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 14일 오후 5시,둔촌동 본당
"전능하신 천주 성부,
~~~~~~~~~~~~^^~~~
~~~~~~~~~~~~~^^~~~~
~~~~~~~~~~~성령을 믿습니까?"
"네.네."
"~~~~~~~~~~~모든성인의 통공을 믿습니까?"
"네,네..."
"죄의 용서외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
"네,네...."
"영원한 삶을 믿습니까?"
"네,네,.."
이에 나는"유스티노께,수산나께"
성부와 성자와 성렁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김수길 루도비꼬(신부)
이렇게 우리 부부는 주님품에 안겼고 이듬해에 견진성사를 받았다.대부는 나의 고등학교와 대학선배인 김진열변호사 그리고 대녀는 김변호사의 부인인 윤정희님이었다.이때 교육담당수녀님은 베드로 라는 남자 세례명을 가진 수녀님으로 재치와 재담이 뛰어난 분이었다.나의 고민을 자세히 들은 수녀님은 "참 어려운 결단을 하셨습니다.주님께서는 유스티노 형제님과 같은 죄지은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십니다.앞으로 훌륭한 신앙인이 되실겁니다"하고 격려하셨다.
실로 나로서는 1980년에 성당문을 두드린 후 3수만에그리고 13년에 입교한 것이다.청산은 자유분방한 성격과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가정은 편할 날이 없었다.천주교 선택도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다분히 정략적이었다.풀무원 시절 아주 착하고 똑똑한 아이가 있었는데.그녀를 안것을 아내가 눈치채고 눈에 불을 켜고 집안이 전쟁통이었다.미성년자를 따먹더니,이제는 회사 여직원까지...
나는 급했다.어떻게 해서라도 아내를 천주교 성당으로 이끌고 가야지.
그런데 천주교는 처음 입교하기가 너무 어렵다.어떻게 성당에 한두번 데리고 가도 누가 우리를 끌어주는사람이 없었고 또 교리나 절차를 몰라 뒤쪽에 우두커니 앉자 있다가 나와 버리곤 했다.어느분이 그런 것을 알려면1년간 예비자교리공부를 해야한다는 것이었다.그런데 나는지방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1년간 예비자교리는 생각지도 못했다.다행히 그런 사람을 위해 통신교리 강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나는 물어물어 강좌를 신청했고 아내는 "당신이 뭐 신앙공부를 한다고?"하면서 콧방귀만 꾸었다.할 수 없이 통신강좌를 나와 아내 두사람분을 신청했고,내가 2부의 답안지를 풀어 보냈고 이렇게 6개월정도만에 교리 교육과정이 끝났다.나는 종종 주말에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읽어보라고 하면 내용도 보지않고 어디 싸인 하면 되느냐고 해서 겨우 싸인만 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였다.최종10번은 반드시 성당에 출석해서 직접 교육을 받아야 세례를 준다는 것이었다.다행히 그때쯤은 서울로 인사발령이 났었기 때문에 어렵사리 출석하여 이날 1993년8월 14일 세례를 받은 것이다.
천주교인으로서 볼 때 입교하기가 너무 어렵다.젊었을 때 몇군데 개신교를 다녔는데 거기는 가는 첫날부터 전도사님을 비롯한 집사님들이 어서오시라고 손잡고 또 신방까지 하면서 잘모르는 새신자들을 안내해주어서 금방 가까와질 수 있는 장점이있다.반면 지나치게 술.담배등에 대해 판에 박힌 말로 죄악운운 하고 십일조를 강요하는 듯해서 신앙심이 약한 새신자로서는 부담이 되었고,목시님들은 자신을 신비하고 거룩한듯한 언행을 표해 나는 거부감이 컸다.이에 반해 술 좋아하는 나는 10계명이외에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아 무엇보다도 편했다.또.미사후 가끔 저녁에 신부님과 술자리를 하는게 너무 좋았다 .그렇지만 신부님들은 술을 드시면서도 보이지 않는 절제를 하시기 때문에 카리스마와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내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급선무였다.그래서 나는 엉터리였지만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곧 레지오 "창조주의 어머니"쁘레시띠움에도 입단했다.그런데 5년후 덕소로 이사가게 되었는데 그곳 성당은 레지오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고 교우들의 모임이 활성화되어 있어 교우들과의 교류가 아주 좋았다.그러면서 아내는 신앙의 맛을느끼기 시작했고 성경공부 하느라 강남역 역삼동성당은 물론 이곳.저곳을 다녔다.
우리는 또 하남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신장성당에 다니게 되었다.에코타운 새아파트였기 때문에 신자들은 기대감으로 충만했고,교우들간의 교류가 좋았다.아내는 구역장으로 활동했고 나는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연히 성당 건축헌금도 천만원,이천만원도 즐거운 마음으로 낼 수 있었다.
아마 이때가 나의 신앙심이 가장 불타 있었던 것 같다.그후 2009년 9월 강동구 암사동 롯데캐슬아로 이사오면서 암사성당으로 나가게 되었고 곧"순교자들윽 모후"쁘레시띠움에 입단했다.
~~~~~~~~^^^^~~계속~~~~~~^~^








