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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Vorspiel einer Philosophie der Zukunft. 1886)(Par-delà le Bien et le Mal) 해제
P. Champromis, Les Oeuvres I, Dictionnaire, PUF, 1992, p. 2006-2007. (P.2190.)
샹프로미(Pierre Champromis, s.d.) 프랑스인으로 니체 탐구자. 독일 본에서(1952-1953) 그리고 하이델베르크에서(1954-) 가르쳤다..
-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쉰여섯)
권력의 의지(Willen zur Macht)(권능의 의지(La Volonté de puissance, The Will to Power)은 여동생(Elisabeth Förster-Nietzsche 1846–1935)과 니체의 친구인 가스트(Peter Gast, 본명: Johann Heinrich Köselitz, 1854–1918)에 의해 정리된 글들이다(1888년에 쓰다만 글이라 한다) - 기획된 제목 La Volonté de puissance, essai de transmutation de toutes les valeurs (Der Wille zur Macht - Versuch einer Umwertung aller Werte).
- 샹프로미는권능의 의지(Willen zur Macht)가 1880년대에 쓰여졌으며, 일반적으로 1888년 쯤에 멈추었다고 한다. 이 책(1886) 아래 둘째 장에서 ‘권능의 의지(la volonté de puissance)’가 등장한다. (52NKJ)
** 이 저술 넷째 장에서 두 가지 도덕을, 고상한 자의 도덕과 비천한 자의 도덕을 이야기하는데, 대부분은 헤겔철학의 주인과 노예를 연상하게 한다고 한다. 전자에서 “잘해-허술해(bon-mauvais, 좋다-나쁘다)”는 수직적 구조에서 구축적 설명으로, 그리고 후자에서 “좋다-짓궂다(bon-méchant, 착해-냉혹해)”는 수평적 평면에서 구성적 설명으로 보면 어떨까 한다. - 들뢰즈는 전자에서 위계의 질서이며 폴리스적 체계를, 후자에서 결(파장)의 확장으로보아 노마드 체계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52L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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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Vorspiel einer Philosophie der Zukunft. 1886)(Par-delà le Bien et le Mal) - (Pierre Champromis, s.d.)
이 작품은 니체가 경구의 방식으로 회귀를 표시해 준다. 제목이란 가끔 반대의미를 불러 온다. 이 제목은 니체가 모든 도덕 저편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en soi)인 것처럼 생각되어 온, 또한 오늘날에 있어서 좋다는 것과 나쁘다는 것과 동일시되어 온, 온선(un Bien)과 온악(un Mal) 저편에 위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장은 “철학자들의 편견들”을 비판한다. 가장 심각한 편견은 진리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 가치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사람들은 인간이 거짓[위조]되게 정돈[배열]된 세상에서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인간에게 오류라는 것이 현존의 조건이라고 본다. 그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진리의 의지를 공포하였으나, 그들의 사유는 도덕적 결론들에 의해 방향 잡혀있었다. 자신들은 그 도덕적 결론들에 이르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의지의 관념과 자유의 관념에 관한 반성을 여기서 똑같이 찾아낸다. 의지적 작동(l’acte)은 복합적 사실이며, 그 복합적 사실에서 의지가 명령하기 때문에, 의지는 원인이며 자유롭다고 믿게 된다.. “자연(본성)의 합법성”이라는 관념은 단지 법률적이고 도덕적인 관념의 인간형태적[의인적] 투사일 뿐이다. 실제 상으로 현상들의 규칙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 다음이란, 동일한 물리적 요소들이 현재로서 발견될 때, 그 요소들의 잠재적 연관들이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정립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장[둘째 장]에서 니체는 권능의 의지에 대한 자기 이론을 소개한다. 만일 사람들이 심리학적 현상뿐만이 아니라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신체적)인 현상들을 이러한 의지에 의해 설명하기에 이른다면, 그의 일체(의지의 총체) 세계는 “권능의 의지”로서 나타날 것이고 인식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章)은 “자유로운 정신”에 몰두 한이 정신은 “녹색 초원”의 이상을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적 관념들의 대표자들인 “자유사상가들”에 반대이다. 그들의 관념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안전(la sécurité)과 평안(le bien-être)이라는 관념이다. [니체가 주장하는] “자유로운 정신”은 다음을 안다: 즉 인간이 아주 다른 현존의 조건에서도, 그리고 “선량한” 자격(성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형편없는(불량한) 자격(성질)들에게도 다행스럽게 발전된다는 것이다.
“도덕의 자연 역사(자연사)”는 그래도 행해지고 있으며, 철학자들은 자기 시대의 도덕의 “기초를 놓고자” 유념하였다. 니체 자신은 우리들 시대의 도덕을 고발한다: 그것은 “무리의 도덕”(une morale de troupeau)이다. 그 도덕은,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와 닮은 자들과 같은 동일한 권리들과 동일한 열망들에게 맞는 완전한 무리의 한 짐승으로[각 개인이 짐승처럼] 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철학자들의 도래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가치를 되돌려놓고 인류를 반대되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다음 장[셋째 장]은에서 새로운 철학자들에게 몰두한다. 우선 그들은 지식인(le savant, 과학자)을 제 자리에, 인도될 필요가 있는 인식 도구의 자리에, 다시 놓아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비판가들이며 역사가들이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은 그들의 고유한 임무의 준비일 뿐일 것이다. 진실한 철학자의 준비란 ‘가치를 규정하는 것’이다.
「인민들과 조국들」에서 니체는 유대인들과 프랑스인들에 대해 말한다. 유대인에 관한 한, 독일인들이 반유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유대인을 거부하는 것은 잘 못이다. 프랑스인에 관한 한, 프랑스 인들은 17세기에 감정과 풍습에서 “귀족(noblesse)”의 유일한 표본을 제시했으나, 허약자들이 된 이래로 의지 속에서 문화의 도식(도면) 위에서 가치만을 간직할 뿐이다. 조국들 저 넘어서, 유럽은 오늘날 통합[통일]되기를 바란다.
마지막 장[넷째 장]에서 “무엇이 고상한가?” 니체는 사회적 도덕적 이상을 진술한다. 인간다운 전형을 세우는 모든 고양[앙양]은, 니체가 말하기를, 귀족정의 사회의 작품, 말하자면 존재들의 자연적 위계[등급]을 믿는 사회의 작품이다. 결국에는 그러한 사회에서 지배 계급은 열등 계급자들에 마주하여, 이들[열등] 각자가 고양하려고 밀고 가는 “거리감 있는 정념(un pathos de la distance)”을 겪는다. 이 (거리감 있는) 정념은 이들 각자가 스스로 고양되도록 밀어부친다. 그러고 나서 니체는 도덕적 영역으로 나간다. 두 가지 도덕이 있다: 하나는 영주들의 도덕이며, 다른 하나는 노예들의 도덕이다.
첫째 도덕 영역에서 근본적인 대립은 “잘해-허술해(bon-mauvais, 좋다-나쁘다)”. “허술한”자는 사람들이 오해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는 느슨하고(비겁하고) 천박하고, 거짓말쟁이다. “잘한”자는 고상한[귀족적]인간이다: 그는 이렇게(이처럼) 그 자신이 스스로 느낀다. 그의 도덕은 그의 본성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une glorification)이다, 즉 삶의 충만, 타자에 관해서처럼 자신에 관한 훈련된 능력, 모든 부드러움[연함]을 혐오하는 강건함[딱딱함] 등을 행하는 것이다. 그는 과거와 전통을 존중한다. 결국 그는 자기 짝들에 대해서 의무들만을 인정한다. 의 이면[내막]을
둘째 도덕 영역에서, 노예들의 도덕에서, 덕목들은 억압받는 현존을 가볍게[경감]해주는 덕목들이다: 즉 연민(la pitié), 상부상조(une entraide), 인내(une patience), 운력(un labeur, 수고) 등이다. 여기에서도 “좋다-짓궂다(bon-méchant, 착해-냉혹해)”이라는 대립이 생겨난다. “짓궂다”는 능력있는 자에 속하고, 말하자면 “착하다”는 고상한 도덕으로부터 이다. 이 장(章)의 마지막은 오늘날 어떻게 정신의 인간이 고상하게 될 수 있는가를 제시한다.
1887년에 니체는 즐거운 지식(Die fröhliche Wissenschaft („la gaya scienza“ Gai savoir), 1882)에 다섯째 부분을 첨가한다. 사람들은 여기서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을 발견한다. 이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기계적이고 불합리한 세계만을 제공하는 의미들과 과학자들에 대해 항상 두려움을 갖는 자들이다. 사람들은 이로부터 특히 “신의 죽음”에 관한 것에 집착할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지적인 정직성 때문이고, 그것의 귀결들은 그것의 토대를 상실했던 우리 도덕의 붕괴이기도 하고, 그것의 의미를 상실했던 세계에서 니힐리즘의 상승이기도 하다. (P. Champromis)
(3:15, 52NKJ)
#참조1.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1886) 넷째부분, n. 146,
[이 유명한 구절은 주지주의자들의 싸움에 쓰인 것 같다. 관념론자 대 주지주의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달리 말하기, 새로운 삶이 “디오니소스 찬가”일 것이다. / 저편(Jenseits, Par-delà)이란 의미가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이 저세상(Au-delà)가 아니며, 이편도 저편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달리 사는 방식이 있다는 것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53LLI)]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본성이 이성에 앞서 불가분하게 존재 한다는 의미이다 라고 해설이 붙어있다. / (ma) 괴물(Ungeheuern) 즉 추론과 싸우는 자는 추론 자가 될 수밖에 없다. ‘권능(심연)의 발현은 다른 길이라’라는 의미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달리 말하기, 달리 살기, 다발로 뭉치기. 이념과 이성의 주장자들(괴물들)과 싸워 봐야 주지주의자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내재주의자가 되라.]
“Wer mit Ungeheuern kämpft, mag zusehn, daß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r Abgrund auch in dich hinein.”
(fr. trad. Celui qui lutte contre les monstres doit veiller à ne pas le devenir lui-même. Et quand ton regard pénètre longtemps au fond d’un abîme, l’abîme, lui aussi, pénètre en toi. 146.- ‘chpitre 4. Maximes et intermèdes’)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 Jenseits von Gut und Böse, ‘Viertes Hauptstück[4장]. Sprüche und Zwischenspiele’ Nr. 146 (1886) - [Abgrund(아프그룬트), 영어로는 abyss(어비스) fr. un abîme. ]
- 이 인용구를 대구(對句)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니체는 그리고(Und)라고 했는데, 프랑스 번역문 중에 대부분은 문자 그대로 그리고(Et)인데, 나처럼, 그런데(Or,)도 있구나. 이 후자(Or)에는 Marc Halévy: Éloge des Esprits Libres: De Lao-Tseu à Nietzsche, 2014. Esfaindyar Daneshvar: La littérature transculturelle franco-persane: Une évolution littéraire ... Florence Krésine: Le nombre et l'innombrable dans le théâtre de Shakespeare: histoires et tragédies. Kindle Edition, 2017. 등이 있다.
알레비(Marc Halévy, 1953-) 프랑스 물리학자, 철학자.
다네스바르(Esfaindyar Daneshvar, s.d.) Universiteit Leiden, LUCAS, PhD Franse Taal en Cultuur. “On Oral and Poetic Transculturalism in Franco-Persian Novels.” International Journal of Persian Literature, vol. 1, no. 1, pp. 164–185.
크레신(Florence Krésine, s.d.) Université Paris III - Sorbonne Nouvelle,
(53LLI)
첫댓글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본성이 이성에 앞서 불가분하게 존재 한다는 의미이다 라고 해설이 붙어있다. / (ma) 괴물(Ungeheuern) 즉 추론과 싸우는 자는 추론 자가 될 수밖에 없다. ‘권능(심연)의 발현은 다른 길이라’라는 의미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달리 말하기, 달리 살기, 다발로 뭉치기. 이념과 이성의 주장자들(괴물들)과 싸워 봐야 주지주의자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내재주의자가 되라.] - 이 인용구를 대구(對句)로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Und) 대신 그런데(Or)로.
[이 유명한 구절은 주지주의자들 사이의 싸움에 쓰인 것 같다. 관념론자들 대 주지주의자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달리 말하기, 새로운 삶이 “디오니소스 찬가”일 것이다. / 저편(Jenseits, fr. Par-delà)이란 의미가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이 저세상(Au-delà)가 아니며, 이편도 저편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달리 사는 방식이 있다는 것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 (53LLI)]
푸꼬와 들뢰즈는 니체의 가치 전도(Umwertung aller Werte) - 땅에 충실하라 - 를 받아들였다. 프랑스 철학의 분위기는 스탈린의 사후에 60년대를 거치면서, 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철학자들을 프랑스에서는 헤겔의 2항대립과 다른 차원에서 키에르케골, 맑스, 니체, 프로이드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인식적 차원에서 가치전복보다 더 깊이 있는 체계의 전복을 보았던 이는 벩송을 이어받은 들뢰즈가 형이상학을 포함하여 전개할 것이다. (54V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