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708/고후 39
그리스도의 종 (고후 11:23-27)
2019-9-11
그리스도의 종된 성도 여러분,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명을 위해 고난받고 수고합니다.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유혹할 때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를 썼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약혼자로서 재림의 날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이 순결함과 거룩함에서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바로 가르치고 다시 되돌리기 위해서 바울은 “나와 같은 사람이 참된 사도다. 내가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다.” 부끄럽지만 자기를 자랑합니다. 11장에서 12:13까지 이렇게 자랑합니다. 11장에서는 첫째, 거짓 사도들은 말솜씨를 자랑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바로 전한 것을 자랑합니다. 둘째, 거짓 사도들은 돈을 위해서 교회 일을 했지만, 사도는 그 거짓 사도를 막기 위해서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1-15절까지 이렇게 두 가지를 자랑했습니다. 16절 부터는, 셋째로, 고린도 교회에 온 거짓 사도들은 유대인임을 자랑하지만,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넷째로 오늘 본문, 23-33절에서, 사도는 거짓 사도들 보다 더 많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수고하고 고난받고 섬긴 것을 자랑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직분자,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사도 바울 처럼 그렇게 큰 고생을 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직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수고합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도 직장에서 고난과 수고가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증거입니다.
1. 그리스도의 직분자는 종으로 섬긴다 (23절).
첫째로 직분자는 종으로 섬깁니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직분자들/종들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 처럼 내가 말하는데, 나 자신도 더욱.
. 22절에서 출신 민족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스라엘인입니까? 나도” 이렇게 말했다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직분자입니까? 나 자신도 더욱”이라고 합니다. 바울과 거짓 사도들은 유대인이라는 점에서는 똑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직분자로서 사도 바울 “자신은 더욱”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22절에서, 유대인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음” (21절), 바보스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섬긴 것을 자랑하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라고 더 나쁘다고 말합니다
왜 직분자로 섬기는 것을 자랑하는 것을 정신나간 것이라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종이요/직분자이니까,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하는데도 자기를 자랑하니까, 정신나간 것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종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치기 위해, 할 수 없이 자랑합니다. 우리도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하지만,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간증할 수 있습니다.
직분자는 디아코노스, 종을 말합니다. 집에서 일하는 종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에 종으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0:4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섬기려 하고, 즉 종이 되고,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대신 죽었습니다. 죽기까지 종처럼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들도 그리스의 종으로서 섬기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금은 하늘에서 몸으로 계시면서 다스립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도를 남겨 두셨고 목사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사도들을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사도들은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종으로 섬기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갑니다. 거짓 사도들은 아름다운 말로 고린도 교인들의 인정을 받고 인기를 끕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은 20절에 고린도교인들을 종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때리기도 하고 교인들의 재산을 삼키고 돈 욕심이 많습니다. 14절에, 사단의 직분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자기 종으로 삼기 위해 수고합니다.
그러나, 사도도, 목사도, 모든 성도도,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서 종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2. 사도는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고난받고 수고했다 (24-27절).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이렇게 했습니다.
23절,---더 넘치는 수고들에서, 더 넘치는 투옥들에서, 지나치게 많은 매들에서, 많은 죽음들에서.
수고들을 한 것도 거짓 사도들 보다 더 넘칩니다. 감옥에 투옥된 것도 더 넘칩니다. 매를 맞은 것도 지나치게 많았고 죽음들도 많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고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이 35년쯤 되고 고린도 후서를 쓴 것은 55년 쯤이니까, 지난 20년 동안 받은 고난을 말합니다.
1) 극심한 고통과 죽음들
수고에 대한 이야기는 27절부터 다시 말합니다. 이 편지를 쓸 때까지 감옥에 갇힌 것은 사도행전에서는 16장에 빌립보 감옥에 갇힌 것 한 번만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여러 번 감옥에 갇혔습니다.
또 매를 여러 번 맞았습니다.
24 유대인들에 의해 사십 대에 하나 모자라는 매를 다섯 번 당했습니다.
25 세 번 태장 맞았고
유대인들로부터 5번 매를 맞았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은 이스라엘 땅에도 있었고 지중해 근처 여러 도시에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에서는 큰 잘못을 한 사람들에게 매를 때렸습니다. 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지 먼저 회당에서 유대인에게 전도했기 때문에 거기서 매를 맞았습니다. 아무 잘못이 없고 그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하다가 매를 맞았습니다.
신명기 25:3은 40대 까지 때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매를 때리는 사람이 잘못 계산하여 40대를 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를 39대까지만 때릴 수 있도록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양가죽을 3겹으로 붙여서 채찍과 비슷한 매를 만들었습니다. 매를 맞다가 똥 오줌을 싸는 경우도 있었고, 죽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주 모욕적인 벌입니다.
이렇게 39대 맞는 힘든 벌을 바울은 지난 20년 동안, 5번이나 맞았습니다. 이렇게 매를 계속 맞으면서도, 계속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회당에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산헤드린 공회에서 주먹으로 맞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도 그리스도 처럼 맞으면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섬겼습니다.
25절에 태장은, 로마 관리들이 주는 벌입니다. 나무 막대기를 여러 개를 묶은 몽둥이로 때립니다. 아주 수치스러운 벌이기 때문에 로마 시민은 태장으로 맞지 않도록 법으로 정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지만, 사도행전 16장에서 빌립보에서 태장으로 맞았습니다. 전에 로마 군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막대기로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종 바울도 3번이나 계속 태장으로 맞았지만, 로마의 식민지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25절, 한 번 돌 맞았고
사도행전 14:19에서는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죽은 줄로 알고, 성 바깥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시 살아가 더베로 가서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던 스데반을 돌로 쳐서 숙였습니다. 이제 거꾸로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일이 생겼습니다. 자신은 돌을 맞아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냥 죽었다면 하나님 나라의 안식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한 번 돌맞고 고통당하면서 순교했습니다.그러나, 바울에게는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기에 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계속 매맞고, 고통당하고 계속 해서 순교하면서, 복음 전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바울은 앉은뱅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으로 고쳐주었지만, 자신은 돌에 맞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남은 구원하였는데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느냐? 십자가에서 내려 와서 우리로 보고 믿게 하라” (막 15:31).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 분 자신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 바울도 남을 구원하기 위해 그는 돌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종으로 섬겼습니다.
갈 6:17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매를 맞고 돌맞아 남은 상처가 온 몸에 있었던 것을 두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가 받은 상처 때문에 원망하지 않고 그리스도 앞에서 자부심을 가집니다. 또 다시 상처받을까 겁내고 물러 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몸에 고통의 상처가 계속 나더라도 충성되게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25절, 세 번 파선당했고, 하루는 온 밤낮에 깊음에서 지냈으며
세번 배가 파선해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한 번은 하루 밤낮, 즉 24시간 동안 깊음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망망한 바다에서 나무 조각을 잡고 있다가 살아 났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사도로 부름을 받은 다음, 최소한 12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2년에 한번은 죽었다가 살아 났습니다. 고린도후서 4:11에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 분의 종들을 죽음과 고통에 던집니다. 그러나 근질기게 살아나게 하셔서 고통과 죽음을 참으면서 계속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섬기게 하십니다. 고후 1:9-10에서 말합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 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 다시 죽음의 고통이 오겠지만 담담하게 계속 맡겨진 직분을 다했습니다.
저는 목사가 된지 10년 되었지만 이런 죽음을 겪어 본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통을 당할까 두려워 하는 저의 모습을 보고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도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과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직분을 다할 때, 사람들의 반대 때문에 죽도록 힘들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고난을 피하려는 마음 보다 하나님이 살려 주시는 한, 계속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로서 신실하게 직분을 다하기 바랍니다.
2) 많은 여행들의 위험
26절은 “많은 여행에서” 당한 위험들을 말합니다. 전도하기 위해 지중해를 여행하는 것이 위험의 연속이었습니다. 여행(26절)”과, “수고” (23, 27절)는 예수님께서 먼저 하신 일입니다. 요한복음 4:6에서 그리스도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냥 앉으셨다.”고 가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하신 전도 여행과 수고를 사도 바울은 계속 해서 합니다.
26 많은 여행들에, 강들의 위험들에, 강도들의 위험들에, 동족으로부터의 위험들에, 이방인의 위험들에, 도시들에서의 위험들에, 광야들에서의 위험들에, 바다에서의 위험들에, 거짓 형제들에서의 위험들에
사도 바울 인생 전체가 선교를 위한 여행이었고 위험이 있었습니다. 위험은 몸을 좀 다칠 그런 위험이 아니라, 배가 파선된다든지 (눅 8:23)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는다”와 함께 쓰이는 단어입니다. (고전 15:30,31). 날마다 죽음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첫번째 죽음의 위험은 강들과 강도들로부터 왔습니다. 강에서 배를 타고 다닐 때, 갑작스레 물이 불어나서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강을 따라 배타고 여행하면서,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물건을 빼앗기도 목숨의 위협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강도들 두 명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듯이, 바울도 강도들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둘째로, 여행 중에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동족과 이방인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한 유대인 회당들 마다, 바울을 저항했기에 위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모아서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에배소에서 우상 인형 만드는 이방인들이 경기장에 모여 몇 시간 동안 바울을 죽이라고 소리 치면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스도도 유대인들이 로마 사람에게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셋째로, 곳곳에서 위험이 있었습니다. “도시들에서의 위험들에, 광야들에서의 위험들에, 바다에서의 위험들에” 가는 곳마다 위험을 지나갔습니다.
넷째로, 위험 중 가장 큰 위험은 “거짓 형제들”의 위험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믿지 않는 교인들이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에서는 할례를 꼭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구원받는 은혜를 헛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지금 고린도에서는 거짓 사도들이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다른 위험들은 사도 바울의 생명이나 몸에만 위협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거짓 형제들은 사도가 세운 교회 자체를 위험하게 했습니다. 바울의 영혼을 죽일 듯한 그런 위험이었습니다. 그리스도도 제자인 가롯 유다의 배반을 당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성경을 가장 잘 아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부터 조롱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인 사도 바울도, 교인들로부터 위험과 고통을 당하면서, 계속 복음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23절에 말하는 “많은 죽음들”과 그 고통을 계속 당했습니다. 돌을 맞고 배가 파선당하면서는 완전히 죽는 줄 알았는데 살아났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오는 죽음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까지도 3년동안 사역할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계속 죽이려 했습니다. 갈릴리의 파도가 그리스도께서 탄 배를 물에 빠뜨릴 뻔 하면서 계속 죽음의 위험 가운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계속 죽음의 위험이 있었고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이 고통과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사도행전 17장은 빌립보에서 태장을 맞고 감옥에 갖혔을 때,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행 16:25)고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찬양할 때, 고린도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서 ‘두려워 하지 말라.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느니라.” (행 18:10)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라는 곳에 계속 가면서, 죽음의 고통이 있을 때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주님은 바울을 만나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죽음과 위협을 당하면서도 사명을 향해서도 충성되게 나갔습니다.
에배소서 6장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우리를 지키는 갑옷과 같다고 합니다. 지금도 인생의 여행길에, 곳곳에 많은 위험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거짓된 사람들로부터 심한 정신적 고문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에서,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송할 때 주님은 새롭게 우리를 만나 시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십니다.
3) 생활의 수고와 생활의 고통들
사도 바울은 먹고 사는 문제, 의식주를 위해서도 많이 수고하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요한목음 4장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곤함과 수고를 그리스도의 종도 계속 합니다.
27 수고와 고역에
많은 자지 못함 들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에서
많은 금식들에서
추위와 헐벗음에서
바우은 먹을 것을 벌기 위해, 자기 손으로 일하며 많은 수고와 고역을 한 것입니다 (살전 2:9, 살후 3:8).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살전 2:9는 말합니다.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리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부담을 주기 않기 위해)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낮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밤에는 자기의 천막 만드는 기술로 밤늦게 까지 일했습니다. 졸음을 참고 일했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해서 굶주리고 목마를 때도 복음 전하는 일을 먼저 했습니다. “많이 금식했다.”는 것은 기도하기 위해 금식한 것 보다는, 먹을 것이 없어서 그냥 굶었던 것을 말합니다.
추위와 헐벗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따뜻한 옷을 살 돈이 없어서 추위를 참았습니다. 낡고 찢어진 옷을 입었습니다. 헐벗음과 추위는 사도가 죽을 때 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쓴 지 10년 뒤, 65년 경에, 사도는 곧 순교를 앞두고 디모데에게 편지합니다. “드로아에 두고 온 외투를 가져 오라.” (딤후 4:13). 추위에 떠는 애처로운 노인의 음성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할 때, 비싼 브랜드 옷을 입으려고만 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자랑하기 위해 비싼 사치품을 사려는 마음도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그리스도의 종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삶을 삽니다. 그리스도 처럼 수고하면서, 굶기도 하고 의식주에서 부족함이 있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28절에 “이 외의 것들을 그만 두겠고” 이 외에도 많은 죽음과 고통과 위협이 있었지만, 그만 말하겠다고 합니다. 사도는 이렇게 힘든 일들에 대해 그냥 큰 일이 아닌 것 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직분자, 즉 종”으로서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사도는 죽다가 살아 나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그 위험 가운데 살았습니다. 춥고 배고프면서도 복음 전하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바울이 그 죽음과 고통을 좋아했다면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죽음이 있는 곳, 위험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가라고 명령하시니까 갔습니다. 사도를 핍박하는 그 사람들, 그 도시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니까 거기로 갑니다.
오늘날 목사들에게는 이렇게 큰 고통은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에도 이런 정도의 고통은 없습니다. 또 반드시 사도 바울과 똑 같이 고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와 같은 그런 능력이 있지 않으니까 그런 고난을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이므로, 어떤 종류이든지 고난과 고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은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10:34,35).
우리 모두는 각자에게 주신 사명과 직분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너무 힘들면 어떻게 하나, 사명을 다하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지 맙시다. 주님 주신 사명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어려움을 감당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다면 힘든 가운데서도 계속 살려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난과 고통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간증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직분을 다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거룩한 백성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할 사명이 있습니다. 학생들과 청년들은 지금 가난하고 부족해도 앞으로 좋은 남편과 아내,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기 위해 계속 수고하며 준비합시다. 청년들은 보수가 적은 곳에서라도 일단 수고하며 일하면서 땅을 다스리기 시작해야 합니다. 좁은 월셋방에서라도 결혼하여 자녀를 놓고 가정을 세우는 것은 참으로 귀합니다. 자기 손으로 땀흘려 가정을 세우고 가족을 부양하는 그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로서 직분자로서 고생하고 수고합니다. 이 모든 사명을 다하기 위해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 그리스도의 고난와 우리의 섬김에 대해 잘 배웁니다. 우리의 어려움 가운데 지켜 줄 것을 기도하고 찬송하며 그리스도의 위로를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시대의 문화는 거짓 사도들이 했듯이, 남의 섬김을 받고, 그냥 부자가 된 것만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섬기기 위해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종들입니다. 그리스도도는 그 분의 종 바울을 계속 죽음의 위험 속에서 고난받게 하셨지만 끈질기게 살아 남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온 세계의 복음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과 불편을 감사합시다. 가정을 세우기 위해, 직장과 학교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고통을 당하는 것은 수치스런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수고 가운데,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섬기는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위로주시고 힘주십니다. 이 수고와 고난 가운데 십자가를 지시고 먼저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생으로 환영할 그날 까지 우리 직분을 위한 수고와 고생을 즐겁게 감당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