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48> 서장 (書狀)
탕승상에 대한 답서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경전에서 말했습니다. ‘마음의 생사(生死)를 끊어 버리고 마음의 빽빽한 수풀을 베어 버리고 마음의 더럽고 탁함을 씻어 버리고 마음의 집착을 풀어 버린다.’ 집착하는 곳에서 마음을 움직여 돌리되, 움직여 돌리는 바로 그 때에 또한 움직여 돌리는 도리(道理)도 없다면 저절로 하나 하나 위에서 밝아지고 사물 사물 위에서 드러나, 매일 인연에 응하는 곳이 깨끗하든 더럽든 좋든 싫든 순응하든 거슬리든 마치 진주구슬이 쟁반 위에 있는 것과 같아서 억지로 굴리지 않아도 저절로 구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시절에 이르면 꼭 집어서 남에게 보여 줄 수는 없으나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서 그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남양 혜충 국사가 말했습니다. ‘법(法)에 얻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들여우의 울음소리이다.’ 이 일은 맑은 하늘에 태양이 빛나는 것과 같아서 한 번 보면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스스로 보았다면 삿된 스승이 흔들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숲을 베어버리고
더럽고 탁함 씻어내고
집착의 끈을 풀어버린다
예를 들어 만화영화에 나오는 세상 같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 밀가루로 만들어져 있다고 해보자. 이 밀가루는 잘 뭉쳐지기도 하고 다시 쉽게 가루로 돌아가기도 한다. 산도 바다도 나무도 동물도 사람도 나아가 생각이나 느낌 등 내면적인 것들까지도 모두 오직 밀가루로 만들어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양에서 차이가 나는 산, 바다, 나무, 식물, 동물, 사람 그리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이런 느낌 저런 감정 등을 제각각 다른 이름을 붙여 구별할 것이다.
그러나 밀가루 그 자체는 어떻게 될까? 밀가루로 만들어진 사물들은 제각각 다른 모양에 따라 제각각 다른 이름을 붙여야 구별이 가능하므로 모두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지만, 밀가루 그 자체의 경우는 정해진 모양이 없으므로 모양을 가지고 구별하여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더구나 밀가루는 동일한 성격을 가진 다른 종류의 가루가 없기 때문에 특히 구별하여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밀가루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아가는 밀가루 인간은 밀가루에 관하여 의식(意識)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양을 갖춘 밀가루 반죽인 사물이나 의식들과는 달리 밀가루 그 자체는 정해진 모양이 없기 때문에, 의식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의식하여도 모두가 반죽이 되어 모양을 갖추어 버려서 본래 밀가루 그대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밀가루에 관한 의식 역시 이미 반죽이 되어 모양이 갖추어진 채 나타나는 것이다. 밀가루 세계에서는 어떤 생각이나 의식도 밀가루를 통하여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이처럼 밀가루는 이 세계의 유일하며 불변하는 근원이면서도 그 자체는 도무지 파악될 길이 없다. 그런데 혹시 밀가루 인간 가운데 한 사람이 이와 같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모든 모양과는 다른 불생불멸의 근원을 알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면, 이 밀가루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그가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어떤 모양을 만들어서 밀가루에 관한 생각이나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밀가루를 반죽하여 어떤 모양을 만들어 밀가루를 말한다는 것은 모두 가짜일 뿐이다.
이 밀가루 사람이 밀가루를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반죽된 모양에서 완전히 부서져서 밀가루로 돌아가는 것이 방법인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미 사람이 없으므로 밀가루를 알거나 모르거나 하는 일도 없다. 반죽된 상태로 사람 노릇을 하면서 밀가루를 반죽된 가짜 모양이 아니라 모양 없는 가루 그 자체로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문제는 반죽된 모양이다. 반죽된 모양에 속지 않을 지혜만 있다면, 눈 앞에 나타나는 하나 하나의 반죽이 사실은 전부 다만 밀가루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밀가루 인간은 눈 앞에 나타나는 지금 이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밀가루라는 사실을 문득 자각하여 믿게 될 때, 밀가루를 직접 아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근본이 무엇일까 하고 의심하였던 그것 조차도 바로 근본인 밀가루였던 것이다. 도(道)가 바로 그렇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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