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의 관계를 명확히 살피려면, 대승과 소승의 경과 논의 관계를 상세히 살펴야 한다. 그리고 논보다는 경을 중심으로 살피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된다. 그 까닭은 논은 경을 해석하는 것도 있지만, 경의 내용과는 별개로 또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학설을 펼친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현재 능력으로는 그것들을 상세히 살피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글은 다만 아함굥과 이른바 대승 경전, 그리고 논들을 대강이나마 읽으면서 느낀 것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소승 불교는 대개 부파 불교, 그 중에서도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논]에 나타난 학설을 중심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승의 경과 논에서 소승 불교를 비판하는 내용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함경과 부파 불교의 아비달마는 내용에서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아함경과 이른바 소승 불교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승 경전들과 그 경전에 대한 논들도 구별해서 생각해야 한다.]
실제로 반야 계통의 경전에서는, 특히 마하반야바라밀경은 아함경의 거의 모든 법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마하반야바라밀겅을 압축적으로 요약한 반야심경도 당연히 아함경의 핵심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담고 있다. 삿된 견해들에 관한 것들과 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든 비유들도 아함경의 것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다.
반야 경전에서는 특히 공을 강조하고 있는데, 공은 무상, 괴로움, 비아와 함께 아함경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개념이다. 이것들은 아함경의 첫번째 경에서부터 등장한다. 아함경에서 가장 공한 법은 세속법인 인연법에 대비된다.
[부파불교의 대중부의 일부에서는 근본4법과 임시로 붙혀진 이름을 강조하는데, 이는 아함경에 부합한다.]
다만 대승 경전에서 부파 불교의 유식론을 수용하고 있는데, 아함경은 유식론의 내용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대승 경전의 내용을 고려하면,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 또는 아함경의 차이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들의 차이에서 온 것은 이니라고 판단된다.
대승의 눈으로 볼 때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소승 불교는 중샘 제도브다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는 법을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본다. 그 반면에 대승 불교는 개인의 수행에 더하여 평생을 중생을 제도하는 데 바치신 부처님의 행[보시와 인욕]을 그대로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개인의 득도보다는 중생 제도가 우선이며, 중생 제도를 수항의 방편으로 삼는다. 그것이 곧 보살행이다.
그러나 아함경에서도 브시와 인욕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컨대 브시는 6념처에 들어 있고, 또 보시를 설한 경과 인욕을 설한 경도 아주 많다.
무엇보다도 아함경에 등장하는 부처님은 탄생 이전에는 당연히 보살이있으며, 부처님께서 설법을 통하여 중생을 제도하신 그 모습이 바로 보살행이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3귀의나 6념처의 내용은 그러한 부처님의 보살행을 항상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며,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보살행을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함경에서는 수행이 중생 제도의 전제 조건이 됨을 말하고 있다.
증일아함경_47. 선악품(善惡品)[9]
''나쁜 길을 따라가서 바른 길을 만나고, 삿된 소견을 쫓아 바른 소견에 이르며, 삿됨을 돌이켜 바름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도 물에 빠져 있으면서 남을 건네주려 하는 것과 같아, 끝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는 열반에 들지 못하고서 남을 열반에 들게 하려 한다면, 그건 그리 될 수 없느니라.
그러나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물에 빠지지 않고서 남을 건네주려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지금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열반에 들고서 다시 다른 사람을 열반에 들게 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리 될 수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