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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남훈이 쓰는 리뷰시 단평]
살바도르 달리표 상상력 주식회사가 파는 잠재의식 해방을 위한 몇 개의 이미지
―기기묘묘한 꿈의 형상을 얻으려면 보름달이 뜨기 이틀 전 별빛이 담적색을 띨 때 초콜릿 소스를 바른 성게를 먹고 잠들라 ―달리
김홍조
1
“돌기는 돌았구먼. 분석 대상이야.”
의기 양양한 스페인 청년의 방문을 받은
프로이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2
‘무의식을 깨우는 불가사의한 체험 상품’을 파는 상상력 주식회사의 세일즈맨이 거리로 나섰다. 마치 현장범이라도 체포하려는 듯 긴장한 채 걷고 또 걷는 하루. 성공에 대한 강한 집착, 동물적인 판매 감각과 뻔뻔함을 죄다 갖추었다고 자부하지만 실적은 시원찮다. 웬만한 대형 사건이 터져도 꿈쩍하지 않을 만큼 무디어진 사람들의 신경망을 건드리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리한 직관력을 얻게 돼 어떤 일을 하건 큰 소리 치며 살 수 있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이 없다. 다리에 힘이 탁 빠질 때쯤이면 발길은 저절로 주점으로 향한다. 술도 좋고 다 좋은데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정신을 놓는 빈도가 잦아진다는 것. 특히 장대비라도 쏟아지는 여름밤이면 열이면 아홉은 이상한 장소에서 눈을 뜨는 자신을 발견한다. 집에서 반대 방향, 차로 한 시간 이상 떨어진 대로변에서 깨기도 하고 전에 살던 아파트 놀이터 벤치에 떡하니 누워 있기도 한다. 어떤 날은 택시를 타고 자기 집 앞에 오긴 했는데 여기가 아니라고 자꾸 우겨 기사 양반을 화나게 만든다. 정신을 차려보면 또 하나의 자기는 멀리 도주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게 무슨 허망한 꼴인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본인의 잠재의식이나 깨우고 있다니. 그것도 언제나 농락당하는 모습이 아닌가. 한순간 자기를 지배했다가 때가 되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놈. 무서운 녀석임에는 틀림없다. 어쨌든 오늘도 허탕을 친 것만은 분명하다. 뭐 잃어버린 것 없나 싶어 가방을 열면 회사 CEO의 얄밉게 꼬부라진 콧수염과 ‘고객에 드리는 말씀’이 인쇄된 제품 카탈로그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안녕하십니까. 상상력 주식회사의 사장입니다. 우선 제 별난 비밀부터 공개해드려야겠군요. 제 등엔 점이 몇 개 있는데 자꾸 벌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면도기로 살갗을 베어냅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그 상태로 가파른 돌계단 위에 올라섭니다. 허공으로 몸을 날리기 위해서죠. 아무도 하지 않는 저만의 돌출 행동, 전 세계에서 유일한 퍼포먼스이므로 굳이 의미를 찾으려 하지는 마세요. 또다른 취미라면 미술 전시회에 수영복 차림으로 나타나 거울이 있는 인조 손톱과 등에 달린 유방을 자랑스럽게 흔드는 겁니다. 축 처져 흐물흐물한 시계와 잠재의식을 저장한 서랍이 달린 비너스 상을 전시하기도 합니다. 할리우드의 인기 여배우 얼굴을 호화 아파트 실내로 리모델링하고 말을 여인의 나체로 변신시킬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호들갑을 그렇게 떠냐구요? 그 이유는 우리의 충성스런 고객인 당신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대리 만족과 신선한 충격을 주려는 경영자로서의 배려 때문입니다. 이제 저희 회사는 신뢰할 수 있는 기관에 연구를 의뢰해 수백 번의 테스트를 끝낸 따끈따끈한 DIY 신상품들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평소 진정한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 애를 태운다거나 지나친 긴장으로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시는 분들에게 확실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사료되오니 부디 이번 이벤트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상품 1> 하드락 카페. 고막을 찢을 듯한 사운드. 자욱한 담배 연기. 목이 없는 수십 개의 얼굴이 웃고 떠들고 마신다. 어떤 놈은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자기 최면을 통해 읽어내는 경쟁자의 본심!)
<상품 2> XX중앙도서관 정문 앞. 똥 누는 폼으로 엉거주춤 앉은 채 등을 보인 젊은이 하나가 계단을 내려가려고 애쓰고 있다. 한 손을 뻗어 아래쪽의 턱을 더듬더듬 찾지만 허공만 휘저을 뿐이다. 지금 그에겐 계단 하나하나가 낭떠러지요 절벽이다(상황 재연극으로 치유하는 어두운 과거!)
<상품 3> 다시 하드락 카페. 시간은 밤 12시 전후. 의자를 붙여 만든 잠자리에 누워 있던 사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뮤직 박스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대형 유리창 밖에 누워 있는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본다(현대인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꿈같은 유체이탈!)
3
이제
당신을 짓눌러온 거짓 신화와 전설을
무장 해제시키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초현실주의를
온몸으로 초대하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자기 본능
그 심층의 이미지를 날 것 그대로 인정하라
난폭한 발상과 기이한 감각에
누구는 가위 눌린다 하고
혹은 자아도취라는 후유증이 있다고 하지만
어두운 터널에 갇혀 있다는
스스로의 주문에서 풀려나라
이의를 제기하고
야누스의 얼굴일지언정
관계 설정을 다시 하라
무엇보다
삭막한 일상과 모든 진부한 양식
합리의 비합리와 문명의 야만성
고단위 프로파간다에 속지 말라
불안 공포로 잠 못 드는 이여
영원한 자유를 얻으라
―『시에』2009년 가을호
*살바도르 달리: 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시인은 살바도르 달리의 매혹적인 이력에 흠뻑 빠져 있다. 다분히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달리의 작품 세계는 시인의 말마따나 “당신을 짓눌러온 거짓 신화와 전설을/무장 해제시키고/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초현실주의를/온몸으로 초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시인은 “잠재의식의 해방을” 위해 자연스럽다고 가정되는 모든 것에 의문을 던지는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한 시선이야말로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영원한 자유”를 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웬만한 대형 사건이 터져도 꿈쩍하지 않을 만큼 무디어진 사람들의 신경망을 건드리는” 전략을 택하는 “상상력 주식회사의 세일즈맨”은 기실 시인의 대리자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들의 신경망이 이미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주어진 현실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자각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잠재의식”을 어떻게 일깨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시인은 아마도 시적 진술을 통한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화폐와 맞바꾸기 위한 상품의 형태로 밖에 제시되지 못한다는 점은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진다. 해방의 상상력 또한 자본주의적인 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전제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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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통신
나문석
사자는
다비트의 오각형을
휘날린다
겹쳐진 역삼각형
아무리
뒤집어도 갈퀴들은
모래밭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팔꽃 같은
여름이 나무 위에서
반짝이는 시간
우주는
벌써 커다란 별을
땅위에
혜성같이 쏟아 놓는다
무덤 위에 핀
지독한 혈흔
나는 텔아비브
통신이 그려내는
불온한
오각형을 본다
―『시에』2009년 가을호
무지개의 빛깔은 일곱 개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영롱하고 다채로운 색의 향연에서 겨우 일곱 개의 색깔 밖에 보지 못한다. 인간의 시선과 그 시선을 확정 짓는 언술은 인간의 사고와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연속된 현실을 분절된 언어로 코드화한다. 그런 점에서, 나문석의 「텔아비브 통신」에서 주목해야 할 진술은 “오각형을 본다”이다. 그것이 “불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비트의 오각형”으로 상징되는 시오니즘의 기치가 “무덤 위에 핀/지독한 혈흔”,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맹목적 폭력과 죽음을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대한 나문석의 이러한 다분히 주관적인 태도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현실의 개선과 변혁의 이유를 나름대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즉 ‘시오니즘’과 같은 민족의 동일성을 상상하는 정치적 태도가 타자에 대한 억압이나 폭력적 태도로 언제든 전화(轉化)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비트의 오각형”과 “커다란 별”이 지닌 상징적 의미 속에 녹여놓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시인이 행해야 하고 행할 수 있는 것은 “본다”의 ‘해석’이 아니라 ‘한다’의 ‘변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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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와 먼지
박 승
강화섬 다녀오는 유월의 늦은 오후
이차선 굽은 길에 밭딸기 깃발 날린다
길가에서 다 팔린 끝물 과일을 산다
빨갛고 하얀 살에 박힌 검은 점
상자 속 향기는 차 안을 채운다
피부에 묻은 부드러운 먼지와
소금기와 한 번은 스쳤을 손길과
햇살에 제대로 구운 살결의 내음
씻지도 않은 꼭지를 따 입에 넣는다
열매는 이렇게 미세한 흙을 묻히고
그냥 먹는 것이 제 맛일까
비에 씻기고 바람에 떠다니던 사연
작은 뱀딸기 같은 놈을 바람에 헹구어
아이에게도 하나 골라 준다
맛있다고 한참을 딸기 딸기 한다
위험한 농약도 작은 씨앗 속에 묻어 있겠지
딸기 딸기 하는 마음에 걱정을 밀어버리고
빨간 물이 오르도록 꼭지를 딴다
―『시와문화』 2009년 가을호
근대적인 위생 관념은 육체에 대한 강박적인 청결로 민중들에게 제시되었고 진정한 근대인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주어졌다. 문명화 과정이란 곧 인간의 동물성을 드러내는 것을 배제하는 과정이라 했던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주장을 우리가 수용한다면, 「딸기와 먼지」의 시적 화자는 비근대적이거나 전근대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씻지도 않은 꼭지를 따 입에 넣”고 “작은 뱀딸기 같은 놈을 바람에 헹구어/아이에게도 하나 골라”주는 화자의 행동은 근대적인 위생 관념과 거리가 먼 것으로 쉽게 치부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화자는 “밭딸기” 속에 “위험한 농약도 작은 씨앗 속에 묻어 있”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오염’조차 “비에 씻기고 바람에 떠다니던 사연”으로 여길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빨갛고 하얀 살에 박힌 검은 점”을 가진 “끝물 과일”은 ‘오염’이 완벽히 제거되었기에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오염’이 조건으로 주어지기에 “그냥 먹는 맛이 제 맛”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적 위생관념은 “피부에 묻은 부드러운 먼지와/소금기와 한 번은 스쳤을 손길과/햇살에 제대로 구운 살결의 내음”을 모두 ‘오염’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기실 ‘오염’은 그저 “딸기 딸기 하는 마음에 걱정을” 던지게 하는 근대적 자의식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이 짧은 시편 속에서 근대적 당위와 서정적 회복 사이에서 긴장하고 갈등하며 화해하는 시적 구성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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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놀
―우아한 관계
박연숙
오 분쯤 늦게 도착했을 때 당신은 죽어 있었다 죽어… 전화선을 타고 온 이 말의 온기가 귓가를 감돈다 누군가 익숙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당신이 아니었다 당신은 주석 달 일이 남은 붉은 잉크를 엎질러 버린 것이다 고통을 정지시킨 시간은 안락하다 그들은 말이 없고 종종 넝쿨의 힘으로 담장을 넘다가 멎는다 죽은 이의 세상에선 태양이 그림자를 늘이지 않는다 추억의 손바닥은 데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의 온기를 거두어들인 기억과의 악수는 위험하다 당신이 흘린 시간들이 루미놀 속에서 명멸한다 애초 별들의 꿈은 액체였을 터, 내 심장 근처에서 잠시 두근거렸다 주검의 독살을 빠져 나가지 못한 별들도 활활 뜨겁다 죽어서야 꽁꽁 뭉친 손바닥을 환하게 펼쳐든 것이다 죽어… 라는 말의 떨림, 차디찬 불꽃의 부피가 뭉클 만져졌다 누군가는 결론 낼 일이 남았다고 푸르게 반짝이는 자정이었다
―『애지』 2009년 겨울호
부정어법은 주체와 세계가 맺는 부정합한 긴장 관계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박연숙의 시가 부정어법으로 점철된 진술을 감행하는 것은 주체와 세계, 현실과 당위 사이의 균열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니었다”, “말이 없고”, “늘이지 않는다”, “데워지지 않는다”와 같은 진술들은 그 예가 된다. 시인은 이를 “우아한 관계”라 하지만 사정은 정반대다. 위 시에서 나타나는 “죽음”과 “생”, ‘나’와 “당신”의 상호예외적인 관계는 “차디찬 불꽃”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모순어법으로 외화 되고 있는 것이다. “루미놀”을 이용한 혈흔 감식이 “활활 뜨”거운 “별들”로 상상되고 그것이 사인(死因)을 추적하는 “결론”으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심장”의 “두근”거림과 “주검의 독살” 사이의 심연과도 같은 거리감은 메워질 수 없다. 박연숙 시인이 보여주는 시적 긴장은 세계와의 접촉과 화해가 붕괴된 시대를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무의식적인 근원을 외화하고 있는 것이라 말해도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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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
박응식
뻐기고 우기다 한 소리 들었지
―사내 속이 그렇게 짜잔 해서 뭣 한다요
잔챙이는 찌 놀림이 촐싹대지만
대물은 고요하지
옳은 소리 무시한 척 내숭 떨다
기다리는 거야 찌가 고요 할 때까지
좁은 속 늘리고 늘려 고요해 지는 거야
큰 고기는 관상어가 아니지
바늘이 녹슬면 부러지고 줄이 약하면 터지지
산란을 하고 지느러미가 물살 만들어야 강이 사는 거야
통 큰 아내가 기타 소리를 물고
호이호이 강 속으로 낚싯대 끌고 가지
놀란 나는 화들짝 부여잡고
잔고기들 뒤에서 아가미 벌름거리며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내가 하잔 대로만 허시오
잔챙이는 금방 끌려오지만
대물은 강을 흔들며 나오지
줄을 톡톡 건드리며
아내는 커다란 비늘에 광택을 내고 있지
―『리토피아』 2009년 겨울호
낚시를 할 때 “대물”을 낚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엉덩이를 들썩이지 않는 인내가 필요하다. “찌 놀림이 촐싹대”는 “잔챙이”마냥 “뻐기고 우기다”가는 “아내”에게 “한 소리” 들을 지도 모른다. 물론 “아내” 때문에 “대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큰 고기는 관상어가 아니”라는 화자의 진술처럼, “대물”은 자유와 자연스러움의 상징적 의미를 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물”이 되기 위해서는 “좁은 속 늘리고 늘려 고요해 지는” 지혜가 필요하다. 최소한 시인처럼 “낚시”를 하면서도 지속적인 자기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낚시는 그저 “대물”을 낚기 위한 레저 행위가 아니라 화자 스스로가 “대물”이 되고자 하는 수양 행위가 된다.
“잔챙이”와 “대물”을 지속적으로 비교하면서 “대물”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화자에게서, 우리는 일상적 사건을 전경화하는 시인의 독특한 시각을 읽어낼 수 있다. 더욱이 사투리의 효과적인 활용과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주도하는 어조를 유지함으로써 자칫 딱딱하고 지루할 수 있는 주제와 구성을 흡입력 있게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시적 울림은 독특한 재미까지 선사한다. 물론 낚시는 재미가 아니다. 시인에 따르면 그것은 성찰의 다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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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음
박일만
얼마냐는 물음에 대꾸 없다
시끄러운 속내 씻으러 찾아 온 청계사
봄 산도 묵은 계절 벗어내고 있다
산문 주차장 한 쪽
중년의 남루한 여자
낡은 트럭 짐칸에 차려진 국화빵 기계
또다시 가격을 물어도 미소만 보내온다
볼 붉은 꽃잎이 내 가슴을 파고든다
오천 원 지폐를 내밀자 그제서야 손으로 가리킨다
만국기처럼 화려하지는 않게 천정에 달린 가격표
“한 봉지에 이천 원”
비로소 알아차리고 계산이 건네진다
산 쪽에서 비둘기 소리 들린다, 듣는지 마는지
묵언수행도 저처럼 슬퍼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산천대천 번잡한 세상 가운데 태어나
한 생을 선천성 침묵으로 태어나
왁자지껄한 뭇 사람들을 피해
멀찌감치 한 구석 빌려 살아가고 있다
저렇게 말없이 통하는 절 한 채도 있는데
손짓, 몸짓만으로 세상을 읽는 음색도 있는데
쉿!
봄 산이 꿈틀대며 기지개 켜는 소리 들린다
―『시인시각』 2009년 여름호
여행은 일상의 탈출이 아니라 일상의 연장이다. “시끄러운 속내 씻으러” “청계사”를 방문해도 시인이 본 것은 “봄 산도 묵은 계절 벗어내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것은 아무런 깨달음도 진술하지 않는다. 다만 시인이 어떤 깨달음의 계기를 갖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해주는 복선에 가까운 진술일 뿐이다.
그가 삶의 찰나적 깨달음을 느끼게 된 것은 고고한 “청계사”가 아니라 “국화빵 기계”가 있는 “낡은 트럭” 앞의 일상에서이다. “선천성 침묵”의 “묵언수행”이 행해지고 있는 이곳이야말로 “말없이 통하는 절 한 채”였던 것이다. 사물을 언어로 재단하고 “음색”으로 규정하는 “시끄러운 속내”들이 일거에 무너질 때서야, 내가 스스로 만든 소리들을 중단하고 나서야, 시인은 비로소 “봄 산이 꿈틀대며 기지개 켜는 소리 들”을 수 있게 된다. 소리를 발하는 것이 “득음”이 아니라 소리를 듣는 것이 “득음”이라는 소중한 깨달음, 그렇다면 시인에게 “득음”을 “득음”이라 진술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말하기는 당혹스러운 것은 아니었을까? 언어가 아닌 것을 언어로 진술할 수밖에 없는(不立文字 不離文字) 시인이라는 존재의 모순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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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에 애인이 있어요
박지우
인천국제공항 디트로이트행 출구가 닫힐 때, 나는
가방에 애인을 구겨 넣었다
바람에 찢긴 얇은 구름 한 채를 삼키고
오래도록 자크를 열지 않은 가방은 몸살을 앓았다
문자메시지에 계절을 전송해 주기도 했던
그 남자의 냄새 코끝에 달려있다
후두두 비가 내린다
빗물 속으로 녹아드는 나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내 몸은 젖어들었다
비에 실린 바람의 무게
낡은 가방을 몇 번이고 놓고 싶었다
때론 깨진 거울을 넣어 상처를 내기도 했다
묵직한 가방,
그는 내 어깨에 실려 나를 끌고 다녔다
오랜 시간 침묵했던 그가 자크를 뜯어먹는 동안
중심을 이탈한 바람 한 자락 가방으로 들어간다
―『다시올문학』 2009년 겨울호
화자는 “가방에 애인을 구겨 넣었다”고 말한다. “때론 깨진 거울을 넣어 상처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냐하면 화자는 “그는 내 어깨에 실려 나를 끌고 다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가방을 끌고 다닌 게 아니라 그가 나를 끌고 다녔다는 것이다. 기실 화자는 “가방에 애인을 구겨 넣”은 적이 없다. “디트로이트”로 가는 여행객들이 응당 가방을 꼭 끌어안고 타듯, 한순간도 애인을 잊지 못하고 의식했을 뿐이다. “낡은 가방을 몇 번이고 놓고 싶었”지만 끝내 놓지 못했다는 진술에는, 되레,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시인이 애인의 가방 속에 들어가 끌려 다녔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지우의 시는 지독한 연애시다. 끝끝내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집착하고 있으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애인에 대한 이상한 가역반응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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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2
서주영
어둠이 알을 낳고 있다
등불을 켜도 사방이 그을음뿐이다
탱자나무울 시퍼런 가시에 그믐달이 걸려 있다
집들은 날개를 무겁게 접어 뉘고 있다
잠든 아이들이 벗어놓은 옷이
문틈으로 새어든 달빛에 주린 배처럼 구겨져 있다
뭉텅 제살을 도려내던 자작나무,
산문을 지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그 길가
연서 같은 소문 하나가
서낭당 돌무더기에 눌려 있다
―『미네르바』2009년 겨울호
서주영의 시에는 시인의 주관적 개입이 거의 배제되어 있다. 사물 그 자체의 이미지만으로 하나의 시세계가 구성되어 생생한 현장감이 전달되고 있다. 마치 카메라의 시선처럼 비인간화된 그의 이미지 직조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나름의 시적 상상력과 서사를 구축하도록 이끈다. 하나하나 펜으로 꾹꾹 눌러 쓴 듯한, 그리하여 이미지와 이미지가 충돌하고 교섭하며 상호 침투하게 하여, 독특한 시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향토적 서정에 기반한 많은 시편들이 자기 동일성의 나이브한 시적 정서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주영의 시는 대상에 대한 미적 거리를 확보하고 이미지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그 같은 태도와 궤를 달리하는 시적 형상화 능력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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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책사유
성태현
진한 복분자 또는 쟈스민 향으로
코털을 자극하는 일
술에 의한 술책의 시작이다
쌉쌀한 백포도 맛이나 톡 쏘는 옥수수 주정으로
혀끝을 찔러 돌기마다 꿈틀대면
한 단계 술의 술수가 통하게 되는 것이다
활활 타는 위스키 한 모금, 짜릿한 쏘오맥, 목구멍 열고
식도를 따라 첨벙 위 속으로 털어 넣으면
술술 주술이 먹혀 들어가는 것
술책은, 1%의 향기와 1%의 독기
1%의 열기로
그들의 혓바닥 바늘을 돋게 하는 것이다
고지혈증으로 혈도가 막힌
어수선한 핏줄에 취기가 돌고
갈라진 등줄기에서 핏방울이 솟는다
해갈을 호소하는 땀구멍이 구석구석에서 열리고
털끝마다 말초신경이 촉수를 내민다
벌겋게 달아오르는 산과 계곡
꼬부라져 튀어 오르는 역류가 쏟아내는 욕지기
똑바로 서 있던 제방이 비틀거리고
그들은 진원이 애매한 진동에 현기증을 느낀다
폭음이 시작되자
술통 속으로 처넣어야 할 광기
사나워진 폭우가 술통에서 넘친다
목구멍에 손가락이라도 집어넣고 게워내야 할
술의 실책 3%,
그들을 무너뜨린 책임은 97%
폭우라는 이름의 천재지변으로 돌리면 된다
그들은 곧, 마주보고 웃게 될 것이다
―『불교문예』2009년 가을호
시인은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한 줄 행과 한 편의 시를 직조해낸다. 그렇다면, 도연명 이래로 많은 시인들이 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는 술이야말로 시각 · 청각 · 후각 · 미각 · 공감각 · 근육감각을 총체적으로 동원해야만 하는 제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술이, 술꾼을 시인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인은 후각, 촉각, 미각, 근육감각 등 온 감각적 정보들을 동원하여 시를 쓰고 있다. “면책사유”로 “천재지변”을 들먹이면서까지 술에 관심을 표명하는 시인은, “술―술책, 술―술수, 술술―주술”과 같은 언어유희를 이끌어내면서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까지도 부드럽게 이끌어준다. 마치 술의 역능이 그러하듯. 그렇다면 시인의 시 쓰기는 곧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는 술 마시기와 동의어가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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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베를 짜다
손수진
오래된 집에 거미가 산다
그 집의 역사만큼 오래된 거미 밤마다 실을 뽑아 베틀에 건다
나고야에서 나고 자랐니라
해방이 되자 너도 나도 귀국길에 올랐니라
사나흘이면 가리라던 귀국길은 달포가 넘어 걸렸니라
시모노새끼에서 규슈로 가는 야미 배를 타고
동지섣달 바람은 얼마나 부는지 까불까불 가랑잎 같았니라
누렇게 부황 든 사람들은 바닥에 짐짝처럼 구겨져 있었니라
산후조리 못해 병든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축하고
핏덩이 동생은 내가 들쳐 업고, 애면글면 군산항에 내렸는데
쓰리꾼이 아버지 허리춤에 찬 전대 귀신같이 털어가고
지게꾼에게 매낀 보따리마저 잃어버리고
석탄차 얻어 타고 대구에 내리니 염생이 마냥 눈알만 반들반들
그런 우스운 꼴이 없었니라
고향집에 돌아와 열흘 만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닷새 후에 딱정벌레처럼 붙이고 다니던 동생마저 세상 뜨고
그때 나이 열일곱,
열아홉에 시집이라고 왔더니라
예단이라고 벌거지 터진 물들인 것 같은 명주베 넉자, 뿔스무리한 저고릿감 넉자
일곱세 무명베 두루마기 흑감 한 감, 동동구리무 한 통, 덧분 한 통
시집오는 날 아침까지 손수 밥해먹고
분 한번 못 찍어 바르고 얼굴 한번 못 본 신랑한테 시집이라고 왔더니라
길쌈도 못 배우고 말도 어눌하고 홀아부지와 살다가 시집이라고 왔는데
대추씨 같은 시엄시 땡감 같은 시누이 내 살아온 역사를 어예 말로 다하겠노
어머니 나이 팔십, 지금도 그 주소를 외우며
밤새워 술술 몸속에서 거미줄을 뽑아 달빛아래 철커덕 철커덕 은빛 베를 짠다.
아이지깽 도요하시시 하시라쬬 도고 산주 이찌노 니반찌
―『내일을여는작가』 2009년 봄호
화자는 고통을 인내하며 “어머니”의 “살아온 역사”를 진술한다. 너무도 아프기에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어머니의 “역사”는 “어머니”의 육화된 음성으로 진술될 수 있을 뿐이다. 화자가 가까스로 할 수 있는 말이란, 거미가 “몸속에서 거미줄을 뽑”듯 “어머니”는 “은빛 베를 짠다”고 진술하는 정도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역사에 대한 화자의 보상심리가 깔린 ‘승화’의 한 계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가 살아온 지난한 삶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한국 현대사의 수난은 곧 여성 수난사이기도 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시의 진술이 갖는 호소력과 설득력은 깊어진다. 더욱이 이 시의 제재를 시적 화자의 감정적 대응으로 치환시키지 않은 시인의 태도는 단순히 어머니에 대한 공감과 애정의 차원을 넘어 보편화 된 역사적 지평에서 “살아온 역사” 다시금 상상할 수 있게끔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한 어머니의 역사가 보편적 역사로 상상될 수 있는 자리, 손수진의 이 시가 보여주는 시적 역량의 한 진경(珍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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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꽃
신영연
고요한 허공의 입구에서
동심원 그리며 소리들이 유전자처럼 낙하한다 그 푸른 속력과 힘의 파장으로
몸의 말이 일어난다 응얼응얼 또르르르륵,
농밀한 데시벨의 눈금으로 교신하는
소리들의 대화가 무반주에 묻힐때 마른 번개 휘두르는 구름의 눈빛을
심해의 바닥, 물고기의 파산 얘기를
느낌표로 서 있는 기나긴 환상도
투명한 바람의 손길로 갈마들면
저마다 노래가 되고 꽃잎이 되고 혹은 그림이 되거나 날개가 되리라
그런 소리의 입술은 허방을 딛는다
말을 얻지 못한 씨앗들이 손에서 뛰쳐나와 온몸으로 피워낸 둥근 소리꽃
소리의 방언이 빚어낸 몸짓은, 춤이다
―『시와사람』 2009년 가을호
에피쿠로스에게 세계는 수직 낙하 운동에서 빗나간 한 원자의 우연한 “속력과 힘의 파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비스듬한 운동을 하는 한 원자가 수직 낙하하는 한 원자와 부딪치고, 그 원자가 다시금 다른 원자와 부딪치는 연속되는 과정을 통해, 세계는 수직의 인과적 질서와 사선의 우연이 만들어낸 기묘한 시공간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영연 시인은 에피쿠로스주의자이다. 과학자에게 세계가 구성되는 기본 단위가 원자라면, 시인에게서 세계의 구성단위는 “말”일 것이고, 그 “말”은 소리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낙하”하는 것으로 상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자들이 서로 부딪치고, 퍼지며, 깨어지는 과정을 거쳐 세계가 만들어지는 동안, “소리들” 또한 “노래가 되고 꽃잎이 되고 혹은 그림이 되거나 날개가” 된다. 하지만 원자들과는 달리 어떤 소리들은 시인의 입을 거쳐 육화되지 않고 온전한 그 자체로(“온몸으로”) “춤”이 될 수 있다. 육화된 언어인 시가 끝끝내 닿지 못하는 곳, 영원한 미래이자 영원한 과거, “춤”과 같은 시, 말이 되지 않은 말을 한다는 모순이야말로 시인이 추구하는 “소리꽃”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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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에는 황금알이 있다
양문규
천태산 은행나무는 가을철만 되면 옥살이를 시작하는데요 저 은행나무 누구에겐가 하루에도 몇 번씩 금물 같은 글자들인데요 누구에겐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금전이 되나 봐요 가지와 가지 사이 햇빛의 글자들이 수천수만의 색깔로 반짝이는데요 바람이 불면 우수수 허공에 살아 있는 벽화를 그리는데요 그 벽화 누구에겐가는 환하게 물든 영혼이자 생명인 시가 되는데요 누군가의 손에서는 은행이 구린내 풍기는 황금알로 바뀌는가 봐요
가을철만 되면 창살 아닌 그물망에 갇혀 옥살이를 하는 천태산 저 은행나무, 누군가에겐 노랗게 물들인 사랑이었는데요 누군가에겐 남몰래 안마당에 키우는 황금거위였나 봐요 천태산에는 아득한 산촌 마을과 절이 있는데요 마을 주민들 옥살이를 시키고 있는 절을 찾았는데요 주지스님 절로 마을이 먹고 산다고 했는가 봐요 천태산 있어 절 있고 은행나무 있는 것인데, 그게 뭔 가당찮은 소리냐며 마을 주민들 한마디씩 했다는데요
가을은 만산홍엽마저 떨구느라 분주한데, 누가 천태산의 영혼 은행나무에게 옥살이를 시키는 건가요
―『불교문예』2009년 겨울호
“천태산 은행나무”의 “옥살이”는 그저 얼기설기 꼬인 나무의 “가지와 가지 사이” 떨어지지 않는 은행잎들이 “창살”에 갇힌 것으로 상상하는 데서 비롯되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비유라기보다는 직설에 가까운 것이다. 왜냐하면 “천태산 은행나무”에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글자가 되고 금전도 되며, 수천수만의 색깔일 뿐 아니라 벽화이기도 한 그것. 게다가 영혼, 시, 황금알, 사랑, 황금거위이기도 한 그것이기에 어디 제 몸 하나 달아날 겨를이라도 있겠는가. 그렇다면 “천태산 은행나무”는 도리어 아무 것도 아닌 것이기도 하다. 매우 많은 이름과 사연과 맥락을 갖고 있기에 그것은 “천태산 있어 절 있고 은행나무 있는 것”이 된다. 은행나무는 잎조차 떨어뜨리지 않고 옥살이를 하기에 분주하지 않다. 그저 그대로 존재하면서 “주지스님”의 허언마저, “마을 주민들”의 “한마디”마저 무화시킨다. 그것은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것. 천태산에는 황금알뿐만 아니라 황금알이 아니기도 한 것, 그저 ‘그것’이 있다.
손남훈
부산 출생. 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공저 『지역이라는 아포리아』.
―『시에티카』2010. 상반기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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