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아래의 농장(Farm Beneath the Sands)'이라 불리는 서쪽 종착지의 한 유적은
얼어붙은 강모래 아래에 파묻혀 원형을 완벽하게보존하고 있었다.
이 유적에서 대부분의 목재는 아래층보다 위층에서 발굴되었다
목재가 귀해서 낡은 건물이나 방에 쓰인 나무도 감히 버리지 못하고,
방을 개축하거나 덧붙일 때 재활용했다는 뜻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건물 벽을 떼로 처리하는 식으로 목재의 부족을 해결했다.
하지만 이런 해결책은 자체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인가?" 라는 환경회의론자의 반문에
"삼림 파괴가 땔나무의 부족 사태를 초래했다"라고도 대답할 수 있다.
난방과 어둠을 밝히는 데 고래 기름을 사용했던 이누이트족가 달리,
노르웨이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버드나무와 오리나무를 땔나무로 사용햇다.
요즘의 도시인들은 경작조차 못하겠지만 유제품을 만들 때도 땔나무가 필요했다.
젖은 쉽게 부패되는 위험한 음식이다. 우리에게도 영양분을 주지만 박테리아레게도 영양분을 준다.
따라서 저온 살균하거나 냉동시키지 않으면 금세 부패되어 버린다.
현대인에게는 저온 살균과 냉동이 당연하게 여기지지만 노르웨이인을 비롯해서 옛사람들은 그런 것이 뭔지 몰랐다.
노르웨이 인들은 젖을 수거하거나 저장하는 용기, 치즈를 만드는 용기를 끓인 물로 자주 세쳑하는 식으로 부패를 막았다.
젖을 수거하는 통은 하루에 두 번씩 세척했다.
따라서 방목장 (언덕에 마련한 여름 목장)도 해발 390미터 이하에 마련되었다.
가축을 방목하기에 적합함 초지는 해발 760미터까지 있었지만 390미터 위에서는 땔나무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에서는 부근에 땔나무가 떨어지면 방목장도 자동적으로 폐쇄되었다.
이런 점에서는 그린란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린란드와 노르웨이 사람들은 부족한 땔감을 다른 것들로 대체했다.
짐승의 뼈, 가축의 똥, 떼를 태웠다.하지만 이런 해결책도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짐승의 뼈와 가축의 똥은 건초 증산을 위해 거름으로도 쓰일 수 있었다.
게다가 떼를 태우는 것은 초지를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삼림 파괴는목재와 땔나무의 부족을 초래한 것만이 아니다. 철의 부족까지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대부분의 철을 소철(蘇鐵)에서 얻었다. 즉 철을 조금 함유한 습지의 퇴적물에서 철을 추출해냈다.
아이슬란드나 스칸디나비아와 마찬가지로 그린란드에서도 소철은 쉽게 구할 수 있다.
크리스티안 켈러와 나는 동쪽 정착지의 가르다르에서 철색을 띤 습지를 두 눈으로 목격했다.
토머스 맥거번은 서쪽 정착지에서 그런 습지를 보았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린란드에서는 소철을 찾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소철에서 철을 추출하려면 고열이 필요했기 때문에 숯을 만들 대량의 나무가 있어야 했다.
설령 그린란드 사람들이 노르웨이에서 철괴를 수입해서 이런 절차를 뛰어넘었더라도
철괴를 연장으로 만들려면, 또한 연장을 다듬고 수리하기 위해서라도 숯은 여전히 필요했다.
그린란드 사람들이 철로 만든 연장을 사용했고, 철을 가공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규모 목장터에서 대장간터와 용재를 발견하기란 귿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대장간이 수입한 철을 재가공하는 데만 사용되었는지 소철에서 철을 추출하는 역할까지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린란드으 바이킹 유적에서는 중세 스칸디나비아 사회에서 사용하던 철물(鐵物)들이 흔히 발견된다.
도끼, 큰 낫, 부엌칼, 양털을 깎는 가위, 대갈못, 목수용 대패, 구멍을 뚫는 송곳, 구멍을 파는 나사송곳등이다.
그러나 철이 넉넉하지 않았던 중세 스칸디나비아의 기준에서도
그린란드 사람들이 철 부족에 시달렸다는 증거가 이런 유적들에서 찾아진다.
예컨대 영국과 셰틀랜드 제도의 바이킹 유적에서는 못을 비롯해서 다른 철물들이 훨씬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그린란드에서는 철못조차 부족했다.
가장 아래층에서 약간의 철못이 발견될 뿐, 후기층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철못조차 소중해서 감히 버릴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란란드에서 장검이나 헬멧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두 조각의 사슬갑옷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그것도 같은 갑옷에서 떨어진 조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철로 만든 연자은 ㄴ닳고 닳아 토막이 될때까지 재사용되고 다시 다듬어졌다.
코를로르토크밸리에서 발굴한 뭉뚝한 부억칼을 보면서 나는 비애감에 젖지 않을 수없었다.
칼날이 닳아 거의 없어진 부엌칼이었다. 칼토막에 비해 손잡이가 터무니없이 길어보였다.
그렇게까지 다듬어 써야 했을 정도로 소중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린란드에 철이 부족햇다는 사실은 고고학적 유적에서 발굴된 다른 물건들에서도 확인된다.
유럽에서는 철로 만든 물건들이 그린란드에서는 다른 재질로, 간혹 상상을 초월하는 재질로 만들어졌다.
나무못과 순록의 뿔로 만든 화살촉이었다.
아이슬란드의 1189년 연감은, 항로를 이탈해 아이슬란드로 표류해온 그린란드 배가
나무못을 박고 고래수염으로 다시 단단히 동여맨 배였다며 놀랍다는 듯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전부(戰斧)를 휘두르며 적들을 떨게 만들었던 바이킹들에게
고래 뼈로 그런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은 참기 힘든 굴욕이었을 것이다.
철의 부족은 경제의 효율성마저 떨어뜨렸다. 철로 만든 큰 낫, 큰 식칼, 큰 가위가 부족했다.
뼈와 돌로 그런 연자응ㄹ 만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건초를 수롹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가축을 도살하고 양털을 깎는 ㄷ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햇다.
그러나 철 부족으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는 이누이트족과의 싸움에서 나타났다.
바이킹들은 무기에서의 이점을 상실했다.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과 원주민들의 무수한 다툼에서
유럽인들은 강철로 만든 칼과 갑옷 덕분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예컨대 1532~1533년 에스파냐가 페루의 잉카 제국을 정복하러 나섰을 때
아스파냐는 169명, 80명, 30명, 110명, 40명의 군사로 수천에 서 수십만의 잉카 군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게다가 단 함 명도 전사하지 않았고, 몇 명만이 부상을 당했을 뿐이다.
에스파냐 군의 강철 칼은 잉카 군의 면 갑옷을 쉽게 잘라냈지만
돌아니 나무로 만든 잉카 군의 무기는 에스파냐 군의 강철 갑옷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햇다.
그러나 그린란드에 정착해서 첫 세대가 지난 후에도
바이킹이 강철 무기와 강철 갑옷을 가졌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단 두 조각이 발견된 사슬 갑옷 한 벌이 발굴되엇지만
그린란드 정착자의 것이 아니라 그린란드를 방문한 유럽인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활과 화살, 창으로 싸워야 햇다. 이누이트족과 다를 바가 없었다.
또한 잉카와 아스텍의 전투에서 에스파냐 정복자에게 결정적 이점을 안겨주었던 말을
그린란드 정착자들이 전투에서 사용했다는 증거도 없다.
하기야 아이슬란드인들도 말을 전투에서 사용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린란드의 정착자들은 전문적인 군사 훈련도 변변히 받지 못했다.
요컨대 그들은 어떤 점에서도 이누이트족보다 유리하지 않았다.
결국 철의 부족이 그들의 사회를 붕괴시킨 원인(遠因)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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