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인 용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그녀가 남긴 영혼의 기록
노란 옷 입은 / 작은 벌은 / 엉덩이에 칼 /
군인 흉내 내며 / 뽐내고 있네 ―「벌」
모락모락 모락모락 / 검은 연기가 / 하늘궁전에 올라가면 /
하늘의 하느님 연기가 매워 /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네 ―「비」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끌려가기 전, 경성의 소학교 시절에 이미 동시 4편 ―「벌」「비」「전단」「쥐」―을 썼던 문학소녀였다. 그녀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을 노래했다. 일본 NHK 프로듀서 출신 작가 다고씨는, 2011년 월간 『문학사상』에 기고한 논문 「비극의 공주가 남긴 혼의 외침-알려지지 않은 천재 동시 작가 덕혜옹주」란 글에서 4편의 동시를 소개했다. 그중에서 「벌」과 「비」는 일본 근대음악의 선구자인 미야기 미치오(1894-1956)가 동요로 만들었다.
덕혜옹주의 동시에서는 시각적 이미지가 은유를 통해 잘 전달되고 있다. 또한 마음속에 내재 된 자신과 민족의 슬픈 현실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벌」에서는 벌을 군인에 비유하고 있는데, 칼을 차고 뽐내는 군인은 조선을 힘으로 제압한 일본군을 나타낸다. 「비」에서는 옹주 자신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이 시에서 하느님은 그녀의 아버지 고종 임금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동시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높은 수준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고종황제의 막내딸 덕혜옹주, 똑똑하고 재주가 많아 황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던 아이, 그녀는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가장 외롭게 생을 마감했던 조선 최후의 황족이었다. 덕수궁의 꽃이라 불렸던 덕혜옹주는 태어난 순간부터 철저히 정치적 희생자로 살아가게 된다. 고종황제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라던 13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후, 일본으로 끌려가면서 그녀의 삶은 송두리째 휘둘린다. 일본에서 덕혜옹주는 모든 조선인과의 접촉금지를 당하는 등 냉대와 감시로 점철된 소녀 시절을 외로움과 싸우며 홀로 보낸다
일본은 철저하게 덕혜옹주를 무너뜨린다. 쓰시마 섬 도주(島主)인 소 다케유키 백작과 덕혜옹주의 강제 결혼은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돈과 명예만 보고 덕혜옹주와 결혼한 일본인 남편은 그녀가 받아오던 조선 황실의 특권과 경제력마저 상실되자 덕혜옹주를 버리고 일본인 여자와 재혼한다. 그러나 덕혜옹주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절망적이고 엄혹한 현실에 시달리던 덕혜옹주는 결국 정신질환을 앓게된다. 10년 넘도록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홀로 지내오던 중 덕혜옹주의 하나뿐인 딸마저도 실종되고 만다.
조선 황실에서 맺어준 정혼자와 인연도 끊고 강제로 일본인의 아내가 되었다가 종국에는 미친 여자로 몰려 정신병원에 수용된 덕혜옹주,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것은 조국에 대한 믿음이었다. 1945년 덕혜옹주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은 해방이 되었지만 그녀는 점차 역사 속으로 잊혀 갔다.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권력층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황족들을 외면했고 덕혜옹주는 국적도 없이 타국에서 유령처럼 떠돌았다.
덕혜옹주는 독살당하지 않으려고 날마다 물병에 물을 가지고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어떤 때는 학교에 가기 싫어 하루 종일 음식을 먹지도 않고 누워있기도 했고 거리를 방황하기도 했다. 일본에는 덕혜옹주의 오라버니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가 있었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일본인들의 꼭두각시처럼 살던 오라버니 부부도 그녀를 돌봐줄 수 없었다.
1962년 마침내 덕혜옹주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지 37년이 지나서야 쓸쓸히 조국의 품속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켜켜이 쌓인 절망과 슬픔과 고통이 뒤범벅이 된 인생의 뒤안길에서 차라리 조국에 대한 그리움은 사치였을까. 김포공항에서는 어릴 때 덕혜옹주의 유모였던 변복동(당시 72세)씨가 큰절을 올리며 그녀를 붙잡고 통곡하지만 덕혜옹주는 유모를 알아보지 못한다. 덕혜옹주는 한때 고종의 집무실로 쓰였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다 1989년, 77세의 나이로 한맺힌 삶을 마감한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삐뚤삐뚤 쓴 짧은 낙서가 덕혜옹주가 남긴 유일한 글이었다. 그녀는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체념했지만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대한민국 우리나라를 잊지 못했다.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끌려가기 전 경성의 소학교 시절 썼던 두 편의 동시 「전단」과 「쥐」도 일본인 작곡가 구로사와 다카토모(1895-1987)가 동요로 만들어 일본 여러 도시의 아동들과 교육가들에게 순회공연을 하며 알렸다고 한다.
남쪽 하늘에서 날아 온 / 커다란 날개 단 비행기가 /
전단을 수도 없이 날리고 있다 / 금색 전단 은색 전단 /
난 그걸 갖고 싶지만 / 바람의 하느님이 데리고 가네 /
어디로 가는지 보고 있자니 / 솔개 옆에서 놀고 있네 ―「전단」
따라락 또르륵 / 쥐들의 난리법석 /
쥐야 쥐야 무얼하니 / 오늘은 집 안의 대청소 /
그래서 난리 부리며 / 있는 게로구나― 「쥐」
덕혜옹주의 비극은 단순히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겪었던 불행한 역사의 한 페이지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던, 대한제국 황실의 풀잎 같던 귀여운 소녀 덕혜옹주가 겪은 비극에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이유도, 그녀가 살아온 질곡의 세월이 우리 자신들이 일제 강점기에 당한 고통과 해방 뒤에 이어진 기막힌 현실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대마도 여행 둘째 날, 이즈하라에 있는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를 찾았다.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는 한국 관광객들을 보며 내 생각은 혼란스러웠다. 대마도 백작과 강제 결혼을 하고, 설상가상으로 그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고독하고 불행한 인생을 살았던 덕혜옹주였다. 그런데 자신의 그림자도 남기기 싫었을 대마도에 결혼 기념 봉축비가 웬 말인가. 그것도 조선 사람들이 그 기념비를 세웠다니. 슬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나 역시,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앞에서 영혼 없이 사진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