번국도 ‘민둥산역-멀미APT’ 이정표를 보고 빠지는 이 펜션 이름은 드위트리펜션이다. 높은 천정을 가진 독채룸 사이가 풀장이라, 여름철에는 여러 뮤직비디오에서 마치 몰디브인 척 등장하는 곳이다.
어디가 됐든 다음날 느긋하게 일어나 59번 국도를 탄다. 영동고속도로 진부IC까지 이어지는 한갓진 길이다. 정선 남쪽에서 만났던 신작로들과 달리 길은 좁고 많이 구부러졌다. 2, 7로 끝나는 날에 열리는 정선 5일장도 만난다. 동강을 지나 오대천 옆으로 난 숙암계곡도 만난다.
숙암교 건너 왼쪽으로 단임골이 있는데, 시간이 되면 ‘정선에서 가장 정선스러운’ 단임골 방문도 좋겠다. 길에 덮인 아스팔트가 시멘트로, 시멘트가 흙이 되더니 급기야 눈 속으로 사라지는 7km 시골길 끝에 단임골이 있다. 소설가에 약초꾼에, 세상 악다구니 싫어서 숨어든 사람까지 이 한적한 마을사람들 사연도 계곡에 흘러넘치지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대신 선한 마음 품고 눈밭 밟고 산보하며 조심스럽게 문 두드려 직접 그 분들에게 이야기를 청하시라.
여행 수첩
가는 길(서울 기준, 추천 일정순)
중앙고속도로 제천IC→38번국도 영월 방향→느릅재~고한터널까지 터널 12개→상동·정암사 방향→삼탄아트마인→1km 정암사→정암사 오른쪽 414번 지방도 6km 만항재→38번국도로 돌아와 사북·영월 방향→사북읍 한국병원삼거리에서 화암면 방향 11km 백전리 물레방아(폐교된 용소분교 지나 오른편)→한국병원삼거리에서 정선방면으로 북상하면 진부IC가 나온다. 도로번호는 59번.
대중교통
1.버스:동서울터미널에서 고한, 사북 공영버스터미널까지 하루 34회. 공영터미널에서 삼탄아트센터 및 정암사까지 농어촌버스 25분, 못골정류장 하차. 백전리 물레방아는 공영버스터미널에서 백전1리행 버스 승차 후 백전2리에서 서원리행 버스 환승.
2.기차:청량리역에서 고한역까지 하루 6회 운행. 삼탄아트센터는 역에서 못골행 버스.
묵을 곳
1.삼탄아트마인 레지던시:11만원~22만원. 입장료 및 시설이용료 포함. (033)591-3001. 월요일 휴관.
2.드위트리펜션:26만원부터. 조식, 아로마 입욕용품, 하이원 리프트 할인권 포함. (010)5251-7531
3.고한읍내 저렴한 숙소 다수. 정선 관광사이트에서 다양한 조건으로 숙소 검색 가능.
먹을 곳
1.삼탄아트마인 레스토랑 832L: 스테이크부터 설렁탕까지 가격대 다양. 20인 이상 단체 비비큐 예약 가능
2.고한읍내 메밀촌막국수: 스키어들 사이에 맛집으로 소문난 곳. 막국수 및 곤드레밥. (033)591-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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