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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13. 그는…더듬거리며 말했다(Bégaya-t-il‥…, 1993)
들뢰즈(Gilles Deleuze), dans “비평과 임상”(Critique et clinique, 1993), 135-143((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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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Gilles Deleuze), 비평과 임상(Critique et clinique, 1993)의 뒷 표지에는 다음 네 가지 물음들이 있다.
- 어떻게 다른 입말(혓소리)이 그 혓소리 속에서 창조되는가? 언어(le langage) 전체가 그 언어의 한계(끝) 또는 언어의 고유한 “바깥(dehors)”으로 향하고 있는 방식임에도 말이다.
- 어떻게 혼백병(魂魄病: la psychose)의 가능성과 망설(妄說, le délire)의 실재성이 이 행로(ce parcours) 속에 기입(기록)되는가?
- 어떻게 언어(le langage)의 바깥이 비(非)-언어적인 시현들(示顯, visions)과 청취들(聽取, auditions)로 이루어지는가? 그런데 단지 입말(혓소리)이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데 말이다.
- 왜 작가는 이때부터, 단어들을 통해서, 채색가들과 음악가들로 (달리)되는가? [책 뒷면 글]
[자기 이야기, 색깔, 노래를 간직하는 것이 문학이며 이때 건강한 것이다.] (54OKG)
* 혀말(la langue)하다라고 해야 할까? 옹알옹알 거리다(입말하다). 더듬더듬 거리다, 웅얼웅얼 거리다, 소곤소곤거리다, 불쑥 말하다, 헉헉거리며 말하다, 하소연하듯 말하다. 화내어 터뜨리다, 고함치다, 푸하하 터트리다, 등등 이런 말들은 있다와 없다와는 전혀 달리 말하기이며, 소위 말하는 존재론과 연관이 없고, 내적 감화작용에서 나오는 표현일 것이고, 이를 손이 문자화하여 글자로 적은 것이리라. 손의 작업은 입에서 나오는 숨쉬기와 소리(le son) 또는 목소리(la voix)에 연관이 크다. 이 모든 혀말에는 감화작용이 먼저이다. 오관의 상식으로 쓰여지면, 이미 그 숨결과 감화는 멀어지고 희미해진다.
어느 할매가 혼자 사는 데, 건장한 도둑이 들어왔다. 그가 뒤져보니 가져갈 것이 마땅한 것이 없다. 도둑은 중얼거리며 “아무 것도 없네”. 흔들 소파에서 자는 줄 알았던 할매가 가느다랗게 속삭이듯이 “(나) 있잖아”. 그는 둘러보며 약간 화나듯이 “있긴 뭐있어...” 다시 둘러보아도 가져갈 만한 것이 없어, 나가려고 하면서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녀가 부드럽게(doucement, 달달하게) 속삭이듯이 “나~ 나, 있잖아...”: 여기서 있다와 없다는 벩송이 EC 4장에서 말하는 존재와 무 사이에서 관심의 차이에서 ‘없다’는 것이다. 현존에는 언제나 무엇인가가 있다. 벩송은 무란 없고, 현존이 있다고 한다. 있기는 있다. 있다는 기호(le signe)의 표출에는 할매의 목소리가 기어 나오고, 애정관심을 섞어서 목소리가 나온다. 유머이다.
레이몽 루셀의 유명한 예로서 순음 한 음소를 바꾸었는데 문장과 의미가 달라진다. “낡은 당구대의 쿠션들(les bandes du vieux billard)”과 “오래된 약탈자 대대(大隊)들(les bandes du vieux pillard)”에서 단지 두 철자의 차이(순음 b/p)이다. 우리말의 순음 ㅂ/ㅍ, 부산과 푸산을 영어권에서는 구별없이 하나(p)로 듣는다고 한다. 삶의 영역의 차이, 즉 문화의 차이는, 벩송이 말하듯이, 한 설교자가 웃음거리를 이야기했는데 웃지 않는 사람은 그 지역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구개음의 차이에서 ㅈ/ㄷ사이에서 ‘덩거장에 불비디 번덕번덕’이라면 유머라 한다. 짤짤이와 딸딸이 사이에도 ㅉ/ㄸ구개음의 차이가 있다. 한 문화와 다른 문화의 영역의 차이라고 하면, 유머가 될 수 있을 것인데, 논리 실증주의 이래로 의미의 있음과 없음, 주지주의의 진위의 차별로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벌주는 차이를 생산한다. 주지주의의 차이구별(차별)을 아이러니라 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러니란 들뢰즈 표현으로, 세상의 다양함에서 하나의 답을 찾거나 이항대립으로부터 구별하자는 데서 오지 않았던가?
어쩌면 주지주의가 허무의 극복, 회의주의의 극복이라는 차원에서만 살아왔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양체에서 아이러니가 아니라 유머이다. 유머를 몰라서 유머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방인, 소수자, 별종도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삶은 원인에서부터 다양한 차히 즉 세분화가 있는 것이지, 이항 구별의 차이 즉 미분화로 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다. 할매의 나~에는 애정관심(sexualité)이 있다. 유교의 자애, 불교의 무상보시, 스토아의 아가페, 인디언의 포틀래치 등은 다양체의 자발성의 표현이며,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는 속삭임일 것이다. 성관심은 2항 관계가 아니라 다양체의 관계이며, 들뢰즈가 n차원의 성(애정)관심이 있다고 하는데, 무지개의 빛깔처럼 5색이든 12색이든 24색이든 다양하다. 인민에게 각자 도생 시절에, 몸보시가 n개의 보시들 중의 보시이리라. (55Q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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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 분류에서 셋으로 나누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것은 각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2항과 하나 더 보태어 겹치기 항을 말한다. 이런 논의는 영혼과 신체 그리고 둘의 통합의 논의와 닮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3이란 수자에 매력이 있다. 그럼에도 실재성에서는 4의 숫자가 더 분명해 보인다. 분류상으로 경계를 그으면 둘(A 와 B)이 보인다. 그리고 둘의 접합으로 3항(AB)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3항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배경 또는 집합론의 공집합이 있을 수 있다. 이 공집합과 같은 것이 관심과 편리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직관적으로 배경 또는 근저(이유와 기원)으로서 다른 양태로서 있을 수 있고, 그 4항이 실재성일 것 같다. 이 4항이 흐름과 덩어리로서 분리불가능한 영역 또는 위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항의 성립은 문법적으로 주어와 술어일 수 있고, 카테로리 상으로 실체와 다양한 범주들일 수 있다. 이런 경계선을 긋기는 2항 4항 8항으로 무한히 계속되어 선긋기 또는 자르기 할 수 있다. 이 잘려진 항들을 다시 결합하여 하나 또는 통일체로 다시 만드는(재-현재화, re-présentation) 단일성의 회귀에는 직관이 필요하다. 벩송은 이런 회귀의 직관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여긴다. 그러면 3항의 하나는 무엇일까? 하늘을 나누는 셋은 하나로부터 3가지 드러남, 분열이지만 3항은 하나인 전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3항의 합은 1직각 이지 십진법의 10은 아니다.
언어의 사용과 설득 또는 설명을 위한 표현에서도 이런 2항과 3항 사이의 연관이 있을까? 있을 것 같다. 확신하여 가르쳐 주거나 넘겨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도 교감과 공감을 통해서 각자들은 서로 침투하듯이 소통의 영역이 있을 수 있다. 그 표현과 전달이 이분법적으로 잘 되지 않기에 더듬거리고 지체하고 제자리 울림이 있고, 문법에 맞지 않게 말할 수도 있고, 규정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아페이론과 같은 실재성을 인정하는 말투로서 전개할 수 있는 데, 인간의 언어가 아닐 수 있고, 더듬이, 옹알이, 방언, 속삭임, 숨결뿐만 아니라, 암시, 유비, 비유, 불가사의한 또는 형언할 수 없는 단어들, 발언자의 자신도 또한 다른 누구도 소통은 불가능하지만 상호침투의 꿈의 이미지와 닮은 기호들(les signes)가 있을 수 있는데, 이 상호침투적 소통을 직관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징후적 또는 증상적 이미지들로서 사유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이미지의 영역에서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은 철학이라기보다 예술이고, 현대의 회화와 조각에서 드러나지만 언어상으로 시와 소설에서도 많은 작가들이 작업했다고 들뢰즈는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예술작품과 문학작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작품과 작가에 대한 소개, 재소개와 더불어, 한번 읽은 인식과 두 번 세 번 읽어가면서 재인식을 통해서 흐름 속에 이리저리 헤매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노력에 노력을 더하다가 갑자기 그 작품의 의미에 통하는 지점에 이를 것이다. 이 더듬거리는 논문도 그러하다. 글자는 표상인데, 쪽들의 전체는 표상이상의 내용을 내 보인다. 그 표출되는 상태에 함께 젖어가는 것이 중첩된 노력없이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럼에도 어떤 이가 한 번에 관통한다면, 그는 이글 이전에 이런 종류의 글들에 대한 오랜 학습과 훈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노력에 노력을 중첩적으로 보탤 필요(이익)가 있을까라는 반문에 직면하게 되면, 들뢰즈는 사는 게 그렇다고 말 할 것이다. 일상의 매일 반복이 동일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첩에 중첩이 제자리걸음(동일반복)을 넘어선다는 것(이질반복)을 그 본인은 알게 되어 있다고 답할 것이다. 삶이 그러하다. 그 삶은 공집합 또는 배경은 여전히 응축하고 중첩하며 새로운 실재성을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삶이 먼저다’도 마찬가지이다. C’est la Vie. 엷은 가랑비 속이라도 죽 걸으면 속까지 젖는다는 것을 안다. (2:06, 55QLI)
시, 소설, 단편, 산문 등에서 글쓰기의 다양함은 현대에 와서 문학 작품상들이 여럿으로 되어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일상이나 관례와 달리 글쓰기의 종류는 어떤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더듬거리며 말하기라는 주제를 걸어 놓고, 글쓰기의 세분화의 길을 가는 여럿 양태를 제시하다.
한편으로 들뢰즈의 이런 주제는 후기구조주의가 얼마나 다양하게 가지치기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후기구조주의에서 루셀에 관해 여러 작가의 저술들이 있듯이, 들뢰즈도 이런 문제를 다양하게 다루어, 강도와 심도가 있는 글쓰기를 한 것 같다.
다른 한편 프랑스어의 입말과 말투를 나눈 것이 단순히 구조주의에서 뿐만이 아니라, 삶의 깊이와 흐름을 진솔하면서 여러 세분화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혀말 또는 입말에서 있다는 것이다. 혀말은 이미 언어학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의식의 내재적 상태의 변화와 창의성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입말이 있고, 그 사용이 얼마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삶의 터전이 이미 다양화되었고, 각각의 영역에는 그 영역의 고유한 입말이 있다. 그렇다고 공통감각과 양식에 맞는 입말의 코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영역의 다양함만큼이나 사람들 각각의 위상이 달라 입말의 다양화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 영역과 위상의 이해와 소통을 위해서 학습과 교육도 필요할 것이고, 소통을 위한 노력, 삶의 연대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셋으로 분류하던지, 넷으로 분류하든지 간에 상위의 상징(기표)과 달리, 심층의 흐름을 무시하거나 내던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흐름, 진동, 요동, 섭동, 변화, 화성(조화) 등은 삶이 우선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인민이 최종심급이듯이. (55Q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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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C13. 그는…더듬거리며 말했다(Bégaya-t-il‥…, 1993)
[꺽쇠의 숫자는 문단 번호이다, 10문단으로 되어 있다.]
[1][2] [소설가들의 억양들. 세 종류]
[1] 사람들은 말하기를, 나쁜 소설가들은 ‘그가 말하기를”이란 말 대신에, 억양들(les intonations)을 표시하는 “그가 중얼거리기를”, “그가 더듬더듬 거리기를”, “그가 울먹이며 말하기를” “그가 비웃기를”, “그가 소리치기를”, “그가 더듬거리며 말하기를” … 등과 같은 표현들을 대체하면서, 대화를 가리키는 말들을 다양하게 변화시킬 필요를 느낀다고 한다. 억양들에 연관하여 작가는 두 가지 가능성들을 갖고 있는 듯하다. (135)
하나는 그것을 행하는 것(le faire)이다. (발작은 그랑데 영감에게 말을 더듬게 하고, 뉘생장에게 알아들기 힘든 사투리를 말한다. 사람들은 매번 발작의 즐거움을 느낀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행하지 않고 그것을 말하는 것(le dire sans lefaire)이다. 마조흐의 주인공은 속삭인다. .. 멜빌의 이자벨도 속삭인다. .. 카프카의 그레고르는 말한다기보다 삐약거린다. (133)
[2]하지만 셋째 가능성이 있는 듯하다. 그 때 말하는 것, 그것은 행하는 것…(Quand dire c’est faire…). ... 말투를 더듬거리는 것은 더 이상 등장인물이 아니라, 혀말을 더듬거리게되는 것은 작가이다. (135)
적어도 멜빌과 같은 위대한 작가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인데, 그에게서 숲과 동굴의 떠드는 소리, 집의 침묵, 기타소리 앞에서 등은 이자벨의 속삭임과 그녀의 부드러운 “낯선 억양들”을 증명해 준다. 또는 카프카는 다리 떨림과 몸의 흔들림을 통해 그레고르의 우는 소리를 확증한다. 마찬가지로 마조흐는 규방의 무거운 긴장감과 마을의 소문들 또는 초원의 진동들을 통해 인물들의 더듬거림을 배가 시킨다. (136)
“내 가족들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 나는 모르겠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말더듬이였지만 뭔가 말할게 있었다. 선천적 말더듬거림이 나와 많은 동시대인을 짓눌렸다. ...” (136)
[일상적, 관습적 말하기에 벗어나야 하는 이유: 위기, 공황]
[3] 혀말을 더듬거리에 하기. 혀말을 말투와 혼동하지 않고서 가능한가? 모든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혀말을 고려하는 방식에 의존한다. (136)
만일 혀말이 말투와 혼동된다면, 그것은 매우 특별한 말투, 즉 시적 말투와 혼동된다. 이 시적말투는 가지치기와 변이의 권능, 혀말에 알맞은 이질생성과 변조의 권능을 실행한다. 예를 들어, 언어학자 기욤(Guillaume, 1883-1960)은 혀말의 각각의 항을, 다른 항들과 연관하여 항상성[상수]를 지니는 것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할당할 수 있는 역동론[동역학]에 관하여 파악된 미분적 입장들 또는 관점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한다. 부정관사 “un”은 개별화의 움직임 안에 포함된 변이의 지대를 전체를 관통할 것이며, 정관사 “le”는 일반화 운동 속에 포함된 지대 전제를 관통할 것이다. (136-137)
혀말은 사지[온몸] 전체를 떨게 한다. 거기에 혀말 자체의 시적 내포[이해]의 원리가 있다. 그것은 마치 혀말이 무한하게 변화되어 추상적 선(線)을 펼치는 것과 같다. (137)
문제는, 균형으로부터 멀어진 지역들(des régions loin de l’équilbre)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도 사람들은 진보할 수 있는가? ... 물리학은 그것을 입증해 준다.케인즈(Keynes, 1883-1946)가 정치경제학을 진보시킬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정치 경제학을 균형이 아니라, “호황(boom)”의 상황에 순응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당하는 장(champs)에 욕망을 도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면 언어도 공황(krach)에 가까운 호황의 상태에 놓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단테(Dante, 1265-1321)가 “더듬거리는 말을 경청했”으며, “유창한 언변의 결함들”을 연구했다는 것을 찬탄한다. (137)
[일상 또는 제도 속을 벗어난 입말 사용이란?]
[4] 이러한 것은 두 언어 병용과 다 언어 병용의 상황이 아니다. .. 카프카는 독일어로 쓴 체코인이고, 베케트는 프랑스어로 쓴 아일랜드인이긴 하지만, 그들은 두 언어를 섞지 않았고, 심지어는 다수언어와 소수언어를 섞지도 않았다. (137)
그들은 자신들의 표현 수단인 다수언어에 대한 소수적 사용(un usage mineur)를 발명한다. 그들은 이런 혀말을 소수화하는데(minorer), 마치 음악에서처럼, 단조가 역동적 조합들을 영속적 불균형으로 지칭하는 것과 같다. (138)
위대한 작가는, 그가 표현하는 그가 표현하는 입말에서, 그 입말이 태생어라 할지라도, 이방인처럼 항상 있다. .. 그것은 자기 자신의 언어에서 이방인이다. (138)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1935)의 지혜의 일곱기둥(Seven Pillars of Wisdom: A Triumph(Les Sept Piliers de la sagesse)에서 ... 로렌스는 아라비아의 음악들과 환상들(visions)을 추출하여 영어를 비틀거리게 했다. 그리고 클라이스트(Kleist, 1777-1811)는 독일어의 깊이에서 어떤 입말을 환기시켜 했는데, 다수 언어의 대표자인 괴테(Goethe, 1749-1832)에게 공포를 일으킬 정도였다. (138)
[입말의 이중화(분화)의 작업들; 루카의 이접들
[5] 혀말은 이중 절차[과정]에 복종한다. 즉 행할 선택들의 과정 대 확립할 연속물들의 과정, 그리고 비슷한 것들의 이접(disjonction) 즉 선별(sélection) 대 조합들의 연결(connexion) 즉 이음(consécution). (138)
균형으로부터 멀어진 것, [두 가지], [하나는] 이접들이 포함되고 내포적이고, 다른 하나는 연결들이 반성적이다. (138-139)
만일 루카(Ghérasim Luca, 1913-1994)의 말투가 이렇게 탁월하게 시적이라면, 그것은 왜냐하면 그가 더듬거림으로써 말투의 감화작용이 아니라, 입말의 감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139)
입말 전체는, ‘나는 너를 열렬히 사랑한다(JE T’AIME PASSIONEMENT: je t’aime passionnément)’라고 소리치는 것의 한계에서, 궁극적인 소리나는 덩어리(un bloc), 즉 단 하나의 숨결을 분간해내기 위하여 실을 잣듯이 길어지고 변한다. (139) [우리 역사도 면면(綿綿)이 이어져 와서, 우리 입말(혀말)이 방탄소년단(BTS)을 통해서도 퍼지고 있다. 주지주의자들은 외국어를 수용하기에도 바쁘지만 말이다.]
passionné nez pasionném je
je t’ai je t’aime je
je je jet je t’ai jetez
je t’aime passionném t’aime > (139)
[입말의 이중화(분화)의 작업들; 베케트의 연결들]
[6] 루카는 루마니아인이고 베케트는 아일랜드 인이다. 베케트는 더 이상 선별되지 않고 있는 포함된 이접들의 기술을 더 높이 올려놓고서, 오히려 거리를 통하여 이접항들을 주장하며, 서로를 제한하지도 배타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가능성의 일체를 구획 구분을 하면서 관통한다. (139)
예로서 [베케트의] 와트(Watt, 1953)에서 ‘크노트’가 신을 신고 방에서 움직이거나 가구의 위치를 바꾸는 방식이 그러하다.
베케트의 시에서 일단 입말의 연결에 관하여, 그는 더듬거림으로 탁월하게 시적 또는 언어학적 권능을 만든다.
베케트의 방식은 이러하다. ... 혀말을 가지고 나무를 만드는 대신에 리좀을 만들고, 입말을 영속적 불균형으로 둔다. 「잘못 말해진 것은 잘못 보여진다(Mal vu mal dit)」[(1981 불어로, 1982 영어로 번역한 단편소설)] 잘 말한다는 것, 그것은 위대한 작가의 고유물도 아니고 일거리[임무]도 아니다. (140)
[다른 방식들: 페기와 루셀]
[7] [둘의] 가운데로 밀고 나가거나 더듬거리는 방식들도 많이 있다. 페기(Péguy, 1873-1914)는 할당할 수 없는 부분사[관사, 전치사, 부사어]를 가지고 강력하게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높이에서 할당할 수 있는 항들로 진행하는 것이다. (140)
페기에서, 말더듬은 입말과 매우 잘 결합한다. 그는 입말을 손대지 않은 채, 충분하고 정상적인 단어로 남겨둔다.
루셀(Roussel, 1877-1933)에서, 또한 다른 절차가 있다. .. 무려 다섯 개의 괄호가 서로 삽입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내적인 증가는 그 증가가 부풀어지는 언어를 위하여 절대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추진들의 각각으로 있다는 점에서 부족할 수 없다. 각 시구의 발명은 일체의 파괴이었으며 또한 일체를 재구축하라는 명령(prescription)이었다.”
[입말의 또 다른 세분화된(가지치기) 다양한 방식들, 구문론: 커밍즈, 아르토, 셀린]
[8] 따라서 혀말이 가지치기하듯이 이루어진 변종[들]이 있다. 변항의 각 상태는 다른 선들로 갈라지고 이어지는 능선(la crête, 닭벼슬) 같은 선(線) 위의 자리[위치]와 같다. 이것은 구문론적 선이다. 이 구문론법은 곡선들, [원의] 고리, 굴곡들, 역동적 선의 [접선]편차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은 이접들과 연접들의 이중적 관점의 자리들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140-141)
루카의 정식, ‘나는 너를 열렬히 사랑한다(je t’aime passionnément)’는 더듬거리는 기나긴 계열들의 마지막에 고함처럼 터져나온다. - 멜빌(Melville, 1819-1891)의 바틀비(1856)의 “나는 차라리‥…하지 않을 래” 든지, 커밍스(Cummings, 1894-1962)의 시구 “ 그는 자신이 행한 것을 춤춘다(he danced his did)” - (141)
그리고 이런 최종적 한계는 모든 문법적 모습을 포기하는데, 보다 정확하게는 아르토(Artaud, 1896-1948)의 숨결-단어들에서 서투른 상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와 같다. .. 셀린(Céline, 1894-1961)에게서 밤의 끝으로 여행(Voyage au bout de la nuit, 1932)은 모국어를 불균형으로 만들며, 외상 죽음(Mort à crédit, 1936)은 새로운 구문론을 감화적인 변이들로 발전시키고, 반면에 기뇰 벤드(Guignol's Band, 1944)는 궁극적 목표를 – 감탄문과 생략문과 같은 것을 – 찾는데, 이런 문장들(감탄문과 생략문)은 단어들의 순순한 춤을 이용하여 모든 구문론을 떼어낸다. 두 양상(les deux aspects)은 서로 던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수학, 미적분에서 텐서와 극한처럼, 혀말 속에서 긴장과 언어의 한계라는 두 양상이 있다. (141)
[입말의 음조(조바꿈): 회화와 음악 - 문체론]
[9] 이 두 양상들은 무한한 음조들(tonalités)에 따라서 실행되지만 항상 일체를 이룬다: 즉 [한편] 혀말 전체가 되게 하는 언어의 극한이 있고, [다른 한편] 혀말을 극한에 운반하는 변이의 선(線) 즉 조바꿈의 선이 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혀말은 혀말의 바깥에 있지 않고, 구문론적 극한은 언어의 바깥에 있지 않다: 새로운 혀말[elle]은 언어의 바깥(le dehors)이지, 그-바깥에(au-dehors) 있지 않다. 그것은 회화 또는 음악이며, 단어들의 음악, 단어들을 지닌 회화, 단어들 속에서 침묵인데, 마치 단어들이 이제 자기들의 내용을, 즉 웅장한 시각[회화]과 장엄한 청취[음악]을 토해내는 듯하다. (141)
그것은 위대한 작가(위고, 미쇼)들의 소묘들과 회화에서 특수한 것, 그것은 이들 작품들이 문학이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작품들은 전혀 문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141-142)
단어들은 그리고 노래한다. 그러나 단어들이 분할하고 혼성하면서 그리는 길의 극한에서 이다. 단어들은 침묵한다. 누의 바이올린은 그레고르의 삐약거리는 소리와 연결하고, 기타가 이자벨의 웅얼웅얼 소삭임을 반영한다. 죽어가면서 노래하는 새의 멜로디는, 부드러운 ‘야만(barbar)’과 같은, 빌리 버드의 말더듬을 극복한다. (142)
혀말이 매우 팽팽할(긴장할) 정도로 혀말이 더듬거리거나 우물거리거나 속삭이기 시작할 때‥…, 모든 언어는 극한에 도달한다. 그 극한은 한계의 바깥을 묘사하거나 침묵과 혼동된다. (142)
또는 “현존하지 않는 미래에 올 문체의 요소들”에 대해, 미치 프루스트(Proust, 1871-1922)처럼, 비-문체로 말을 해야 하는가? 문체는 혀말의 경제[아낌]이다.마주보거나 등을 맞대는 것, 혀말을 더듬거리게 하는 것, 이와 동시에 언어를 언어의 한계로, 언의 바깥에, 언어의 침묵에 운반하는 것. 그것은 호황(boom) 또는 공황과 같은 것이리라. (142)
[입말의 세 가지 위상: 단어들(언어), 색깔들(회화), 소리들(음악). – 또 하나: 삶의 총체로서 현존재의 감화작용.]
[10] 각자는 자신의 혀말로 추억들을 제시할 수 있고, 이야기들을 발명할 수 있고, 견해들을 발언할 수 있다. (142)
그러나 이야기들을 파헤치는 것, 의견들을 갈라놓은 것, 기억[추억]들 없는 지역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할 때, 또한 자아를 파괴해야만 할 때, 확실히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수단들은 항상 불충분(inadequats, 부적절)하게 남아있으며, 문체는 비문제가 되고, 혀말은 알지 못하는 이방어로 회피하게 내버려 둔다. (142)
“독자들이 불충분(inadequats, 부적절) 수단들이 펼쳐지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즉 [수단들이란] 단편들, 암시들, 노력들, 탐구들이다. 거기서 잘 다듬어진 문장이나 완전하게 일관된 이미지를 찾으려 시도하지 마세요. 쪽들 위에 인쇄된 것, 그것은 당황스런 말투, 말더듬일 것이다. ‥…” (142-143)
비엘리(Biely, 1880-1934)의 말더듬는 작품, 코틱 레타이에프(Kotik Létaïev)(1918)는 자아 속에가 아니라, 우주, 즉 세계의 폭발이 있는 어린이-생성 속에 던져져 있다. 어린시절은 나의 시절도 아니고 추억도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un bloc), 익명의 무한한 단편, 항상 동시대의 생성인 것이다.비엘리, 만델스탐(Ossip Emilievitch Mandelstam 1891-1938), 흘레브니코프(Velimir Khlebnikov, 1885-1922)는 세 번 말더듬고, 세 번 십자가에 못 박힌 러시아의 삼위격이다.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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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5 단테/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Dante Alighieri 1265-1321) 이탈리아의 시인. 신곡(La Divina Commedia).
1749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독일 고전주의 성향 작가, 철학자, 과학자.
1777 클라이스트(Bernd Heinrich Wilhelm von Kleist, 1777-1811) 독일의 극작가. 슈로펜슈타인 가정(Die Familie Schroffenstein 1803), 펜테질레아(Penthesilea, 1808), 깨어진 항아리(Der zerbrochne Krug 1808), 하일브론의 케트헨(Das Käthchen von Heilbronn, 1810) 미하엘 콜하스(Michael Kohlhaas, 1810), 홈부르크 공자(Prinz Friedrich von Homburg 1821) / 결투(Le Duel (Der Zweikampf), 1811)
1799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 프랑스 소설가, 극작가, 문예 비평가, 수필가, 저널리스트, 인쇄업자. 외제니 그랑데(Eugénie Grandet, 1834), 고리오 영감(Le Père Goriot, 1834-1835).
1802 위고(Victor Hugo, 1802-1885), 프랑스 시인, 극작가, 소설가. Notre-Dame de Paris (1831), Les Misérables (1862)
1819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미국 문학자. 모비 딕/백경(白鯨, Moby-Dick, 1851)
1836 자허-마조흐(Sacher-Masoch, 1836-1895), 오스트리아 제국의 갈리시 왕국 출신 역사가, 기자, 소설가.
1871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프랑스 작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de 1913 à 1927)
1873 뻬기(Charles Pierre Péguy, 1873-1914)[마흔하나] 프랑스 작가, 시인, 수필가. 1894년 ENS 6등입학, 인성자유 사회주의자, 안티성직주의. 1898년 철학 교수자격에서 낙방하고 대학과 멀어졌다. 1907년 카톨릭으로 복귀. Note sur M. Bergson et la philosophie bergsonienne, 1914.
1877 루셀(Raymond Roussel, 1877-1933) 프랑스 작가, 극작가, 시인. 아프리카 인상들(Impressions d'Afrique, 1910), 『나는 내 책 몇 권을 어떻게 썼는가』(1935)-메타그람이라는 글자 바꾸기놀이 기법.
1880 비엘리(Boris Nikolaïevitch Bougaïev, 필명Andreï Biély ou André Bély, 1880-1934) 러시아 시인 작가. 코틱 레타이에프(Kotik Létaïev(ru) (1918, Котик Летаев: 작가의 어린 시절을 상기하는 자전적 소설), 어느 열광자의 수첩(Carnets d'un toqué)(entrepris en 1918, et publié en 1922, Записки чудака, 저전적 소설)
1883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 선고(Das Urteil, 1913) 소송(Der Prozess, 1915) 변신(Die Verwandlung, 1915)(주인공, 그레고르 잠자), 성(Das Schloß, 1926)
1883 기욤(Gustave Guillaume, 1883-1960) 프랑스 언어학자, 언어의 영혼기제(psycho- mécanique du langage)라는 이론으로 유명하다. 카나다 라발대학에서 그의 연구가 활발하다. 카나다 언어학자인 발랑(Roch Valin, 1918-2012)이 계승하였다. Walter Hirtle et Ronald Lowe 등이 기욤에 대한 작품을 썼다.
1883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 영국 경제학자. 거시경제학과 경제 정책 분야에서 기존의 이론과 관습들을 변화시킨 영국경제학의 대표자.
1885 흘레브니코프(Velimir Khlebnikov, 본명 Viktor Vladimirovitch Khlebnikov, 1885-1922) 러시아 시인, 극작가. 작가.
1888 (아라비아의)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Lawrence d’Arabie, 1888-1935) 영국 장교, 작가. 지혜의 일곱기둥(Seven Pillars of Wisdom: A Triumph(Les Sept Piliers de la sagesse),
1891 만델스탐(Ossip Emilievitch Mandelstam 1891-1938)[마흔일곱] 블라디보스톡에서 별세. 러시아 시인 수필가. 시대의 소음(Le Bruit du temps, 1925), 단테에 관한 대화(Entretien sur Dante, 1933)
1894 커밍스(Edward Estlin Cummings, 1894-1962), 미국 시인, 작가, 화가. “He sang his didn't, he danced his did” from “Anyone loved in a pretty how town”?
이름없는 도시의 거주자들의 삶에 대한 시라고 한다. 1940년에 쓰여진 시로서 제목은 "anyone lived in a pretty how town" 이다.
1894 셀린(Louis-Ferdinand Céline, 1894-1961), 프랑스 작가. 밤의 끝으로 여행(Voyage au bout de la nuit, 1932) 외상 죽음(Mort à crédit, 1936), 기뇰 벤드(Guignol's Band, 1944)
1896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 프랑스 연극 이론가, 배우, 작가, 수필가, 시인. «잔혹극(théâtre de la cruauté) »을 창안하였다.
1899 미쇼(Henri Michaux, 1899-1984) 벨기에 작가, 시인, 화가. 1955년 프랑스 국적.
1906 베케트 (Samuel Beckett, 1906-1989) 아일랜드 시인, 작가, 극작가. 소설 와트(Watt, 1953)
1913 루카(Gherasim Luca, fr. Ghérasim Luca, 1913-1994)[여든하나] 아셰키나제 유태계(그럼에도 세파라드처럼 살았다), 루마니아 출신 시인. 암늑대를 가로지는 숫늑대(Un loup à travers une loupe, 1942. 잉어의 노래(Le Chant de la carpe, 1973) 40년간 증없이 살다가 아파트에서 쫒겨나게 되어 자살했다.
1924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 프랑스 철학자, 후기구조주의자. 후기 근대성의 비판적 사용으로 유명하다. Le Postmoderne expliqué aux enfants: Correspondance 1982-1985,(Paris, Galilée, 1988) - 스페인판은 유년기의 책읽기(Lecturas de infancia, fr. Lectures d'enfance), 2010
1925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 철학자.
1926 푸꼬(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철학자, 레이몽 루셀(Raymond Roussel, 1963)
1935 니바(Georges Nivat, 1935-) 프랑스인 대학교수 2000년부터 제네바대학, 슬라브 역사가, 소련작 솔제니친과 비엘리 번역가.
1954 빠스로네(Giorgio Passerone, 1954-) 이탈리아인, 릴 3대학에서 이탈리아 문학을 가르친다. (La linea astratta: pragmatica dello stile, 1991)(Guerini studio, 1991) La linga astratta
?-? 마르텔(François Martel, s.d.), Jeux formels dans "Watt", 1972
?-? 피에르 블랑쇼(Pierre Blanchaud, s.d.), 독일어를 프랑스어로 번역가. 특히 클라이스트(Kleist)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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